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39화
자세한 곡절은 알 길이 없지만 대찬에게 전채원은 그저 윤이영의 배역을 뺏어간 사람에 불과했다.
“아무리 바빠도 차 한 잔 할 시간이 없어요?”
“죄송하지만 없네요.”
대찬은 그렇게 지나가려다가 할 말이 생각나서 전채원을 돌아봤다.
그래, 그럼 그렇지.
너도 남잔데 어떻게 날 그냥 지나치겠어.
전채원은 속으로 웃었다.
“전채원 씨.”
“왜요, 갑자기 커피 마시고 싶어지셨어요?”
“다음부턴 제 트위터에 댓글 남기지 마세요. 특히, 그렇게 남들의 오해를 살 만한 댓글은 더더욱. 저한테 안 좋고 전채원 씨한테는 훨씬 더 안 좋으니까요.”
“뭐, 뭐라고요?”
대찬은 전채원의 황당한 얼굴을 뒤로하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대찬이 찬바람만 쌩쌩 불며 그대로 스쳐 지나가자, 전채원은 꽁한 얼굴로 툴툴거렸다.
“뭐야, 진짜. 싸가지 없어.”
그날 밤.
왈라비 사장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막 잠들려던 참에 걸려온 전화였다.
한바탕 쏘아줄 작정으로 왈라비 사장은 침대에 누운 채로 손을 더듬거려 휴대폰을 찾았다.
그러나 그는 액정에 뜬 발신인을 보고 그럴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백 사장님, 이 시간에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백민하 해뜰녘 사장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백민하 사장의 목소리는 다소 격앙되어 있었다.
“졸린 목소리시네요.”
“아, 예. 막 잠들려던 참이라.”
“잠이 잘 오시나 봅니다.”
“…예?”
“누구는 신경안정제까지 먹어가며 힘겹게 잠들고, 잠이 들어도 하루에도 몇 번씩 깨버리는데 대표님은 잠이 잘 오시나 봐요.”
“백 사장님, 그게 갑자기 무슨…….”
“무슨 말인지 아실 텐데요.”
왈라비 사장은 몸을 일으키고 허 참, 헛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윤이영 때문에 이러십니까?”
“알고 계시네요.”
“참 나, 윤이영 복 받았네요. 조대찬이 거들어줘, 백 사장님이 거들어줘. 난 누가 거들어주나.”
“그렇게 장난조로 넘길 일이 아니에요. 당사자는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백 사장님, 저희도 아예 손 놓고 있는 건 아닙니다. 저 그렇게 매정한 놈 아니에요.”
“이영이가 만족할 정도의 조치를 취해주세요.”
“어떻게 백이면 백, 다 맘에 들겠습니까. 그렇게 치면 이영이도 저한테 아주 만족스러운 연예인은 아니에요.”
백민하 사장은 대찬과 달랐다.
그녀는 자질구레한 말다툼을 선호하지 않았다.
“윤이영 씨는 나한테도 중요한 사람이에요. 뜻대로 해줘요.”
“백 사장님.”
“안 그러면 전채원 씨를 해뜰녘 홍보모델로 삼았던 결정을 철회할 겁니다.”
“지금 사심으로 비즈니스를 좌지우지하시겠다는 겁니까? 그게 경영자로서 올바른 판단이십니까?”
“사심이 아니에요. 소속연예인 제대로 관리 못하는 회사를 어떻게 신뢰하고 비즈니스를 하죠? 냉철하게 내린 결론이에요.”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이영이는 사장님하고 사적으로 아는 사이인지는 몰라도 최소한 이 건과는 별개예요.”
“제 입장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왈라비 대표는 허 참,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백 사장님, 맘대로 하십시오.”
“맘대로 해라?”
“네,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광고 하나 날아가는 걸로 뜻을 꺾겠습니까?”
“자존심 세우지 말아야 할 곳에 자존심을 세우시네요.”
“그거야 제 자유입니다.”
“그러시군요. 그런데 광고 하나 날아가는 걸로 안 끝난다면요?”
“…예?”
“제가 가만히 있어서 그새 까먹으셨나 본데요. 제가 왈라비 엔터에 가진 지분이 상당하거든요?”
“…예?”
왈라비 대표는 지금까지 의식하지 않던 사실을 갑자기 의식했다.
백민하 사장은 왈라비 엔터의 대주주였다.
그냥 대주주도 아니었다.
백민하 사장은 왈라비 엔터의 지분 39.2%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는 원래 백민하 사장의 전남편인 방태열 전 해뜰녘 사장이 보유했던 지분이었다.
왈라비 엔터의 햇병아리였던 내연녀를 키워주려고 당시 무리를 해서 왈라비 엔터의 지분 49%를 사들였다.
상황이 종료되고 난 후, 백민하 사장은 투자금을 회수하겠다고 했으나 왈라비 대표는 난색을 표하면서 투자금의 20%만을 돌려주었다.
나머지 80%는 그대로 잠들어있는 상태였다.
“내 지분이 과반은 안 되지만, 지분의 3분의 2를 필요로 하는 특별결의를 저지할 정도는 돼요. 계속 고집을 피우시면 저도 대표님이 중요 결정을 내리는 고비마다 고집을 피울 겁니다.”
“…….”
“거기에 조 대표가 작정하고 싸움 시작하면 필래 쪽 입김 들어간 건은 번번이 불발될 거예요. 제가 조 대표를 가만 보아하니 비겁한 술수도 이제는 거리낌 없이 쓰더군요. 갑자기 세무조사 들이닥칠지도 몰라요?”
“…….”
“자존심 더 세우고 싶으시면 세우세요. 그거야말로 사심으로 비즈니스를 좌지우지하는 것이고 경영자로서 올바른 판단이 아니니까. 끊어요.”
할 말을 마친 백민하 사장은 전화를 끊었다.
왈라비 대표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왈라비 대표는 윤이영과의 계약해지에 합의했다.
윤이영은 아무 마찰 없이 왈라비 엔터의 품에서 풀려났다.
윤이영은 대찬에게 가볍게 입을 맞춘 뒤, 백민하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감사해요, 대표님.”
“살다보니 전남편 덕을 다 보네. 도움이 돼서 다행이야.”
“대표님 덕분에 모든 게 다 부드럽게 풀렸어요.”
“그러게 이 맹추야, 문제가 있으면 동네방네 실컷 떠들어대란 말이야. 얼마든지 간단히 풀 수 있는 문제였다고. 아주 커플이 쌍으로 답답해.”
“그래서 여태 사귀나 봐요.”
“아주 좋겠어, 천생연분이야.”
윤이영은 헤헤 웃었다.
그녀가 자유의 몸이 되자, 예상대로 온갖 연예기획사에서 연락이 폭주했다.
대찬과 윤이영은 사방팔방에서 들어온 제안을 한데 모아 정리해놓고 의논하기 시작했다.
대찬은 자기 일처럼 꼼꼼히 따져주었다.
각 회사마다 자금력은 어떤지.
수익 배분은 철저하게 이뤄지는지.
과거의 영광에 취해있거나 자신들의 유망함을 너무 과신하지는 않는지.
오너의 성품이 견딜 만한 수준인지.
기획력이 뒷받침되는지.
새 회사를 물색하는 데 정신이 없는 대찬을 윤이영은 턱을 괸 채로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바라봤다.
이것저것을 따지던 대찬은 윤이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영아, 솔 엔터 어때? 여기 보니까 자금구조도 견실하고, 요 몇 년간 구설수에 오른 연예인도 없고, 악플 대처에도 아주 단호하고, 또…….”
“오빠.”
“엉?”
“나 그냥 내가 회사 차리면 안 될까.”
대찬은 눈을 깜빡거렸다.
“네가?”
“왜, 요즘 1인 기획사도 많아. 배우로서 클 만큼 컸으니 이제 와서 남이 건사해줄 것도 없어. 귀찮기만 하지.”
“그야 그렇지만.”
“매니저 오빠한테도 전화했더니 내가 써주기만 하면 바로 사표 쓴다고 했어.”
대찬은 빤히 윤이영을 바라봤다.
윤이영은 생글생글 웃었다.
“왜, 안 돼?”
“안 될 거 뭐 있겠어.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좋아, 그럼 그렇게 결정. 오빠 이래저래 힘든 건 아는데, 행정적인 부분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대찬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도와줄 테니까.”
“고마워.”
윤이영은 빙긋 웃었다.
대찬은 불현듯 스치는 생각이 있어 윤이영에게 말했다.
“원래 이영이 너한테 들어가려던 대본을 전채원이 가로챘으면, 지금 당장 들어갈 작품은 없겠네?”
“응, 대본 여러 개 놓고 고민하고 있어. 왜?”
“들어온 대본들 구경 좀 해보자.”
“오랜만에 신내림 좀 받았어? 대박 드라마 하나 점지해 주려고?”
대찬은 씩 웃었다.
“한번 그렇게 해봐?”
윤이영을 일약 스타덤에 올린 ‘소풍 가는 날’을 추천한 이후, 대찬은 그녀에게 구태여 훈수를 두지 않았다.
윤이영이 고르는 작품들 중에는 대찬이 아는 것도 있고 모르는 것도 있었다.
저 영화는 관객 얼마, 저 드라마는 시청률 몇 퍼센트.
대강의 정보가 대찬의 머리에 남아있었다.
그러나 대찬은 속으로 기억을 떠올리기만 할 뿐, 윤이영에게 이거 해라, 하지 마라 일언반구도 보태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첫째로는 대찬의 첫 번째 삶과 두 번째 삶이 같은 걸 투입해도 다른 것이 산출되는 경우가 왕왕 있는 탓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윤이영이 훌륭한 배우인 까닭이었다.
대본이 아무리 좋아도 주연이 그걸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면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밖에 되지 않는다.
대찬이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배우를 잘못 만나 사장되는 억울한 명작 몇 작품이 구제되었다.
대찬의 첫 번째 삶에서 폭삭 망해버렸던 작품이, 윤이영을 만나 제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렇듯 대찬 자신이 굳이 개입할 이유가 없는 까닭에 수수방관했지만 이번만큼은 개입하고 싶었다.
왈라비 엔터와 결별하고 찍는 첫 작품이었다.
결과가 볼품없으면 왈라비가 얼마나 고소해 하고 낄낄거리겠는가.
그들의 야코를 확 죽이자면 확실한 작품을 고를 필요가 있었다.
윤이영은 자기한테 들어온 대본들을 건네주었다.
대찬은 내용은 보지 않고 제목만 휙휙 살피며 넘겼다.
어차피 문외한인 대찬이 내용을 봐봤자 아무 소용없었다.
‘흉작이구만, 흉작이야.’
대찬은 떨떠름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마땅히 눈에 걸리는 이름이 없었다.
대찬이 들어봤음직한 작품들도 대개 큰 반향은 일으키지 못하고 소소한 ‘중박’ 정도로 취급되는 작품들이었다.
그렇게 찬찬히 대본들을 살피던 대찬의 시선을 확 사로잡는 작품이 하나 있었다.
대찬은 무언가에 홀린 듯 윤이영에게 대본 하나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그러자 윤이영은 질색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표정 뭐야? 진짜 무당 같아.”
“이거다. 이거야, 이영아.”
“…뭔데 이게.”
대찬은 두 손으로 대본을 꽉 잡고 윤이영이 잘 볼 수 있는 각도로 틀었다.
윤이영은 대본 표지에 적힌 제목을 발음했다.
“신호음.”
“이거 해.”
“대본이 좋아서 나도 심사숙고하던 작품이긴 한데…….”
“무조건 해.”
대찬은 이 ‘신호음’이라는 드라마를 잘 알았다.
첫 번째 삶에서 대찬은 이 드라마의 애청자였다.
‘잠깐, 근데 이거 원래대로면 작년에 방송 탔어야 했는데.’
대찬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첫 번째 삶과 두 번째 삶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원래대로’라는 건 없음을 다시 깨닫고 납득했다.
이 드라마가 첫 번째 삶의 2016년에 방영되었을 때, 주연은 윤이영이 아니었다.
때가 안 맞아서 다른 배우가 출연했다.
대찬은 기억 속의 주연을 윤이영으로 바꿔 생각해보았다.
‘윤이영도 뒤지지 않아. 아니, 사심 조금 보태서 훨씬 나아.’
만일 그 배역이 윤이영과 아예 동떨어졌다면 대찬도 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따져보니 윤이영도 그 배역에 안성맞춤이었다.
윤이영은 미심쩍은 표정을 했다.
“이거 정말 괜찮겠어? 작품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오빠가 무슨 더 볼 것도 없다는 것처럼 덮어놓고 추천하니까.”
“그렇게 하는 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지?”
“그래도…….”
“자, 결정. 나머지는 내가 다 불태워버릴 거야.”
대찬은 신호음의 대본만 윤이영에게 던져주고 나머지는 한아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이영은 만류하려다가 대찬이 워낙 자신에 차서 권하니, 그의 말을 따라주기로 결정했다.
2017년 12월, KBN 방송국 앞.
레드카펫이 방송국 입구까지 쫙 깔렸다.
레드카펫의 좌우로는 기자들과 열성적인 팬들이 운집해있었다.
레드카펫의 끝자락에는 커다란 밴들이 연예인들을 실어 날랐다.
저마다 한껏 치장한 연예인들은 밴에서 내려 고상한 걸음으로 좌우에 인사를 건네며 레드카펫을 걸었다.
대찬이 운전하는 차량도 무수한 밴들의 행렬에 들어있었다.
물론 밴은 아니고 SUV라는 차이는 있었다.
연말 연기대상 시상식이 열리는 날.
대찬은 윤이영의 매니저에게 하루 휴가를 허락했다.
대찬은 자신이 직접 윤이영을 방송국까지 에스코트했다.
푸른색 드레스를 입은 윤이영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뭐 어려운 일이라고. 나도 오늘 시상자로 초대받았는데, 너랑 따로 오면 되도 않는 불화설 돈다니까.”
“하기야 그것도 그러네. 그럼 오빠 팔짱 끼고 레드카펫 밟아보는 거야?”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연예인도 아닌 게 나댄다고 욕먹을 걸. 나는 주차장에 차 대고 뒷문으로 따로 들어갈게.”
“암튼 남의 시선은 나보다 더 신경 쓴다니까.”
“당연하지. 난 남들 관심받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더 잘 상처 받는다고.”
윤이영은 싱겁게 웃고는 차에서 내릴 채비를 했다.
대찬은 그녀의 어깨를 살짝 당겨 진하게 키스한 다음에야 그녀를 놔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