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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25화 (425/556)

난 할 수 있어 425화

대찬은 기본적으로 온정적인 사람이지만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다.

사회공헌사업부를 서서히 침몰시키고 있는 자신을 그대로 우대해줄 리가 없었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후배는 씩 웃었다.

“회사 옮겨요.”

“…옮겨?”

“선배가 자기 쪽에서 일해주면 좋겠다던데요.”

박 이사는 귀가 솔깃했다.

원한이든 무엇이든 그게 무슨 관계랴.

로튼 프룻츠와 비슷한 조건으로, 아니 상황이 상황이니 조금 조건이 못해도 좋았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적을 옮긴다면 대찬도 말리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위기도 타개할 수 있다.

그런데 후배는 엉뚱한 소리를 했다.

“단, 근무는 똑같이 로튼 프룻츠에서 하세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로튼 프룻츠의 정보를 이쪽으로 건네주기만 하면 돼요.”

그 말에 박 이사의 낯빛은 흙빛이 되었다.

“지금 나더러 첩자 노릇을 하라는 건가?”

“뭐든 상관없어요. 이 조건만 수락하면 꽤 많은 대가를 지불할 용의가 이쪽에는 있거든요.”

“로튼 프룻츠에 원한이 많은 사람, 그게 누구야.”

“그걸 선배가 굳이 알아서 좋을 게 있을까요?”

“나는 그냥 평범하게 일하고 평범하게 밥 빌어먹고 살고 싶어. 그게 다야. 조대찬 뒤통수를 후렸다가 나더러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라는 거야?”

후배는 웃음을 머금으며 핏물이 몰칵 올라온 고기를 박 이사의 접시에 올리며 말했다.

“안 들키면 되잖아요.”

“조대찬, 그 여우같은 놈을 속일 자신이 없어.”

“그래요?”

후배는 웃으며 탁자 위에 두꺼운 봉투를 올려놓았다.

박 이사의 동공이 흔들렸다.

“확인할 거 없어요. 정확히 2천이에요. 계약금 조로 해두죠. 넣어두세요.”

“돈 2천에 내내 불안 속에 살고 싶지 않아.”

“에이, 2천으로 끝나겠어요? 건수에 따라서 오천이 될 수도 있고, 억이 될 수도 있고 그런 거지.”

“…….”

“걱정 마세요. 내가 무슨 남파간첩인 줄 알아요? 산업스파이처럼 거창한 걸 시키려는 게 아니에요.”

“그럼 뭐야.”

“이쪽도 그렇게 담이 커 보이진 않더라고요. 작은 정보면 돼요. 들켜도 회사는 잘리되 감방은 안 갈 정도의 정보. 무슨 말인지 알죠?”

“아직 하겠다고 안 했어.”

“안 한다고요? 선배, 멍청하게 살지 맙시다.”

후배의 도발에도 박 이사는 역정을 내지 않았다.

400장의 5만 원 권은 봉투에 갇혀 있어도 돈 냄새를 진하게 풍겼다.

박 이사는 술을 더 마시지 않았다.

맑은 정신으로 식당을 나섰다.

안주머니에 두툼한 돈 봉투를 지키려면 정신이 맑아야 했다.

돈 봉투와 맞닿은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는 허둥거리는 걸음으로 갈 길을 재촉했다.

그때 갈 길 바쁜 그의 앞을 누군가가 막아섰다.

박 이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대, 대표님.”

대찬이었다.

대찬은 묘한 웃음을 머금으며 박 이사의 가슴에 손을 갖다 댔다.

“선물 받으셨나 봐요.”

“…….”

박 이사의 눈동자는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해 동서남북으로 굴렀다.

대찬은 얕은 한숨을 쉬고 그에게 말했다.

“잠깐 차에 타세요.”

말을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대찬은 그를 조수석에 앉히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분노를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했다.

시선은 차마 그쪽으로 향하지 못했다.

운전 중에나 지켜야 할 전방 주시를 대찬은 시동이 꺼진 상태에서 철저하게 준수했다.

그는 최대한 정제된 목소리로 박 이사에게 말했다.

“요즘 이래저래 귀찮은 일들이 있었거든요.”

“…….”

“흥읍에 있는 연구소 건물에 불법 증축 신고가 들어왔어요. 불법은 불법이긴 한데, 되게 미미한 거였거든요?”

“…….”

“돌아가신 어르신이 그런 걸 꼼꼼하게 안 따지시고 건물을 지으셨나 봅니다. 하기야, 누가 그 벽지까지 와서 쓸데없는 파파라치 노릇을 하겠습니까.”

“…….”

“거기에 은오영 소장님한테는 괜한 시비가 걸렸다나 봐요. 일전에 주먹 잘못 휘두른 전력을 어떻게 알았는지,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 같았어요.”

“…….”

“다르샨 싱 전무님한테는 뜬금없이 인종차별적인 이메일이 오고요. 세무서에 우리가 탈세를 한다고 허위 신고가 들어오고, 안 그래도 이사님 심란하셔서 이런저런 일들 일일이 말씀 안 드렸었거든요.”

박 이사는 쌕쌕 가쁘게 숨을 쉬었다.

“그래서 요새 초비상 상태였어요. 어디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니까 자질구레한 것까지 직접 챙기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이사님한테 더 모질게 했습니다.”

박 이사는 대찬을 흘끔 보다가 이내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그를 오래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모든 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이사님이 정시 퇴근하시더라고요. 이 과장님한테는 친구 만난다고 하셨다면서요.”

“…….”

“이사님 치부 드러내기 꺼리시잖아요. 가까운 사이일수록 오히려 옷깃을 여미시잖아요. 그런데 이 상황에서 친구를 만난다.”

“…….”

“그럼 그 친구는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면 친구가 아닐 것이다.”

“…….”

“만약 친구가 아니라면, 무슨 꿍꿍이속이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걸음이 저절로 옮겨지더라고요. 미행은 취미가 아닌데 박 이사님 뒤를 밟았습니다.”

“…….”

“민 선배, 은 소장, 싱 전무. 우리 회사 요인들은 한 번씩 푸닥거리를 했는데 유독 박 이사님 쪽만 조용했거든요.”

“…….”

“그렇다면 언젠가 박 이사님한테도 마수를 뻗칠 것이고, 절대적인 제 조력자인 그 사람들과는 달리 박 이사님은 동떨어지고 무력한 신세이니…….”

“…….”

“그 마수의 형태가 달랐겠죠. 위협이나 도발의 형태가 아니라 유혹과 회유의 형태를 띠었을 것이다.”

대찬은 박 이사의 외투에 다시 손을 올렸다.

대찬의 손길에 박 이사는 진저리를 쳤다.

묵직한 돈 봉투의 감촉이 대찬의 손끝에 전해졌다.

“누굽니까.”

“…….”

“누가 이사님한테 돈을 줬습니까.”

“모릅니다.”

“정말 이딴 식으로 나올 겁니까!”

좁은 차 안에서 대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공명했다.

박 이사는 목을 움츠렸다.

“저, 정말 모릅니다. 제가 만난 사람은 정말 친구예요. 고등학교 후배라고요.”

“고등학교 후배가 갑자기 불러내서는 이 큰돈을 덜컥 안겨줬다고요? 절 얼마나 바보 천치로 아시는 겁니까?”

대찬은 박 이사가 맘 편히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박 이사는 읍소했다.

“그 친구도 누구 사주를 받고 말만 전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정말이에요. 누가 있기는 있는데, 그게 누군지 정말 모릅니다!”

“그럼 그 돈의 대가로 그쪽에서 원하는 게 뭡니까.”

“…….”

박 이사는 말이 목구멍에 턱턱 걸려서 즉답하지 못했다.

“바로 대답 안 하시면 의심만 더 커질 뿐입니다. 말씀하세요.”

“정보, 정보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 정보를 특정하진 않았습니까?”

“네, 그렇다고 산업스파이 노릇을 시킬 생각은 없다고 했습니다.”

대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기술을 빼 갈 의도는 없다?”

“일단 저를 안심시키려고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 그런 건지 정확히는 모릅니다.”

“안심시킬 말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굳이 자신들한테 이로울 게 없는 단서를 그렇게 확실하게 달아놓을 필요가 없어요.”

“다만 무엇이든 좋으니 정보를 달라고 했습니다. 아, 그리고.”

“그리고?”

“대표님께 원한이 깊은 분이라고 했습니다.”

“원한이 깊다…….”

대찬이 잠시 고심하는 사이, 박 이사가 싹싹 빌었다.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돈 봉투가 없었으면 변명의 여지가 있으셨겠죠.”

“죄송합니다. 정말 제가 이러면 안 되는 건데.”

“이러셨군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자신의 앞에서 울음을 짜내는 오십 대를 대찬은 묵묵히 바라봤다.

이 인간을 어쩌면 좋아.

대찬은 분노와 측은지심이 동시에 들었다.

그는 한숨을 쉬고 박 이사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경위야 어찌 됐건 제 등에 칼을 꽂으려고 했던 분을 계속 기용할 순 없습니다.”

“…….”

“하지만 일단 기회를 드리죠.”

“기, 기회요.”

“제 말씀만 잘 따라주시면 이 회사는 아니지만 식구들 굶기지 않을 자리는 마련해드리죠.”

“아, 알겠습니다.”

“허튼수작 부릴 생각은 관두십시오. 이사님 신상에 결코 이롭지 않을 겁니다.”

“제가 염치없게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이사님 염치는 진즉에 없고요. 한 번 더 뒤통수를 치시면 그땐 마이너스 염치가 되는 겁니다. 사람이 아닌 겁니다.”

박 이사는 침을 꼴깍 삼키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박 이사를 보내고, 대찬은 운전대에 얼굴을 묻은 채 고심했다.

“나한테 원한이 있는 사람이라.”

대찬은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다.

그런 것 치고는 인심을 크게 잃지 않았다.

다만, 떠오르는 몇몇 얼굴들이 있었다.

“그 인간들 중에 이런 수고로운 작업을 할 정도로 할 짓 없는 인간, 그리고 거금을 아무렇지 않게 쾌척할 수 있는 인간…….”

대찬은 용의선상에서 어중이떠중이들을 지워냈다.

원한은 깊되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인간, 그러니까 이젠 이름마저 가물가물한 유백기 같은 인간.

복수도 형편이 돼야 하는 것이다.

유백기 같은 녀석이 이제 와서 복수를 하겠답시고 이 정도의 돈과 시간을 들일 리는 만무하다.

“시마 회장이나 그린블러드도 아니야.”

그들이 그랬다면 로튼 프룻츠의 기술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을 것이다.

그런데 기술에는 관심이 없다고 명시적으로 못을 박았으니 그들도 아니다.

“극동일보도 아니야.”

극동일보의 조대찬 ‘담당’인 구본진은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걸어오지 않는다.

자신을 고고한 선비의 후예로 여기는 구본진은 글로 시비를 건다.

사건이 발생하면 그걸 이용해 대찬을 포박하려들지, 구태여 이런 식으로 사건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이런저런 가능성을 다 제하고 보니 대찬의 뇌리에는 오직 한 사람이 남았다.

“우리 불쌍한 제이슨.”

대찬은 한심스럽기 그지없는 그 이름을 다시 발음했다.

“제이슨 리…….”

돈도 많고, 시간도 많고, 원한도 깊은, 그리고 이렇게 유치하고 악착같은 이는 제이슨 리뿐이었다.

그렇잖아도 이래저래 스트레스가 쌓여있던 대찬이었다.

이런 와중에 하이에나처럼 얼쩡거리는 제이슨 리가 혐오스러웠다.

대찬은 운전대에 박았던 고개를 다시 꼿꼿이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박 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사님, 잘 듣고 제 말대로 하세요.”

“마, 말씀만 하십시오.”

대찬은 제법 품을 들여 차근차근, 박 이사에게 설명했다.

박 이사는 잔뜩 경직된 자세로 그의 말을 차분히 들었다.

박 이사는 한동안 후배에게 정보를 던져주지 않았다.

열흘쯤 되자 후배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참다못한 그는 박 이사에게 전화를 걸어 채근했다.

“선배, 설마 2천 받고 먹튀 하려는 건 아니죠?”

“먹튀가 아니야. 정보를 빼내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아.”

“아니, 아무거나 괜찮다니까요? 옥석은 우리가 골라요.”

“그래도…….”

“선배는 그냥 아무 정보나 좀 던져주라고요. 선배가 묵묵부답이니까 저도 괜히 쪼이잖아요. 나도 생업이 있는 사람인데. 저놈들 때문에 내 생업에 지장이 있다니까요?”

“…알았어.”

한참 뜸을 들이던 박 이사는 후배에게 몇 장의 서류를 전달했다.

그 서류들에는 다르샨 싱 전무가 최종 검토 한 보고서가 섞여 있었다.

제목은 대량생산 체제를 위한 설비 구축의 건.

30페이지짜리의 두툼한 보고서였다.

첫 장에는 할 일 많은 윗선을 위한 간략한 요약문이 차지하고 있었다.

요약문의 내용은 이랬다.

-기술개발의 완수와 동시에 대량생산 체제에 돌입해야 한다.

-이를 위해 조속히 장비 및 설비 구축에 돌입해야 한다.

-태상바이오는 우리 회사가 원하는 수준의 기술과 여건을 보유한 국내 유일의 기업이다.

-태상바이오테크에 장비 및 설비의 구축을 의뢰한다.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관계유지를 위해 태상바이오에 지분투자가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한다.

-태상바이오는 현재 자금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 투자유치에 적극적이다.

-우리 회사의 지분투자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 확실시된다.

요약문을 다 읽은 제이슨 리는 탁자에 보고서를 툭 던지듯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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