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40화
윤이영이 차에서 내리자 카메라 플래시가 그녀의 주변을 낮처럼 밝혔다.
윤이영은 확실히 프로였다.
잠깐도 눈을 뜨기 어려울 정도로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에도, 환한 미소를 지으며 눈 한번 깜짝이지 않았다.
그녀는 한결같은 표정을 유지한 채로 웃으며 손을 들고 천천히 각도를 틀며 기자들이 사진 찍기 가장 적합한 피사체로 구실해 주었다.
대찬은 흐뭇하게 웃고는 바로 차를 몰았다.
대찬은 시상식 초반에 조명상 시상자로 잠깐 무대에 오르고는 내내 객석에 있었다.
그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팔짱을 낀 채 행사를 즐겼다.
행사의 중간에 2017년에서 2018년으로 넘어가는 카운트다운.
그 이후 제야의 종소리.
사람들의 시선이 스크린 속 보신각으로 향해있던 그때.
객석의 대찬과 무대 바로 앞 귀빈석의 윤이영은 서로를 바라보며 입술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새해를 기념하는 유치한 몸짓이었다.
이제 행사는 가장 중요한 마지막 순서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2017 KBN 연기대상. 이제 마지막 순서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다소 상기된 얼굴로 남자 사회자가 말하자 여자 사회자가 말을 받았다.
“대망의 연기대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그 영광의 주인공은 누가 될 것인지. 우선 후보부터 화면으로 만나보시죠.”
웅장한 음악이 흐르고 후보들이 등장했다.
대찬의 눈길이 가는 후보는 두 명이었다.
하나는 당연히 신호음의 주연을 맡은 윤이영.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천유기의 주연을 맡은 전채원.
사회자도 그 부분을 짚고 넘어갔다.
“올해는 이례적으로 젊은 여배우가 두 명이나 대상후보에 올랐습니다. 과연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대상까지 거머쥘 수 있을지 주목됩니다. 자, 2017 KBN 연기대상. 시상에는 길영훈 KBN 사장님께서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시상자로 나온 길영훈 사장은 시시껄렁하고 어색한 농담 몇 마디로 시간을 때웠다.
위상은 높지만 대중에게 자기를 보일 기회는 많지 않은 사장은 이참에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사람으로 자기 이름 석 자를 거국적으로 알리려고 작정을 한 듯싶었다.
대찬은 객석의자에 몸을 묻고 팔짱을 낀 채 속으로 꿍얼거렸다.
‘영감님, 빨리 대상은 윤이영이라고나 말하고 들어가세요.’
그런 대찬의 텔레파시를 받고도 한참 시간을 끈 사장도 최소한의 눈치는 있었다.
그는 자기를 노려보는 많은 시선을 의식하고 험험, 헛기침을 했다.
“2017 KBN 연기대상, 수상자는…….”
사장이 뒤끝을 흐리자 긴장감을 유발하는 의례적인 음악이 들렸다.
사장은 음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안경을 고쳐 쓰며 큐카드에 적힌 이름을 발표했다.
“신호음의 윤이영 님! 축하드립니다!”
“그렇지!”
대찬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주변 사람들의 눈총을 받고 민망하게 웃으며 다시 주저앉았다.
팡파레가 울리고, 윤이영이 눈시울을 붉히며 무대 위로 올라왔다.
동료 배우들은 박수를 치며 윤이영의 수상을 축하했다.
전채원은 똥 씹은 표정으로 건성건성 박수를 치다가, 카메라가 자기를 겨누는 걸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열렬히 박수를 쳤다.
윤이영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면서 트로피를 받았다.
그 와중에 길영훈 사장이 그녀를 위로해주는 척하며 은근슬쩍 어깨에 손을 올리고 비비적대려고 했다.
윤이영은 손등으로 눈물을 찍어내면서도 반대쪽 손으로 야무지게 그를 밀어냈다.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동료 배우들 여럿이 나와 윤이영에게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대찬은 굳이 저 대열에 합류하지 않았다.
‘오늘은 오롯이 윤이영 혼자서 축하 받아야 하는 날이야.’
괜히 대찬이 끼어 들었다가는 세간의 이목은 윤이영 대상에만 집중되지 않고, 조대찬이 어쩌고 하는 가십으로 분산된다.
‘그리고 지금 튀어나가면 진짜 관심종자처럼 보일 거거든.’
대찬은 무대를 향해 뛰어나가고 싶은 충동을 꾹 억눌렀다.
윤이영은 훌쩍이며 눈물을 닦고 마이크 앞에 섰다.
그녀는 감격에 겨운 눈빛으로 트로피를 빤히 바라봤다.
한참을 그렇게 하다가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넘기며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런 큰 상을 제가 받아도 될지 모르겠어요.”
‘되지, 그럼.’
대찬은 속으로 윤이영의 말에 대답했다.
“어… 모자란 저에게 과분한 영광을 허락해주신 국민 여러분, 그리고 제 주변의 사람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보통 수상소감을 할 때 여러 사람을 거론하기 마련이다.
그 여러 사람에는 소속사 사람들, 그리고 부모 등이 무조건 포함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윤이영은 소속사 사람들에게도, 부모에게도 감사할 수 없었다.
그러니 주변사람이라는 말로 뭉뚱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가 사랑하는 조대찬 씨에게도 감사를 표합니다.”
그러자 관객들은 환호성으로 화답했다.
“실은 이 신호음이라는 좋은 작품을 해라, 무조건 해라, 그렇게 강력하게 추천한 사람이 바로 조대찬 씨입니다.”
윤이영은 그렇게 말하면서 객석에 앉아있는 대찬에게 살짝 눈빛을 주었다.
대찬은 옅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조대찬 씨가 아니었으면 아마 이 훌륭한 작품을 제 필모그래피로 삼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저에게 인생 최고의 선택을 하게 해준 제 연인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그러자 남자 사회자가 윤이영의 말을 받았다.
“조대찬 씨가 오늘 이 자리에도 와있는 걸로 아는데요.”
“아, 예… 괜히 남들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괜히 저한테 부담 주기 싫은지 꽃다발을 사놓고도 안 나오네요.”
“에이, 남자가 소심하게 그러면 안 되죠. 조대찬 씨 어디 계세요.”
그러자 대찬의 옆에 앉은 사람들이 슬금슬금 그를 훔쳐봤다.
멀리 있는 사람들도 조대찬이 어디 앉아있나 두리번거리다가 그를 발견하고 그쪽을 바라봤다.
‘왜 저래, 진짜.’
대찬은 목을 움츠리며 자리에 파고들며 몸을 숨겼다.
사회자는 윤이영에게 물었다.
“윤이영 씨, 오늘 이영 씨가 주인공이니까 여쭤볼게요.”
“네.”
“조대찬 씨가 이 자리에 나와서 꽃다발을 드리면 어떨 거 같아요?”
윤이영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오늘같이 좋은 날, 연인한테 꽃다발 하나 받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그러자 사회자는 객석을 바라봤고, 객석의 사람들이 동시에 대답했다.
“네!”
윤이영은 흐뭇하게 웃으면서 대찬을 향해 말했다.
“조대찬 씨,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나와서 꽃다발 좀 줘요.”
그러자 대찬의 옆에 앉은 사람들이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얼른 나가봐요.”
“그래요. 사놓은 꽃다발이 아깝다.”
PD가 가장 싫어하는 건 돌발변수였다.
그는 대찬을 돌아보며 잔뜩 구겨진 얼굴로 바라봤다.
대찬이 머뭇거리자 그는 입모양으로 욕을 했다.
‘짜증나게 하지 말고 빨리 튀어 나가요!’
관객들도 환호성을 지르며 이구동성으로 대찬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조대찬! 나가라! 조대찬! 나가라!”
이쯤 되니 아무리 철면피라도 나가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되었다.
대찬은 벌떡 일어나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무대 위로 올라온 대찬에게 남자 사회자가 짓궂게 말했다.
“조대찬 씨는 오늘 저한테 감사해 하셔야 되겠어요.”
“…예?”
“저 아니었으면 오늘 밤새도록 바가지 긁힐 뻔했으니까, 그렇죠?”
“하하…….”
“자, 지금 윤이영 씨 소감도 다 끝나고 해서 벌써 화면 밑에 엔딩 크레딧 깔리고 있을 거예요. 빨리 꽃다발 드려야 화면에 잡힐 거거든요?”
“아, 예…….”
숫기 없는 대찬의 등을 남자 사회자는 툭 건드리며 얄밉게 말했다.
“또 무슨 사춘기 남학생처럼 수줍게 건네고 그러진 않겠죠? 무릎 한쪽은 꿇어주시겠죠?”
사춘기 남학생처럼 꽃다발을 삐죽 내밀고 끝내려던 참이었다.
그런 말을 듣고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대찬은 별수없이 한쪽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그래도 그렇게 한 보람이 있는지, 윤이영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대찬은 부끄럼에 얼굴이 붉어졌다.
윤이영도 대찬이 이런 일을 부끄러워한다는 걸 잘 알았기에, 뜸들이지 않고 바로 꽃다발을 낚아챘다.
객석에서는 대찬에게 한 가지를 더 요구했다.
“뽀뽀해! 뽀뽀해! 뽀뽀해!”
그러자 이미 모든 걸 내려놓은 대찬은 기꺼이 윤이영의 뺨에 입을 맞췄다.
윤이영은 웃으면서 살짝 볼을 갖다 대다가,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대찬의 두 뺨을 붙들었다.
“이영아.”
대찬의 당황스러운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찬의 입술을 향해 자기 입술을 돌진시켰다.
“으읍!”
대찬은 윤이영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미처 대비할 틈도 없었다.
사람들은 환호했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갔다.
화면은 이물질 하나 없이, 연기대상의 마지막을 대찬과 윤이영의 키스로 장식했다.
대찬은 윤이영에게 동료들과 충분히 기쁨을 나눌 시간을 허락했다.
그리고는 먼저 운전석에 들어가 앉았다.
쿵쿵 뛰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대찬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손등을 갖다 댔다.
“예쁘게 드레스 차려입고 멧돼지 같이 달려들기는.”
대찬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윤이영의 기습적이고 저돌적인 키스 덕분에 실시간 검색어에는 대찬과 윤이영의 이름이 나란히 올라가 있었다.
대찬은 몇 백만 명은 족히 봤을, 그리고 인터넷에 퍼진 동영상으로 그 이상의 사람이 볼 장면을 몇 번씩이나 돌려봤다.
각 잡고 들어오는 윤이영.
뒤로 주춤 물러나면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받아들이는 조대찬.
대찬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미리 힌트라도 주고 들이박지. 모양 빠지게 저게 뭐야.”
대찬이 툴툴거리는 사이.
윤이영은 동료들의 축하를 한 몸에 받았다.
“이영 씨, 오늘 해 뜰 때까지 한바탕 마셔야죠?”
“저도 그러고 싶은데 조대찬 씨가 감시하려고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거든요.”
“아아, 조대찬 씨도 같이 와서 마시면 좋을 텐데!”
“하하, 그 사람이 생각보다 낯을 많이 가려요.”
“그런 거짓말을 누가 믿어요?”
“어, 진짠데……. 다음에 제가 거하게 한 턱 쏠게요. 오늘은 먼저 자리 뜰게요.”
윤이영은 웃으면서 여전히 아쉬워하는 동료들을 뒤로하고 자리를 떴다.
그때 전채원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서로 불편해진 사이.
웬만하면 못 본 척 하고 비켜 지나갔겠지만, 정면이어도 너무 정면이었다.
시선이 딱 맞아서 어물쩍 넘어갈 수 없는 각도였다.
그래도 선배인 윤이영이 어정쩡하게 웃으면서 전채원에게 말했다.
“채원아, 올해 고생 많았어. 올해는 내가 운이 좋았지만 내년에는 이 상이 너한테 갈 거야.”
“어머, 언니! 축하드려요, 진짜.”
전채원은 손뼉을 치며 윤이영에게 인사를 건넸다.
윤이영은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나는 진짜, 내가 언니보다 상 먼저 받으면 어떡하나 걱정했거든요.”
“그래?”
“네에, 솔직히 언니 서른 넘어가면서 운세 한 번 꺾였잖아요.”
“응……?”
“그리고 이번에 우리 회사에서 퇴출되면서…….”
윤이영은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퇴출이라니, 말이 좀 그렇네.”
“그럼 탈퇴라고 할까요? 탈퇴가 맞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제 회사 빽도 못 쓰게 됐잖아요. 이번 아니면 또 언제 타겠어요. 언니가 받아서 진짜 다행이에요.”
“내년에도 올해처럼만 하면 채원이 너도 좋은 결과 있을 거야.”
“네, 꼭 그럴게요. 언니가 올해 상 받았으니까 이제 맘 놓고 대상 노려도 되겠어요.”
윤이영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누가 보면 올해 대상 나한테 일부러 양보한 줄 알겠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에 불편한 게 있었거든요. 뭐랄까, 친언니보다 먼저 시집가서 애 낳는 것처럼 왠지 모르게 껄끄러운 그런 거?”
윤이영은 생긋 웃었다.
“우리 채원이가 날 친언니처럼 생각해주는 줄은 몰랐네.”
“생각해준다기보다는 나중에 노처녀 히스테리처럼 저한테 간접적인 피해가 갈까봐 그런 거죠.”
“…노처녀 히스테리?”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언니가 노처녀 히스테리 부린다는 게 아니라.”
“응, 그래. 어쨌든 내가 받았으니 그런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상 못 탔다고 괜히 혼자서 소주 마시지 말고 동료들이랑 맥주 마셔.”
“뭐라고요? 제가 왜 혼자…….”
윤이영은 전채원을 더 상대해주지 않았다.
“그럼 난 먼저 가볼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조대찬 씨요?”
“그래.”
전채원은 묘하게 입술을 비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