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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24화 (424/556)

난 할 수 있어 424화

“글쎄요.”

“조 대표도 박 이사님 걱정을 많이 합니다. 미워서 그런 게 아니에요. 어떻게든 품고 가고 싶어서 더 모질게 하는 겁니다.”

“압니다. 왜 모릅니까. 저도 민 전무님만큼이나 조 대표 심성 잘 압니다. 그런데.”

“그런데?”

박 이사는 답답한 듯 대번에 술을 넘겼다.

“조 대표도 많이 변했어요. 나를 보는 눈빛이 많이 변했더라고. 나는 숫제 짐 덩어리예요.”

“이사님.”

“안 변할 수가 있나요. 아니, 변해야만 하죠. 변하지 않고서야 그 무거운 짐을 어떻게 다 짊어지고 가겠습니까.”

“…….”

“짐을 잔뜩 짊어졌으니 쓸모는 없는데 무겁기만 무거운 나 같은 짐은 얼른 내던지는 게 맞겠죠.”

“그렇게 말씀하지 마시라니까요.”

박 이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분수에 안 맞게 너무 큰 소임을 맡았어요. 실망시켜 드려서 전무님께도, 조 대표에게도 미안합니다.”

“무슨 벼랑 끝에 몰린 것처럼 말씀하세요. 아직 기회는 많아요.”

“…….”

민승기는 박 이사의 잔을 채우며 타이르듯 말했다.

“자, 그렇게 좌절만 하고 계시면 뭐가 달라진답니까?”

“…….”

“변해진 모습을 보여주자고요, 조 대표한테. 그래서 조 대표가 이사님께 모질게 대한 거, 아주 민망해지도록 하자고요.”

“허허…….”

박 이사는 난감한 듯 웃었다.

누군들 안 변하고 싶을까.

다만 그 변화된 모습이 현상 유지도 어렵게 만들 정도로 부작용을 낳을까, 그게 두려울 뿐이다.

그의 주저하는 모습에 민승기는 답답한 듯 살짝 목소리를 키웠다.

“그럼 이대로 박 이사님 스스로 비풍초똥팔삼으로 전락할 작정이세요? 멋지게 한 방 먹여줘야지.”

“무슨 좋은 수가 있겠어요?”

민승기는 당당하게 웃었다.

“친한 후배한테 아이템 하나를 받아왔어요. 이게 제법 단위가 크거든요.”

“…그래요?”

“이거 잘만 성사시키면 조 대표도 이사님을 다시 볼 겁니다.”

“한번 자세히 말씀해주시죠.”

박 이사는 스스로 우물을 찾아 떠나기에는 게으른 성품이었다.

하지만 물을 떠먹여주겠다는데도 마다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그는 민승기의 말에 반응을 보였다.

민승기가 알선해준 건수는 과연 그 규모가 작지 않았다.

장비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열악한 상황에 놓인 소방관들을 위한 크라우드 펀딩이었다.

명시적인 목적은 소방관의 노고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회사나 다 그렇듯, 숨은 목적은 순수한 이타심이 아니었다.

떠들썩하게 크라우드펀딩을 진행해서 회사의 이미지를 제고시키겠다는 게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이 회사는 로튼 프룻츠 측에 크라우드펀딩의 광고를 의뢰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민승기가 그 의뢰를 받아냈다.

크라우드펀딩 자체를 홍보해서 더 많은 지원을 소방관들에게 하겠다는 선한 목적이 아니었다.

선한 목적으로 크라우드펀딩을 실시하는 회사를 홍보하기 위함이었다.

박 이사는 이 의뢰에 의욕적으로 달려들었다.

민승기의 성의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잘 해내야만 했다.

만일 이것조차도 잘 해내지 못한다면.

박 이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대찬에 이어 민승기에게서도 신뢰를 잃을 공산이 컸다.

그럼 정말 이 회사에서 박 이사가 설 자리는 사라지게 된다.

그는 배수진을 치고 죽기 살기로 달려들기로 결심했다.

“선배, 내가 웬만하면 클레임 안 넣으려고 했는데 진짜 이건 아니잖아요.”

대찬은 학내 동아리 로튼 프룻츠가 에피니키온이었던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후배로부터 잔뜩 짜증 돋친 전화를 받아야만 했다.

등 뒤에 강물을 두고 죽기 살기로 덤비겠다는 각오를 보여주는 배수진.

실은 이 배수진은 자살행위와 다름없다.

역사상 한신이 구사했던 배수진은 필사즉생의 각오를 무식한 방법으로 표출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무식한 배수진은 임진왜란 때 전멸을 면치 못했던 신립처럼 비참한 결과를 낼 뿐이었다.

박 이사의 배수진 역시 그런 결과를 내보이고야 말았다.

현상 유지의 달인인 그가 목숨을 걸고 파격적인 광고를 제작했다.

의욕만 앞서고 능력이 따르지 못하니 결과물은 참담했다.

이런 광고는 대개 보는 이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형태로 제작된다.

목장갑을 끼고 화마와 사투를 벌이는 소방관.

그을음 때문에 검게 흐르는 땀방울을 닦는 목장갑 낀 소방관의 손을 클로즈업.

잔잔하고도 비장한 배경음악.

그리고 간결한 캐치 프레이즈.

그거면 된 것이다.

그런데 박 이사는 터무니없는 모험을 감행했다.

그의 광고는 아주 간단했다.

흑백 화면.

덩그러니 놓인 목장갑.

배경음악 없음.

10초 간 목장갑을 보여준 후, 떠오르는 글씨.

‘목장갑의 주인은 목수, 소방관의 장갑은 소방장갑입니다.’

이어서, ‘소방관에게 소방장갑을, 크라우드펀딩 진행 중.’

소위 ‘심플 이즈 베스트’라지만 이건 터무니없었다.

박 이사는 제작비용을 최소화하면서 광고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했다.

실제로 이 광고를 촬영하는 데는 목장갑 한 켤레만큼의 값만 들어갔다.

최저예산으로 최고의 효과를 낸다면 자신의 떨어졌던 위상을 바로 회복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의 계획대로 최고의 효과가 나왔다면 더 없이 훌륭한 한 수가 됐겠으나, 불행하게도 박 이사의 광고는 최저예산으로 최저효과를 내고 말았다.

대찬의 후배는 평소 신뢰해 마지않던 민승기에게 변함없는 신뢰를 보냈다.

그렇기에 확인 절차 없이 바로 로튼 프룻츠로부터 결과물을 받겠다고 호언장담했다.

호언장담의 결과는 참혹했다.

로튼 프룻츠에서 넘어온 결과물을 본 후배의 상사는 길길이 날뛰었다.

한바탕 홍역을 치른 후배는 상사에게서 전달받은 짜증을 대찬에게 고스란히 전달했다.

“…미안하다.”

대찬은 더 둘러댈 말이 없었다.

그의 짜증은 정당했다.

“선배, 로튼 프룻츠 잘 나간다고 진짜 이렇게 성의 없으면 곤란해요.”

“내가 진즉 확인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어. 미안하다. 광고는 다시 제작해서…….”

“됐어요. 뭘 믿고 또 로튼한테 일을 맡겨요. 로튼이 양심이 있으면 계약 철회하고 선수금 되돌려주세요.”

“…그렇게 할게. 사과의 의미로 다음에 술…….”

평소 대찬에게 스스럼없이 존경심을 표하던 후배는 대찬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말을 잘랐다.

“끊을게요.”

뚝.

대찬은 통화가 종료된 휴대전화를 한참 꼭 쥐고 있었다.

업계는 소문이 빨랐다.

로튼 프룻츠에 의뢰되었던 광고 두 건이 빛의 속도로 취소되었다.

대찬은 입술을 꼭 깨물고 속으로 되뇌었다.

‘소리 지르지 말자, 소리 지르지 말자, 소리 지르지…….’

“박 이사님!”

대찬은 자기최면에 실패했다.

그의 목소리가 사무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이미 상황파악을 마친 박 이사가 축 처진 몸을 일으켰다.

대찬의 눈이 불타올랐다.

“저한테 억하심정 있으세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있습니까?”

“죄송합니다. 의욕이 너무 앞서서…….”

“그런 되도 않는 변명 듣고 싶지 않아요.”

“…….”

대찬의 언성은 가라앉았지만 분노는 여전했다.

그는 박 이사를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로튼 프룻츠 창사 이래, 대찬이 임직원에게 이런 눈빛을 보낸 것은 최초였다.

“저는 박 이사님한테 전권을 맡겼습니다. 믿음을 이렇게 배신하시는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사회공헌사업부에 대단한 걸 바랐습니까? 저도 염치가 있는 사람이에요. 사회공헌사업부, 지금 어려운 거 알고 있다고요.”

“…….”

“박 이사님이 평소 하시던 것에 한 발짝, 두 발짝만 더 나가면 그걸로 만족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건 도대체……!”

박 이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이 없었다.

그의 분노가 박 이사 휘하의 직원들에게로 번졌다.

“사회공헌 직원들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박 이사님 안 말리고 뭐 했습니까!”

“지, 직원들은 만류했습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그래요? 그럼 전적으로 박 이사님 잘못이군요. 아니, 전적으로 제 잘못입니다. 박 이사님한테 전권을 맡기는 게 아니었습니다.”

대찬의 분노가 사그라질 줄을 모르자, 민승기가 급히 진화에 나섰다.

“조 대표, 필요한 말만 해.”

대찬은 두통이 지끈지끈 오르는 이마를 짚었다.

“방금 말은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번 결과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저와 박 이사님 둘에게 있습니다. 부정 못하시겠죠.”

“…예.”

“당분간 하던 업무만 관장하시고 광고제작 업무에서는 손 떼세요. 이 과장님.”

“네!”

대찬의 성마른 부름에 이 과장이 얼른 몸을 일으켰다.

“앞으로 들어오는 광고제작은 이 과장님이 총괄하세요. 별도로 제 지시가 있기 전까지.”

“하, 하지만…….”

이 과장은 슬그머니 박 이사의 눈치를 살폈다.

대찬은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세요.”

“알겠습니다…….”

대찬은 후, 한숨을 몰아쉬었다.

“박 이사님, 의욕도 알고 노력도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건 정말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한 나흘 휴가 다녀오세요. 가서 머리 좀 식히고 오세요.”

“아닙니다. 일하겠습니다.”

“이건 박 이사님을 위한 판단이 아니라 회사를 위한 판단이에요. 회사를 위해서 가세요, 휴가.”

“…예.”

박 이사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박 이사의 마음은 참담했다.

‘나 어떡하냐.’

그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모처럼 주어진 기회를 살리기는커녕 최악의 결과만 초래하고 말았다.

이제 반전의 카드는 없다.

남은 선택지는 몇 개 되지 않았고, 그것들은 모두 박 이사에게 가혹한 것이었다.

퇴사는 명예는 지키지만 생계는 지키지 못한다.

자진해서 임원 자리에서 내려와 다시 부장이 되는 건 그 반대다.

물론 자진해서 내려온다 해도 대찬이 승인해준다는 보장은 없었다.

며칠간의 휴가에서 돌아왔어도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마음가짐도 그대로, 주변상황도 그대로였다.

박 이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오전 아홉 시부터 오후 여섯 시까지 가시방석 위에 앉아 있었다.

그러던 차에 그의 고등학교 후배가 연락을 해왔다.

오랜만에 술 한잔하자는 게 용건이었다.

속이 답답하던 박 이사는 흔쾌히 그 제안에 응했다.

정시에 퇴근한 그는 후배와 둘러앉았다.

후배는 웃으며 술을 따라주었다.

“요즘 할 만해요?”

“할 만하긴, 거지같다.”

“이사님이 거지면 여태 차장인 난 뭐예요?”

“이사 그거, 하나도 소용없다. 일 못하면 이사의 ‘사’자가 죽을 ‘사’자야.”

“암튼 옛날부터 선배 엄살 심한 건 알아줘야 돼.”

“엄살 아니다.”

박 이사의 후배는 선배의 안색을 살폈다.

박 이사의 얼굴은 우중충했다.

“왜, 요즘 일 있어요?”

“일단 한 잔 먹고 말하자.”

소주를 입 안에 탈탈 털어 넣은 박 이사는 후배에게 그대로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지금껏 응어리진 속을 누구에게 시원하게 털어놓지 못했다.

아내에게 말하자니 이번 달 생활비가 어쩌고 하는 생계의 문제에 말문이 턱 막힌다.

자식에게 말하자니 사춘기다.

부모에게 말하자니 이제 없다.

부하 직원에게 말하자니 신세가 우스워진다.

그러니 적당히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고등학교 후배에게나 털어놓을 수 있었다.

한참 말을 듣던 후배는 피식 웃었다.

“이야, 이거 예상보다도 개판이네요.”

“놀리냐.”

“요즘 선배가 맡고 있는 사업부 실적이 영 아니라 분위기가 안 좋을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거든요.”

박 이사는 음식을 집던 젓가락을 탁 내려놓으며 퉁명스레 반응했다.

“네 회사나 잘 건사할 것이지 남의 회사 사정에 왜 관심을 둬?”

“이유가 있어요.”

“이유라니.”

“로튼 프룻츠에 원한이 많은 사람한테 청탁이 들어왔거든요.”

“뭐?”

“나도 심부름꾼일 뿐이에요. 갑자기 나한테 찾아와서는 선배랑 같은 학교 나오지 않았냐고 그러더라고요.”

박 이사는 불안한 눈빛으로 후배를 바라봤다.

후배는 말을 이었다.

“무슨 원한이 그렇게 사무쳤는지 몰라도 공부 많이 했더라고요. 로튼 프룻츠의 약한 고리가 선배인 걸 알더라고요.”

“…….”

“하기야 수익률이 개판이니까 약한 고리일 수밖에 없겠네요. 근데 이거 들어보니까 예상보다도 더 심각하잖아요, 상황이.”

“야.”

“그쪽이 그러더라고요. 선배 좀 꼬셔보라고. 저도 성과가 있어야 수당을 더 쳐서 받거든요?”

“…….”

“선배, 선배는 지금 시한부예요. 로튼 프룻츠에 있으면 분명히 재계약 실패할 거예요.”

“…….”

박 이사는 아니라고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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