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45화
“감사해요. 저희 가까운 사람들도 그저 버티라고, 인생 다 그런 거라고만 했는데… 제대로 뵌 적도 없는 조대찬 씨한테 이런 위로를 받을 줄은 몰랐어요.”
유성은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맺혀 있었다.
대찬은 푸근하게 웃었다.
“위로에서 그치면 안 되겠죠. 문제가 해결돼야죠. 그래야 저도 원하는 목표를 성취하지 않겠습니까.”
“네, 꼭…….”
“마음의 준비는 단단히 해두셔야 할 겁니다. 유 선수가 저한테 말씀하셨듯, 간단한 문제가 아니니까요. 선수 분들께는 인생이 달린 문제니까.”
유성은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면식도 없고 컬링에 지금까지 아무 인연도 없으셨던 조대찬 씨도 이렇게 나서주시잖아요. 마음의 준비는 이미 다 마쳤습니다.”
대찬은 그녀, 그리고 컬링 국가대표의 확실한 의지를 확인하고 전화를 끊었다.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대찬의 첫 번째 삶, 평창 올림픽에서 컬링 여자대표팀은 은메달을 따내며 장안의 화제로 떠오른다.
그런데 이번에는 작지 않은 변수가 생겨버렸다.
그리고 그 변수가 대찬 자신이었다.
차라리 첫 번째 삶에서 결과가 변변찮았다면 부담이 덜했을 것이다.
만일 그랬는데 이번에 메달을 딴다면 자기 덕분이라고 한껏 자아도취 할 수 있었다.
메달을 따지 못해도 원래 그랬다고 최소한 자기 합리화는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실컷 들쑤셔놓고 성적이 참혹하다면.
세간의 비난에 앞서, 대찬은 자신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감에 더하여 죄책감까지 느낄 터였다.
그게 선수 본인들이 원했던 것이라고 해도 그렇다.
지금까지 첫 번째 삶의 일들이 두 번째 삶에서 그대로 이어지지 않고, 주사위를 두 번 던지는 것처럼 독립시행으로 결과가 나타났다.
그러나 그걸 갖고 자위하는 건 도리어 자신을 더 비겁한 사람으로 만들 뿐이었다.
함재기는 유성은도 말했듯 간단한 적수가 아니었다.
대찬도 그를 쉽게 다룰 생각이 없었다.
함재기 단독의 힘보다 무서운 것.
그가 수십 년에 걸쳐 형성한 인맥과 파벌이었다.
컬링계는 물론이요, 체육계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대찬은 확인했다.
대찬은 다시 침대로 돌아가지 않고 한참을 그대로 서재에 머물렀다.
그는 의자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수도승처럼 눈을 감았다.
그러면서 접신하는 무당처럼 중얼거렸다.
“가장 중요한 건 어디서 싸우느냐인데…….”
날카로운 사자 이빨도 물속에서는 무용지물이다.
대찬이 아무리 대중의 호의를 얻고 있고, 권력의 곁불을 쬔다지만 체육계 안에서 시비가 걸리면 함재기 일당을 이길 도리가 없었다.
그러면 대찬은 순식간에 체육의 체 자도 모르는 얼치기가 될 것이다.
올림픽에 숟가락 한번 얹어보겠다고 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30년 만에 조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을 말아먹으려 한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리라.
그들을 이기자면 좁고 음습한 그들만의 우물을 전장으로 택해선 곤란했다.
만인이 바라보는 양지에서 싸워야만 했다.
늪지에 잠자는 악어를 바싹 마른 양지로 끌어올려야 한다.
흙먼지로 눈을 가리고 무방비의 목덜미에 날카로운 이빨을 꽂아 넣어야 한다.
이를 위해 대찬은 윤이영의 힘을 빌려야만 했다.
대상 배우의 위용이 아직 창창하게 빛나고 있었다.
방송가에 그녀의 가치는 절정에 달해있었다.
대찬은 한 이불을 덮은 그녀를 슬쩍 돌아봤다.
“이영아, 자?”
“응.”
대찬은 그녀를 향해 몸을 모로 눕혔다.
윤이영은 한쪽 눈만 뜬 채로 대찬을 흘겨봤다.
“오늘은 그냥 얌전히 잡시다? 나 새벽에 나가야 돼.”
“참 나, 누군 새벽에 안 일어나나? 안 건드려.”
대찬의 말에 윤이영은 떴던 한쪽 눈을 다시 감고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용건이 뭐야. 별 거 아니면 내일 말씀하시죠?”
“별 거라서 지금 말할래.”
“뭔데?”
“그, 아는 PD 중에 평창 올림픽 특집 프로그램 제작하는 PD 없어?”
“있지. 그것도 여럿.”
대찬은 흐흐 웃으며 윤이영의 허리를 와락 껴안았다.
“이 남자가 왜 이래?”
“청탁 좀 합시다.”
며칠 후, 평창 올림픽 특집으로 꾸려지는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평창 올림픽의 개회식까지 여러 편으로 제작되는 이 프로그램에는 편마다 게스트가 바뀌어 초청되었다.
이 편에는 윤이영이 게스트로 초청되었다.
그저 그런 연예인들을 출연시키던 PD는, 윤이영 측에서 먼저 출연 의사를 밝히자 입을 함지박 만하게 벌리며 어서 옵쇼, 밝은 목소리로 반겼다.
윤이영의 매니저이자 Y2Y의 이사는 윤이영이 출연하는 조건으로 프로그램의 내용을 조금 바꿀 수 있겠느냐고 문의했다.
“대신 노 개런티로 출연하겠습니다.”
“노 개런티요? 그럼 뭘 하셔도 좋습니다.”
합의는 쉽게 이뤄졌다.
그리고 그 합의의 결과로 제작된 프로그램이 전파를 탔다.
MC가 활기차게 외쳤다.
“평창 이모저모 세 번째 시간! 오늘은 초특급 게스트, 윤이영 씨를 모시고 진행합니다! 안녕하세요, 윤이영 씨.”
“안녕하세요, 윤이영입니다. 반갑습니다!”
윤이영도 MC의 목소리만큼이나 활기차게 대답했다.
이런저런 잡담이 지난 후,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 오늘은 말이죠. 조금이라도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밤낮 가리지 않고 피땀 흘려 훈련에 매진하는 선수들을 기습방문해서 힘을 불어 넣는, 이른바 깜짝 노크! 내 응원을 받아줘! 시간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윤이영 씨가 나와 주신 만큼, 남자 선수들이 큰 힘을 얻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어떠세요?”
“제가 찾아뵙는 게 방해만 안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제작진이 준비한 선물이 잔뜩 준비돼있으니 모쪼록 선수 여러분이 기뻐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항상 겸손한 우리 대상 배우 윤이영 씨입니다. 자, 오늘 응원할 종목은 무엇이죠?”
“네, 바로 컬링인데요. 아마 4년 전 소치 올림픽의 기억이 있으신 분들은 잘 아실 겁니다.”
“맞습니다, 컬링! 그야말로 빙판 위의 체스라고 불리는 종목입니다. 오늘은 이천에서 열심히 훈련하는 컬링 대표선수들을 만나 응원해보겠습니다! 자, 그럼 가실까요?”
화면은 이천으로 넘어갔다.
보통 원활하게 방송에 내보내기 위해 겉으로는 깜짝이니 기습이니 하는 말을 써도 사전에 방문을 합의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윤이영 측은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정말 기습방문을 하자고 제안했다.
올림픽 조직위원회하고만 사전합의를 했다.
갑자기 카메라가 우르르 이천 훈련원으로 모여들었다.
선수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함재기는 갑작스런 등장에 깜짝 놀랐다.
“뭐, 뭐야?”
기실 따지자면 결례였다.
취지는 응원을 위한 기습방문이라지만 훈련을 멋대로 중단시키는 민폐 행위였다.
다만 올림픽 조직위원회와 더불어 대찬이 개인적으로 알려 선수들은 이 일정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윤이영의 출연에 눈이 먼 방송사는 그런 깊은 고려 없이 일을 그대로 추진했다.
MC는 쾌활하게 웃으며 쳐들어왔다.
“안녕하세요! MBS에서 나왔습니다!”
“M, MBS요?”
“네, 여기는 윤이영 씨입니다. 윤이영 씨 아시죠?”
“아, 압니다…….”
카메라가 자기를 겨누고 있으니 함재기는 전처럼 덮어놓고 왁왁대지는 못했다.
그는 윤이영을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찝찝한 기운을 느꼈다.
그녀가 대찬과 오랫동안 교제하고 있다는 사실은 TV를 즐겨 보지 않는 그도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니 영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상파 채널의 카메라에 대고 꺼리는 티를 낼 순 없었다.
자기 이미지에 악영향을 끼칠 테니까.
그리고 그는 외부의 관심을 즐기는 편이었다.
우물 안 대장 개구리는 바깥으로 나가기 싫어한다.
하지만 바깥에서 우물에 보이는 관심은 좋아한다.
그건 꼭 자기가 다스리는 우물이 강이나 바다처럼 대단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까닭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대장 개구리가 아니라 용왕님이었다.
그런 복잡한 사정이야 알 길이 없는 MC는 자기 직분에만 충실했다.
“혹시 저희 방문이 실례가 되는 건 아닌지…….”
“아, 뭐, 잠깐 휴식은 필요한 거니까요.”
함재기는 MC에게는 대범하게 말하고 선수들에게 휘휘 손을 저으며 외쳤다.
휴식! 휴식!
그런 와중에도 선수들을 불러 세우지는 않고 자기가 카메라를 독식했다.
“에, 우리나라에서 컬링은 94년도에 제가 먼저 들여와서, 하하, 그러니까 한국에서만큼은 제가 원조인 셈이죠. 컬링의 조상님이니까. 에, 그러니까…….”
지루하고 영양가 없는 눌변의 자기자랑은 그대로 통으로 편집되었다.
그의 장황한 말은 전파를 타지 않고, MC가 구사하는 빠른 박자의 멘트만 전파를 탔다.
“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선수들 말씀 좀 들어볼까요? 협회장님, 선수들과 얘기를 나눠도 괜찮겠죠?”
“예? 아, 뭐…….”
“저기 아름다우신 선수 분이 딱 눈에 띄네요. 컬링계의 윤이영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겠죠?”
윤이영은 눈웃음을 지으며 MC의 말에 동의했다.
MC가 지목한 이는 유성은이었다.
미리 언질을 받은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카메라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컬링 여자대표팀 스킵, 유성은이라고 합니다.”
“네, 유성은 선수! 저희가 오늘 컬링 국가대표팀을 응원하기 위해 찾아왔는데요. 어떻게 하면 우리 유 선수가 힘을 잔뜩 받아서 경기에 나설 수 있을까요?”
“제가 남자라면 윤이영 씨를 뵙는 것만으로도 힘을 잔뜩 받았겠지만요.”
MC는 쾌활하게 웃었다.
“유감스럽게도 아니시네요.”
“네, 사실 저희 컬링 종목은 다른 종목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져서 열악한 환경에서 훈련하고 있습니다.”
“열악한 환경. 마냥 국가대표라고 호화스럽게 훈련하는 건 아니었군요!”
유성은은 쓴웃음을 지었다.
“네, 저희 컬링은 물론이고 동계든 하계든 여러모로 도움이 절실한 종목들이 많습니다.”
유성은의 조잘거림이 함재기는 불쾌했다.
그와 그녀는 종종, 아니 꽤 자주 대립했다.
유성은은 여자 대표팀의 맏언니였다.
그렇잖아도 책임감이 강하고 뚝심이 있는 성격인데, 맏언니라는 점 때문에 그녀는 더 강인한 태도를 가졌다.
자기가 아니면 부당한 대우에 목소리를 낼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되바라진 년.
싸가지 없는 년.
그래서 저런 적나라한 욕설을 감수해가면서 함재기와 대립했다.
함재기는 그녀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그러나 그녀만큼 실력이 뛰어난 선수가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기용할 수밖에 없는 판이었다.
그러니 카메라 앞에서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다시 카메라 앵글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자, 쓸데없는 인터뷰는 여기까지만…….”
“잠시만요, 협회장님. 잠깐이면 돼요.”
PD는 함재기를 얌전히 다시 앵글 밖으로 끌어냈다.
한주먹거리도 안 되지만 함부로 주먹을 휘두를 수 없다.
함재기는 입술을 악물었다.
PD의 제지 덕분에 유성은과의 인터뷰는 계속되었다.
유성은은 상황이 얼마나 열악한지 세세하게 말했다.
그러자 윤이영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에 집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MC는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고군분투하고 계실 줄이야! 정말 몰랐습니다. 저희가 선물이랍시고 준비한 것들이 어쩐지 하찮게 느껴지네요.”
그러자 유성은은 급히 손을 저었다.
“아뇨,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은 아니에요.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시는 것만으로 저희에겐 아주 큰 힘이 됩니다!”
윤이영은 고개를 저었다.
“저… 외람되지만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MC는 당연히 그녀에게 발언권을 허락했다.
“그럼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사실 제 연인인 조대찬 씨가 이번 올림픽에 기여하고 싶다는 말을 여러 번 했었거든요.”
“아, 그렇습니까?”
윤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개 기업인으로는 큰 사랑을 받았으니 이런 국가적인 이벤트에서 조금이나마 보답을 하고 싶다고.”
“그렇군요.”
“말씀을 들으니 컬링 대표팀에 도움을 드리는 방향으로 진행을 하면 어떨까 싶어요.”
이미 약속된 차례임에도 프로페셔널한 MC는 호들갑을 떨었다.
“정말입니까? 이야, 그렇게만 된다면 컬링 대표팀 선수들에게 이보다 큰 선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바로 전화를 걸어서 확답을 듣는 게 어떨까요?”
“즉석 전화연결인가요?”
윤이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대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찬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어, 이영아.”
“오빠, 나 지금 촬영 중인데…….”
윤이영은 상황을 설명했다.
대찬을 위한 설명이 아니라 시청자를 위한 설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