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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36화 (436/556)

난 할 수 있어 436화

“나가봐요.”

“네, 그리고 1시부터 해뜰녘 백 사장님이랑 점심약속 있는 거 아시죠?”

“아, 맞다, 맞다. 알았어요. 거긴 나 혼자 갈 테니까 진위생 씨는 회사에서 일 봐요.”

“알겠습니다.”

진위생을 내보내고, 대찬은 단체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조대찬입니다. 저는 오늘부로 올축사 공동상임위원장에서 물러납니다.

저희 회사의 진위생 차장이 저를 대신해 올축사 정기회의에 참석할 것입니다.

다음 회의에서 저희 몫의 위원장 자리에 진위생 차장이 호선되도록 양해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짧지 않은 시간,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대찬이 문자메시지를 보내자마자 한우 위원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위원장님.”

“조 대표, 지금 우리 협박하는 건가?”

“협박이라뇨. 당치 않습니다.”

“그럼 도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정기회의 한 달에 몇 번이나 있다고 그 정도로 바쁜 건 아닐 테고.”

“그 정도로 바쁩니다.”

한우 위원장의 목소리에는 진한 불쾌감이 묻어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선수촌 식자재 납품 시도를 용케 저지했다고 여겼는데 이 여우 같은 녀석이 그것보다 용케 우회로를 발견해 허를 찔렀다.

그러더니 이제는 회의에 자기 대신 일개 차장을 보내겠다고 한다.

한우 위원장 입장에서는 약이 바짝 오를 일이었다.

그에게는 더 이상 대찬을 저지할 현실적인 카드가 없었다.

그렇기에 더 목소리를 으르렁거렸다.

“조 대표,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게 있어.”

“제가 무슨 선을 넘었다는 겁니까.”

“각 단체 대표들이 나오는 자리에, 일개 차장을 보낸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보나? 나는 아주 심한 모욕감을 느끼고 있어, 지금.”

“그렇습니까. 전혀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요.”

“자네 의도가 어쨌건 이건 잘못된 행동이야.”

대찬은 앉아있던 의자를 빙그르르 돌렸다.

통유리로 된 외벽 덕분에 오후의 바쁜 강남이 한눈에 들어왔다.

“차장급을 보내는데도 심한 모욕감을 느끼신다니 놀랐습니다. 우리가 처음 원탁에 둘러앉을 때, 위원장님께서는 과장급을 내보내셨죠.”

“그건……!”

“그럼 그때는 저한테 엄청난 모욕을 주려고 각오하신 거였군요. 잘 알았습니다.”

“그렇게 비꼬지 말고!”

“비꼬는 게 아니라 사실입니다.”

“…….”

“그럼 오늘 일은 더 양해를 구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과장으로 받은 모욕을 차장으로 갚았으니 제가 조금 손해 보고 마는 거죠. 전화 끊습니다.”

대찬은 전화를 끊고, 바로 해뜰녘의 백민하 사장과의 약속을 위해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대찬은 백민하 사장과 한 중식당에서 만났다.

백민하 사장은 웃으면서 악수를 건넸다.

“내 생각엔 1년 후면 로튼 프룻츠가 우리 해뜰녘보다 더 큰 회사가 될 것 같아요.”

“인사말치고는 너무 과하십니다.”

“과하긴. 이번에 올림픽 공식 서포터 자격 따낸 건 좋은 수였어요. 올림픽의 공신력과 인지도를 그대로 비도축육으로 옮겨오는 거니까.”

“이영이가 백 사장님만큼만 단 소리를 해주면 인생이 조금 더 행복할 텐데요.”

“단 소리도 가끔 들어야 달지. 아첨꾼은 애인으로선 꽝이에요. 내 전 남편이 완전 그런 스타일이었거든. 날 봐요. 결과가 참혹하잖아.”

대찬이 받아치기 힘든 말을 백민하 사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대찬은 그저 겸연쩍은 웃음만 지으며 자리에 앉으려고 했다.

그때 백민하 사장이 조심스레 말했다.

“사실, 오늘 나 혼자 온 게 아니거든요?”

“아, 일행이 있으세요?”

백민하 사장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 대표하고도 아주 관계가 없는 사람은 아닌데. 합석해도 괜찮겠어요?”

“아, 그래요? 저랑 관계가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백 사장님하고 관계가 있는 것만으로도 합석하셔야죠.”

“시원시원해서 좋네요. 채원 씨, 안으로 들어와요.”

백민하 사장의 부름에, 늘씬한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대찬은 눈을 크게 떴다.

“전채원 씨네요?”

“놀랐죠?”

백민하 사장은 흐흐 웃었다.

전채원은 머리를 살짝 넘기며 대찬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조 대표님.”

“아, 예. 안녕하세요.”

전채원은 대찬이 잠깐 혼이 빼앗길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도 그럴 것이, 전채원은 가장 주목받는 20대 여배우였다.

언론에서는 여신이라든지 미친 외모라든지 하는, 적나라하고 유치한 표현까지 써가며 그녀의 미모를 찬양했다.

대찬 역시 그런 표현이 유치할지언정 부적절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앉아도 되죠?”

“그럼요, 앉으세요.”

대찬은 전채원에게 자리를 권했다.

백민하 사장이 대찬이 그녀와 관계가 없지 않다고 표현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전채원은 흔히 왈라비 엔터테인먼트의 두 번째 로또 당첨이라고 표현되었다.

물론 첫 번째 로또는 윤이영이었다.

영세한 연예기획사인 왈라비 엔터가 윤이영에 이어 전채원을 갖게 된 건 그야말로 로또 1등만큼의 큰 행운이었다.

전채원이 윤이영과 같은 소속사에 있었으니 대찬도 알음알음 그녀에 관한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대찬은 웃으며 백민하 사장에게 물었다.

“그런데 사장님은 어떻게 전채원 씨랑 알고 계세요?”

“아, 이번에 우리 홍보모델로 손잡게 돼서요.”

“그러시군요.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나는 조 대표처럼 보는 눈이 없어서. 윤이영 씨처럼 흙 속의 진주를 찾아낼 재간이 없어요. 그래서 비싸지만 검증된 전채원 씨랑 손을 잡았어요.”

그러자 전채원이 생글생글 웃으며 백민하 사장에게 물었다.

“조 대표님이 보는 눈이 있으시단 게 무슨 뜻이에요?”

“아, 윤이영 씨 무명일 때 필래마트 홍보모델을 했었거든요.”

“네, 저도 그건 알고 있어요.”

“그때 윤이영 씨를 모델로 밀어붙인 게 당시 필래마트 직원이었던 조 대표거든.”

“아아.”

“그때 상황을 듣자하니 무리할 정도로 밀어붙였다더라고요. 그러니 보는 눈이 있다고밖에 할 수 없죠.”

전채원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렇네요. 조 대표님, 저는 어때요? 잘될 거 같아요?”

대찬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전채원 씨야 이미 잘됐는데요, 뭘.”

“더 잘될 수 있겠어요? 아이, 솔직하게 말씀해보세요.”

자연스러운 애교에 입꼬리가 꿈틀할 뻔했다.

대찬은 간신히 표정 관리를 했다.

전채원의 몸에 밴 애교에 시시덕거렸다가는 윤이영을 볼 낯이 없었다.

“잘되실 거예요. 사실 저보다 이영이가 보는 눈이 더 정확한데, 이영이도 채원 씨 칭찬을 많이 했거든요.”

“그래요? 이상하다, 이영 선배 내 앞에서는 그런 말씀 한 번도 안 하셨거든요.”

“이영이가 원래 겉으론 좀 무뚝뚝해도 속이 따뜻한 스타일이잖아요.”

전채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 해도 너무 쌀쌀맞았거든요. 전 이영 선배가 저 싫어하는 줄 알았잖아요.”

“이영이는 누굴 이유 없이 싫어하고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뭐야, 그럼 이유가 있어서 싫어한다는 말씀이세요, 지금?”

대찬은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아니, 전채원 씨를 싫어하는 게 아니란 뜻이죠.”

“아하.”

대찬은 백민하 사장, 전채원과 더불어 한참 식사를 했다.

대찬이 백민하 사장과 점심약속을 잡은 건 다분히 비즈니스적인 이유에서였다.

같이 점심 먹을 사람이 없어서 밥 친구를 구하려던 게 아니었다.

비도축육을 제품으로 내놓는 것에 관하여 긴히 나눌 말이 있었다.

그런데 순진한 건지, 아니면 철이 없는 건지 전채원은 시도 때도 없이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밥 먹다 체하겠어요. 너무 딱딱한 말씀만 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러자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희 같은 사람들은 밥시간도 업무의 연장이거든요. 이럴 때 아니면 따로 만나 뵙고 얘기 나눌 여유가 없으니까. 채원 씨가 이해 좀 해주세요.”

“에이, 그래도 어떻게 내내 일 얘기만 해요.”

그러자 백민하 사장이 전채원에게 눈총을 쏘았다.

“그러게 내가 굳이 자리에 안 나와도 된다고 했잖아요. 이런 얘기가 싫으면 먼저 일어나도 좋아요.”

“말씀을 또 그렇게 섭섭하게 하시네요.”

전채원이 시무룩한 얼굴을 하자 대찬은 냉수로 입을 헹구고 백민하 사장에게 말했다.

“나머지 얘기는 식사 다 하시고 티타임 때 하시죠. 지금은 전채원 씨 뜻대로 해주시죠.”

백민하 사장은 영 마뜩잖다는 얼굴로 대찬의 뜻을 따라주었다.

식사를 다 마치고, 전채원을 보낸 뒤 백민하 사장은 차를 마시며 눈살을 찌푸렸다.

“미안해요. 괜히 전채원 씨 데리고 나와서.”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전채원 씨는 이영이 직장 후배잖아요. 백 사장님이 사과하실 일은 아니에요.”

“철이 없어도 너무 없어.”

“다 그렇죠, 뭐. 나이로만 보면 아직 대학생이잖아요.”

“에휴, 예뻐서 쓰기는 했지만 영 내키진 않아.”

“홍보모델이 예쁘면 됐지 그 이상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대찬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후루룩 차를 마셨다.

대찬은 백민하 사장과 구두로 거듭 협력하기로 약속하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로튼 프룻츠와 해뜰녘의 수장이 입을 맞췄으니, 이제 실무단계에서 착착 계획을 수립해나갈 것이었다.

그날, 대찬은 퇴근길에 윤이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 해?”

“대본 읽고 있었어. 퇴근이야?”

“응, 오랜만에 치맥 할까?”

윤이영은 웃으면서 말했다.

“나 또 화장 빡세게 하고 성수동 가야 되는 거야?”

“그럴 거 없어. 오늘은 내가 갈게. 왼손에는 치킨, 오른손에는 생맥 3천 들고.”

“그거 오랜만에 반가운 소리다.”

“한동안 네가 왔다 갔다 고생 많았으니까. 이번엔 내가 알아서 모셔야지.”

“똥집 추가에 샐러드 많이.”

대찬은 피식 웃었다.

“다 아는 걸 뭘 굳이 말해.”

대찬은 윤이영의 주문대로 양념 반, 후라이드 반, 똥집 추가에 샐러드 많이, 생맥주 3천CC를 들고 윤이영의 집으로 갔다.

대찬은 그녀를 보자마자 이마에 입을 맞추고 피식 웃었다.

“집에 있으면서 화장은 뭐 하러 했어?”

“이게 무슨 화장이야? 그냥 로션만 발랐어, 로션만.”

“그렇다고 치자고.”

대찬이 선선히 대답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윤이영은 쪼르르 꽁무니를 따르며 바락바락 따졌다.

“화장한 거 아니라니까?”

“아유, 알았다고요.”

대찬과 윤이영은 작은 탁자에 둘러앉아 닭다리를 뜯고 맥주를 마셨다.

그러던 중에 자연히 하루 일과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해뜰녘이 전채원을 모델로 썼더라고.”

“그렇다더라. 모델료 짭짤하게 받았다고 사장이 좋아하던데. 근데 오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오늘 백민하 사장님 만났는데 전채원을 데리고 나오셨더라고.”

그러자 윤이영은 쯧, 가볍게 혀를 찼다.

“예쁘지? 그 계집애.”

“그런 얕은 유도신문에 넘어갈 거 같아? 예쁘기야 예쁘지. 근데 하루가 멀다 하고 윤이영 보고 살아서 그런가, 별 감흥은 없어.”

“능구렁이 같긴.”

“사실인걸.”

대찬은 흐흐 웃으면서 윤이영과 건배했다.

윤이영은 대찬을 흘끔 보며 물었다.

“별 건 없었어?”

“별 거 있을 게 뭐 있어.”

“아니, 나한테 오빠 얘기를 몇 번씩 하더라고.”

“내 얘기를?”

윤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더러 복 받은 여자라는 거야. 조 대표님 얼굴 잘 생겼지, 능력 좋지, 돈 많지, 성격도 좋아 보이지, 어디 하나 빠진 게 없다고 칭찬을 어찌나 하던지.”

“오, 전채원이 사람 보는 눈은 있구만.”

그러자 윤이영은 대찬에게 눈총을 쐈다.

“그래, 나도 부정은 안 하겠는데 이미 남이 침 발라놓은 남자 갖고 몇 번씩이나 말하는 게 신경 쓰이더라니까.”

“신경 쓰일 것도 많다.”

“아니야. 여자의 촉이 있지. 핸드폰 잠깐 줘봐.”

대찬은 헛웃음을 지었다.

“왜, 몰래 전채원하고 연락이라도 했을까봐?”

“그게 아니야. 오빠 트위터.”

“트위터?”

“분명히 오빠 팔로우 했을 거야. 대담하게 DM 보내놨을지도 모르지.”

윤이영은 대찬의 트위터에 들어가 자신의 예상을 확인하려고 했다.

역시나.

대찬의 많은 팔로워 중에 전채원의 이름이 끼어있었다.

그리고 대담하게도 대찬의 하나 있는 트윗에 댓글을 달아놓았다.

-전채원 @imchae1·오늘 식사 즐거웠어요~ 다음에도 함께 식사해요!! ♡♡♡

이봐라, 이봐라.

윤이영은 역시 자기 예상이 맞았다며 대찬에게 큰소리를 칠 참이었다.

그러려던 윤이영은 멈칫하더니, 화면을 끈 상태로 휴대폰을 대찬에게 돌려주었다.

“뭐야, 왜 말을 하려다가 말아?”

“뭘? 아니야. 맥주나 계속 마시자.”

윤이영은 뒷맛이 씁쓸한 표정으로 맥주를 꿀꺽꿀꺽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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