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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46화 (446/556)

난 할 수 있어 446화

설명을 들은 대찬은 시원한 대답을 내놓았다.

“아, 내 도움이 절실하다는 말을 들으니까 반갑기까지 하네. 네, 제가 도움을 드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찬이 즉석에서 결단을 내리자 MC는 대찬의 배포에 감탄했다.

유성은은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그녀는 이 같은 내용을 미리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처음 듣는 듯, 아니 그것보다 더 과장된 몸짓과 표정으로 기뻐했다.

MC는 그녀의 의사를 물었다.

“조대찬 씨의 이런 결정에 선수들 역시 동의하실까요?”

“당연하죠! 정말 감사드립니다. 더 힘을 내서 메달을 꼭 국민 여러분께 안겨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 선수가 기뻐하는 걸 보니 제가 다 기쁘네요.”

유성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저희 협회장님께서도 기뻐하실 거 같아요. 항상 열악한 형편을 안타까워하셨거든요.”

“아, 그렇습니까? 그럼 여기서 함재기 협회장님의 소감을 안 들어볼 수가 없겠네요.”

MC는 카메라 앵글 바깥으로 쫓겨났던 함재기를 다시 안으로 불러들였다.

함재기의 얼굴에는 심통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MC는 그 얼굴을 보고 놀리듯 말했다.

“지금 너무 좋으셔서 표정 관리 하고 계신 건가요?”

“아니, 그게 아니라…….”

“감정에 솔직하셔도 됩니다. 이제 컬링 대표팀이 장비 걱정 없이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는데…….”

이대로 허허 웃어넘기면 문전박대했던 대찬의 쌈짓돈이 컬링팀으로 흘러 들어온다.

게다가 방송에서 떠들어댔으니 거기서 얼마를 착복하기도 글러버렸다.

함재기는 불편한 듯 입술을 씰룩였다.

“예, 물론 풍족한 것도 좋지만, 스포츠계에서는 그게 마냥 절대선은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절대선은 아니다?”

함재기는 바지를 치켜 올리며 완고한 표정을 지었다.

“스포츠라는 게 원래 헝그리 정신이 있어야 하거든요? 등 따시고 배부르고 그러면 사람이 나태해집니다.”

“아…….”

MC의 아는 이해되었다는 의미의 아가 아니라 탄식의 아였다.

“우리 컬링팀, 지금껏 열악한 환경에서 잡초처럼 버텨내며 성적 내왔습니다. 다 헝그리 정신이죠, 그런 것들이.”

“옛날에는 그랬지만 요즘은 그래도…….”

“요즘도 똑같아요. 오히려 지금 더 절실한 게 헝그리 정신이에요. 요즘 애들 뭐 굶어봤어야 알지. 힘든 게 뭔지나 알겠어요? 나는 내 자식 같은 선수들을 온실 속의 화초로 키울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자 가만히 듣고만 있던 윤이영이 말했다.

“협회장님의 철학은 존중하는데요.”

MC를 바라보던 함재기는 이제 시선을 윤이영 쪽으로 옮겼다.

윤이영은 차분하게 말했다.

“선수들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요?”

“이봐요, 윤이영 씨.”

“네.”

“선수가 왜 있고 코치가 왜 있고 협회장이 왜 있겠어요. 선수들은 우리한테 자식이에요. 우린 선수들을 가르칠 의무가 있고, 선수들은 우리 가르침에 따를 의무가 있어요.”

“그래서 선수들의 의중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이세요?”

“지도자와 선수의 의견이 대립한다면 지도자는 때론 비민주적인 결정을 내리기도 해야 하는 겁니다. 지도자는 응석받이가 아니거든요.”

윤이영은 눈을 말똥말똥 떴다.

“협회장님은 협회장님의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세요?”

“비약하지 마세요. 나는 그렇게 말한 적 없습니다. 애인 닮아서 그런지 궤변에 능하시네.”

“지금까지 선수들과 의견이 대립하는 경우, 한 번이라도 본인 의견을 꺾고 선수들 손을 들어주신 적이 있으세요?”

“그건…….”

윤이영은 함재기가 대답할 충분한 시간을 허락했지만 그는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없으신 모양이네요.”

“선수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하지 않고는 내 고유권한입니다.”

MC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네요. 후원을 거절하시다니…….”

윤이영은 함재기를 바라보며 물었다.

“협회장님은 협회장님의 철학에 떳떳하시죠?”

“그게 무슨 말이죠?”

“그럼 안 떳떳하세요?”

“떳떳합니다!”

“그러시군요.”

“내가 뭐 죄 짓는 것도 아니고 다 선수들을 위하는 건데 안 떳떳할 이유가 뭐가 있어요!”

윤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죠. 받는 분들이 싫으시다니 어떻게 강권할까요.”

“네, 백번 옳으신 말씀이네!”

함재기는 콧김을 뿜으며 절대 후원을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표시했다.

윤이영은 카메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은 컬링 대표팀 여러분을 만나봤습니다. 아쉽게도 협회장님의 강력한 의사로 후원은 불발됐습니다.”

윤이영이 정말 판을 접고 떠날 자세를 보였다.

이제 당황스러운 것은 유성은을 포함한 선수들이었다.

대충 간을 보다가 안 될 것 같으니 바로 떠나버리는 건가?

역시 조대찬도 장사치라고, 조금이라도 손해 볼 장사는 안 하겠다는 건가?

역시 믿을 수 없는 인간이었던 건가?

윤이영은 유성은의 따가운 눈빛을 느꼈지만 꿋꿋이 제 할 말을 이어나갔다.

“비록 후원은 못 해드리게 되었지만, 마음만이라도 컬링 대표팀의 선전을 기원하겠습니다!”

그러자 얼결에 MC도 윤이영의 말을 받았다.

“컬링 대표팀 파이팅! 대한민국 파이팅!”

촬영을 진두지휘하는 PD는 이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어 멍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그때 함재기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윤이영에게 물었다.

“잠깐, 이걸 방송에 낼 생각이에요?”

윤이영은 당연한 걸 물어보느냐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송에 안 낼 거면 뭐 하러 카메라를 대동하고 왔겠어요?”

“누구 맘대로 방송에 내겠단 거요!”

“방송에 왜 나가면 안 되나요?”

“그건……!”

“협회장님은 협회장님의 생각에 떳떳하시다면서요. 근데 왜 방송에 나가면 안 되죠?”

“쓰, 쓸데없이 소란스러워지니까!”

“협회장님이 맞고 저희가 틀리면 저희만 욕을 바가지로 먹겠죠. 안 그래요, PD님?”

그러자 감을 잡은 PD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욕을 먹어도 우리가 먹겠지.”

함재기는 당황해서 손을 마구 휘저었다.

“아, 뭐든 간에 나는 시끄러워지는 건 딱 질색이에요! 방송 내보내지 마요! 내 허락 없이 내보냈다가는 법정에서 볼 줄 알아요!”

법정에서 보자는 협박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PD에게는 지루할 정도로 식상한 협박이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모자이크 넣어드릴게요.”

“모, 모자이크 넣으면 더 이상해지잖소!”

“그럼 음성변조까지 해드릴까요.”

“PD 양반, 지금 나랑 농담 따먹기 합니까?”

PD는 흐흐 웃으며 말했다.

“아니면 이거 차라리 PD노트에 넘겨서 본격적으로 다뤄보라고 해야겠네요. 마침 누가 올림픽을 망치고 있는가, 라는 제목으로 프로그램 만들고 있던데.”

“PD!”

“그냥 후원 받으세요. 뭐가 그렇게 불만이신 겁니까? 헝그리정신이요? 헝그리정신이 다 해결해줄 것 같으면 왜 미국 애들이 금메달 싹쓸이해요? 우리랑 DNA는 같으면서 더 헝그리한 북한 애들은 왜 힘도 못 쓰는 겁니까?”

“당신하고 논쟁할 생각 없어요.”

“예, 그냥 할 말이 없다로 알겠습니다. 협회장님이 뭐라고 하시든 방송 내보낼 겁니다. 고소하고 싶으시면 고소하세요.”

“이런……!”

할 말이 없었다.

고소하려면 하라는데 더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함재기는 이를 악물고 빠르게 머리를 돌렸다.

헝그리정신 운운하면서 굴러 들어오는 후원을 뻥 차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삽시에 대중은 자신을 일제히 손가락질할 것이다.

그럼 현재 자격 정지 중임에도 선수들을 지도했다는 사실이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다.

그 이후에도 먹잇감을 포착한 방송사들이 달려들어 자신을 멋대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터.

그럴 순 없었다.

함재기 협회장은 PD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후원! 받겠소! 그럼 됐지!”

“예, 됐습니다, 그럼.”

화면에는 아름다운 장면만 방영되었다.

윤이영의 즉석 제안, 대찬의 즉석 수락, 기뻐하는 선수들.

대찬은 흐뭇한 얼굴로 방영되는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그리고는 담당 PD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조대찬입니다. 그날 찍었던 촬영분 있잖습니까. 편집된 부분들.”

“아, 예.”

“그건 그대로 보존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후원을 거절하며 헝그리정신 운운하던 완고한 모습이 담긴 촬영분을 의미했다.

“물론입니다.”

“잘 보관해주십시오. 나중에 쓸 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PD는 대찬의 의중을 이해했다.

“네, 그렇게 하죠.”

“감사합니다.”

“대신, 뭔가 일을 벌이시려면 저희 방송국과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PD 역시 대찬과 생각이 비슷했다.

함재기가 뒤가 구린 인간이라는 건 굳이 이것저것 찾아보지 않아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장, 그리고 단독으로 뭔가를 터트리기에는 부담이 컸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역풍을 맞을 공산이 컸다.

그런데 대찬이 먼저 나서서 바람몰이를 해준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까지는 뒷짐만 지고 있을 터지만, 판이 짜이기만 하면 누구보다 빠르게 이슈를 선점하고 싶었다.

그렇게 대찬과 PD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대찬은 잘 빼입고 이천으로 향했다.

그는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하여 기자들을 불러 모았다.

방송을 탄 직후였다.

대찬이 통 큰 결단을 했다고 알리는 기사 몇 꼭지가 제법 관심을 모았다.

화제가 될 만하다고 판단한 기자들은 대찬의 부름에 응했다.

수많은 카메라가 겨누는 상황에서, 대찬은 후원물품 전달식을 가졌다.

그는 활짝 웃으며 함재기 협회장과 악수를 나눴다.

그걸 카메라들이 열심히 찍었다.

대찬은 웃음을 머금고 함재기의 손을 흔들며 말했다.

“인생 어떻게 될지 몰라요, 그렇죠? 절대 거부하시던 걸 이렇게 또 받아주시고.”

“우쭐하기는.”

사진이 다 찍히자 함재기는 대찬의 손을 확 뿌리쳤다.

대찬은 그야말로 억 소리 나는 규모의 후원물품을 이천의 컬링 훈련원으로 보냈다.

동원된 트럭만 해도 상당했다.

1차로 보내진 물품은 뜬금없었다.

훈련원 앞에 잔뜩 쌓인 상자들에는 로튼 프룻츠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

함재기가 못마땅한 얼굴로 선수들을 시켜 상자를 개봉하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물품들이 나왔다.

그걸 보자마자 선수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뭐야, 고기잖아…….”

상자에 들어있는 건 다름 아닌 비도축육이었다.

대찬과 긴밀히 교감하던 유성은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이건 선수들이 원하는 게 아니었다.

물론 저만 한 분량의 비도축육은 원가로만 따져도 상당한 액수가 소요되기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선수들이 원하는 건 고기가 아니었다.

컬링 경기를 치르는 데 들어가는 장비들은 엄청난 고가였다.

배드민턴처럼 생활스포츠로 즐기는 종목이라면 시장에 진출한 업체도 많을 것이고 그만큼 대량으로 생산되어 단가 자체가 낮아진다.

하지만 컬링은 아니었다.

몇 개의 업체가 독점적으로 제품을 생산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컬링 선수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값을 치러 장비들을 구매하는 수밖에 없었다.

국제대회용 스톤은 한 세트에 3,600만 원.

얼음을 닦아내는 브러시는 10에서 25만 원.

신발은 5에서 28만 원.

일회용 패드도 한 장에 4에서 8만 원까지 했다.

가격이 부담되어 전자 센서가 부착된 스톤은 언감생심이었다.

당장 장비 때문에 고역인 선수들에게 훈련장 앞에 우르르 쌓인 비도축육은 고맙기보다는 도리어 원망스러웠다.

유성은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함재기는 고기들을 보고 푸하하 웃었다.

“덜떨어진 놈! 내가 헝그리정신, 헝그리정신 하니까 진짜 우리가 헝그리한 줄 아나 보네.”

그는 쯧쯧 혀를 차며 후원에 대한 기대로 잔뜩 몸이 달았던 선수들을 질책했다.

“야 이 새끼들아, 잘 봐둬라. 이게 너희가 노래를 부르던 후원이다.”

“…….”

“아주 배 터지게들 드세요. 알겠냐?”

“…….”

함재기의 비아냥거림에 선수들은 받아칠 말이 없어 고개만 푹 숙였다.

후원물품이 전달된 날.

유성은은 대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제나 그랬듯 역시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사려 깊은 성정의 그녀는 왜 쓸 데도 없는 고기를 보내느냐, 우리가 밥 굶는 처지인 줄 아느냐는 말부터 꺼내지 않았다.

“후원은 감사히 받았습니다. 덕분에 한결 더 힘내서 훈련할 수 있겠어요.”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네… 정말 감사해요.”

대찬은 유성은의 개운치 않은 목소리의 이유를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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