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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29화 (429/556)

난 할 수 있어 429화

백민하 사장은 조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견문이 넓혀질까 의문이긴 해요. 괜히 장시간 비행기 태우면서 괴롭히는 건 아닌지.”

“그래도 알게 모르게 도움은 될 겁니다. 경험은 뭐든지 좋으니까요.”

“조 대표가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 고맙네요. 아, 괜한 오해는 말아요. 애들 비행기 표는 회삿돈 아니고 내 사비로 샀으니까.”

대찬은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백민하 사장은 웃으면서 말했다.

“박람회 준비는 잘했어요?”

“예, 일단 최대한 노력했습니다. 해뜰녘도 준비 많이 하셨죠?”

“우리야 하던 매뉴얼이 있으니까 그대로 가져갔죠. 이번에는 유럽 시장을 공략할 만한 라인업으로 뽑아봤어요. 전통 장류를 서양인 입맛에 재해석한 제품 위주로 꾸렸어요.”

“오, 그거 좋은데요.”

“로튼 프룻츠도 고민을 많이 했을 텐데?”

“하하, 시간 나면 저희 부스에 들러주십시오.”

“오, 뭔가 비장의 무기가 있는 모양인데. 기대하겠어요.”

백민하 사장은 빙긋 웃었다.

대찬과 백민하 사장은 비즈니스석에 나란히 앉아 끊임없이 사업 얘기를 했다.

로튼 프룻츠로서도 해뜰녘과의 돈독한 관계는 필요했다.

해뜰녘은 가공식품 분야에서 두드러지는 존재감을 보유하고 있었다.

로튼 프룻츠는 고기를 만들어내는 데는 국내에서 제일이었지만, 그걸 가공한 제품을 만드는 일은 아예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비도축육이 일반에 첫선을 보일 때, 해뜰녘이 기꺼이 비도축육을 이용한 가공식품을 만들어낸다면.

해뜰녘의 인지도를 신뢰하는 만큼, 소비자들이 낯선 비도축육에 갖는 꺼림칙한 마음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었다.

해뜰녘 역시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비도축육 분야에 경쟁업체보다 한 발 앞서서 진출할 수 있다.

그러니 서로 좋은 일이었다.

오랜 비행 끝에 일행은 독일 쾰른에 도착했다.

힘차게 흐르는 라인강의 바로 옆에 우뚝 선 쾰른 대성당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아누가 2017이 개최되는 독일의 대표적인 대형 박람회장, 쾰른메세는 쾰른 대성당의 강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8만 5천 평 규모의 박람회장은 쾰른 대성당 못지않은 위용을 자랑했다.

저 드넓은 박람회장을 무수히 많은 식품업계 업체들이 부스 하나씩을 차지하고 모여들 것이다.

그리고 그 무수히 많은 업체들보다도 많은 방문객들이 박람회장을 찾을 것이다.

대찬은 무수히 많은 경쟁자들을 제치고 이목을 끌어내어 대외 인지도를 높여야 하는 사명이 있었다.

날이 밝고, 시차적응을 할 틈도 없이 대찬은 바로 박람회가 열리는 쾰른메세로 향했다.

진위생은 잠이 덜 깬 눈을 비비적거리면서 느릿느릿 대찬의 뒤를 따랐다.

“너무 새벽 같이 나가시는 거 아닙니까?”

“아, 그럼 진위생 씨는 나 두고 더 푹 자다가 오시든지요.”

“…그럼 그날로 저 해고 아닙니까?”

“잘 아시네.”

대찬은 진위생을 돌아보며 픽 웃었다.

진위생은 안 들리는 말로 꿍얼대고는 대찬의 꽁무니에 열심히 달라붙었다.

아누가 측에서는 사람을 보내 로튼 프룻츠 측을 맞이했다.

주최 측에서 그다지 끗발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맞이해줄 사람을 보내준 것만으로도 대찬은 감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쾰른까지 오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렇게 초청장까지 보내주시니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로튼 프룻츠를 저희 박람회에 모시게 되어 큰 영광입니다.”

주최 측은 대찬을 박람회장 안으로 안내했다.

그는 대찬과 나란히 걸어가면서 말했다.

“우연히 업체 한 곳이 사정이 생겨서 박람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가장 유망한 업체에 그 부스를 제공하자는 의견이 내부적으로 있었습니다.”

“그랬군요. 저희를 유망하다고 판단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로튼 프룻츠는 그런 평가를 받을 자격이 충분합니다.”

주최 측은 대찬을 부스로 안내했다.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을 지나, 한참을 걸었다.

걷고 또 걷는데도 주최 측의 발걸음은 잦아들지 않았다.

박람회장의 가장 끄트머리에 이르러서야 그의 걸음이 멈췄다.

“자, 여기가 로튼 프룻츠의 부스입니다.”

“…그렇군요.”

문자 그대로 구석이었다.

박람회장의 중심에서 한참 떨어져 있었고, 주변에 부스도 몇 군데 되지 않는 그런 구석.

대찬과 동행한 직원들 역시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참가신청을 한 것도 아니고 비용을 지불한 것도 아니었다.

초청된 마당에 자리를 따질 자격은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구석도 이런 구석이 없었다.

부스는 잡동사니를 두는 창고까지 접하고 있었다.

아마 박람회장을 찾는 방문객 중 열에 일고여덟은 이 부스의 존재조차도 모르고 일정을 마칠 것이 분명했다.

주최 측 역시 그런 로튼 프룻츠의 감상을 인지하고 있었다.

“자리가 조금 외진 곳에 있기는 합니다만, 로튼 프룻츠의 열정과 패기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본래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 법이지요, 그렇지요?”

“하하, 그래도 목수의 손에 망치 정도는 들려줘야 나무를 다듬는데요. 이건 맨손이나 다를 바 없군요.”

대찬은 주최 측의 태연한 말에 순간 발끈해서 날 선 말로 응수했다.

주최 측은 그 말에 어깨만 으쓱였다.

“그렇게 불쾌감을 표하시면 저희가 너무 죄송하잖습니까.”

“불쾌감까지는 아니고요. 아무튼, 주최 측에서 여러모로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로튼 프룻츠가 모쪼록 이번 박람회에서 소기의 성과를 이뤄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최 측은 하나마나 한 덕담을 던지고 유유히 사라졌다.

그러자 직원들의 노골적인 불만이 터져 나왔다.

다르샨 싱은 멀어져가는 주최 측의 뒷모습을 쏘아보며 한국어로 꿍얼거렸다.

“씨벌놈들.”

그나마 싱 전무의 걸쭉한 욕설이 헛웃음이나마 대찬을 웃게 만들었다.

로튼 프룻츠에 비하면 해뜰녘의 부스는 그야말로 ‘해 뜰 녘’이었다.

중심에서 가까운 곳에 널찍하게 자리를 잡았다.

주최 측에서 배려하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백민하 사장은 해뜰녘의 부스를 설치해놓고 로튼 프룻츠의 부스를 둘러봤다.

그러더니 역시 대찬과 마찬가지로 헛웃음을 지었다.

“뭐야, 장난해?”

“주최 측의 의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모르겠네요.”

백민하 사장은 허리춤에 손을 얹고 대찬보다도 더 화를 냈다.

“이럴 거면 뭐 하러 초청했어? 사람 멕이는 것도 아니고 불러놓고 이런 거지같은 자리를 줘?”

“뭐, 저희도 해뜰녘 같은 로얄석을 바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무슨 쥐구멍만도 못한 곳을 부스랍시고 주고 있어.”

백민하 사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탄했다.

그녀는 로튼 프룻츠의 부스에 놓인 브로슈어를 바라봤다.

“이거, 한 뭉텅이만 우리 줘요. 우리 부스에 갖다 놓게.”

“그래주시면 저희야 감사하죠.”

백민하 사장은 직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성 과장, 이거 우리 부스에 한 두 박스 갖다놔요. 우리 브로슈어 줄 때, 로튼 프룻츠 것도 같이 끼워 넣어줘.”

“알겠습니다. 가능하면 로튼 프룻츠 측 부스도 안내하겠습니다.”

“역시 성 과장 똑똑해.”

백민하 사장의 배려에 대찬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이거 다 조 대표한테 점수 따놓으려고 그러는 거니까 꼼꼼히 기억해둬야 해요, 알았죠?”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나, 웬만하면 우리 부스에 계속 있을 생각이에요.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면 우리 쪽으로 와요. 두 팔 걷어붙이고 도울 테니.”

“알겠습니다, 사장님.”

백민하 사장은 눈을 찡긋하고 로튼 프룻츠의 브로슈어 한 뭉텅이를 들고 자기 부스 쪽으로 사라졌다.

대찬은 짝짝, 두 번 박수를 치며 직원들에게 말했다.

“자, 언제까지 자리 타령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일단 최선을 다해봅시다.”

대찬은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주긴 했지만 스스로도 힘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찬은 쩝, 입맛을 다셨다.

오후까지 박람회 준비를 마치고, 대찬은 직원들과 함께 쾰른의 고급 레스토랑을 찾았다.

부스 때문에 사기가 빠졌으니 밥이라도 좋은 걸 먹였다.

그건 스스로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대찬은 메뉴에 있는 모든 음식을 시켜놓고 맥주부터 들이켰다.

식사를 하면서도 직원들은 박람회에 대한 걱정을 접지 못했다.

은오영 소장은 고기를 썰면서 대찬에게 말했다.

“중요한 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느냐에 달렸습니다.”

“그렇겠죠. 이번 박람회의 목적은 딱 하나, 세계에 우리를 알리는 겁니다. 그런데 박람회장에서조차 이목을 끌지 못하면 그 목적이 달성될 리 만무하니까요.”

다르샨 싱 전무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업체들처럼 제품이나 전시해놓고 판촉이나 해서는 곤란합니다. 무언가 파격적인 퍼포먼스가 필요해요.”

“파격적인 퍼포먼스라, 그게 뭘까요.”

다르샨 싱 전무는 쩝, 입맛을 다셨다.

“글쎄요.”

대찬이 시킨 음식들이 줄줄이 식탁 위에 올라왔다.

갖가지 음식 중에 대찬은 케밥에 시선이 꽂혔다.

“독일 사람들도 케밥을 먹어요?”

그러자 아는 체 하기 좋아하는 은오영 교수가 우쭐하며 말했다.

“독일에 가장 많이 사는 외국인이 터키 사람들이에요.”

“아, 그래요?”

은오영 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왜, 독일에 유명한 축구선수들도 있잖아요. 외질이나 귄도간 같은. 그 사람들도 다 터키계거든요.”

“축구에 관심이 없어서 잘 몰랐네요.”

“그래서 터키 음식이 독일에서도 아주 보편적이죠.”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케밥이라.”

대찬은 케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마 케밥에 인격이 있다면 뭘 자꾸 꼬나보냐는 둥, 아니면 부끄럽게 왜 그렇게 보냐는 둥 항의할 정도로 대찬은 오래 바라봤다.

“잘 자요. 내일 봅시다.”

대찬은 직원들을 각각 객실로 들여보낸 후, 자기도 객실을 찾아 들어갔다.

그는 발을 닦고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내일 일정을 생각하면 일찍 자두는 것이 좋았다.

그런데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대찬은 다르샨 싱 전무의 말을 곱씹었다.

‘이목을 끌 수 있는 파격적인 퍼포먼스…….’

대찬은 내내 그걸 궁리하다가 스르르 잠에 빠졌다.

다음날.

박람회가 시작되는 첫날이었다.

아누가 2017이 개최되는 쾰른메세에는 엄청난 인파가 운집했다.

세계 각지의 식품 산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총출동했다.

아누가 2017에는 도합 7,400여 곳의 업체가 참여했다.

그리고 방문객으로서 16만 5천 명의 대인원이 참석했다.

잠실야구장을 6번 만원사례를 이루고도 남을 정도의 대인원이었다.

엄청난 인파를 보고 대찬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역시 허명이 아니었네.”

“이렇게 사람이 많을 줄은 몰랐습니다.”

진위생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다.

이렇게 엄청난 인원이 모여 봤자 로튼 프룻츠의 부스에 발걸음이 닿지 않는다면 배만 아프고 말 일이었다.

대찬은 비장한 각오로 박람회장을 향해 걸어갔다.

아누가 2017의 파트너 국가인 인도를 대표해, 인도의 식품가공부 장관이 나와 개회사를 했다.

그것으로 아누가 2017이 개막했다.

대찬은 직원들의 어깨를 부여잡고 결전을 다짐했다.

“자, 잘해봅시다.”

“네, 대표님.”

직원들 역시 소기의 성과를 얻어내리라는 각오로 임했다.

그렇게 부스로 향하는데, 익숙한 단어들이 대찬의 귀에 쏙쏙 박혔다.

같은 영어라도 누가 발음하느냐에 따라 잘 들리는 경우가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미국으로 유학까지 다녀온 대찬이었지만 아무래도 물 흐르듯 흐르는 미국식 영어보다는, 영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아 뚝뚝 끊기는 듯한 정직한 발음이 귀에 더 잘 들렸다.

대찬의 귀에 들리는 영어는 일본 억양이 분명한 영어였다.

게다가 그 잘 들리는 영어로 읊조리는 단어들이란 배양육, 윤리적인 육식, 식량 혁명 따위의 것들이었다.

대찬의 이목이 그쪽으로 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찬은 그쪽을 보자마자 얼굴이 확 구겨졌다.

그건 로튼 프룻츠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코테츠 키친이잖아.”

코테츠 키친의 부스는 인도 식품가공부 장관의 연설이 있었던 박람회장의 중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코테츠 키친의 부스는 딱 봐도 일본 느낌이 나도록 잘 꾸며져 있었다.

공을 많이 들인 티가 났다.

대찬과 같은 곳을 바라보던 은오영 소장이 탄식했다.

“허! 그린블러드하고는 아주 앞뒷집으로 꼭 붙었네요. 신혼부부 모양으로!”

과연 은오영 소장의 말처럼 코테츠 키친의 부스 바로 옆에는 그린블러드 미트의 부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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