소설리스트

난 할 수 있어-449화 (449/556)

난 할 수 있어 449화

“아빠!”

“협회장님이라고 해라.”

“혀, 협회장님.”

“잘 들어라. 지금 가볍게 처신했다가는 한국 컬링계가 위험해진다.”

“…네.”

“이건 음해야. 한국 컬링이 곧 우리 집안이고, 우리 집안이 곧 한국 컬링인데 돈 몇 푼 잘못 썼다고 우리한테서 컬링을 뺏어가려고 하는 거야.”

“맞아요. 우리가 애써 일궈놓은 밭을 뺏길 순 없어요.”

“그래, 맞다. 그러려면 네 역할이 중요하다. 언론이 여차하면 네 살점을 뜯어먹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어.”

감독은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어떡해요?”

“저쪽만 힘이 있는 게 아니다. 나도 있다. 조금만 기다려봐라. 우리도 반격에 들어갈 테니까. 너는 망할 것들 입단속이나 잘 시켜.”

함재기가 말하는 망할 것들이란 선수들을 의미했다.

함재기도 이대로 무너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체육계 전반에 걸친 자신의 영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했다.

사안의 중대성을 인식한 거대한 조직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와 개인적인 친분이 두터운 이들이 그를 위해 나서주었다.

-체육계 원로 10人, “한국 컬링은 함재기 협회장 피땀의 산물”

-前 컬링 국가대표들, ‘대부’ 위해 발 벗었다…“올림픽 앞두고 언론의 비난 선 넘었다”

-“메달 따고 질책해도 늦지 않다” 시민단체, 컬링 대표팀 지도부 비호

대충 여건이 갖춰지자 함재기가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그는 직각으로 허리를 숙여 카메라 앞에 인사를 하고, 준비해온 대본을 꺼냈다.

그는 코를 훌쩍이는 것으로 눈물의 시동을 걸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컬링협회장 함재기입니다. 최근 여러 가지 문제로 물의를 일으켜 대단히 죄송합니다.”

함재기는 착석한 지 10초 만에 다시 몸을 일으켜 고개를 숙였다.

“저에게 잘못이 있다면 어떤 처벌도 달게 받을 것입니다. 검찰 조사에도 성실히 응할 계획입니다. 또한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을 것입니다.”

훌쩍, 훌쩍.

코를 두 번 훌쩍이자 마법처럼 함재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국민 여러분, 그러나 저에게 잠깐의 시간을 허락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꼭 30년 만에 올림픽이 우리 조국 대한민국에서 열립니다. 저는 국위를 선양하고 국민 여러분께 기쁨을 안겨드리기 위해 불철주야 올림픽만을 위해 뛰어왔습니다.”

훌쩍, 훌쩍, 훌쩍.

붉어진 눈시울에서 즙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두 달도 남지 않았습니다. 저를 포함한 모든 지도부들이 공황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이 상태로 대회를 치를 수 없는 수준입니다. 국민 여러분, 저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딱 두 달만 멈춰주십시오. 메달로 보답하고 십자가에 매달리겠습니다. 그때 화살을 쏘고 돌을 던져주십시오.”

주르륵.

준비했던 눈물이 기가 막힌 타이밍에 흘러 내렸다.

함재기는 한쪽 눈물만 닦고 한쪽은 닦지 않았다.

“저는 94년, 한국에 처음으로 컬링을 들여왔습니다. 그 이후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컬링을 전파하고, 한국 컬링의 위상을 높이는 데 제 한 몸을 던졌습니다. 제가 컬링이고, 컬링이 저였습니다. 사람들이 관심 가져주지 않아도 저는 묵묵히 제 할 일을 해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한국이 세계무대에서 메달을 다툴 정도의 컬링 강국으로 변모하는 데 성공시켰습니다. 이제는 정말, 올림픽 메달, 메달만이 남았는데 이렇게… 크흑.”

함재기는 이제 얼굴을 푹 파묻고 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의 곁에 도열한 지도자들도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닦았다.

눈물은 세간의 관심을 모으는 특효약이었다.

기자들은 함재기의 눈물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다.

그러던 중, 어느 기자 하나가 외쳤다.

“옆방에서 컬링 선수들 기자회견 한답니다!”

“뭐! 선수들?”

그러자 기자들은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함재기는 당황하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눈물쇼의 메커니즘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기자들이었다.

이 이상 함재기에게 건질 것이 없다고 판단한 그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옆방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함재기가 엉엉, 더 큰 소리로 울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선수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착석해있었다.

그들은 함재기처럼 눈물 젖은 대본을 읽지 않았다.

그들의 대표인 유성은은 비교적 덤덤한 표정으로 입장을 발표했다.

“함재기 협회장님 이하 지도부의 부적절한 행실은 여러 보도를 통해 익히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여기서 그분들을 더 욕보이는 말씀은 더하지 않겠습니다.”

기자들은 유성은의 입술에 집중했다.

“저희의 입장을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는 폭압적이고 부패한 지도부의 밑에서 더 이상 훈련을 진행할 수 없습니다. 대회 역시 그분들의 지도하에 치를 수 없습니다.”

유성은의 목소리에는 결기가 서려 있었다.

“저희는 함재기 협회장님 이하 모든 지도부의 용퇴를 원합니다. 저희는 저희의 힘만으로 대회를 치르겠습니다. 결과를 장담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최선의 결과를 얻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대찬은 굳은 표정으로 유성은의 기자회견을 지켜봤다.

대찬이 마련한 자리였다.

함재기 측은 어떻게든 반격에 나설 것이고, 높은 확률로 한바탕 신파극이 되리라 여겼다.

한국 컬링계의 발전을 위해 이 한 몸 던졌는데, 이제 와서 나를 버리려 하느냐.

그렇게 하소연하는 게 그의 유일한 무기니까.

대찬은 그가 기자회견을 자청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바로 유성은에게도 기자회견을 준비시켰다.

무엇을 말하라고 일일이 주문하지 않았다.

“유 선수, 그냥 속에 있는 얘기를 하세요. 덤덤하게.”

대찬의 그 주문을 유성은은 그대로 이행했다.

“저희에게는 저희 스승을 내쫓을 권리가 없습니다. 그건 월권이고 도리에도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부탁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협회장님, 감독님, 코치님, 부디 물러나주세요. 저희는 더 이상 선생님들 밑에서 운동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러지 않으시겠다고 해도 저희는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꼭 물러나주십시오.”

유성은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푹 숙여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빠져나갔다.

유성은의 결기가 함재기의 눈물을 덮었다.

함재기는 끝까지 버틸 작정이었지만 상부에서 들어오는 압력을 견디지 못했다.

함재기와 감독, 코치 전원이 사퇴했다.

“씨발, 잘 먹고 잘 살아라. 네들이 우리 없이 메달 따나 봐라.”

감독의 적나라한 저주가 우연히 한 언론사에게 포착되어 기사화되었다.

그 한 마디로 몇몇 바보들이 보내던 일말의 동정심마저 완전히 잃어버리고 그들은 세간의 입방아에 나노 단위로 산산조각 났다.

실직자 상태였던 외국인 감독, 코치들이 급히 수배되어 단기 아르바이트를 뛰러 한국에 들어왔다.

대찬은 비도축육으로 하던 1차 후원, 1억 원으로 하던 2차 후원에 이어 3차 후원을 했다.

3차 후원의 규모는 금액으로만 10억 원에 달했다.

물론 로튼 프룻츠의 주머니에서만 나온 금액은 아니었다.

“서 대표님, 간만에 좋은 일 좀 하시죠. 한 5억만 땡겨봐.”

대찬은 서원웅의 필래를 이 좋은 일에 동참시켰다.

필래에 5억은 없어도 티 안 나는 돈이었다.

5억으로 생색낼 기회를 버리지 않았다.

거기에 자발적인 국민모금으로 넘치도록 풍족한 금액이 컬링 대표팀에 전달되었다.

컬링 대표팀은 필요한 금액만 정확히 사용하고, 남은 금액은 다른 비인기 종목 선수들을 위해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두 달 후.

추운 날씨에 대찬은 두꺼운 패딩을 입고 평창으로 향했다.

윤이영과 대동한 덕분에 그는 적잖은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대찬은 선글라스를 푹 눌러 쓰며 윤이영에게 작게 툴툴거렸다.

“이제 네가 왜 유명세 타는 게 골치 아픈 거라고 했는지 알 거 같아.”

“그걸 이제 아셨어요? 이 둔탱아.”

“아, 생각보다 더 힘든 일이었어.”

대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찬은 윤이영과 나란히 관중석에 앉았다.

그러자 주변의 관객들이 대찬과 윤이영을 금세 알아봤다.

붙임성 좋은 아주머니 하나가 대찬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조대찬 씨 아니세요?”

“예? 아, 예, 맞습니다. 안녕하세요.”

“어머, 긴가민가 했는데 맞네! 나 진짜 이번에 너무 고마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너무 고마워. 조대찬 씨는 하늘이 보낸 천사야! 전생에 이순신 장군이었을 거야!”

돈 몇 억 쓴 것 치고는 낯 뜨거운 찬사에 대찬은 금방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진짜, 우리 컬링 선수들 보면 너무 자랑스럽고 짠하고 그래. 조대찬 씨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 메달도 못 따고 욕만 먹었을 거 아니야!”

“하하…….”

“아유, 그거 생각하면 나 너무 불쌍해. 불쌍하고 다행이야.”

사실 제가 안 끼어들었어도 은메달은 땄을 거거든요.

대찬은 불필요한 말은 목구멍 뒤로 삼켰다.

그쯤 해두면 좋을 걸.

아주머니는 괜히 한 발짝 더 나갔다.

“윤이영 씨는 복 받은 줄 알아야 돼, 진짜. 조대찬 씨 같은 남자가 세상천지 어디 있어.”

“예? 하하, 예…….”

윤이영은 떨떠름하게 웃었다.

“하하, 예가 아니라 진짜 그렇다니까. 윤이영 씨 뭐 대상 타고 연기 잘하고 그런 거 하나 소용없어. 애인 하나는 진짜 잘 사귄 거야. 1초마다 감사해야 돼, 알았지.”

“네… 안 그래도 그러고 있어요.”

“그래, 그래. 아유, 부러워 죽겠어 정말.”

아주머니는 괜히 사람 난처하게 만들어놓고 둘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윤이영은 씹어 뱉듯이 대찬에게 속닥거렸다.

“1초마다 고마워요, 우리 조대찬 씨? 난 정말 복 받은 여자야.”

“…….”

대찬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는 헛기침을 하고 화제를 돌렸다.

“직관은 다 좋은데 해설을 못 들어서 그게 문제야. 컬링은 겨우 룰만 아는 정도니까 경기를 봐도 한 수, 두 수 앞을 내다보는 재미는 못 느끼거든.”

대찬은 그렇게 말하면서 윤이영의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자기의 한쪽 귀에도 이어폰을 꽂았다.

윤이영은 대찬에게 눈을 흘겼다.

“아주 구렁이 담 넘어간다?”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됐잖아.”

대찬은 겸연쩍게 웃으며 휴대폰으로 중계방송을 틀었다.

캐스터의 흥분한 목소리가 대찬과 윤이영의 한쪽 귀에서 웅웅 울렸다.

-“여기는 강릉 컬링센터입니다. 지금부터 스웨덴과의 여자 컬링 결승전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정말 장한 우리 선수들입니다.”

대찬은 오늘 이 순간이 더 없이 감사했다.

-“그 모진 풍파를 겪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자 컬링대표팀, 이제 오늘 스웨덴을 꺾으면 대한민국에 금메달 하나를 추가하게 됩니다. 져도 은메달입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우리 선수들.”

져도 은메달이니, 적어도 대찬의 개입으로 성적이 더 나빠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 컬링 대표팀은 믹스더블에서 동메달, 남자 컬링에서 4위를 기록하며 훌륭한 성적을 거뒀습니다. 최소한 그릇된 스승의 가르침보다 당찬 학생의 자습이 못하지는 않다는 게 증명된 셈이군요.”

대찬은 캐스터의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 한번 잘하시네.”

대찬은 기분 좋게 웃으며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대찬은 수많은 관객들 중 하나로서 스톤 하나에 웃고 탄식했다.

-“자 오늘의 마지막 샷입니다.”

캐스터의 목소리에는 긴장이 흘렀다.

현장에는 그것보다 더한 긴장이 흘렀다.

-“이 마지막 스톤이 스웨덴의 스톤보다 안쪽에 들어가면 대한민국의 금메달입니다.”

대찬의 꼭 쥔 주먹에도 저도 모르게 땀이 촉촉이 배어 있었다.

그는 옆에 윤이영이 앉은 것도 잊은 채, 경기장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평소 같으면 윤이영에게 또 한 소리 들을 일이었지만, 윤이영도 그렇기는 매한가지라 별 일은 없었다.

스킵인 유성은이 신중한 표정으로 스톤을 쥐었다.

대찬도 이제는 이어폰을 빼고 현장에 집중했다.

상황은 간명하다.

이제 더 이상 해설이 필요하지 않았다.

스톤을 몰고 앞으로 나아가던 유성은은 슬쩍 손목에 힘을 줘서 스톤을 굴렸다.

열심히 브러시로 얼음을 닦아준 덕분에 스톤은 힘 있게 앞으로 뻗어 나갔다.

유성은은 침착한 얼굴로 스톤을 바라봤다.

관중들의 시선 역시 얼음 위를 굴러가는 둥근 돌덩이 하나를 따라 움직였다.

유성은은 열심히 브러시를 움직이는 선수를 향해 외쳤다.

“영미! 영미야! 영미! 워!”

자기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의 크기와 높낮이에 따라 선수는 열심히 브러시를 움직였다.

쓱싹쓱싹.

부지런히 얼음을 긁는 소리만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영미야! 헐! 헐!”

대찬은 윤이영의 손을 꼭 붙들고 초조한 듯 다리를 떨었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스웨덴의 노란색 스톤 두 개가 하우스의 절묘한 위치에 딱 붙어있었다.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면 들어오라는 듯 견고하게 버티고 서있었다.

한국의 붉은색 스톤은 수문장의 도발에 유유히 하우스의 중앙을 향해 돌진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