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22화
“업체들 중 몇몇은 직접 여기까지 와서 브리핑하겠다고 했는데, 그것만으론 알 수가 없죠.”
“예, 우리가 직접 실사를 나가봐야 합니다.”
“며칠간 수고를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연구원들은 숨통 좀 트이겠네요. 두 분 다 당분간 연구소 바깥으로 도실 테니.”
“그렇잖아도 땡땡이 칠 작당모의를 하고 있길래 혼쭐을 내주고 나오는 길입니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스트레스가 오죽하겠어요.”
다르샨 싱 전무는 콧방귀를 뀌었다.
“늙은 상사들은 이렇게나 고생하고 있는데 술 마실 궁리부터 하는 게 어디 부하직원으로서 가당키나 합니까?”
그 말에 은오영 소장은 진저리를 쳤다.
“우리 싱 전무, 조선사람 다 됐네.”
“조선이고 인도고 아닌 건 아닌 거야, 은 소장!”
“이 인간이 이렇다니까요, 사장님.”
대찬은 싱겁게 웃고는 둘을 차 뒷좌석에 앉히고 실사를 나갔다.
로튼 프룻츠의 제안에 열의를 보인 업체는 서른 곳이 넘었다.
그중에서 서류만 보고도 영 아니다 싶은 업체를 거르니 열 곳이 탈락했다.
남은 스무 곳 중에서도 인터넷 검색으로 형편없다는 게 밝혀진 업체가 다시 절반.
남은 열 곳 중에서 자금흐름이 안정적이고 업력이 제법 되는 업체가 다섯 군데.
하필 또 수도권에 두 곳, 부산에 한 곳, 광주에 한 곳, 대구에 한 곳이었다.
본의 아니게 전국일주를 하게 생겼다.
다르샨 싱 전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지역의 숨겨진 맛집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 다섯 곳 중에 먼저 다녀온 세 곳은 대찬의 성에 차지 않았다.
“자기 회사가 어느 정도 능력이 있는지부터 밝혀야지. 어떻게 앉자마자 돈, 돈, 돈 얘기부터 해요? 참나.”
대찬은 수도권 한 곳의 대표와 얘기를 나누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르샨 싱 전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쪽 입장에서는 돈 얘기부터 안 할 수 있겠습니까. 나 같아도 눈이 돌아가겠어요.”
“아무리 그쪽 입장이 그렇더라도 사업 파트너를 대하는 태도는 그게 아니죠. 그런 회사에 뭘 믿고 의뢰를 하겠어요?”
은오영 교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결국 지방으로 내려가게 됐네요.”
“지방으로 내려가는 건 괜찮지만 그쪽하고는 확실히 계약까지 가야 될 텐데요.”
“뭐, 안 되면 외국 업체라도 수배해보죠.”
“으음, 정 안 되면 그렇게 하긴 해야겠지만.”
“자, 일단 내려가시죠. 부산으로 먼저 갈까요.”
“그러시죠.”
대찬은 부산에 있는 태상바이오테크의 대표와 마주앉았다.
태상의 사장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올해로 일흔이라고 했다.
“태상 노태식 사장입니다. 이렇게 실물로 뵈니 더 훤칠하시네요.”
“하하, 별 말씀을요.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한 손님이신데 환영 안 할 도리가 있나요.”
“여러 곳의 회사를 둘러봤지만, 저희 기대를 충족해주는 업체는 유감스럽게도 아직 발굴하지 못했습니다.”
“전인미답의 영역을 개척하는 회사이니만큼, 그 수준을 맞출 회사가 많지는 않겠지요. 더더욱 국내에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조 대표님께는 유감이겠지만 우리에게는 다행이군요. 모쪼록 우리의 수준이 조 대표님의 기대를 충족해내기를 바랍니다.”
친절한 말씨에 대찬은 빙긋 웃었다.
“저도 부디 그러기를 바랍니다.”
“우리 태상은 국내 유수의 업체들에 결코 뒤져지지 않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믿음이 가는군요.”
“기회가 꼭 저희에게 주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로튼 프룻츠가 1차로 의뢰할 설비는 생각보다는 규모가 소소했다.
다른 대기업처럼 당장 몇 천 억대, 많으면 조 단위에 이르는 자금을 투입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업체들이 군침을 흘리는 건 그 다음이었다.
이미 국가적 관심을 받고 있고, 실제적인 기술력을 확보해놓은 로튼 프룻츠의 미래는 밝았다.
그 밝은 미래를 상수로 놓아보자.
로튼 프룻츠가 벌어들이는, 또 투자로 거둬들이는 돈의 단위부터가 달라질 것이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했다.
로튼 프룻츠는 맡겼던 업체에 2차, 3차로 발주를 넣을 터다.
벌어들이는 돈의 단위가 달라지면 발주하는 돈의 단위도 달라진다.
그럼 이 하나의 계약만으로도 회사를 돌릴 정도까지 기대해볼 법했다.
그러니 태상의 노태식 사장도 대찬의 선택을 받기를 간절히 원했다.
대찬은 노태식 사장의 사무실을 슬쩍 살폈다.
전문용어와 생명공학 지식이 난무하는 평가지표는 대찬의 능력 밖의 것이었다.
사장의 사무실이 어떻게 생겼는가 살펴보는 것은, 전문지식과는 별도로 대찬이 업체를 판단하는 몇 가지 기준 중에 하나였다.
간혹 어떤 회사의 사장실은 골프채와 수석, 난초 따위로 도배되어 있다.
아예 실내용 퍼팅매트가 깔려있는 경우도 제법 되었다.
대찬은 그런 사장실을 가진 회사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남의 취미생활에 왈가왈부할 권한은 물론 대찬에게 없다.
그러나 사장실은 사장의 휴게실이 아니라 사무실이었다.
사무를 보라고 만든 공간이다.
그런 데서 골프채를 쥐고 폼이나 잡고.
수석이나 구경하고.
먼지도 안 쌓인 난초 이파리를 닦고.
그건 대찬의 기준으로는 실격이었다.
태상바이오테크에 방문하기 전에 들렀던 업체 두 곳도 그런 대찬의 자체적인 기준에 미달이었다.
물론 그 기준이 절대적인 잣대가 되지는 못한다.
다만 같은 값이라면 사장 휴게실이 아니라 사장 사무실이 갖춰진 회사를 다홍치마로 여겨줄 정도는 되었다.
노태식의 사장실은 골프채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사장실 자체도 회사의 규모에 비해 상당히 협소했다.
탁자에는 흔한 명패도 없이 컴퓨터만 달랑 한 대 놓여 있었다.
사무용 의자 역시 말단직원이 쓰는 것과 같은 것.
대찬은 벌써 그런 것에서 노태식 사장에게 적잖은 호감을 느꼈다.
노태식 사장은 고령임에도 시종 겸손하고 친절한 태도를 유지했다.
대찬이 딱히 중요한 고객이기 때문에 겉치레로 꾸미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는 음료를 갖고 들어온 직원에게도 웃으면서 존댓말을 썼다.
대찬은 노태식 사장에게 말했다.
“직원들을 귀하게 여기시는 것 같아서 존경심이 듭니다.”
“허허, 나한테 돈 벌어다주는 사람들이 귀한 건 당연하죠. 그걸 뭘 존경씩이나. 조 대표는 안 그래요?”
그 말에 은오영 소장이 촉새처럼 나댔다.
“우리 대표는 우리를 격의 없게 대하시기는 하는데, 격의 없게 부려먹어서 문제죠.”
“저런.”
대찬은 은오영 소장에게 눈을 흘기고는 노태식 사장에게 웃으며 말했다.
“저야 아직 나이가 어려서 직원들이 어려운 것도 있지만, 사장님은 그것도 아니잖습니까.”
“늙으면 더 어려워요. 직원들을 막 대하면 겉으로야 예예, 순종적이죠. 그런데 뒤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는 뻔한 거 아닙니까? 나이 많은 게 벼슬이냐. 늙은 게 죽지도 않는다, 뒷공론이 일겠지요.”
“하하…….”
“존댓말 쓰는 데 돈 드는 것도 아니고, 나 좋고 남 좋은 일인데 안 하는 게 바보 아닙니까.”
“저도 나중에 나이 들어서 사장님처럼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이구, 꿈도 소박하셔라.”
대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박하다뇨?”
“이 업계 글로벌 시장을 이끌어나가실 할 분이, 고작 부산에서 근근이 생계나 잇는 노인네처럼 됐으면 좋겠다니.”
대찬은 미소를 머금었다.
“잘되고 못 되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된 사람이 되느냐 덜 된 사람이 되느냐의 문제니까.”
“그 마음가짐이라면 저는 비기지도 못할 만큼 훨씬 훌륭하신 분이 되실 겁니다.”
노태식 사장은 태상바이오가 보유하고 있는 자랑할 만한 설비들을 직접 선보였다.
보통 이런 건 기술이사 따위의 직함을 갖고 있는 실무에 정통한 임원이 선보이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노태식 사장은 자신이 직접 팔을 걷어붙였다.
괜한 오기나 과한 쇼맨십이 아니었다.
노태식 사장의 설명은 간결하면서도 내용에 넘치거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준비를 단단히 해놨는지, 비전문가인 대찬도 얼추 알아들을 수 있도록 최대한 쉬운 말로 설명했다.
다르샨 싱 전무, 은오영 소장은 노태식 사장의 말에 집중했다.
그들이 그의 말을 곱씹으며 꼼꼼히 따지는 사이.
대찬은 그들의 한 발짝 뒤에 서서 반은 알아듣고 반은 못 알아들은 채로 이따금 고개만 끄덕였다.
그들은 노태식 사장이 저녁을 사겠다는 제안을 고사했다.
그러자 노태식 사장은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모처럼 부산까지 오셨으니 술이라도 걸판지게 대접하려고 했는데요.”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회사 핵심인력 전부가 밖에 나와 있어서 1분 1초라도 빨리 복귀해야 하거든요.”
“우리 회사가 대표님 마음에 꼭 들었으면 여유가 났을 텐데, 어째 그렇진 않은가요?”
대찬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건 아닙니다. 물론 자세한 얘기는 여기 두 분 말씀을 들어봐야겠죠.”
“물론,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태상바이오를 속으로 낙점해도 다른 업체들과도 미팅은 해봐야 하니까요.”
“그렇지요. 아쉬운 마음에 늙은이가 질척거렸습니다.”
“아유, 별 말씀을요.”
“모쪼록 다음에는 편안한 마음으로 부산에 내려오십시오.”
“그러겠습니다. 그때는 아예 2박 3일로 정해놓겠습니다.”
노태식 사장은 장난으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또 그것대로 난감하겠어요. 2박 3일 간 대표님 접대를 하려면.”
“그때는 아주 칼 같이 더치페이 할 겁니다.”
노태식 사장은 주차장까지 그들의 배웅을 나갔다.
“멀리 나오지 마세요, 사장님. 아직 날씨가 춥습니다.”
대찬은 웃으며 노태식 사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멀리 안 나가겠습니다. 살펴 가시죠.”
대찬과 노태식 사장은 웃으며 헤어졌다.
그렇게 차를 타고 태상바이오 사옥을 떠나려던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뭐야!”
대찬은 차를 움직인 지 3초 만에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대찬과 싱 전무, 은 소장의 몸이 순간적으로 휘청거렸다.
벨트를 매기 전인 은오영 소장은 대시보드에 머리를 쿵 박았다.
대찬은 창문을 열고 말했다.
“뭡니까! 어디 다치시진 않았죠.”
“예, 예예, 안 다쳤습니다.”
“갑자기 튀어나오시면 어떡해요. 큰일 날 뻔했잖습니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중년 남성이었다.
㈜태상바이오, 회사이름이 적힌 작업복을 입고 있는 걸로 봐서는 태상의 직원인 듯했다.
대찬은 그의 사과를 받고 가던 길을 재촉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는 대찬에게 용건이 있었다.
“저, 조 대표님.”
“네?”
그는 대찬을 향해 몸을 굽실거렸다.
“우리 태상하고 꼭 계약을 체결해주세요.”
“…그건 저희가 내부논의를 거친 다음에 결정할 일입니다.”
“꼭 좀, 꼭 좀, 부탁드립니다. 우리 사장님, 좋은 분이에요.”
“좋은 분인 건 저도 압니다.”
갈 길이 바쁜데 뜬금없이 발목이 잡혔다.
대찬의 목소리가 틱틱, 성의 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대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직원은 읍소하듯 말했다.
“그냥 좋은 분이 아닙니다. 우리 직원들한테는 정말 부처님, 예수님이 따로 없습니다.”
“…….”
“직원들 생일 하나하나 꼼꼼히 직접 챙기시고요. 병이라도 걸리면 완전히 낫고도 몸조리 마칠 때까지 눈치 안 보고 병가도 넉넉히 쓰게 해주시고요.”
“…….”
“혹시 송사에라도 휘말리면 직접 변호사까지 붙여주십니다. 마음 불편하면 업무에 전념 못한다고. 그래서 회사가 도와줘야 된다고.”
“저도 잠깐 뵈었지만 훌륭한 분이라는 건 충분히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바보 같은 사장님이 직원들을 너무 위하니까 회사가 오히려 어려워집니다.”
그 말에 대찬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래요?”
“지난번에는 크게 대출까지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은행 도움 없이 혼자서 뚜벅뚜벅 잘 걸어갔는데 말입니다.”
“…그렇군요.”
“요즘 한 번도 돈돈 해본 적 없으신 분이 투자처를 찾아 여기 뛰고 저기 뛰고 하십니다.”
“…….”
“모쪼록 조 대표님이 잘 도와주십시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우리 사장님 같은 분 또 없습니다.”
“잘 숙고해서 결정하겠습니다.”
대찬은 창문을 올리고 다시 차를 몰았다.
백미러로 흘끔 보니, 그 직원은 대찬의 차가 완전히 태상바이오 사옥을 빠져나갈 때까지 연신 몸을 굽실거렸다.
대찬의 표정이 심란해졌다.
대찬과 다르샨 싱 전무, 은오영 소장은 근처의 한적한 커피숍의 한 귀퉁이에 둘러앉았다.
대찬은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은오영 소장에게 물었다.
“태상, 어때요?”
“나쁘지 않아요. 그런데 어딘가 한 끝씩 모자라요.”
대찬은 팔짱을 끼며 다르샨 싱 전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