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27화
이제 대찬은 자신 앞에 비굴해질 수밖에 없다.
노태식 사장은 비서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어, 그래?”
“예, 방금 인터넷 기사 확인했습니다.”
노태식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결정됐구만. 어디랑 계약을 했다던가?”
그의 말을 들은 제이슨 리는 들어 올리던 찻잔을 멈칫했다.
이 노친네가 치매 걸렸나.
어디랑 계약을 해, 어디랑 하긴.
그런데 비서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요산테크닉스랑 했다고 합니다.”
“음, 예상대로구만. 하긴, 요산이 그쪽으로는 더 나은 카드이긴 하지. 요산이라면 우리도 불만은 없어.”
노태식 사장의 촌평에 제이슨 리는 어리둥절했다.
요산테크닉스는 또 뭐야.
이 회사 다른 이름인가?
제이슨 리의 동공이 흔들렸다.
노태식 사장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제이슨 리에게 말했다.
“아, 로튼 프룻츠 아시죠? 조대찬 씨가 대표로 있는.”
“…네, 아주 잘 알죠.”
“잘 아시기까지 합니까? 그렇군요. 이번에 로튼 프룻츠랑 계약이 체결될 뻔했는데, 아깝게 됐습니다.”
“네?”
“로튼 프춧츠가 요산이라는 회사랑 손을 잡았다는군요.”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노태식 사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제가 말을 어렵게 한 것 같진 않은데. 제이슨 씨에게는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르겠군요. 로튼 프룻츠와 계약을 맺었다면 제이슨 씨의 투자제안을 고사했을 테니까요, 허허.”
“잠깐, 로튼 프룻츠가 이쪽하고 계약하기로 돼 있던 거 아닙니까?”
“아이고, 아닙니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밥을 안 먹어도 배불렀을 겁니다.”
제이슨 리는 실시간으로 영혼이 육체에서 탈출하는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때 노태식 사장의 전화가 울렸다.
그는 제이슨 리에게 잠깐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아, 조 대표님! 웬일로 전화를 다 주시고. 예? 아, 예, 소식 들었습니다. 요산이랑 계약하셨다고. 예예, 축하드립니다. 요산은 충분히 경쟁력 있는 회사니까요. 그렇다고 우리를 아주 등한시하진 말아주세요? 혹 다음에 인연이 닿을지 누가 압니까. 하하, 예예.”
노태식 사장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찬과 대화를 나누다가, 제이슨 리 쪽을 흘끗 보고는 말을 이었다.
“아, 지금 여기에 제이슨 리라는 분이 와계시는데요. 지금 막 사인까지 마쳤습니다, 예. 제이슨 씨 본인 말씀으로는 조 대표님을 잘 아신다고 그러시네요. 아, 대표님도 잘 아세요? 네? 스피커폰이요? 아, 예, 잠시만요. 늙었어도 이 정도는 해야 기술회사의 대표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노태식 사장은 통화를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그러자 사장실 전체에 대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는 활기찼다.
“제이슨! 소식이 안 들리길래 한강 물에 다이빙이라도 했나 했더니, 잘 살아있네!”
제이슨 리는 지금 이 상황이 전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대찬은 꽉 막힌 제이슨 리의 말문이 당연하다는 듯 멋대로 떠들었다.
“이번에 노 사장님 회사에 투자하기로 결정했다면서. 아주 훌륭해. 그래도 한번 데이니까 정신이 차려지긴 했나 봐?”
“야, 야 조대찬…….”
“형한테 야가 뭐야, 인마. 정신 차린 게 아니었네. 싸가지 좀 탑재하지.”
“너… 이 회사랑 계약하고 나중에 지분도 인수하려던 거 아니었어……?”
제이슨 리의 목소리가 염소의 울음소리처럼 떨렸다.
“아쉽지만 불발. 사장님! 그래도 꿩 대신 닭이라고 제이슨이 투자를 결정했으니 그래도 다행이네요.”
“허허, 면전에 대고 닭이라고 어떻게 그럽니까. 그래도 제이슨 씨 덕분에 한숨 돌렸습니다.”
대찬은 쾌활하게 웃으면서 제이슨 리에게 말했다.
“제이슨, 근데 너 목소리가 왜 그래? 너 투자 잘한 거야. 왜 떨고 그러는데.”
“…….”
제이슨 리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대찬은 그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떠들었다.
“너 설마, 어디서 이상한 소문 듣고 투자 결정한 건 아니지? 우리 회사가 태상에 올인 한다든지 뭐 그런 소문. 에이, 아닐 거야. 네가 아무리 팔푼이라도 그 정도는 아니잖아.”
“…….”
하얗게 질렸던 제이슨 리의 얼굴이 이제는 붉게 달아올랐다.
분노보다는 수치심이 앞섰다.
“뭐야, 왜 대답이 없어. 사장님, 아무튼 축하드리고요. 다음에 부산 내려가겠습니다.”
“예예, 조 대표도 이번에 요산과 계약 무사히 끝난 거 축하드립니다.”
대찬은 제이슨 리에게 인사치레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제이슨 리의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졌다.
노태식 사장은 다소 놀란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제이슨 씨, 어디 몸 안 좋습니까?”
“사, 사장님…….”
“예, 말씀하세요.”
“저, 투자 취소할래요.”
그 말에 노태식 사장의 얼굴이 독사처럼 굳었다.
여태 부처님 얼굴을 하고 살았던 그에게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제이슨 씨, 이미 결정이 된 일입니다. 어린애처럼 이러지 마세요.”
“…로튼 프룻츠가 여기에 투자하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이유야 어찌 되었든 제가 관계할 문제는 아닙니다. 중요한 건 제이슨 리는 50억 원 어치의 우리 회사 신주를 사들였고, 저는 신주를 팔았다는 것뿐이지요.”
“사, 사장님, 이건 아니에요.”
“제이슨 씨, 이건 아닙니다. 무리한 요구는 하지 마세요.”
제이슨 리의 눈에 그렁그렁 물기가 고였다.
노태식 사장은 그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발휘하지 않았다.
그건 미리 대찬에게서 그의 악행에 대해 아주 상세히 전해들은 까닭이었다.
노태식 사장은 선인이었다.
누구에게나 착한 사람은 선인이 아니라 호구다.
노태식 사장은 악인에 대해서는 철저히 냉정한 사람이었다.
“자, 이제 우리 태상바이오의 든든한 대주주가 되셨으니 같은 대주주끼리 상견례라도 해야지요?”
“…….”
제이슨 리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저희 회사 대주주는 저와 제 조카 둘, 그리고 저의 오랜 죽마고우들로 이뤄져 있답니다.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노태식 사장이 비서에게 눈짓을 하자, 비서가 그들을 안으로 들였다.
노태식 사장의 조카인 노승훈, 노유훈을 위시하여 노태식 사장의 오랜 친구들인 대주주들이 좁은 사장실을 메웠다.
제이슨 리는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자, 여기는 제 조카 노승훈, 그리고 그 옆이 노유훈.”
노승훈과 노유훈은 고개를 까딱이며 제이슨 리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금방 또 뵙네요.”
“아니, 벌써 제이슨 씨랑 구면이야?”
“예, 삼촌. 우리 회사에 관심을 보이시길래 저희가 신주를 인수하라고 권유했거든요.”
“아아, 그래?”
노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슨 씨가 돈은 많은데 정보력은 좀 부족하신 모양이에요.”
“유훈아, 그게 무슨 말이냐?”
“로튼 프룻츠 내부 자료를 입수하셨다고 했거든요. 거기에 로튼 프룻츠가 우리 회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궁극적으로는 인수까지 할 거라고 했거든요.”
“그래? 허허, 제이슨 씨가 뭘 단단히 착각하셨구만. 아니면 로튼 프룻츠가 잘못된 자료를 작성했든지 말이지.”
“저는 괜히 기대했잖아요. 우리도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설 줄 알았거든요.”
“허허, 나도 잠깐은 기대했더라마는.”
“지구는 둥그니까 로튼 프룻츠 손잡고 자꾸자꾸 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들 다 만나고 올 줄 알았다고요. 쯧, 한여름 밤의 개꿈이었어요.”
노승훈과 노유훈은 제이슨 리의 앞에서 보이던 태도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그들은 숙부인 노태식 사장을 철저히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제이슨 리는 원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노승훈과 노유훈을 쏘아봤다.
그 둘은 제이슨 리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노유훈은 피식 웃으며 그를 부러 도발하기까지 했다.
“제이슨 씨, 그 부족한 실력으로 우리 회사 경영에 괜히 관여하지 마시고 배당금은 꼬박꼬박 챙겨드릴 테니까 뒷방에 물러나 계세요, 아셨어요?”
“이, 이 개새끼가……!”
제이슨 리가 눈물을 왈칵 흘리며 노유훈에게 달려들었다.
노유훈은 그의 가슴을 확 밀어 다시 소파에 처박고는 쯧, 혀를 찼다.
“괜한 소란 피우지 마세요. 경찰 부릅니다.”
제이슨 리는 멍한 눈을 한 채 한참을 소파에 구겨져 있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바쁜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대찬은 부산으로 내려가 노태식 사장을 만났다.
노태식 사장은 그를 반갑게 맞았다.
대찬은 깍듯하게 그를 향해 인사했다.
“사장님, 그간 안녕히 계셨습니까.”
“허허, 조 대표님 덕분에 안녕하고 안녕했지요.”
둘은 노태식 사장이 단골이라는 오래된 식당에 들어가 마주 앉았다.
곰장어를 구워주는 식당이었다.
껍데기가 홀라당 벗겨진 곰장어가 산 채로 뜨거운 불 위에 올려졌다.
거기에 소금까지 뒤집어쓴 곰장어는 몸을 마구 비틀었다.
눈코입이 없는 생물인데도 그것의 고통이 그 몸부림만으로 전해졌다.
대찬은 살짝 진저리를 쳤다.
노태식 사장은 서로 얽혀 불에 타죽는 곰장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찬에게 말했다.
“참, 마음이 불편합니다.”
“곰장어 때문에요?”
“아뇨, 곰장어야 뭐 하루 이틀 먹나요. 그게 아니라 제이슨 씨 때문에요.”
대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 녀석이 왜요, 또 제 버릇 남 못 주고 사장님 괴롭힙니까?”
“아니, 오히려 측은할 정도로 아무 움직임이 없어요. 좀 불쌍하게 됐잖습니까.”
대찬은 곰장어가 익기 전에 기본 안주로 나온 오이를 아삭아삭 씹어 먹었다.
“불쌍하다뇨.”
“아주 인생의 쓴맛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잖습니까. 어떻게 보면 우리가 그 사람을 속여서 이렇게 된 거니까.”
“어떻게 보면이 아니라 우리가 속여서 이렇게 된 게 맞아요. 명명백백히.”
노태식 사장은 쩝, 입맛을 다셨다.
“그게 참 마음이 편치가 않아요.”
불에 타들어 가던 곰장어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몸의 겉면에 그을음이 생기자, 파마머리를 세게 볶은 주인이 와서 가위로 싹둑싹둑 곰장어를 토막 냈다.
대찬은 곰장어가 잘라져가는 모습을 구경하며 노태식 사장에게 말했다.
“사장님은 참 착하신 분입니다.”
“예? 그게 인지상정이지요. 맹자님 가라사대 측은지심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했습니다.”
“제이슨을 두 번 먹이시네요.”
“예에?”
노태식 사장은 눈을 끔뻑거렸다.
“측은지심은 인간의 본성이다. 맞아요. 그렇게 치면 제이슨은 인간이 아니에요.”
“그게 무슨 말씀…….”
“제이슨의 아비인 이두희는 학교 소유의 특허를 해외로 빼돌렸습니다. 도둑질에 해외탈세 아닙니까.”
“…….”
“그렇게 여러 사람의 뒤통수를 쳐놓고 아주 잘 먹고 잘 살았단 말입니다. 그 아비와 그 아들에게 측은지심이란 게 존재했을까요? 그랬다면 그렇게 못하죠.”
“허허…….”
현란한 솜씨로 곰장어를 볶던 주인은 대찬과 노태식 사장의 접시에 같은 양을 덜어주었다.
“식으면 맛이 읎어예. 말씀은 뒤로 미루고 곰장어에 소주 한 잔부터 퍼뜩 하이소.”
“예, 그러겠습니다.”
대찬은 주인의 추상같은 명령을 즉각 받들었다.
소주 한 잔씩을 나눠먹은 대찬과 노태식 사장은 동시에 곰장어 한 점씩을 집어 우물거렸다.
곰장어를 오독오독 씹으니 고소한 풍미가 입 안에 번졌다.
대찬은 곰장어를 씹으면서 노태식 사장에게 말했다.
“측은지심은 인간의 본성인데, 수오지심도 인간의 본성 아니겠습니까?”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측은지심도 없는 막돼먹은 놈을 수오지심을 발휘하여 혼내줬을 뿐이에요.”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더 할 말은 없지만…….”
“그리고 뭐, 우리가 함정 파놓고 유도한 거 아니잖아요. 그놈이 먼저 제 뒷조사 하다가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것뿐입니다.”
노태식 사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곰장어 한 판을 다 해치우자, 식당주인이 다시 가죽이 벗겨진 채로 몸부림치는 곰장어를 다시 갖고 왔다.
그리고 불 위에 부었다.
대찬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노태식 사장에게 말했다.
“측은지심을 발휘한다면 우리, 이 곰장어한테나 발휘하자구요.”
식당주인은 대찬을 못 미덥다는 듯 쏘아보며 툴툴거렸다.
“음식 앞에 두고 문자 쓰고 지랄 났다. 씨그럽구로. 씰데없는 말은 고마하고 술이나 마이 묵고 가라! 알았나!”
“옙.”
대찬은 그 이후로 말없이 열심히 곰장어만 먹었다.
태상바이오는 제이슨 리가 물어다 준 자금으로 자금난을 해소했다.
노태식 사장은 확보된 자금의 상당 부분을 직원들을 위해 할애했다.
대찬은 그걸 두고 경영인답게 하시라, 말을 올리려다가 관뒀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대찬이 가진 경영인답다는 말의 정의와 노태식 사장이 가진 정의가 다를지도 몰랐다.
태상바이오가 몇 십 년째 이 악다구니판에서 건재하게 살아남은 건, 어쩌면 저 노태식 사장의 비합리적인 경영방식 덕분인지도 몰랐다.
대찬은 기초적인 장비 몇 가지를 발주하는 것으로 태상바이오와의 좋은 인연을 이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