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23화
무언의 질문을 받은 다르샨 싱 전무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은 소장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럼 태상과 손을 잡으면 생산에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이 높습니까?”
“차질까지야 모르긴 합니다만, 우리가 요구하는 수준에 다소 못 미치는 건 사실입니다.”
“으음…….”
은오영 소장은 쩝, 입맛을 다시며 대찬에게 말했다.
“그래도 태상에 마음이 가기는 해요. 사장님 인상도 좋고, 인상만큼 마음씀씀이도 좋고, 그렇죠?”
그는 대찬이 자신의 의견에 당연히 동의하리라 생각했다.
노태식 사장은 대찬이 존경할 가치가 충분한 사람이니까.
그런데 웬일인지 대찬의 얼굴에는 찬바람이 불었다.
“우린 태상바이오와 계약 안 합니다.”
“예, 예에? 그게 무슨…….”
은오영 소장의 눈이 커졌다.
다르샨 싱 전무도 대찬에게 말했다.
“좀 아쉽다, 정도이지 아예 후보에서 제외할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대표님.”
“기술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럼…….”
“노태식 사장님 때문입니다.”
“예? 사장님 때문에 계약을 하겠다는 거면 모를까, 사장님 때문에 계약을 안 하겠다는 건…….”
대찬의 얼굴에 씁쓸한 기운이 감돌았다.
“노태식 사장님의 마인드는 분명 본받을 만합니다. 인간적인 호감을 품고 있는 걸로 따지자면 소장님보다 제가 훨씬 깊을 겁니다.”
“그런데 왜…….”
“본말이 전도됐어요.”
“본말이 전도돼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태상 직원이 나와서 하는 말 들으셨죠.”
“아, 예…….”
“복리후생, 좋죠. 그런데 노태식 사장님은 독지가가 아니라 사업가예요. 직원들 뒷바라지 하느라 회사 재정을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뭐, 내내 튼튼한 회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네, 차라리 신기술 개발에 자금을 과하게 들이부었다가 휘청거렸다면 참작이 되겠죠. 하지만 이건 참작이 안 됩니다.”
은오영 소장은 머쓱하게 웃었다.
“뭐, 우리는 직원이라면 직원이니까. 노 사장에게 마음이 기우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왜요, 이직하고 싶은 요구가 막 꿈틀거리셨어요?”
“그건 아니고요.”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태상 직원은 자신의 읍소로 사장을 돕고 싶었겠지만, 오히려 결과는 그 반대가 되었네요.”
“하지만 회사 신용등급이 최악인 것도 아니고, 그것 하나만으로 태상과 계약하지 않겠다 하시는 건…….”
“그 직원이 아니었어도 저는 태상과의 계약을 망설였을 거예요. 기술력이 무난한 정도여서는 곤란해요. 확실해야 해요.”
“물론 그렇지요.”
은오영 소장은 못내 아쉬운 듯 연신 입맛을 다셨다.
대찬은 남은 커피를 해치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구에 있는 업체로 가보죠. 그쪽에서는 소득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대찬의 희망은 이뤄졌다.
대구에 있는 업체는 로튼 프룻츠가 원하는 조건에 부합했다.
전반적으로 기술이 탁월한 회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로튼 프룻츠가 원하는 분야의 스페셜리스트였다.
로튼 프룻츠가 원하는 만큼의 설비를 맞춤 제작 할 수 있느냐, 그것만을 잣대로 삼는다면 유수의 글로벌 기업들과 비교했을 때 전혀 뒤지지 않았다.
비용 측면에서 강점이 있었으니 오히려 더 낫다고 해야만 했다.
대구에 위치한 요산테크닉스라는 회사였다.
요산테크닉스는 태상바이오보다 훨씬 안정적인 재무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노하우도 체계적으로 축적되어 있었다.
물론 태상바이오와의 미팅 때보다는 다분히 사무적이고 딱딱한 대화가 오갔으나, 사무를 보는 데 사무적이면 충분했다.
대찬은 다르샨 싱 전무와 은오영 소장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어때요?”
은오영 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할 나위 없습니다.”
대찬이 다르샨 싱 전무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그 역시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대찬은 빙긋 웃었다.
“잘 됐네요. 더 품을 팔아야 되나 걱정했는데.”
“대표님, 한 가지 제안을 더 드리고 싶은데요.”
“말씀하세요.”
“요산테크닉스는 장기간 파트너십을 구축할 가치가 충분한 회사입니다.”
“요산 측의 설명과 두 분 의견을 들어보면 그런 것 같네요.”
“그래서 말씀인데, 아예 요산에 지분투자를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 말에 대찬이 대답하기도 전에 은오영 소장이 먼저 호들갑을 떨었다.
“계약만 잘 맺어두면 되지, 무슨 투자씩이나!”
“아, 물론 그런 건 대표님 소관이고 제가 관여할 부분이 아닌 건 압니다만.”
은오영 소장은 픽 콧방귀를 뀌었다.
“이거, 이거, 전무 직함 달았다고 자기가 비즈니스에 일가견이 좀 생긴 줄 착각하네.”
“아니, 나쁘지 않아요.”
“에?”
대찬은 은오영 소장에게 맞장구를 쳐주지 않았다.
대찬은 다르샨 싱 전무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여겼다.
“요산테크닉스의 설비는 우리에게 필수예요. 지금이야 요산이 간택을 기다리는 입장이니 우리에게 고분고분하다지만.”
“나중에 규모가 커지고, 요산의 필요성이 확고부동해지면 원숭이 꽃신처럼 급한 건 우리가 될 수도 있어요.”
“맞습니다. 그때 가서 배수진 치고 배짱 튕기면 예상 이상의 지출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요.”
은오영 소장은 뚱한 얼굴로 반박했다.
“그럼 그때 가서 지분을 사들이면 되잖습니까?”
“우리가 사업에 성공해서 대성하면, 요산도 대성할 거예요.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자금을 투입해야 그쪽을 흔들 수 있을 겁니다.”
“우리 속셈을 그쪽도 뻔히 알 텐데 지분투자를 지금 승낙해줄까요?”
대찬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쪽이야 거절할 이유가 없죠. 투자금이 곳간에 더미로 쌓여 있는 우리가 특이한 케이스입니다. 대개의 회사는 항상 투자에 목말라 있어요.”
다르샨 싱 전무가 대찬의 말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가 경영권을 위협할 정도의 지분을 얻겠다는 것도 아니고, 서로의 발전적인 관계를 위해 더 밀착하자는 거니까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네, 우리의 성공은 우리에겐 당연히 상수지만.”
“저쪽에는 불안한 변수겠죠.”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우리의 성공을 확신하진 않을 겁니다. 실패 가능성도 꽤 크다고 볼 거예요.”
“파트너의 불확실한 미래를 보고 괜히 배짱을 튕기느니, 당장 자금을 수혈받는 게 그쪽에서도 훨씬 이득이죠.”
“아주 쿵짝이 예술로 맞으시네.”
소수의견으로 전락한 은오영 소장은 꿍얼거렸다.
“계약을 맺을 때 우리의 지분투자를 승낙한다는 조건을 내걸면 저쪽에서도 굳이 문을 걸어 잠그진 않을 겁니다.”
“만약 거부한다면 저쪽하고도 손 털어야죠. 그런 멍청한 회사하고 2인3각 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은오영 소장은 허공을 바라보며 장탄식을 뱉었다.
“아아, 태상바이오 노 사장의 부푼 꿈은 물거품으로 꺼지는구나.”
대찬은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
“소장님 뭐 태상한테 뒷돈 받았어요? 왜 이렇게 태상을 챙기셔.”
“착한 사람한테 마음이 기우는 건 인지상정이랍니다, 독사 같은 사장님요.”
“독사는 무슨.”
대찬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대찬은 요산테크닉스와 구두로만 입을 맞추고 상경했다.
일단 기초적인 합의에는 도달했지만, 서로 서명하기에는 따져볼 것이 산적해 있었다.
즉석에서 확인될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꽤 많은 인력과 시간이 동원되어 확인하고, 서로 줄다리기를 해야만 했다.
대찬은 요산테크닉스의 대표와 간단히 술잔만 나누고 바로 복귀했다.
한동안 다르샨 싱 전무의 업무는 로튼 프룻츠에 가장 유리한 형태의 계약서를 만들어내는 것이 되었다.
대찬은 태상바이오의 노태식 사장에게 전화로 이 같은 사실을 통보했다.
“사장님, 아무래도 태상과는 같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쉽군요. 혹시 저희 대신 낙점된 회사가 어딘지 알 수 있겠습니까.”
“죄송하지만 본 계약이 체결되기 전까지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지요. 그러겠지요.”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장님과는 좋은 관계를 맺고 싶었는데, 돈 아래 인정을 둘 수는 없다보니 안타깝게 됐습니다.”
“어디 비즈니스 파트너만 좋은 관계인가요.”
“아,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나중에 부산에 오시거든 연락 주세요. 물론 나 말고도 조 대표님 떠받들어 줄 사람이 널리긴 했습니다마는, 상황이 정히 어렵게 되면 절 찾아주시지요.”
좋지 않은 소식을 전달했음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는 노태식 사장의 기색에 대찬은 인간적인 미안함을 느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사장님.”
“조 대표는 제 안부를 잘 모르겠지만, 저는 아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가끔 뉴스 보다 보면 조 대표님 성함이 나오거든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대표님을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전화를 끊고도 대찬의 입 안에는 쓴맛이 오래 머물렀다.
요산테크닉스와의 줄다리기 협상이 타결될 기미를 보였다.
무사히 골인 한다면 로튼 프룻츠의 청사진이 한 차원 더 구체적으로 그려질 것이었다.
이렇게 비도축육 사업부가 손발이 착착 맞아가며 발전을 거듭하는 사이.
사회공헌사업부는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사회공헌사업부의 성과는 여전히 필래그룹의 자회사 웜샤인 시절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필래그룹으로부터 들어오는 투자금은 기존의 1억에서 3억으로 야금야금 늘어나있었다.
이 투자금은 사회공헌사업부의 밑천으로 사용되었다.
사회공헌사업부를 총괄하는 박 이사는 이를 가지고 어떻게든 수익을 내보고자 악전고투했다.
그러나 그의 능력에는 한계가 분명했다.
타고난 천재가 아닌 이상, 회사에서 여기저기 부딪치며 무르익어가는 게 보통의 회사원이었다.
박 이사에게도 여기저기 부딪치는 시련은 있었다.
당장 그럴듯한 계열사에서 듣도 보도 못한 웜샤인이라는 자회사로 전보조치 된 것이 첫 번째 시련.
이후 후계 다툼에서 약이 바짝 오른 서승학에 의해 웜샤인이 해체되면서 하루아침에 실직자 신세가 된 것이 두 번째 시련.
그러나 이 두 번의 시련에서 그는 번번이 대찬에게 구조되었다.
두 번의 시련은 그를 단련시키지 못했다.
그는 다만 소극적인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백마 탄 대찬에게 구원되었을 뿐이었다.
로튼 프룻츠로 적을 옮긴 후로는, 때 되면 꼬박꼬박 들어오는 투자금을 지키는 정도의 업무만을 소화해냈다.
그러니 그의 직급은 과장에서 부장으로, 부장에서 이사로 높아졌지만 실속은 없었다.
사회공헌사업부의 수익모델은 몇 가지 되지 않았다.
전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사업이 특정 집단이나 계층을 지원하기 위한 기념품 생산 및 판매였다.
이는 대찬이 대학생일 때 시작했던 것.
그러니까 십 몇 년이 지나도록, 웜샤인에서 로튼 프룻츠로 간판이 바뀔 때까지 케케묵은 수익모델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었다.
대찬은 민승기와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마뜩잖은 듯 한숨을 쉬었다.
“웜샤인에서 제일 높은 직급에 있었다고 덜컥 이사 자리를 안긴 게 실책이었나 봐요.”
대찬의 말에 민승기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박 이사 제치고 그 밑에 있는 직원들을 임원으로 올릴 수는 없잖아. 그랬으면 더 개판 됐을 거야. 그렇다고 그때 박 이사님만 찍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그럴 이유도 없었죠. 현상 유지에는 선수였으니까 뚜렷한 실책이 보이지 않았어요.”
민승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이름부터가 사회 공헌이잖아. 사회에 공헌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공무원도 아니고 종일 서류만 만지작거리면 어떡해요.”
“박 이사님도 이제 연세 많이 드셨어. 쉰이 넘었잖아. 우리처럼 의욕적으로 변화를 꾀할 나이는 지났어.”
대찬의 얼굴은 여전히 꽁했다.
“백 살도 우습게 넘기는 세상인데요. 이제 인생 반환점 돌았는데 벌써 주저앉으면 안 되죠.”
“그럼 박 이사님 불러다가 잘 얘기해봐. 그래도 아주 꽉 막힌 분은 아니잖아.”
“벌써 두 번이나 얘기 나눴어요.”
“그랬더니.”
“하시는 말씀은 하소연에 가깝고, 변화의 기미는 보이지가 않네요.”
대찬이 딱 잘라 말했다는 건 이론의 여지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민승기도 더 박 이사의 역성을 들 만한 말을 찾지 못했다.
그가 보기에 대찬은 이미 박 이사에 대한 신뢰를 어느 정도 거둔 상태였다.
대찬과 더불어 민승기도 박 이사와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냈다.
물리적인 시간만 따져도 두터운 인연이었다.
지금껏 대찬은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널리 교류했지만 민승기는 그것보다는 교류의 폭이 좁았다.
폭이 좁으니 깊이는 그만큼 더 깊었다.
박 이사와의 친분만을 놓고 보면 대찬보다는 민승기가 훨씬 두터웠다.
그렇기에 민승기는 어떻게든 박 이사를 대찬이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탈바꿈시키고 싶었다.
민승기는 박 이사를 조용히 불러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그는 최대한 부드러운 말투로 그에게 말했다.
“박 이사님, 요새 힘드시죠.”
“가슴이 아주 새까맣게 탔습니다. 내가 회사에 정말 쓸모가 있는 사람인가, 그런 회의가 깊어요.”
“박 이사님은 우리 회사의 삼대 축 중에 하나를 맡고 계시잖습니까. 충분히 가치 있는 분이십니다.”
박 이사는 한숨을 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