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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44화 (444/556)

난 할 수 있어 444화

“여기고 저기고 다 미친놈들뿐이구만!”

대찬은 어깨를 움찔하며 관계자에게 말했다.

“함재기 협회장님이 사무총장님 보고 미친놈이라고 했다고 꼭 일러바치셔야 돼요.”

“하하…….”

한시도 쉬지 않고 자기 성질을 건드려대는 대찬에 대한 인내심이 동났다.

그는 코치들을 향해 꽥꽥 소리를 질렀다.

“너희 왜 가만히 보고만 서 있어! 당장 내쫓아!”

그러자 함재기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코치들이 대찬을 향해 우르르 달려왔다.

대찬이 다급하게 말했다.

“저, 선수님들 드리려고 장비며 뭐며 다 갖고 왔는데 이러실 거예요, 진짜?”

“네놈이 주는 거 필요 없으니까 당장 갖고 꺼져!”

“너무하셔, 진짜.”

평생 운동만 한 코치들의 완력을 대찬이 이겨낼 수는 없었다.

대찬은 그대로 조직위 관계자와 함께 훈련장 밖으로 쫓겨났다.

쫓겨난 대찬의 꼬락서니가 우스워졌다.

넥타이는 풀어 헤쳐졌고 애써 만져놓은 머리도 흐트러져있었다.

대찬은 가볍게 진절머리를 쳤다.

그는 후, 한숨으로 악감정을 속에서 불어내 없애고 동행한 진위생을 바라봤다.

“폭언, 욕설, 그리고 부적절한 신체접촉. 잘 녹음하고 잘 녹화했나요?”

“네, 대표님. 잘 됐습니다. 이거 바로 언론에 넘길까요?”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직.”

“이런 일 있을 거 알고 미리 저한테 지시를 해놓으셨으면, 차라리 기자들을 부르시지 그랬어요.”

“안 돼요. 그건 시기상조예요.”

“가뜩이나 자격도 없는 협회장이 팀을 떡 주무르듯이 주무르고 있잖아요. 명분은 우리한테 있으니까 터트리는 게 좋지 않아요?”

대찬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자격 없는 주제에 대표팀에 숟가락 얹으려고 드는 건 우리나 그 인간이나 똑같아.”

“에이, 우리가 뭐 대표팀 보고 이래라저래라 하러 온 게 아니잖아요. 우린 키다리아저씬데.”

“사람들이 그렇게 친절하지가 않아요. 분란 일으키는 것 그 자체만으로 민폐라고 생각하니까.”

“그래도…….”

“함재기 협회장 쪽에서도 할 말이 아주 없진 않겠죠. 그럼 진흙탕 개싸움이에요. 우리 몸에 진흙 튀겨가면서 싸워 이겨야 할 정도로 가치 있는 상대가 아니에요.”

만일 함재기를 꺾어버리는 게 로튼 프룻츠나 대찬 자신에게 획기적인 이익이 된다면 대찬은 다소간의 불명예를 감수할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이 일은 그렇지 않았다.

잘되면 좋고 안 돼도 그만인 사업.

그런 일을 공들여 쌓은 것을 무너뜨려 가면서 강행할 까닭이 없었다.

대찬은 진위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담배나 한 대 피우고 가시죠.”

그렇게 주차장 옆에 마련된 흡연구역으로 걸어가는 대찬을 누군가가 불렀다.

“조대찬 씨!”

대찬이 뒤를 돌아보니 익숙한 얼굴이었다.

여자컬링팀의 주장을 맡고 있는 선수였다.

실물로는 초면이었지만 며칠간 컬링팀만 파다보니까 저절로 얼굴이 익혀졌다.

대찬은 담배를 도로 집어넣고 꾸벅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세요.”

“잠깐만 저쪽으로 가서 얘기해요.”

그녀는 무언가에 쫓기듯 황급히 대찬을 건물 뒤쪽으로 끌고 갔다.

대찬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그대로 그녀의 손길에 이끌렸다.

그녀는 누가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지 뒤를 살피고는 대찬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저는 여자컬링팀 심은혜라고 합니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저 안에서는 미처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죄송해요.”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인사할 분위기가 아니었으니까요.”

“저, 차분히 예의 차리고 드릴 말씀드려야 하는데 그럴 여유가 없어서요. 바로 본론만 말씀드리고 들어가 봐야 해요. 커피 심부름으로 나온 거라 늦게 들어가면 의심 사거든요.”

“선수들한테 커피 심부름을 시켜요?”

“……네.”

“아니, 여유가 없으시다니까 이런 말은 됐고, 말씀하세요.”

“협회장님은 정상이 아니에요.”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선수 본인으로부터 그 말을 들으니 어렴풋이 짐작하던 것보다 심각성이 피부로 와 닿았다.

“여러 문제점은 저 또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수 분들이 지금 제대로 항의하거나 반발할 계제가 아니란 것도 압니다.”

“네, 물질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훈련에 전념하기 어려운 상황이에요.”

대찬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공감을 표했다.

저런 인간의 밑에서라면 반골 기질이 다분한 대찬은 벌써 갈아 마셔도 골백번은 그렇게 했을 것이다.

심은혜는 착잡하면서도 다급한 목소리로 대찬에게 말했다.

“초면에 염치없지만, 협회장님과 말씀 나누시는 걸 들으니 저흴 도와주시겠다고…….”

“네, 제가 돕고 싶은 건 심 선수를 포함한 팀원들입니다. 무자격자와 끄나풀들이 아니라.”

대찬의 확실한 지지에 그녀는 다소 안도했다.

뻣뻣한 얼굴에 더운 웃음기가 살짝 돌았다.

그러다 자신의 급한 신세를 떠올린 그녀는 얼른 대찬에게 물었다.

“번호 좀 알려주시겠어요?”

“아, 그러죠.”

심은혜가 자신의 휴대폰을 건네주자, 대찬은 얼른 자신의 번호를 입력했다.

“밤까지 훈련이라 아마 자정 가까워져서야 연락드릴 수 있을 거예요.”

“괜찮아요. 언제든 편할 때 연락주세요. 저도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니까.”

“감사해요, 그럼.”

심은혜는 꾸벅 인사를 하고 커피를 사러 뛰어갔다.

그녀의 모습이 급히 멀어졌다.

진위생이 대찬을 흘끗 보며 물었다.

“선수 쪽에서 적극적으로 나오네요?”

“그만큼 핍박이 심하다는 뜻이겠죠.”

“올림픽 두 달 앞둔 국가대표한테 커피 심부름 시키는 것만 봐도 알 만하네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자정.

대찬이 연락을 기다리며 뜬눈으로 침대에 누워있던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대찬은 지체 없이 전화를 받았다.

심은혜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컬링 여자대표팀 스킵 유성은이라고 합니다.”

“아, 예, 안녕하세요. 연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저희를 도와주시겠다고 하셔서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대찬은 그 인사가 쑥스러웠다.

“그러실 거 없습니다. 저희에게도 이로우니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래도 저희한테는 유일한 희망이세요.”

그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려던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누군가에게는 유일한 희망이라고까지 거창하게 말할 정도의 선행이었다.

대찬의 기분이 묘했다.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끼어들었는데 무거운 사명감이 내려앉았다.

유성은은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괜히 저희 때문에 봉변당하신 거 같아서 마음이 안 좋아요.”

“마음 쓰지 마세요. 별 일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함재기 씨와 저 사이의 일이에요. 선수 분들이 마음 쓰실 거 없습니다.”

“이름이 알려질 대로 알려진 조대찬 씨에게도 그렇게 막 대하는 걸 보셨으니 평소 그분의 행실이 어떠셨을지는 충분히 짐작하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과장 조금 보태서 저희는 함재기 일가의 사노비 같은 신세예요.”

침대에 누워서 전화를 받던 대찬은, 몸을 일으켰다.

항상 있는 자리에 있는 슬리퍼를 보지도 않고 신은 뒤, 서재를 향해 비적비적 걸어갔다.

그는 푹신한 의자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전 체육계하고는 별 인연이 없었어요. 평생 회사 밥만 먹으면서 살았거든요.”

“네.”

“그래도 유성은 선수 말씀을 이해는 하겠어요.”

“그러세요?”

대찬은 유성은과 대면한 것도 아닌데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장 다니기 싫은 회사로 손꼽히는 게 어떤 회산지 아세요?”

“…어떤 회산데요?”

“가족기업이요.”

“아…….”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유 선수의 말씀을 세세히 듣지 않고도 알 것 같습니다. 아마 가족기업이 보일 수 있는 가장 안 좋은 수준으로 짐작해도 무리는 없겠죠.”

“네, 조대찬 씨가 생각하는 가장 안 좋은 수준이 어디까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상상력의 최대를 만족시킬 거라고 봐요.”

“손찌검도 합니까?”

유성은은 씁쓸하게 웃었다.

“손찌검이요? 국어사전에 발찌검이라는 단어는 왜 없을까 싶네요. 현실에는 버젓이 존재하는데 말이죠.”

“음, 발찌검은 상상에 없었는데.”

“그게 양복과 츄리닝의 차이죠. 츄리닝은 신축성이 좋아서 발차기가 쉽거든요.”

대찬은 웃어야 할지 여전히 진지해야 할지 몰라서 침묵했다.

유성은은 말을 이었다.

“1초라도 그 인간 밑에 있기 싫어요.”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있겠죠. 발목을 잡는.”

“네, 대회도 얼마 남지 않았고, 함재기 일가가 협회고 뭐고 컬링계를 통치하는 수준이라서 저희가 어떻게 할 재간이 없어요.”

“……그렇군요.”

“컬링으로 먹고살려고 하는 한, 함재기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대찬의 표정도 자못 심각해졌다.

“그래서 저희도 매니지먼트를 의도했어요. 그 인간의 영향력을 조금이라도 분산해보려고요.”

“그런 쪽으로는 잘 몰라서……. 매니지먼트 계약에서 그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나요?”

“매니지먼트는 선수님들과 직접 계약하니까요. 협회장을 통하지 않는 핫라인을 열면 협회장도 마냥 함부로 굴진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그 핫라인을 여는 것 자체가 어려우시죠?”

“…예, 상상 이상으로 협회장의 장악력이 강하더군요.”

유성은은 깊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래서 저희도 답답해요. 사실 웬만한 실력과 각오가 아니고서는 이 마왕을 해치울 수가 없거든요.”

“마왕이라는 말이 딱 맞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대찬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우선 이것부터 여쭤볼게요.”

“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저는 엄연히 외부인이에요. 며칠 전까지는 컬링과는 아무 관계도 없었던 사람입니다.”

“네.”

“그런 문외한에 외부인이 개입한다고 하면 좋아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체육계도 그렇고, 대중도 그럴 겁니다.”

유성은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예, 그렇겠죠.”

“줄탁동기라는 말 아시나요. 어미 새가 바깥에서 쪼고, 아기 새는 안에서 쪼아야 알이 깨진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아요. 저희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대찬은 시원하게 잘 알아듣는 유성은이 마음에 들었다.

“맞습니다. 물론 시작은 저희가 합니다만, 선수님들이 확실한 반응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그게 아니면 저희만 된통 욕먹고 흐지부지됩니다.”

“흐지부지가 아니라 오히려 상황은 더 악화되겠죠.”

“그렇게 생각하세요?”

유성은은 막힘없이 말했다.

“천하의 조대찬이 덤벼도 본인의 권위가 끄떡없다는 걸 확인했을 테니 더 안하무인으로 굴겠죠.”

대찬은 미소를 머금었다.

“네, 그렇다면 선수님들께서 적극적으로 나서실 동기가 충분히 마련됐다고 봐도 되겠군요.”

“저희는 당사자예요. 적당히 간만 보다가 물러나도 좋은 조대찬 씨보다는 동기가 더 강하면 강했지 약하진 않아요.”

대찬은 유성은의 말이 미더웠다.

그녀의 말이 미더울수록, 대찬은 이 사태에 더 깊숙이 개입할 욕구를 느꼈다.

이제는 로튼 프룻츠의 브랜드 이미지를 개선해보겠다는 그런 작은 목적이 아니게 돼버렸다.

대찬은 자신의 이 감당할 수 없이 넓은 오지랖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게 잘한 짓인지 못한 짓인지는, 우유부단한 대찬을 대신해 결과가 결정해줄 터였다.

대찬은 한결 더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저한테 원하는 바를 확실히 얘기해주세요. 말씀에 따라서 제 운신의 폭도 달라집니다.”

“선택지는요?”

“1번, 단순히 경기를 잘 치를 수 있도록 돈을 풀어서 후원을 해달라.”

“일단 1번은 아니에요. 물론 포함돼있는 부분이지만요.”

대찬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2번, 후원에 더하여, 칡덩굴처럼 어지럽게 뿌리를 내린 함재기 일당을 몰아낼 계기를 만들어 달라. 그렇게 해서 맘 놓고 훈련과 경기에만 집중하도록 해달라.”

“2번이 더할 것도 덜 것도 없는 정확한 제 마음이에요.”

“좋습니다. 그럼 저도 대책을 강구하겠습니다.”

대찬의 확실한 대답에도 유성은은 여지를 남겼다.

“말씀은 더 없이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닐 겁니다.”

대찬의 각오가 양은냄비처럼 확 끓었다가 확 식고 마는 즉흥적이고 단발적인 감정의 산물이 아닐까, 유성은은 걱정했다.

만일 그렇다면, 그래서 대찬이 나중에 작은 위기에도 발을 빼려고 한다면.

선수들은 더 곤란한 수렁에 빠지고 만다.

그녀는 대찬의 각오가 그렇게 사소하고 하찮지 않다는 걸 확인받고 싶었다.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까지 일을 벌일 때마다 간단하다고 얕봤던 적은 없습니다. 함재기 씨를 간단한 적수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믿어도 되겠죠……?”

“제 말을 믿지 마시고, 돌아가는 상황을 믿으세요. 그리고 상황에 대한 본인의 판단을 믿으세요. 상황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저는 유 선수께 결단을 요구하지 않을 겁니다.”

대찬이 점차 유명세를 얻으면서, 그의 행적도 일반인들에게 제법 알려져 있었다.

분명한 목소리에 더하여, 그가 보여온 행보가 유성은의 신뢰를 굳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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