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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26화 (426/556)

난 할 수 있어 426화

“에이 씨, 쓸데없는 것만 갖다 주고 있어.”

제이슨 리는 불쾌한 듯 입술을 씰룩였다.

헛돈을 썼다고 생각했다.

분에 못 이겨 이런저런 방법으로 로튼 프룻츠를 괴롭혔다.

그래도 그때는 번거롭기는 해도 돈이 많이 들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돈은 돈대로 쓰고 결과물은 영 시원치 않았다.

“돈값을 못하니까 회사에서도 찬밥 신세지, 병신같이.”

제이슨 리는 짜증이 번진 얼굴로 담뱃불을 붙였다.

한참 담배를 태우던 제이슨 리는 보고서를 한동안 응시했다.

“…….”

그러다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는 거의 피우지 않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보고서를 다시 집어 들었다.

요약문을 뒤로 젖히고 세세한 내용이 쓰여 있는 본문으로 갔다.

그의 시선이 머문 곳은 5페이지.

‘태상바이오와의 협력과정에서의 잠재적 문제점’이었다.

-태상바이오의 지분은 노태식 대표의 소유지분 47%, 노승훈 씨의 소유지분 20%, 노유훈 씨의 소유지분 12% 등으로 구성.

-노태식 대표는 우리 회사와의 파트너십에 매우 긍정적인 반응.

-임직원들의 반응 역시 긍정적.

-노태식 대표는 우리 회사와의 장기적인 관계를 위해 협상에 너그러운 태도를 유지.

-그러나 노태식 대표의 조카이자 대주주인 노승훈 씨, 노유훈 씨는 노태식 대표와 뜻을 함께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짐.

-노승훈 씨와 노유훈 씨는 회사의 장기적인 발전보다는 태상바이오의 가치를 극대화하여 현금화하는 것에 관심.

-태상바이오와의 안정적인 협력을 위해서는 우리 회사가 태상바이오의 상당 지분의 인수 필수.

-이를 위해 대표 일가를 제외한 주주들과 접촉하여 지분을 사들일 필요가 있음.

-다음은 주주의 명단.

보고서를 읽는 제이슨 리의 눈빛이 빛났다.

제이슨 리는 이 보고서의 내용이 사실인지 파악하도록 했다.

적잖은 돈을 받고 그의 심부름을 전담하는 이는 사실이라고 전해왔다.

노태식 사장은 대찬에게 유화적이고, 태상바이오와 로튼 프룻츠의 파트너십이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계약서에 사인만 하면 된다.

노승훈과 노유훈의 상당한 지분이 확인되었으며, 본인들에게 확인한 결과 회사를 매각하여 현금화하는 것을 원한다.

보고서의 내용이 사실로 밝혀지자 제이슨 리는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그는 바로 아버지 이두희를 찾아갔다.

이두희는 아직 아들에 대한 앙금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였다.

어떻게든 전 방위로 몰아치는 어려움을 막아보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하지만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에게서 등 돌린 사람들도 한 트럭이었다.

내놓고는 안 그래도 뒤에서 호박씨를 까는 인간들은 그것의 서너 곱절이었다.

사람뿐만 아니라 이두희의 손을 빠져나간 돈도 상당했다.

그 피해가 아직 고스란히 남은 상태였다.

문제의 시작이자 근원인 아들이 곱게 보일 리 만무했다.

제이슨 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찾아가 말했다.

“아버지, 돈 좀 모아주시면 안 될까요?”

“뭐야?”

이두희의 목소리가 튀었다.

“이자까지 쳐서 금방 상환하겠습니다.”

“얼마나 필요하냐.”

이두희는 역정부터 내지 않았다.

모자란 아들이지만 누울 자리 정도는 보고 다리를 뻗는 아이였다.

저렇듯 말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50억이요. 플러스알파가 있으면 더 좋고요.”

“50억.”

아들의 말에 이두희는 기가 막힌 듯 웃었다.

50억은 돈 좀 만졌다고 자부하는 이두희에게도 작은 금액이 아니었다.

게다가 한바탕 홍역을 치른 마당에 그런 큰돈을 동원할 여력이 모자랐다.

결국 주변의 인맥을 동원하여 투자를 권유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전 같았으면 수월했을 일이다.

그런데 지금은 등 돌린 사람이 워낙 많았고, 여전히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에게서도 신뢰를 크게 잃은 상황이었다.

그러니 이두희의 입장에서 그 돈을 조달하려면 팔자에 없는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투자자를 모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두희는 아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 큰돈을 어디에 쓸 작정이냐.”

“JL인베스트먼트, 이제 그 이름값을 처음으로 해보려고요.”

“돈 날리면 너는 나한테서 영원히 아웃이다.”

“걱정 마십시오. 이 건으로 아버지께 잃은 신뢰도 조금이나마 회복하고, 물질적으로도 보탬이 되려고 합니다.”

“자신 있냐.”

“있습니다.”

이두희의 눈썹이 꿈틀했다.

제이슨 리는 한달음에 부산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노태식 사장과 대립한다던 조카, 노승훈과 노유훈을 만났다.

제이슨 리는 돌려 말하지 않았다.

“로튼 프룻츠 다들 아실 겁니다. 이번에 그쪽에서 태상바이오 측과 큰 계약을 체결하려고 한다던데.”

“네, 저희는 결사반대예요. 계약은 좋은데 너무 헐값에 해주려고 그러거든요.”

“제가 입수한 로튼 프룻츠 측 내부 자료에 따르면, 태상바이오가 로튼 프룻츠의 유일한 구세주더군요.”

노유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도 물렁한 삼촌은 조대찬이 퍼달라는 대로 예예, 하면서 다 퍼주시던데요.”

“두 분 조카께서는 용납하시면 안 됩니다.”

“당연하죠. 뜯어낼 수 있는 최대한으로 뜯어내야지.”

제이슨 리는 그들에게 더 바짝 다가갔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조대찬은 궁극적으로 태상바이오를 인수하려고 들 겁니다.”

“그래요?”

제이슨 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로튼 프룻츠가 지분을 사들인다는 소문이 돌더라고요.”

“소문이 아니라 거의 기정사실이에요.”

“1차 지분으로 교두보를 확보해둔 이후에 야금야금 태상바이오를 집어삼키려고 할 거예요.”

노승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우리 회사가 그렇게 절실하면 아예 손아귀에 넣는 게 좋겠죠.”

노유훈이 노승훈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아예 지금 인수해버리지, 왜 야금야금 답답하게 굴어?”

“로튼 프룻츠가 아무리 덩치가 커졌다고 해도 태상을 한입에 집어삼킬 정도는 아니야.”

“그럼 덩치가 좀 더 커진 다음에 삼키겠다?”

노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제이슨 리가 끼어들었다.

“조대찬은 여우같은 놈이에요. 분명히 태상바이오의 가치가 가장 낮을 때 사들이려고 할 거예요.”

“여우가 아니더라도 그렇게 하는 게 합리적이죠.”

“태상바이오의 값어치를 깎으려고 무슨 수작이든 부릴 겁니다. 두 분은 절대 흔들리면 안 됩니다, 아셨죠.”

제이슨 리는 태상바이오의 지분을 사들이는 것은 길가에 떨어진 돈을 줍는 것만큼 쉬운 투자라고 확신했다.

로튼 프룻츠에 태상바이오 이외의 대안은 없다.

그렇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든 이번 계약, 그리고 차후 인수에까지 뛰어들 것이다.

제이슨 리는 노승훈, 노유훈과 연대하여 대찬을 골탕 먹일 작정이었다.

이번 계약부터 해서 로튼 프룻츠가 지분을 사들이려고 할 때마다 웃돈에 웃돈을 얹어 팔아치울 속셈이었다.

태상바이오가 절실한 로튼 프룻츠는 울며 겨자 먹기로 제이슨 리의 제안을 수락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이슨 리가 상상에 빠져 흐흐 웃는 사이, 노승훈이 말했다.

“우리야 그쪽 말대로 하고 싶지만 문제가 있어요.”

제이슨 리는 눈을 빛냈다.

“지분이 50프로에 못 미친다는 거겠죠.”

“네, 47퍼센트는 삼촌이 갖고 있으니 웬만하면 삼촌 뜻대로 가게 돼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오늘 두 분을 뵙자고 한 겁니다.”

“음?”

“제가 두 분의 지분이 과반에 모자란 만큼의 지분을 사들이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지분을 합하면 과반이 되는 거죠.”

“…정말입니까?”

제이슨 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금 50억. 이 정도면 부족한 지분을 사들이기에는 충분할 것 같은데요.”

“차고도 남죠.”

“다른 대주주의 지분을 사들이려고 하는데, 다리 좀 놔주시겠습니까?”

그러자 노유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어려울 겁니다.”

“어렵다뇨.”

“그분들은 주총에도 안 나오시고 그냥 배당금이나 꿀떡꿀떡 타 드시는 분들이라.”

“프리미엄을 좀 얹어드리면 되지 않겠어요?”

노유훈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가능했으면 저희가 진즉 사들였죠.”

“…그럼 어떻게 해야…….”

“신주발행을 하고 그걸 인수하시죠.”

“노태식 사장님이 수긍하시겠어요?”

노승훈이 제이슨 리에게 말했다.

“의도를 감춘 상태에서 투자의향을 밝히면 삼촌이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요?”

“아, 그것도 그렇네요…….”

“신주를 발행하면 지분이 좀 희석되긴 하겠지만 50억이라면 충분히 의결권을 이쪽으로 가져오는 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으음…….”

기존의 지분을 인수하는 것만은 못하지만 신주를 발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47%인 노태식 사장의 지분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럼 노태식 사장의 사내 장악력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니 내 살도 깎고 남의 살도 깎는 일이었다.

제이슨 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노승훈, 노유훈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었다.

노태식 사장은 현금에 목말라 있었다.

그가 순수한 투자자로 위장한 제이슨 리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 시각.

요산테크닉스의 사장, 남귀성은 대구에서 강남의 로튼 프룻츠 사무실로 올라왔다.

대찬은 평소보다 더 멀쑥한 차림으로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먼 길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지난번에는 조 대표님이 대구까지 내려오셨으니 이번에는 응당 제가 올라오는 게 맞지요.”

남귀성 사장은 혈혈단신으로 올라오지 않았다.

요산테크닉스의 주요 임원들을 좌우에 거느린 채였다.

대찬은 그들과도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요산의 임원들은 깍듯하게 그 악수에 응했다.

로튼 프룻츠의 임원들도 그렇게 했다.

박 이사는 그 임원들의 무리에 섞여 있지 않았다.

대찬은 남귀성 사장과 나란히 앉았다.

이 자리에는 기자 몇몇이 와있었다.

로튼 프룻츠는 회사 규모에 비해 대중의 관심이 높았다.

로튼 프룻츠가 생산단가를 얼마나 낮췄는지, 코테츠키친보다 앞서고는 있는지, 앞으로 장래는 괜찮은지, 국가산업의 한 축을 맡아줄 수 있는지.

대중은 열렬하진 않되 꾸준한 관심을 로튼 프룻츠에 보내주고 있었다.

그런 대중의 관심에 부응하여, 여러 매체에서 기자들이 나와 요산테크닉스와의 계약체결 현장을 담아내고 있었다.

대찬은 한껏 카메라를 의식하며 이날을 위해 마련된 좋은 만년필을 들었다.

대찬은 남귀성 사장과 계약서를 교환하며 서명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남귀성 사장과 악수를 나눴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오늘의 이 계약이 창대한 미래의 시작이라고 믿습니다.”

“하하, 동감입니다.”

대찬과 남귀성 사장은 웃으며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좌우에 도열한 양사의 임원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로튼 프룻츠는 요산테크닉스의 지분 9%를 전격 인수했다.

남귀성 사장 일가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지분을 소유한 대주주가 되었다.

대찬은 개인 자격으로도 요산테크닉스의 지분 1%를 사들였다.

이것으로 로튼 프룻츠와 요산테크닉스는 한 층 더 끈끈한 관계가 되었다.

로튼 프룻츠는 요산테크닉스의 가장 큰 고객이 되었다.

요산테크닉스는 이제 로튼 프룻츠만을 위한 설비를 구축하기 시작할 것이다.

부지는 역시 흥읍이었다.

로튼 프룻츠는 비도축육을 생산하기 위한 공장을 공장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목장이라고 불렀다.

로튼 프룻츠의 첫 번째 목장이 요산테크닉스를 주축으로 한 여러 회사들의 손에서 잉태되기 시작했다.

노태식 사장은 제이슨 리와 악수를 나눴다.

그의 얼굴에는 싱글벙글 웃음이 번졌다.

“감사합니다, 제이슨 씨. 덕분에 회사가 한결 활기차졌어요.”

“무슨 말씀을.”

제이슨 리는 노태식 사장의 얼굴을 보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멍청한 노인네.

당신하고 조대찬 등 뒤에 칼 꽂히는 줄도 모르고 쪼개기는.

노태식 사장은 그런 그의 꿍꿍이속은 전혀 몰랐다.

노태식 사장은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제이슨 리의 투자가 결정되고 차를 한 잔씩 나누며 환담을 나누고 있던 그때.

노태식 사장의 비서가 사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사장님, 로튼 프룻츠의 계약이 성사됐답니다.”

그 말에 제이슨 리는 흐흐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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