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43화
관계자가 이런저런 문제로 퉁 칠 수밖에 없을 만큼 구린내가 진동하는 병폐들이 있었을 것이었다.
아마 새천년그룹에서 전달되었다는 100억 원도 저 찌든 병폐에 동서남북으로 찢겨 증발해버렸을 것이다.
‘새천년한테 백억쯤이야 없어도 되는 돈이라지만 우리는 알뜰하게 써야 되는 입장이라고. 물론 단위도 0 몇 개는 빼야겠지만.’
대찬은 쩝, 입맛을 다셨다.
상황을 보아하니 후원금이 모자라지는 않는데 사사로이 탐하는 입들이 너무 많은 게 문제였다.
관계자는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컬링계에 압도적인 존재감을 지닌 대부가 계세요.”
“대부요?”
“네, 함재기라고 하는 분인데, 이 분이 국내에 컬링을 처음 도입하기도 했거니와 지금 국가대표 지도자들이 이분 딸, 사위, 지인들로 구성돼있거든요.”
“그게 가능합니까?”
“뭐, 개척자의 특권이랄까.”
“아…….”
“기실 그 양반과 주변사람만큼 컬링에 관심이나 전문성을 갖춘 사람이 없거든요.”
“…하긴 그렇겠군요.”
“암튼 그분이 협회장으로 장기집권 하던 와중에 걸린 건수가 커도 너무 커서 날아간 거예요. 아마 안 들켰으면 장기집권이 아니라 종신집권 했을 겁니다. 그분 돌아가셨으면 따님이 세습할 걸요?”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관계자는 툭 터놓고 말할 좋은 말벗을 만났다고 여겼는지, 의욕적으로 대찬에게 말했다.
“근데 협회장 자격정지를 당하시고도 입김이 어마무시합니다.”
“하기야, 따님에 사위에 주변사람들이 여전히 꽉 잡고 있으니 그러지 않는 게 이상하겠군요.”
“예, 암튼 그분을 통하지 않고는 후원이든 뭐든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군요.”
대찬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이런 부류의 사람을 잘 알았다.
우물을 지배하는 대왕 개구리.
권위를 최우선으로 신봉하는 부류.
원리원칙보다는 형편과 융통성을 중시하는 부류.
토론 대신 명령을 선호하는 부류.
우물물이 썩어 못 마시게 될지언정 밖에서 새 물이 들어오는 걸 절대 허용하지 않는 부류.
외부의 간섭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부류.
대찬이 상대하기 가장 껄끄러우면서 꺼리는 부류였다.
‘저쪽에 후원 의사를 타진했다가는 새천년이나 민국은행처럼 중간에 다 노략질 당하고 말 거야.’
대찬은 함재기, 그리고 그의 사람들로 채워진 협회와 교섭하는 것을 포기했다.
앓느니 죽는다고 했다.
저쪽과 협의를 하느니 아예 후원 자체를 포기하는 편이 좋았다.
대찬은 직원들과 방법을 어떻게 실천에 옮길지 논의했다.
몇몇은 왜 굳이 컬링이어야 하냐며, 차라리 다른 종목으로 선회하자고 했다.
그러나 대찬은 한사코 컬링을 고집했다.
사장의 똥고집에는 언제나 이유가 분명했다.
직원들은 일단 그의 뜻을 따라주기로 했다.
종목이 컬링으로 딱 정해지자 역시 가장 똑소리 나는 고미수가 다시 나섰다.
“매니지먼트를 제안하는 건 어떨까요?”
“매니지먼트라.”
“저희 회사는 서포터로 남고, Y2Y가 전면에 나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대찬은 씩 웃었다.
“망해도 나만 돈 왕창 잃고 우리 회사에는 피해 안 가겠네.”
“히히, 그게 대표님 입장에서도 속 편하지 않으세요?”
“능구렁이 같기는.”
“매니지먼트를 전담하게 되면 협회나 소속팀만큼은 아니지만 투자한 금액만큼의 발언권은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고려해볼 만하지 않나요?”
“그럼 협회가 결국 영향력을 우리랑 나눠 가져야 한다는 뜻인데 그쪽에서 승낙해줄까?”
고미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쪽이 혹할 만한 조건을 제시해야겠죠?”
“으음, 오히려 더 크게 털리는 거 아니야?”
“그건 전적으로 대표님 수완에 달린 거죠.”
결정권자가 아닌 고미수의 말은 막힘이 없었다.
결정권자인 대찬의 말은 어쩔 수 없이 머뭇거렸다.
“처음에는 후원해놓고 생색이나 내자던 게 일이 점점 커지네.”
최초제안자인 고미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당장 백지화하는 것도 방법이긴 해요.”
고미수가 먼저 그렇게 말하자, 다른 직원들도 말을 보탰다.
“매니지먼트는 단발적인 게 아니라 지속적인 사업이라, 일이 잘못되면 돈 한 번 흘린 수준이 아니라 두고두고 발목을 잡을지도 몰라요.”
대찬도 그 지적에는 수긍했다.
“그 말씀도 맞아요. 그렇다고 버리기엔 또 탐나는 건수란 말이죠.”
“어떡할까요?”
“버릴 수도 없고, 취할 수도 없고 이거 완전 계륵이네.”
대찬이 거푸 주저하자 고미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를 저격했다.
“Y2Y에서 진행하면 대표님 내외 사비로 하는 거나 다름없어요.”
“그렇긴 하죠.”
“어차피 망해도 대표님 재산 들이붓는 거니까 대표님이 맘대로 결정하셔도 된다구요.”
“고미수 씨는 참 시원시원해서 좋아.”
“그게 제 매력이니까요.”
“좋아요. 그럼 이 건은 Y2Y 실소유자인 윤이영 씨랑 논의해서 결정할 테니까, 여러분은 기존 업무에 충실해주세요.”
“이제야 속이 시원하네요.”
대찬은 고미수를 보며 피식 웃고는 진위생에게 말했다.
“진위생 씨한테 참 아까운 여자예요, 그렇죠?”
칭찬인지 질책인지 분간할 수가 없어 진위생은 혀만 샐쭉 내밀고 대답하지 않았다.
대찬의 말을 들은 윤이영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괜찮은데? 난 찬성이야. 그쪽에서 받아줄지 안 받아줄진 모르겠지만.”
“좋아, 그럼 추진한다?”
“추진!”
윤이영의 허락을 얻은 대찬은 본격적인 행보에 돌입했다.
우선 정공법을 먼저 시도했다.
대찬은 직접 협회에 전화를 걸어 Y2Y와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컬링 대표팀은 무명이었다.
2014년 소치 올림픽에서 화제가 됐던 팀과는 또 별개.
협회는 대찬의 제안이 뚱딴지같이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저희 국가대표팀이랑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고 싶다고요? 매니지먼트가 그거죠? 광고나 인터뷰나 행사나 기타 등등 관리해주는.”
“맞습니다. Y2Y는 신생업체지만 저와 윤이영 씨가 설립하고 올림픽 공식 서포터인 로튼 프룻츠와 긴밀히 연결된 회사입니다.”
“아니, 그건 알겠는데요. 굳이 저희랑 왜……?”
대중 인지도가 제로에 가까운 그들과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해서 뭘 한단 말인가.
협회 측은 얼떨떨할 뿐이었다.
대찬은 구태여 그들에게 제안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그저 받을 거면 받고, 말 거면 말라, 선택을 권했다.
“제안서를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검토 후, 회신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죠.”
직무가 정지당한 상태인 함재기 컬링협회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건 불과 10분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조대찬 씨 전화 맞습니까? 나 함재기라고 하는데.”
“아, 예, 맞습니다. 말씀은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하고 싶다고 하던데. 뭐, 이유야 됐고. 합시다. 대신, 수익 정산 비율 등등 정해야 할 게 많지요?”
“최대한 선수 분들의 편의를 봐 드리고자 합니다.”
그러자 함재기는 피식 웃었다.
“선수들이 아니라 내 편의를 봐줘야죠. 번지수를 잘못 찾으셨네.”
“저희는 선수 분들에 대한 매니지먼트를 제안 드렸는데요.”
“그 애들, 다 내 손으로 키웠습니다. 걔네들 나 아니었으면 공장 가서 손에 기름때나 묻히고 있었을 거라고.”
“…….”
“걔들은 내가 제일 잘 압니다. 내 기준이 곧 걔들 기준이고. 나랑 협의해서 결정하면 돼요. 그게 그쪽 입장에서도 편하지 않겠어요? 다섯을 상대하느니 나 하나 상대하는 게 편하지.”
“아… 근데 협회장님은 현재 자격정지 상태 아니십니까?”
대찬이 부러 물정 모르는 질문을 던지자 함재기의 목소리가 살짝 격앙되었다.
“나는 협회장이자 걔들 아버지 같은 사람이에요.”
“아버지.”
“참 나, 고리타분한 자격을 따지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그럼 난 쟤들 대부 자격으로 그쪽과 협상할 테니까.”
“뭐, 좋습니다. 이천에서 훈련하고 계시죠?”
“예, 그렇긴 한데.”
“경기 준비로 바쁘실 텐데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선수들도 뵐 겸 해서요.”
“아유, 뭘 그래? 나 서울 자주 가요. 서울 가서 연락할 테니 전화나 재깍 받고 나오시지.”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선수들 얼굴이라도 한번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그쪽 딴에는 배려한답시고 이천까지 오겠다고 하지만, 그거 오히려 실례예요.”
“어째서…….”
“그쪽 말마따나 지금은 시합에만 신경 써야 할 시즌이거든. 근데 매니지먼트니 뭐니 하면서 찾아와서는 훈련장 뒤집고 다니면 집중이 되겠어요?”
“…그렇긴 하군요.”
“그러니까 내가 서울 올라가서 연락할 테니까 그때 보자고요.”
어흠, 함재기는 헛기침을 하고 뚝 전화를 끊었다.
대찬은 헛웃음을 지었다.
“참 나, 누가 보면 내가 저 인간 부하직원인 줄 알겠어.”
그의 구실은 그럴듯했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봤을 때, 대찬의 훈련장 방문을 꺼리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선수들 모르게 홀라당 해 처드시려는 거겠지.’
대찬은 그렇게 되도록 용납할 의사가 조금도 없었다.
그는 올림픽 조직위원회 사무총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총장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어요? 요즘 눈코 뜰 새 없으시죠. 혹시 조직위에서 종목 별로 훈련장 한번 슥 둘러볼 계획 있으신가요? 예? 아, 염치없지만 저도 껴서 견학해보고 싶어서요. 이런 때 아니면 언제 경험해보겠습니까, 하하…….”
조직위의 협조를 받은 대찬은 함재기의 의견을 묵살하고 바로 이천의 훈련장에 입성했다.
그를 본 함재기의 눈알이 뒤집혔다.
“이봐요, 조대찬 씨!”
“아, 안녕하십니까.”
그는 한달음에 달려와 대찬을 윽박질렀다.
“내가 서울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어요, 안 했어요!”
“했어요.”
“근데 기어코 이천으로 쳐들어와서는 얼굴을 들이미는 건 무슨 경웁니까!”
대찬은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아, 죄송하지만 그때 일방적으로 말씀만 하시고 제 대답은 안 들으셨거든요.”
“뭐야?”
“저는 그래도 이천으로 가서 찾아뵙겠다고 하려고 했는데 먼저 뚝 끊으시는 바람에.”
“막무가내도 이런 막무가내가 없구만. 아무리 공식 서포터라지만 맘대로 훈련장 드나들 권한은 없을 텐데?”
“어떻게 제 맘대로 그러겠어요. 조직위에서 협조해주셨어요.”
함재기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따로 가서 얘기합시다.”
대찬은 그를 휭 지나쳐 선수들에게 손을 흔들며 외쳤다.
“선수님들! 수고가 많으십니다! 저 조대찬이라고 하는데 말씀 좀 잠깐 나눌 수 있을까요!”
대찬이 큰 소리로 부르자 선수들이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함재기는 대찬의 가슴을 거칠게 밀치며 앞을 가로막았다.
“이 인간이 진짜! 시합 말아먹으려고 작정했어!”
“잠깐도 안 되나요?”
“안 돼!”
“선수님들 인터뷰 보니까 환경이 열악해서 지원이 절실하다고 하셨거든요. 제가 여기서 명시적으로 약속을 드리고 후원물품도 놓고 가면 더 힘내서 시합에 열중하시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그걸 왜 제3자인 그쪽이 멋대로 판단해서 멋대로 행동하느냐고! 날 통해서 하라고 날!”
대찬은 입술을 삐죽였다.
“죄송하지만 함재기 씨도 제3자 아니신가요?”
“뭐? 함재기 씨?”
“협회장님이라고 할 순 없잖아요. 지금 자격 정지신데.”
“대통령 탄핵 당하면 헌재 판결 나오기 전까진 대통령인 거 몰라?”
“알았어요. 호칭은 협회장님으로 해드리죠. 근데 여기서 이러고 계시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뭐야?”
“대통령도 탄핵 당하면 그 순간부터 일을 손에서 놔야 되잖아요. 대행한테 넘기고. 근데 왜 여기서 선수들 지휘하고 계세요?”
함재기는 피식 웃었다.
“감독대행이 내 딸애거든. 아비로서 딸 일하는 것 좀 거들어주겠다는데 그쪽이 왜 간섭해?”
“아무 공식적인 권한도 없으신데 감독 업무를 거들어준다고요? 본인이 비선실세라고 고백하고 계신 거예요?”
함재기는 입술을 악물며 대찬을 거칠게 몰아붙였다.
“당장 나가. 매니지먼트고 뭐고 다 없는 일로 할 거니까 당장 나가라고.”
대찬은 자기 목에 걸린 출입증을 손으로 달랑거리며 말했다.
“저 공식 절차 밟고 방문했어요. 비공식 인사의 퇴거요구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는데요.”
“기어코 한 대 맞고 쫓겨나야 직성이 풀리겠어?”
“때려주시게요? 그럼 저야 고맙죠.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대찬이 느물거리기로 일관하자, 함재기는 타깃을 그를 데리고 온 조직위 관계자로 바꿨다.
“당신, 정신머리가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딴 외부인을 안에 들여서 뭐 어쩌자고? 나 이거 정식으로 사무총장님한테 항의할 거야! 그때 당신이 멀쩡할 거 같아?”
“사무총장님이 지시하신 일입니다.”
“그런 정신 나간 짓을!”
“저는 지시만 받고 왔을 뿐이에요.”
관계자는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