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34화
“그런데 조금 아쉽네요.”
“아쉽다뇨.”
“모처럼 우리 회사를 국내외에 제대로 홍보했잖습니까.”
“네, 그런데요?”
“물론 장기적으로도 좋지만, 단기적으로는 이것만큼 좋은 호재가 없는데.”
대찬은 은오영 소장의 말을 알아들었다.
“이걸 당장 어떻게든 써먹고 싶은데, 못 써먹고 날려버리는 게 아깝다 이 말씀이시죠?”
“예, 직원들 사이에서 이참에 IPO(기업공개) 해버리자는 말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거겠죠. 그만큼 기가 막힌 기회니까.”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장님 말씀이 맞아요.”
“어떻게 좀, 안 되겠습니까?”
“기업공개요? 안 돼요. 아직 샴페인 딸 때는 아녜요.”
“아니, 꼭 그게 아니더라도 이 기회를 살릴 방법 말입니다.”
“없다고 하면 실망하실 거죠?”
은오영 소장은 멋쩍게 웃었다.
“실망까지야 하겠습니까마는.”
“생각해둔 게 없잖아 있기는 합니다.”
그러자 은오영 소장 이하 직원들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뭡니까, 그게?”
대찬은 진위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위생 씨, 오늘 올축사 정기회의 있는 날이죠?”
“예? 아, 예. 오늘 2시, 평소처럼 올축사 대회의실에서 열립니다.”
대찬은 고개를 끄덕이곤 은오영 소장에게 말했다.
“오늘 저 회의에서 생각해둔 걸 얘기할 거예요.”
“우리한테 미리 귀띔해주시면 안 됩니까?”
“안 돼요. 그러다 중도에 고꾸라지면 나만 부끄럽잖아요.”
대찬은 웃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오후 2시.
대찬은 정시에 맞춰 올축사 회의실에 들어섰다.
그러자 축산업계에 종사하는 다른 올축사 공동 상임위원장들이 박수로 환영했다.
“아이고, 국제신사 오셨네.”
“기사 잘 봤습니다.”
“아주 자랑스러워요, 조 대표.”
대찬은 웃음으로 덕담에 화답했다.
“이게 다 위원장님들이 협력해주신 덕분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어림도 없죠.”
“어쩜 말씀도 예쁘게 하실까.”
“사실인 걸요.”
대찬은 웃으며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다.
올축사의 정기회의는 대개 친목을 위한 차담회라고 해도 무리는 없었다.
이미 비도축육의 법제화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완수되었다.
그리고 올축사 연구소에서의 연구도 맞닥뜨리는 장애물 없이 잘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마당에 정기적으로 둘러앉아 할 얘기라고는 별 게 없었다.
나이가 어지간히 든 위원장들은 자식 자랑이나 다음 골프 회동 일정을 잡는 것으로 시간을 때웠다.
이날도 그들은 별 긴장 없이 시시껄렁한 이야기나 나누었다.
그런데 대찬은 마음가짐이 달랐다.
평소에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들의 비위나 맞춰주다 돌아오던 그였다.
그러나 오늘은 은장도 한 자루를 품에 안고 온 차였다.
가벼운 근황을 공유하고 나서, 대찬이 그들을 향해 말했다.
“위원장님들, 제가 오늘 언짢으실 수도 있는 말씀을 올릴까 합니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또 무섭게 시동을 걸까. 나는 조 대표가 저럴 때마다 오줌이 다 마려워져.”
대찬은 멋쩍게 웃으면서도 할 말을 삼키진 않았다.
그대로 입 밖으로 냈다.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에 말입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한우 위원장의 얼굴이 싹 굳었다.
지금껏 기특한 막내아들 보듯이 호의가 가득했던 표정이 온데간데없이 증발했다.
“설마…….”
“선수촌 식자재 납품 입찰에 응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다른 위원장들도 술렁였다.
이건 로튼 프룻츠가 축산업계에 한 발짝 더 가까이 접근하겠다는 노골적인 제스처였다.
한우 위원장은 팔짱을 끼고 얼굴에 잔뜩 주름을 잡았다.
“조 대표, 숨 막히겠어. 너무 압박하잖아.”
“압박으로 느끼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건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결정할 부분이지.”
“가해라뇨. 말씀이 섭섭합니다.”
한우 위원장의 눈썹이 크게 치켜졌다.
“섭섭? 누가 누구더러 섭섭하다는 거야, 지금.”
“축산업계와의 합의를 통해 저희 비도축육도 축산물로서의 동등한 지위를 확보했습니다.”
“그걸 누가 모르나?”
“그럼 저희도 충분히 입찰에 응할 자격이 있습니다.”
“자격이라, 있지. 법적인 자격이 있어. 여기서 법을 다투자는 게 아니야. 정무적인 판단을 해야지, 정무적인.”
“저는 정치인이 아닙니다. 정무적인 판단은 제 소관이 아닙니다.”
“당신은 정치인보다도 더 정치적으로 행동할 책임이 있어. 우리가 이렇게 손을 잡게 된 것도 다 당신의 정치적인 경륜 덕분 아니야?”
대찬은 얕은 한숨을 쉬었다.
“제 정치적인 경륜이 아니라 국가산업의 미래와 업계의 이익을 저와 위원장님들이 치열한 토론과 너그러운 양보로 타협을 이뤄낸 결과입니다.”
“그게 그 말이야! 치열한 토론과 너그러운 양보, 타협! 그걸 두 글자로 줄이면 정치라고!”
“그럼 이번에도 그렇게 하시죠. 저희는 합법적인 자격으로 올림픽 선수촌에 저희 제품을 납품하려고 합니다. 이 건을 두고 치열하게 토론하시죠. 너그럽게 양보하시죠. 타협하시죠.”
“싫네! 자네의 욕심은 정도를 몰라. 어떻게 한 숟가락에 밥 한 공기를 다 올리려고 들어!”
“언성 높이지 마십시오.”
그러자 한돈과 양계 위원장이 한우를 말렸다.
“위원장님, 일단 차분하게 말씀 나누시죠.”
그러자 한우 위원장은 그들에게도 날 선 비판을 쏟아냈다.
“이봐, 당신들은 지금 당신들 일 아니라고 강 건너 불구경 하겠다는 거야, 뭐야!”
“이게 왜 우리들 일이 아니에요. 우리 일이죠.”
“로튼에서 만드는 게 소고기니까, 돼지랑 닭은 이러나저러나 관심 없다, 이거 아니냐고!”
“왜 또 말씀을 그렇게 섭섭하게 해요.”
한우 위원장은 대찬을 향해 눈총을 쐈다.
“이번 올림픽은 평창에서 열려. 평창은 강원도야. 이미 횡성한우가 독점적으로 쇠고기를 납품하기로 잠정적으로 결정이 난 상태라고.”
“어디까지나 잠정적이죠.”
한우 위원장은 책상을 탁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로튼 프룻츠가 횡성한우랑 상대가 된다고 생각하나!”
“아뇨, 상대 안 됩니다. 저희도 모든 쇠고기를 비도축육으로 납품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럴 능력도 안 되고요.”
“그럼!”
“다만 다짐육 형태로 조리할 수 있는 부분에는 승부를 걸 만하다고 판단한 상태입니다.”
“이런……!”
“설마하니 투 플러스 횡성한우를 다짐육으로 먹으라고 제공하진 않을 거 아닙니까.”
“그건 아니지만! 한우의 아성에 도전하는 것만으로도 우린 충분히 불쾌하다 이거야!”
“비도축육은 순수한 근육세포로 이뤄져 있습니다. 지방을 꺼리고 혹여 모를 잔여물을 걱정하는 선수들에게는 충분한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가능성마저 부정하면 저희는 어떻게 장사하라는 겁니까?”
“누가 장사하지 말라고 했나? 넘볼 영역이 있고, 아닌 영역이 있다는 거지.”
“그럼 저희는 허구한 날 용가리치킨이나 튀겨서 팔라는 말씀입니까?
“꼭 올림픽에까지 숟가락을 얹어야 직성이 풀리겠나?”
“네, 숟가락 올릴 수 있는 곳에는 다 올릴 겁니다.”
그러자 한돈, 양계 위원장들은 이번엔 대찬을 말렸다.
“조 대표, 왜 조 대표까지 언성을 높이고 그래.”
“로튼 프룻츠가 올림픽 식자재 납품 입찰에 응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올축사의 공식입장으로 채택할 것을 제안하겠습니다.”
“반대! 반대! 반대! 결사반대! 절대반대!”
한우 위원장은 애가 떼쓰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한돈 위원장이 일어나 중재에 나섰다.
“자, 오늘 회의는 이걸로 파하죠. 서로 감정이 격앙된 상태에서 무슨 결론이 나오겠어요? 이 안건은 다음 정기회의에서 결정하는 걸로, 응? 조 대표도 이쯤하고 물러나.”
대찬은 한우 위원장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죠.”
“자자, 형님도 이쯤 합시다.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고요.”
올축사 정기회의는 그렇게 대립을 뒤로 미루고 파했다.
한우 위원장은 대찬의 선언을 받아들일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의 말을 곱씹을수록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뭐? 혹여 모를 잔여물을 걱정해? 지들 가짜고기는 깨끗하고, 횡성한우는 더럽다 이거야? 나 참!”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가던 한돈 위원장은 멋쩍게 웃었다.
“뭐, 과학적으로 틀린 건 아니잖아요.”
“야, 넌 누구 편이야?”
“형님도 참, 여기서 편이 왜 나와요. 우린 올축사로 묶인 다 같은 한편이잖아요.”
“지랄 났다. 로튼이 가짜 돼지고기 만드는 회사였어도 다 같은 한편 타령 할래?”
“허허.”
“허허? 그래, 실컷 웃어둬라. 로튼이 돼지 멱따는 날까지 실컷 웃어두라고.”
그러자 한돈 위원장은 한우 위원장의 어깨를 주무르며 능글맞게 말했다.
“형님, 그래도 제가 또 형님 생각해서 다음 회의로 결정 미룬 거 아녜요?”
“그게 또 왜 내 생각해서 미룬 거야?”
“일에는 다 때가 있는 거예요. 다음 정기회의 될 때까지 손을 써놓으면 됩니다.”
그러자 한우 위원장의 눈이 빛났다.
“손을 쓰다니.”
“입찰이야 어차피 형식적인 과정 아니겠어요? 결국 결정은 몇 사람의 쑥덕공론으로 이뤄진다고요.”
“그래서.”
“그래서는, 참. 연줄 타고 타면 그 사람들한테 안 닿겠어요? 로튼한테는 입찰해보라고 하세요. 받는 쪽에서 안 받아주면 그만이에요.”
한우 위원장은 눈을 흘겼다.
“되겠어?”
“걱정 붙들어 매세요.”
한돈 위원장은 자신의 호언장담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다음 정기회의에서 로튼 프룻츠의 올림픽 선수촌 식자재 납품 응찰에 대한 공동선언은 부결되었다.
대신 응찰 자체에 대해 축산업계가 집단적으로 반발하지 않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대찬은 그 자리에서 순순히 태도를 바꾼 한우 위원장의 모습이 의아했다.
‘무슨 꼼수를 썼나.’
그 불길한 예감은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로튼 프룻츠는 낙찰에 실패했다.
제법 좋은 조건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종 선택을 받지 못했다.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자 은오영 소장이 흥분했다.
“이건 분명 업계에서 손을 쓴 걸 겁니다.”
“그럴 가능성이 없진 않지만 단정할 수도 없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있나요? 심지어 우리는 원가 이하로 식자재를 제공하겠다고까지 했는데.”
대찬은 웃으면서 그를 다독였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했다지만 비도축육에 대한 불안감이 아직 존재해요. 수긍할 수밖에 없어요. 이걸 갖고 항의하면 우리 꼴만 더 우스워집니다.”
“대표님은 화도 안 나십니까? 어떻게 그리 태평해요?”
“화내서 결과가 달라진다면 얼마든지 내겠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잖아요.”
대찬은 웃음을 흘렸다.
“참 속도 좋으십니다.”
은오영 소장은 툴툴거리며 자리를 떴다.
그러자 대찬은 웃음을 버리고 의자를 뒤로 벌러덩 젖혔다.
희끄무레한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대찬은 반쯤 누운 채로 중얼거렸다.
“분명히 좋은 조건이었는데. 식약처에서 비도축육에 오케이 사인 줬으니 위생이나 안전 문제도 없고, 혁신적인 결정으로 그네들 커리어에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
은오영 소장에게는 대범한 척 말했지만, 대찬의 속도 부글부글 끓기는 매한가지였다.
축산업계가 순순히 전향적인 입장을 보인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저쪽의 음성적인 힘이 발휘된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의혹을 제기해봤자 나만 우스워질 테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또 당하고는 못 사는 성미가 꿈틀거리고.
대찬은 펜을 굴리면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탁자 위에 놓인 전화기를 들었다.
진위생 직통이었다.
“네, 대표님.”
“평창올림픽 조직위원회에 전화 좀 해줘요.”
“알겠습니다.”
진위생은 대찬의 지시를 받자마자 조직위원회에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로튼 프룻츠의 진위생이라고 합니다.”
“로튼 프룻츠요? 네.”
“조대찬 대표님께서 문의드릴 사항이 있어서 연락 드렸거든요.”
응대하는 조직위 직원은 로튼 프룻츠는 몰라도 조대찬의 이름은 알았다.
뚱하던 목소리가 확 밝아졌다.
“조대찬 대표님이요? 윤이영이랑 사귀는 그분 맞아요?”
“아, 예…….”
조대찬 하면 비도축육이 아니라 윤이영부터 나오네.
진위생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걸 체감했다.
“어머, 신기해라. 그런데 어떤 걸 문의하시려고 그러시는지.”
“후원 관련한 문의입니다.”
“후원이요?”
“예.”
대찬 정도의 이름값 있는 사람이 콩고물을 얻어먹으려고 전화를 건 게 아니라, 도리어 후원을 한다고 한다.
조직위 직원은 제법 위상이 높은 사람과 연결해주어야겠다는 의무감이 솟았다.
대리 직급이었던 그는 과장에게 보고했고, 대찬의 이름을 들은 과장은 또 부장에게 보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