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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38화 (438/556)

난 할 수 있어 438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갑자기라뇨.”

“소풍 가는 날로 이영이가 빵 뜬 게 벌써 몇 년 전인데요. 악플, 그런 거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에요.”

“어제오늘의 일 아니죠. 그 긴 시간 동안 이영이가 많이 힘들었습니다. 지금도 힘들어하고요.”

“아, 물론 힘이야 들겠지요. 악플에 아무렇지 않은 연예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남의 일처럼 여기는 태도에 대찬의 속이 슬슬 끓는점에 도달했다.

“이렇게 몇 년간 이영이가 마음고생 하는 동안에, 왈라비 엔터는 뭘 하고 있었던 겁니까.”

“갑자기 그렇게 날을 세우시면…….”

“소속사는 배우가 연기에만 전념하도록 적절한 환경을 조성해줄 의무가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매니저며 차량이며 자질구레한 법적인 문제까지, 그래서 우리가 다 책임지고 있잖습니까.”

대찬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건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근의 공식 외운다고 모범생이라고 하지 않죠.”

왈라비 사장도 슬슬 심사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불쑥 찾아와서는 대뜸 하소연을 하고 있으니 뭐 하자는 짓인가, 시비 걸러 온 건가 싶은 것이었다.

자연 그의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갔다.

“조 대표님, 툭 까놓고 말해서 조 대표님은 제3자입니다. 불만이 있거든 이영이 보고 직접 와서 말하라고 하세요.”

“제3자가 아닙니다. 저도 당사자예요.”

“부부는 일심동체, 뭐 그런 이상한 말씀 하시려는 건 아니죠? 애초에 두 분은 부부도 아니니까.”

“유감스럽게도 비슷한 말이네요.”

“네?”

왈라비 사장의 눈썹이 위로 크게 치떠졌다.

“SNS며 포털사이트며 이영이한테 달리는 악플 중에 절반은 저랑 관련이 있더라고요. 내용은 굳이 안 읊어도 익히 아시겠죠.”

“…뭐 그렇긴 하지만.”

“저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왈라비 측에서 조치를 취해주셨으면 하는데요.”

왈라비 사장은 머리를 긁적이며 쓰읍, 입맛을 다셨다.

“저희도 방법을 강구해보긴 하겠습니다만.”

“방법을 강구할 게 뭐 있습니까. 싹 다 고소해버리면 박멸할 수 있습니다.”

“연예인은 이미지로 먹고사는 직업이에요. 그럼 이영이 이미지가 아주 걸레짝이 될 겁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부당한 공격을 제어한다고 깎일 이미지라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습니다.”

“조 대표님 의중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이영이 의중이 중요하지.”

“아까 말씀 잘하셨습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면서요. 저희 정도면 사실혼이니까 거의 일심동쳅니다. 이미 사전 교감을 나눴습니다.”

“이영이 이미지만 깎이면 주문대로 하겠어요. 근데 그것뿐만이 아니거든요.”

시원하게 원하는 대답을 내놓지는 않고 이리저리 말을 빙빙 돌리는 왈라비 사장의 꼬락서니가 맘에 들지 않았다.

대찬은 팔짱을 낀 채로 소파에 등을 밀착시켜 기댔다.

“그것뿐만이 아니라뇨.”

“농약 치면 해충도 죽고 익충도 죽는 거예요. 괜히 엄정한 대처 운운했다가 관심이 뚝 떨어진다니까요. 이영이뿐만 아니라, 우리 회사가 내놓고 그런 방침을 밝히면 우리 회사 소속 연예인 전체가 그렇게 돼요. 악플보다 무플이 무서운 거 아시죠?”

“그럼 대표님은 소속 연예인들을 악플에 무책임하게 계속 방치하겠단 뜻입니까?”

왈라비 대표는 쯧, 혀를 찼다.

“아직 덜 큰 우리 회사 애기들 붙잡고 물어보세요. 악플 받을래, 무플 받을래, 물어보면 차라리 악플을 받더라도 관심 받고 싶다고 할 겁니다. 백이면 백.”

“그분들이 충분한 능력이 있다면 회사의 강력한 조치는 그분들의 앞길에 득이 되면 득이 됐지 독이 되진 않을 겁니다.”

“그건 조 대표님 생각이고요. 제가 인조고기 갖고 어쩌고저쩌고 읊조리면 조 대표님이 귀담아나 듣겠어요? 이 일은 제가 더 잘 압니다.”

“…….”

대찬이 일단 입을 다물자, 기선을 제압했다고 여긴 왈라비 대표가 말을 이었다.

“그렇잖아도 이번에 채원이 드라마 들어가는 거 아시죠? 천문학적인 제작비가 투입되는 블록버스터급 드라마거든요?”

“근데요.”

대찬의 받아치는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우리 회사한테는 큰 건입니다. 그런데 그런 큰 건을 앞두고 예전부터 쭉 있었던 악플 때려잡겠다고 우리가 푸닥거리 해봐요. 부정 타는 거예요.”

“부정이라.”

“이영이가 지금 창창한 후배 앞길에 훼방을 놓으려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대표님 말씀은 핑계로밖에 안 들립니다. 악플러를 고소하는 게 후배 앞길을 망치고 회사에 큰 손해를 끼친다는 건 침소봉대에 불과합니다.”

“뭐, 좋을 대로 생각하십시오. 저도 좋을 대로 생각할 테니까.”

“끝끝내 이영이를 위해 조치를 취하지 않으시겠다는 걸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왈라비 대표는 피식 웃었다.

“이영이를 위하는 방법이 서로 다른 걸로 합시다. 조 대표님은 말을 이상하게 꼬아서 들으시네요.”

대찬은 말없이 가만히 왈라비 대표의 얼굴을 바라봤다.

왈라비 대표는 더 이상 대찬에게 주눅 들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회사에 믿을 구석이라고는 윤이영 하나밖에 없던 시절은 끝났다.

이제는 전채원이라는 든든한 믿을 구석이 있다.

대찬의 고압적인 눈빛에도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도리어 넉살 좋게 받아치는 여유도 보였다.

“하실 말씀 다 하셨으면 그만 일어나시죠. 피차 바쁜 입장에.”

대찬은 옷깃을 여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주도해서 상황을 매조졌다고 여긴 왈라비 대표는 웃음을 머금곤 읏차, 부러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던 대찬은 고개를 돌려 왈라비 대표를 바라봤다.

왈라비 대표는 뭘 보냐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대찬은 말없이 다시 그를 등지고 사무실을 떠났다.

대찬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자, 윤이영이 조심스레 물었다.

“어떻게 됐어?”

대찬은 넥타이를 살짝 풀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별 말 같지도 않은 구실을 갖다 대던데.”

“그럴 줄 알았어. 괜히 오빠 기분만 상하고 말았네.”

윤이영은 별로 실망한 기색도 없이 웃음을 머금었다.

대찬은 그녀를 흘끗 돌아봤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아무리 전채원이 있다지만 이영이 너를 푸대접할 이유가 없잖아.”

“요즘 좀 트러블이 심했거든.”

“트러블?”

윤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국밥 배우라는 말 들어봤어?”

“하는 영화, 드라마마다 말아먹는 배우?”

“응, 근데 그게 배우들 안목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거든. 보는 눈은 다 똑같아. 근데 소위 자기 급에 맞춰서 대본도 들어오니까 문제지.”

“하긴. 나 같은 사람이 봐도 영 아니다 싶은 것들이 한두 작품이 아닌데 배우들도 다 알긴 알겠지.”

“이번에 드라마 하나가 들어왔거든. 그런데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채원이가 관심을 보이더라고.”

대찬은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아무리 전채원이라도 그렇지, 어딜 윤이영한테 비벼?”

“그런데 비볐네. 그것도 모자라서 전채원이 최종 낙점됐네?”

“뭐? 그럼 아까 사장이 전채원이 들어간다던 블록버스터급 드라마가 그거야?”

윤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천유기라고, 서유기에서 컨셉 따와서 만든 드라마래. 제작비도 천문학적으로 들어가고 작가도 검증돼서 방송국에서도 기대가 큰 작품이래.”

“천유기? 그거 사건 사고로 시작해서 표절에 말 많던 드라만데.”

“뭐? 오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직 방영도 안 했는데.”

“어?”

대찬은 아차 싶었다.

그는 어설프게 웃으며 대충 둘러댔다.

“꿈에서 봤어, 꿈에서.”

“뭐야, 심각한 얘기 하던 중에 무슨 그런 농담을 해.”

“미안, 미안.”

대찬이 멋쩍게 웃으며 사과하자, 윤이영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나도 마냥 호인은 아니라 이걸로 클레임을 좀 세게 걸었거든.”

“사장은 당연히 전채원을 고집했을 거고.”

“응, 나는 알 낳을 거 다 낳은 폐계고 전채원은 앞으로 황금알 순풍순풍 낳아줄 영계니까.”

“말도 안 돼. 전채원이 닭이면 윤이영은 봉황인데.”

윤이영은 피식 웃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사장 입장에서는 나보단 전채원을 키워주고 싶겠지.”

“그래도 순서가 있지. 너한테 들어온 대본이 왜 전채원한테 넘어간 건데?”

윤이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사장이 힘을 좀 쓴 모양이지. 제작진 입장에서는 전채원도 나쁜 카드는 아니니까.”

“그런 일이 있었으면 진작 나한테 말해주지.”

윤이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안 그래도 이런 일 저런 일 때문에 얼굴에 주름 펴질 날 없었잖아. 그런데 나까지 투정 부리면서 걱정거리 얹으라고? 싫어.”

“그래도.”

“오빠한테 말하면 뭐 달라지나. 오늘도 봐. 사장 목에 깁스하고 아주 저 잘났다고 뻗대는 거.”

대찬은 더운 콧김을 내뿜었다.

“왈라비랑 관계 끊자.”

“뭐?”

“이런 회사랑 더 일할 이유 없잖아. 네가 FA로 풀리면 모셔갈 회사 차고 넘쳐.”

“그래도…….”

“뭐가 문제야?”

“전속계약 해지하려면 법정 다툼으로 가야 돼. 그건 싫어.”

법정으로 가면 무조건 욕부터 먹게 된다.

옳고 그름을 떠나, 사람들의 단편적인 의심과 그릇된 확신에 그대로 노출된다.

그럼 악성댓글에 시달리는 빈도도 주체할 수 없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대찬은 윤이영을 흘끗 보며 말했다.

“저쪽에서 계약해지에 동의해주면 되는 거잖아?”

“그렇게 순순히 해줄 리가 없는 게 문제지.”

“만약 저쪽에서 널 놔주겠다고 하면, 그렇게 할 용의가 있어?”

윤이영은 피식 웃었다.

“그렇게만 해주면 사장 업고 동네 한 바퀴 돌 수도 있어.”

대찬은 웃으면서 윤이영의 등을 쓸었다.

대찬은 왈라비 사장과 다시 만났다.

이미 논의가 끝났는데 자꾸 자기를 불러대는 대찬이 왈라비 사장은 귀찮을 뿐이었다.

“이영이는 오늘부로 왈라비 엔터와의 전속계약을 해지할 겁니다.”

“…뭐라고요?”

예상 밖의 말에 왈라비 대표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대찬은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잘못 들으신 거 아닙니다.”

“이영이도 같은 생각입니까?”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왈라비 사장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조 대표님 두고 하는 말인가 봅니다.”

“…….”

“이게 어린 애들 소꿉장난인 줄 아십니까? 그만 놀자 하면 그만하는 그런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대표님이 계약해지에 순순히 응해주시면 간단하겠죠.”

왈라비 대표는 피식 웃었다.

“제가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그래주셨으면 하는데.”

“죄송하지만 그럴 수 없어요. 조 대표님이, 그리고 이영이가 정 왈라비 엔터와의 계약을 해지하고 싶으면 소송을 걸어야 합니다.”

“그건 왈라비 측에도, 우리에게도 좋은 일이 아닙니다.”

“저희한텐 나쁠 것도 없어요. 법정 공방은 이미지에 직격탄이죠. 저희야 뭐 회사 이미지, 크게 신경 안 씁니다. 근데 조 대표님하고 이영이는 다르죠.”

“…….”

“조 대표님이야 말할 것도 없고, 이영이도 악플 때문에 저희랑 관계를 끊고 싶다면서 법정 공방으로 이미지가 더 상하면 악플을 곱빼기로 먹는 격이거든요. 이것처럼 웃긴 일도 찾기 힘들겠습니다.”

“…….”

대찬이 시종 침묵하자 왈라비 대표는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그리고 어차피 우리가 승소할 거거든요. 계약서는 폼으로 있습니까. 악플에 미적거린다는 게 계약서를 무효로 할 만큼 대단한 잘못이 아니란 거, 조 대표님도 아실 겁니다.”

“법정 공방으로 치달을 생각 없습니다.”

“그럼 뭐로 목표를 달성하시렵니까?”

“…….”

“뭐, 조 대표님이 지금까지 신출귀몰한 방법으로 남들 엿 먹여온 거, 저도 잘 알아요. 근데 이 건은 법정 공방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거든요? 어쩌실래요?”

왈라비 사장의 비협조적인 태도를 대찬은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맘껏 날뛰는 그의 언변에 동요하지 않았다.

대찬은 얌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표님 생각은 잘 알았습니다.”

“아이고, 빨리도 아셨습니다. 그걸 알아내시려고 두 번씩이나 귀찮은 걸음을 하셨어요.”

“원만한 해결을 위해서 손을 내밀었던 겁니다. 대표님이 그 손길을 뿌리치시니 유감이네요.”

“예, 저도 이런 황당한 일을 벌이시는 조 대표님이 치가 떨리게 유감입니다.”

더 이상 타협의 여지가 없음을 확인한 대찬은 자리를 떴다.

왈라비 사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찼다.

왈라비 엔터 사무실을 뜨려는 순간에 대찬은 전채원과 맞닥뜨렸다.

그를 발견한 전채원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이런 데서 대표님을 다 뵙네요?”

“아, 예.”

대찬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그대로 전채원을 지나쳐 가려고 했다.

그러자 전채원이 대찬의 손목을 살짝 잡았다.

“그냥 가시게요?”

“나가던 길이었습니다.”

대찬은 탁 가볍게 전채원의 손을 뿌리쳤다.

“안 바쁘시면 커피라도 한 잔 하고 가시죠, 왜. 이렇게 마주친 것도 인연이면 인연 아니겠어요?”

“죄송하지만 바빠서.”

대찬은 전채원에게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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