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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28화 (428/556)

난 할 수 있어 428화

박 이사는 사직서를 냈다.

대찬은 지체 없이 그것을 수리했다.

로튼 프룻츠에 몸담은 사람 중에 가장 먼저 로튼 프룻츠를 떠나게 되었다.

대찬은 박 이사를 따로 불러 말했다.

“박 이사님, 좋은 일로 떠나게 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유종의 미는 거둔 셈이네요.”

“회사에 이익이 됐다기보다는 그저 한 번 속풀이에 불과한 걸요. 제가 저지른 과오에 비하면 큰 역할은 아니었습니다. 발단도 불순했고요.”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다 끝난 마당에 이것저것 따져서 뭐 하겠어요.”

“대표님께는 면목이 없습니다.”

“그런 말씀 마시고요. 새 직장에 가서 잘해주십시오.”

박 이사는 말없이 고개만 숙였다.

대찬은 그를 위해 다른 회사의 자리를 알아봐 주었다.

박 이사는 로튼 프룻츠의 이사 직함을 내려놓고, 다른 회사의 부장 자리를 받아 들어갔다.

박 이사는 한 사업부를 이끌어갈 지도력과 적극성은 부족했다.

그래도 중간관리자로서의 역할을 해내는 데는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까닭에 대찬은 주변에 자기 이름을 걸고 박 이사를 추천했다.

그리고 왜 박 이사가 로튼 프룻츠를 나가게 되었는지, 숨김없이 그 회사에도 일러주었다.

그러자 회사 측에서는 고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정의로운 내부고발자도 아니고 돈 몇 푼에 회사 기밀을 팔아넘기려고 했던 이를 선뜻 기용할 수 없었다.

어차피 그렇게 나이 많은 백수들이야 차고 넘쳤다.

한동안 고심하던 회사는 이력서와 면접, 그리고 대찬의 이름을 믿고 그를 기용하기로 결정했다.

박 이사가 그런 결점을 감수하고도 꼭 기용해야 할 정도로 훌륭한 인재인 까닭이 아니었다.

박 이사를 교두보로 삼아 로튼 프룻츠와 좋은 인연을 맺어두려는 포석의 성격이 강했다.

대찬은 박 이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많이 고민했습니다. 회사의 내부기밀을 반출하려고 했던 분을 다른 회사에 추천한다는 게 못할 짓이거든요.”

“예, 그렇지요…….”

가감 없는 사실이었으니 박 이사는 얼굴만 살짝 붉혔다.

“다만 그건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파격적인 유혹을 받아 어쩔 수 없이 흔들리신 걸로 간주하겠습니다. 대개의 소시민은 그런 상황에서 박 이사님과 같은 선택을 할 테니까.”

“…….”

“옮기실 곳은 잔잔한 호수 같은 회사입니다. 여기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휘몰아치는 다이나믹함은 없을 거예요.”

“예.”

“그러니 괜한 유혹에 시달릴 일도 없을 겁니다. 부디 거기서는 호수 위에 뜬 백조처럼 유유자적 할 일만 하세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체크할 겁니다. 박 이사님 때문에 제 신뢰도가 떨어지는 건 참을 수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으며 박 이사의 손을 꼭 붙들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박 이사는 대찬을 바라보며 어정쩡한 웃음을 지었다.

대찬은 조촐한 송별회로 박 이사의 마지막을 장식해주었다.

송별회를 마치고, 대찬은 부러 멀리 대로변까지 걸어 택시를 잡으려고 했다.

민승기 역시 소화가 덜 됐다며 대찬과 나란히 걸었다.

“이제 어쩔 거야?”

“사회공헌사업부요?”

민승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 이사가 없으니 누굴 선장으로 앉힐 셈이야. 차선임자가 이 과장인데.”

“이사 자리를 덜컥 맡길 정도는 아니죠. 연차도 부족하고 실력도 부족하고.”

민승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아니면 외부영입이라도 할 셈이야?”

“그냥 배를 없애려고요.”

대찬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민승기는 대찬을 흘긋 바라보며 말했다.

“사회공헌사업부를 없애겠다고?”

“네, 사회공헌이 비도축육이나 낮밤한잔이랑 한데 묶어서 삼대 축이라고 하기에는 이제 격차가 좀 심하게 나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여러 개 팀 단위로 쪼개서 경영지원부 소속으로 집어넣으려고요.”

“으음.”

민승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광고제작사업은 과감히 접어야겠어요.”

“하기야 그 사업도 박 이사님이 주도해서 만들었으니, 떠난 사람 따라 사업도 떠나보내야겠지. 돈이 됐다면 모를까.”

“그렇죠. 박 이사님하고는 관계없어요. 그냥, 돈이 안 되니까.”

대찬과 민승기는 각자 택시를 잡아타고 흩어졌다.

사회공헌사업부는 사회공헌팀, 홍보팀, 대외협력팀으로 나뉘어 경영지원부 산하에 두었다.

사회공헌사업부 직원들은 몇몇은 비도축육과 낮밤한잔으로 흩어지고, 몇몇은 다시 세 팀으로 나뉘어 배속되었다.

박 이사가 자리를 옮긴 회사 측에서는 대찬에게 좋은 사람을 추천해줬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대찬은 그제야 마음을 좀 놓을 수 있었다.

박 이사가 나가고, 제이슨 리도 정리된 이후 평온한 나날이 이어졌다.

대찬도 오만 가지 일들에 힘을 낭비하지 않았다.

일상적인 업무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그때 진위생이 대찬에게 초청장 하나를 전달했다.

“대표님 앞으로 초청장이 왔어요.”

“초청장에는 좋은 기억이 없는데.”

대찬의 표정은 시큼털털했다.

근래에 카일라에서 초청장을 받았다가 잔뜩 진을 뺐다.

겨우 몸을 좀 추스르려고 하는 마당에 또 다시 초청장.

대찬이 내키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도 열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초청장은 영어로 쓰여 있었다.

대찬은 진위생을 흘끗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젠 한글도 아니고 아예 영어네요. 카일라보다 한 술 더 뜨는 놈들한테서 온 거 아니야?”

진위생은 멋쩍게 웃었다.

“그런 양아치들한테서 온 것 같진 않아요.”

“음.”

대찬은 초청장을 차분히 읽어 내려갔다.

눈이 살짝 커졌다.

“아누가(ANUGA)에서 온 거네.”

“아누가? 이거 느낌이 안 좋은데요. 카일라랑 뭔가 비슷한 어감인데.”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명색이 로튼 프룻츠 대표 가장 가까이서 일하는 사람이 아누가를 몰라요?”

“아누가가 뭡니까?”

진위생의 순수한 눈망울에 대찬은 웃음을 머금었다.

“프랑스 시알, 일본 푸덱스랑 같이 세계 3대 식품 박람회로 꼽히는 유명한 박람회예요. 말이 3대지 아누가가 이름값이나 규모 면에서 가장 두드러진다고 봐야 해요.”

“아하. 그럼 거기서 초청장이 온 겁니까?”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업체들 대상으로 참가신청을 받거든요. 당연히 업체 측에서 비용도 지불해야 하고. 신청도 작년에 마감돼서 우린 이번에 참가 안 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우릴 초청하겠다고요? 이거, 특별대우 아닙니까?”

“비용도 면제해준다고 하는데.”

진위생은 활짝 웃었다.

“이야, 우리 회사가 잘 나가기는 하나 봅니다. 그 정도까지 우릴 우대해준다고요?”

“아누가가 작은 박람회도 아니고 딱히 급할 것도 없을 텐데 이런 파격적인 조건은 나도 놀랍긴 하네요.”

“더 볼 것 뭐 있습니까. 바로 참석한다고 해야죠.”

“작년에 이래저래 바빠서 신청 못한 게 좀 아쉽긴 했어요. 이렇게 기회를 주니 고맙네.”

대찬은 흐뭇하게 웃고는 해뜰녘의 백민하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누가에는 적지 않은 수의 한국 업체도 참가했다.

식음료 부문에서 전통 강자로 군림하는 해뜰녘 역시 아누가에 단골로 참가하는 업체였다.

대찬이 전화를 걸자, 백민하 사장은 반갑게 응대했다.

“오랜만이에요, 조 대표.”

“잘 지내셨습니까?”

“잘 지내죠. 사업도 그럭저럭 잘 꾸려져 나가고 있고.”

“이번 아누가에 해뜰녘도 참가하시죠?”

“당연하죠. 아누가는 우리 회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행사 중에 하나예요.”

“그 정도인가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실 정도로?”

백민하 사장은 당연한 걸 묻냐는 듯 긍정했다.

“그럼요. 규모 자체가 엄청난데요. 게다가 일반인은 박람회에 참가할 수가 없거든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박람회장을 가득 메우는 그 많은 사람들은 전부 식품업계 관련 종사자예요. 그러니까 일반인들과는 상대도 안 되는, 가능성 높은 잠재적인 고객이라는 거예요.”

“그렇군요.”

“그래서 나는 조 대표가 작년에 아누가에 참가신청 하는 걸 깜빡했다고 하길래 깜짝 놀랐죠. 얼마나 정신머리가 없으면 그걸 깜빡하나 하고.”

따끔한 야단에 대찬은 빙긋 웃었다.

“그래도 다행히 기회가 났습니다.”

“기회요?”

“오늘 아누가에서 초청장이 왔거든요.”

그 말에 백민하 사장은 깜짝 놀랐다.

“정말이에요?”

“네.”

“신기하네요. 아누가에 참가하는 업체가 한두 곳이 아니잖아요. 이런 특혜를 베푸는 경우는 아주 이례적, 아니 최소한 해뜰녘이 아누가에 참가한 이래로는 한 번도 없던 일이에요.”

“그 정도인가요.”

대찬은 은근히 우쭐한 기분이 들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불안한 마음이 자리했다.

로튼 프룻츠가 촉망받는 회사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로 대우해줄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국내에서의 인지도는 여느 기업 못지않았지만 해외에서도 그렇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다른 업계를 댈 것도 없었다.

비도축육 업계로만 한정해도 로튼 프룻츠는 대외적인 인지도가 떨어졌다.

외신에서 평가하는 비도축육 업계의 선두는 그린블러드 미트였다.

그리고 그 그린블러드와 엮여 코테츠 그룹이 합작한 코테츠 키친 정도가 자주 언급되었다.

로튼 프룻츠는 네덜란드, 이스라엘의 업체들보다도 조명을 받지 못한 채 변방으로 취급될 뿐이었다.

아직 그럴듯한 결과물이 시장에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굳이 한국의 업체까지 면밀히 연구할 정도로 외신은 친절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세계 최대의 식품 박람회의 주최 측이 로튼 프룻츠만을 우대한다?

‘영 찜찜하단 말이지.’

이제 우쭐하는 감정보다 걱정하는 마음이 앞섰다.

그런 대찬의 마음을 모르는 백민하 사장은 살갑게 말했다.

“어머, 잘 됐다. 생각해보니 나랑 같은 비행기 타면 되겠네.”

“그래도 괜찮을까요?”

“안 괜찮을 거 뭐 있어요. 직원들 몇몇하고 동행하긴 하지만, 꼴에 사장이라고 나를 다 어려워한단 말이에요. 조 대표가 말동무나 해줘요.”

“하하, 그러겠습니다. 독일까지 가는 비행기 많이 지루할 텐데, 저도 잘됐습니다.”

“가면서 사업 얘기를 좀 했으면 해요. 우리 해뜰녘하고 로튼 프룻츠는 나름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관계거든요.”

“아, 물론 그렇습니다.”

“조 대표가 추진하는 비도축육이 언제 시장성을 획득할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한계를 돌파하면, 특히 가공육 분야에서는 비도축육이 재래육에 비해 압도적인 경쟁력을 지닐 것이라고 확신해요.”

“저는 확신까지는 아니지만 그렇게 희망하고 있습니다.”

“겸손하시긴. 아무튼 그날이 된다면 로튼 프룻츠의 가치는 천정부지로 치솟을 테니까. 먼저 침 발라 두려는 거예요.”

“백 대표님과 함께하는 건 도리어 저희에게 큰 기회입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조만간 공항에서 보자고요.”

“네, 그러겠습니다.”

대찬은 전화를 끊고 바로 진위생에게 말했다.

“박람회 준비하려면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아요.”

“그러겠죠.”

“당분간 비도축육사업부는 박람회 준비를 최우선으로 놓고 일하라고 하세요.”

“넵!”

진위생은 군기 든 척 절도 있게 대답했다.

세계 최대 식품 박람회, 아누가 2017은 독일 쾰른에서 열렸다.

대찬은 로튼 프룻츠의 직원 다섯 명을 대동하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진위생과 다르샨 싱 전무, 은오영 소장과 두 명의 직원이 더 붙었다.

요산테크닉스 측에서도 두 명의 직원을 파견했다.

그래서 대찬의 일행은 도합 여덟이었다.

대찬은 백민하 사장과 인천공항 라운지에서 만났다.

그는 빙긋 웃으며 백민하 사장에게 악수를 건넸다.

“더 예뻐지셨습니다.”

“남편 없이 사니까 나날이 어려지는 느낌이거든요. 조 대표는 좀 늙었네요. 일 열심히 했나봐.”

“그런가요.”

대찬은 멋쩍게 웃으며 자기 얼굴을 매만졌다.

백민하 사장의 두 손은 각각 아이들의 손을 잡고 있었다.

하나는 남자아이, 하나는 여자아이였다.

대찬은 눈을 깜빡이며 둘을 바라보고 백민하 사장에게 물었다.

“이 애들은…….”

“아, 우리 조카들이에요.”

“조카 분들까지 쾰른으로 가나요?”

백민하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동생이 애들 견문 좀 넓히라고 데려가 달라고 통사정을 하더라고요.”

“박람회 준비만으로도 벅차실 텐데.”

백민하 사장은 등 뒤의 직원들을 돌아보며 농담조로 말했다.

“뭐, 일이야 우리 직원들이 다 할 텐데, 뭐.”

직원들은 씁쓸한 미소로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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