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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47화 (447/556)

난 할 수 있어 447화

“제 선물이 별로 마음에 안 드셨나 봐요?”

“그, 그건 아닌데…….”

“솔직히, 화나시죠?”

대찬이 직접적으로 묻자 유성은도 부인하지 못했다.

“…물론 조대찬 씨 회사도 돈을 많이 들였겠지만 저희가 원하던 건 아니에요.”

“네, 누굴 밥값도 없는 거지 취급을 하냐고 오히려 불쾌하실 겁니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스톤, 브러시, 패드 등등. 급하시죠?”

“…….”

“특히 국제경기 규격에 맞는 장비들은 꿈도 못 꾸시죠?”

유성은은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하마터면 거친 말이 나갈 뻔했다.

그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 저딴 고기나 보내고 있어?

유성은은 친절한 목소리를 낼 자신이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대찬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2차 후원에서도 그런 장비를 후원할 생각이 없습니다.”

“뭐라고요……?”

“2차 후원은 상자 무더기로 가지 않을 거예요.”

“그럼…….”

“돈으로 드릴 겁니다.”

그 말에 유성은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저기요, 조대찬 씨. 돈이라뇨.”

“왜요, 그걸로 급한 걸 구비하시면 되잖아요?”

“저는 조대찬 씨가 저희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네,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현금으로 주시겠다는 말씀을 하실 수 있어요?”

유성은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현금으로 하는 후원이 선수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될 리가 없었다.

그건 지금까지 다른 기업에서 했던 후원과 마찬가지로 여러 갈래로 찢겨 여러 방법으로 함재기 일파의 주머니로 들어갈 것이다.

그걸 아는 사람이 현금으로 후원하겠다니.

도대체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그녀는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걱정 마십시오.”

“그럼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도대체 뭐예요?”

“지금 유 선수 놀리는 거 아닙니다.”

“돈이 차고 넘치셔서 그냥 날리고 싶으신 거예요?”

“그럴 리가요.”

“그럼 도대체 왜……!”

대찬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후원금이 전달되면, 그 다음부터는 선수 분들의 호응이 필요합니다.”

“네?”

“시간이 늦어서 졸리시겠지만 집중해서 잘 들어주세요.”

대찬은 최대한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그녀에게 설명했다.

대찬은 2차 후원으로 현금을 협회에게 바로 송금했다.

1억 원 가량.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돈이었다.

하지만 선수들의 훈련 여건을 가시적으로 바꾸기에는 충분한 액수였다.

대찬은 그 돈을 전달하면서, 사용처를 정확히 명시했다.

-선수들이 대회를 잘 준비할 수 있도록, 장비와 경기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명시된 요청에는 증빙할 자료를 전달해달라는 요구가 포함되지는 않았다.

철저히 협회가 선수들을 위해 이 돈을 다 써줄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이 깃든 요청이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이 요청은 관철되지 않았다.

유성은은 대찬에게 장비가 전혀 구비되지 않았다고 알려왔다.

바뀐 것이라고는 고작 브러시 몇 자루와 패드 몇 장이라고 했다.

1억 원 어치는 절대 아니었다.

대찬은 그 소식을 듣고 한숨을 쉬었다.

“돈 욕심에 눈이 멀어도 적당히 멀어야지. 이걸 이대로 꿀꺽해버리네.”

대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후원을 현금 1억 원으로 하는 건 대찬의 입장에서는 꽃놀이패였다.

걸려들면 최고.

걸려들지 않아도 좋았다.

어쨌든 좋은 패였다.

만일 이 1억 원이 고스란히 선수들이 필요로 하는 장비를 구입하는 데 쓰였다면.

후원의 취지가 100퍼센트 성취된 것이었다.

그러니 대찬에게도, 선수들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또 그렇게 했다면 대찬은 잠정적으로 함재기의 값어치를 조금 더 쳐줄 수 있었다.

정말 나쁜 놈이지만, 그래도 공과 사는 구별할 줄 안다고.

하지만 함재기는 대찬의 그런 일말의 기대를 보기 좋게 배신했다.

1차 후원으로 비도축육이 들어온 걸 본 함재기는 하루 종일 대찬을 비웃었다.

역시 장사치는 장사치다.

겉으로는 선수들을 챙기는 양, 나라를 위해 피 같은 돈을 쾌척하는 양 굴더니.

결국 속을 까보니 너나 나나 같은 장사치다.

1차 후원 때, 선수들이 원하는 장비들이 도착했다면.

함재기는 여전히 대찬을 혐오스러운 훼방꾼으로 여기겠지만 그의 진정성만큼은 용납했을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비도축육이 날아드니 비웃을 수밖에.

그 마음이 2차 후원으로 들어온 현금을 자의적으로 착복하게끔 만들었다.

어차피 대찬의 목적이야 방송에 얼굴 좀 들이밀고 요즘 사장님 같지 않게 대의를 생각하는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니 이제 2차로 들어오는 이 현금을 언제나 그랬듯 아무렇게나 꿀꺽해도 무방하리라 여겼다.

새천년그룹의 후원금도, 민국은행의 후원금도 그리했다.

그들에 비하자면 구멍가게에 지나지 않는 정도의 로튼 프룻츠야 간단했다.

함재기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외부의 대찬과 내부의 선수들이 긴밀히 교류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대찬과 통화하는 유성은의 목소리는 침울했다.

“결과는 예상대로였어요. 거액을 쾌척해주셨지만 저희가 체감할 만한 변화는 없었어요. 도리어 악화됐어요. 협회장님이 이제 물불 안 가리고 선수들을 마구잡이로 내몰거든요.”

“네, 당장 곤란하게 되신 부분은 사과드립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지만…….”

“이제 선수님들께 좀 무거운 부담을 주문 드려야 할 것 같네요.”

“…네?”

“다음 주 월요일. 총리님이 선수촌을 찾으신다더군요. 선수들 격려차.”

“그래요?”

“네, 조직위원회와 문화체육위원회 소속인 석우룡 의원님으로부터 접수한 정보입니다.”

2010년대 들어 국회의원이 복수의 상임위에 소속되는 건 흔한 일이 되었다.

석우룡 의원은 농해수위와 더불어 문화체육위원회에 소속되어 있었다.

총리, 조직위원회, 국회의원.

유성은은 지금껏 함재기라는 대장 개구리가 통치해오던 우물에서만 살아왔다.

우물 밖, 강과 바다의 용왕과 이무기들의 이름이 나오니 유성은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그래서요?”

“자리를 마련해드리겠습니다.”

“자리요.”

“네, 마침 제가 방송에서 후원을 약속했으니, 여기에 대한 후속처리가 어떻게 되었는가, 물어보는 자리를 만드는 게 부자연스럽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겠죠.”

“그리고 조직위원회 측에서 그렇게 되도록 자리를 만들어주기로 했습니다.”

유성은은 침을 꼴깍 삼켰다.

“조직위원회에 체육계 인사들이 다수 포진해있어요. 함재기 협회장이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을까요?”

“조직위원회에 체육계의 영향력이 강하게 행사된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나 국회의 유력인사가 개입하면 상황은 사뭇 달라지죠.”

“…그렇기야 하겠죠.”

“몇 분, 아니 몇 십 초면 충분한 일이에요. 유성은 선수는 그저 사실만 말씀드리면 됩니다.”

“구체적으로 제가 뭐라고 하면 될지…….”

대찬은 미소를 머금었다.

“제가 어떻게 해라, 지시하듯 대본을 꾸려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질문에 정직한 대답만 하시면 그만이에요.”

“정말 그거면 되나요?”

“네, 그거면 됩니다.”

* * *

월요일.

선수들의 기합소리만 울리던 선수촌이 떠들썩해졌다.

높으신 분의 행차 소식에 사람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선수들을 다그치던 함재기 역시 그 소식을 듣고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총리의 행차를 여러 고위공직자들이 수행했다.

석우룡 의원과 조직위원장 역시 그 무리에 포함되어 있었다.

총리는 너그러운 미소로 악수를 나눴다.

“나 같은 사람이 불쑥 찾아오고 이러는 거, 민폐인 거 알지만 어쩌겠습니까. 또 안 찾아뵈면 무관심하다고 욕먹으니 찾아뵙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총리의 차분한 인사에 선수촌 관계자들은 멋쩍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총리는 선수촌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선수들 잠자리는 불편하지 않은지.

식사는 양과 가짓수가 잘 갖춰져 나오는지.

외국 선수들의 형편도 충분히 고려되고 있는지.

취재진에 대한 협조, 자원봉사자에 대한 배려가 잘 이뤄지고 있는지.

충분히 기출문제에 있는 너그러운 시험문제였다.

선수촌 관계자는 준비해온 답안을 충실히 주워섬겼다.

총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국회에서 오래 동고동락했던 석우룡 의원이 슬쩍 총리에게 말했다.

“선수촌에 오셨으니 선수들 얘기를 들어보는 게 가장 정확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건 또 그렇네요. 폐가 안 된다면 선수들 몇 분하고도 얘기를 나눠보고 싶네요.”

높으신 분의 하고 싶다는 말은, 아랫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하라는 지시로 다가오는 법.

선수촌 관계자들은 얼른 선수들을 수배했다.

조직위원장이 인간미 넘치는 웃음을 걸치며 총리에게 말했다.

“총리님, 공사가 다망하셔서 TV를 잘 챙겨보시진 못하시겠지만 최근에…….”

“아, 그렇죠. 안 그래도 오는 길에 석 의원이 자꾸 그 얘기를 하던데. 컬링팀, 맞죠.”

“예예, 맞습니다.”

총리는 흐뭇하게 웃었다.

“조대찬 씨의 이름은 진즉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정부 입장에서는 감사한 존재죠. 볼을 꼬집어주고 싶을 정도로.”

“하하…….”

“이번에 또 자발적으로 적지 않은 후원을 컬링팀에 했다고 얘기는 들었습니다.”

조직위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후원이 잘 이뤄졌는지, 이참에 점검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하긴, 잘 되었다면 칭찬하면 될 일이고, 안 되었다면 조대찬 씨한테 은근히 눈치도 한번 주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총리님.”

“컬링팀 선수 분들, 여유가 좀 있으시면 저랑 얘기 좀 나누자고 해주세요.”

정계에서 오래 자리를 지켰던 총리였다.

그는 어떻게 하면 자신의 오늘 이 행보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세간에 입소문이 돌았던 이슈를 써먹는 게 제일 간단한 방법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총리는 컬링팀 선수 대표 몇몇과 마주앉았다.

물론 그 대표들에는 유성은이 포함되어 있었다.

함재기는 자기도 그 틈바구니에 끼고 싶었지만, 총리 측에서 거절했다.

파릇파릇한 선수들 사이에 영감이 끼면 그림이 별로다.

이 그림에서 영감은 총리 자신 하나여야만 했다.

총리는 자기가 직접 테이크아웃으로 구매한 커피를 한 잔씩 선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리고는 원탁에 선수들과 편하게 둘러앉았다.

대찬은 좁은 자기 사무실에서 팔짱을 낀 채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총리도 자기 정치를 할 모양이네.”

대찬은 웃음을 머금었다.

저렇게 그림을 잡는 폼을 보아하니 단순히 의례적으로 선수촌을 찾은 건 아닌 듯했다.

총리 자신도 이미지쇄신을 위해 제법 공을 들이는 품이었다.

대찬은 마우스로 딸깍거리며 화면을 키웠다.

“참 좋은 세상이다.”

총리의 선수촌 방문 실황을 인터넷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총리실24’라는 채널에 들어가니 총리실에서 보내는 실황 영상이 생방송되고 있었다.

덕분에 대찬은 선수촌에 가지 않아도 돌아가는 사정을 겨우 몇 초 간격만 두고 알 수 있었다.

선수들과 마주앉은 총리는 느리고 친절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물었다.

“대회 준비는 잘 되고 있습니까.”

선수들 중에 가장 야무진 유성은이 대표로 대답했다.

“네, 여러모로 조직위에서 신경을 많이 써주셔서요.”

“다행이군요. 조직위 말고도 여러 곳에서 선수 여러분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열심히 응원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총리님.”

총리는 안경을 살짝 치켜 올리며 유성은에게 말했다.

“컬링 대표팀 여러분을 응원하는 분들 중에는 조대찬 씨도 있다지요?”

“예? 아, 예…….”

“방송에서 컬링팀을 후원하겠다고 아주 호언장담을 하셨던데. 어째, 그런 것 치고 대답은 개운하지가 않으십니다?”

유성은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저희 입장에서 체감할 만한 변화는 없었거든요.”

“변화가 없었다?”

총리는 다시 안경을 치켜 올렸다.

그는 그 대답이 은근히 기뻤다.

대찬에 대한 좋고 싫은 감정이 그에게는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젊은이가 열심히 사네, 정도.

대찬에 대한 감정을 떠나, 이건 좋은 건수였다.

후원을 한다던 기업인이 광고 효과는 누릴 대로 누려놓고 카메라가 사라지니까 입을 싹 닦아?

예끼, 이놈아!

그렇게 시원하게 일갈해주면 자신의 인기가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 돌발적인 답변은 총리에게는 좋은 징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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