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21화
그때 박 이사와 가까운 직원 하나가 들어왔다.
“이사님, 대표님이 뭐라세요?”
“우리 쪽 인원 다섯 명을 비도축육 쪽으로 돌리시겠다는데.”
“이러다 우리 사업부 아예 날리는 거 아니에요?”
직원의 말에 박 이사는 한숨을 뿜었다.
“그래도 할 말은 없지. 솔직히 내가 사장이었으면 진작 갈아치웠어.”
“우리가 배운 도둑질이라고는 이게 전부인데, 사업부 날리면 우리도 같이 날아가는 거 아니에요?”
박 이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억측은 하지 마. 조 대표가 어디 그럴 사람이야?”
“에이, 그건 너무 나이브한 생각 아니세요?”
웜샤인 시절부터 동고동락했던 직원은 박 이사를 어렵게 대하지 않았다.
박 이사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 과장이야말로 괜한 억측으로 사내 분위기 흐리지 마.”
“그래도 대비는 해놔야지 않겠어요?”
“야, 막말로 조 대표가 우리 자른다고 해봐. 그럼 뭐 별 수 있어?”
“이사님이 그러시면 안 되죠. 우리 대빵이신데.”
“시답잖은 소리 말고 나가봐.”
박 이사가 귀찮은 손짓으로 내쫓자 이 과장은 입을 삐죽이며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박 이사는 그의 말에 불안감이 솟기 시작했다.
특히 다른 직원들은 몰라도 자신의 신세는 위태로웠다.
직원들이야 고용이 보장되어있지만 임원은 그렇지 않다.
임원은 몇 년 단위로 재계약을 한다.
만약 대찬이 사회공헌사업부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하면.
‘내 모가지 쳐내는 건 숨쉬기보다도 쉬운데……. 그냥 너 나가, 세 글자면 충분하단 말이야.’
박 이사는 저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를 포함한 구 웜샤인 직원들이 로튼 프룻츠에 몸담게 된 경위도 그랬다.
딱히 대찬이 필요로 해서 그들을 불러들인 게 아니었다.
더 나은 인력을 구하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을 받아들인 건, 순전히 대찬의 도의적인 책임감 때문이었다.
서승학과 서원웅의 알력다툼이 극에 달하던 때.
서승학의 폭거로 일순 실직자 신세가 돼버린 그들을 측은지심으로 거둬들였을 뿐이었다.
그러니 대찬이 박 이사에게 이별을 통보해도, 박 이사는 그에게 그럴듯하게 항변할 근거가 없었다.
지금까지 이사 직함까지 달아주면서 제법 고액 연봉을 받아가며 일하게 해주었다.
그것만 해도 대찬은 도리를 다한 것이었다.
박 이사는 미지근한 콧김을 내뿜었다.
그 시각.
대찬은 흥읍의 연구소에서 온 다르샨 싱 전무와 마주앉았다.
대찬은 그에게 홍차를 대접하며 말했다.
“빨리 흥읍에 사옥이 빨리 지어지든지 해야겠어요. 바쁘신 전무님을 번번이 먼 길 오고가게 만드네요.”
“덕분에 살 빠지겠습니다.”
대찬은 잔잔히 웃었다.
“급한 일이 아니면 전화로 해도 괜찮을 텐데요.”
“아닙니다. 오랜만에 서울 공기도 좀 쐬고.”
“지금 놀리는 거예요? 미세먼지 때문에 하루 종일 간질간질한데. 연구소에만 가면 코가 뻥 뚫리던데요.”
“그래도 난 도시 공기가 좋아요.”
대찬은 다리를 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슨 일로 오셨어요?”
“생산단가가 목표대로, 아니 목표보다 더 빨리 낮아지고 있습니다.”
“저도 매일 챙겨보고 있어요. 덕분에 매일 아침 가뿐한 기분으로 시작합니다.”
“이대로라면 생각보다도 빨리 대량생산 체제에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생각보다 빨리라면, 정확히 언제를 말하는 겁니까?”
다르샨 싱 전무는 천천히 손을 비비면서 대답했다.
“특정할 순 없지만 2019년에는 시장에 먹힐 만한 수준의 제품을 생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2019년이라.”
다르샨 싱 전무의 말을 듣고 대찬은 가벼운 전율을 느꼈다.
대찬이 첫 번째 삶을 마감한 게 2019년이었다.
그때까지도 비도축육은 상용화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다.
인식의 좋고 나쁨을 떠나 아예 그 존재 자체도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
그런데 다르샨 싱 전무는 그때가 되면 로튼 프룻츠가 시장에 제품을 내놓을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완성형의 비도축육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돈 받고 팔기에 부족하지 않은 제품이 완성된다는 것.
결국 대찬의 두 번째 삶이 제법 큰 변화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적어도 나쁜 변화는 아니다.
대찬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띠었다.
다르샨 싱 전무는 그 미소가 단지 예상보다 이른 진전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제가 드리려는 말씀은…….”
똑똑.
그때 누군가 대표실의 문을 두드렸다.
대찬이 굳이 묻지 않아도, 방음이 잘 안 되는 문 덕분에 목소리가 들렸다.
진위생이 그 누군가에게 말했다.
“박 이사님, 대표님 지금 싱 전무님이랑 말씀 나누고 계세요.”
“아, 그, 그래?”
박 이사가 그대로 돌아가려고 하자, 대찬이 목소리를 높여 그를 불렀다.
“박 이사님! 들어오세요.”
대찬의 허락이 떨어지자 박 이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다르샨 싱 전무에게 꾸벅 묵례를 했다.
대찬이 웃으면서 물었다.
“급한 용건이세요?”
“아, 아닙니다. 급한 건 아닙니다. 싱 전무님은 웬일로 서울에 오셨어요?”
대찬이 다르샨 싱 전무 대신 대답해주었다.
“그 용건을 이제 막 들으려던 참이에요. 박 이사님 급한 거 아니면 일단 싱 전무님 먼저 뵙고 얘기 듣죠.”
“아, 그럼 저도 같이 들으면 안 될까요?”
그러자 대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차피 비도축육 관련된 얘기예요. 굳이 박 이사님이 들으실 필요까지야.”
“하하, 저도 로튼 프룻츠의 일원 아닙니까.”
대찬은 웃으면서 완곡하게 거절했다.
“비도축육 사업부끼리 비밀얘기 할 거니까 잠깐 나가 계세요.”
농담조이긴 했지만 분명한 의사표시에 박 이사는 앉으려다가 다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대찬은 다시 다르샨 싱 전무에게 집중했다.
“말씀하세요.”
박 이사는 최대한 걸음을 천천히 해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제대로 들리진 않았다.
뭐라고 말은 하는데, 애초에 박 이사의 영어실력이 그다지 탁월하지 않거니와 다르샨 싱 전무의 인도식 억양, 거기에 대화내용이 전문용어가 난무하는 비도축육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니 도통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박 이사는 쩝, 입맛을 다시며 엿듣기를 포기하고 밖으로 나갔다.
‘내가 뭐 다른 회사 사람도 아닌데 왜 이렇게 야박해.’
박 이사는 속으로 꿍얼거렸다.
평소라면 그렇게 꼬아서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들은 말이 있어 박 이사의 심사가 괜히 뒤틀렸다.
대찬은 다르샨 싱 전무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다르샨 싱 전무는 홍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기술은 지금 순탄하게 개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술이 완성되었는데 설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많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그러는 사이에 기술은 좀 뒤처졌지만 설비가 제때 완성된 회사에 덜미가 잡힐 수도 있죠.”
다르샨 싱 전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적극적인 설비투자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서울에 온 겁니다.”
“전무님 말씀이 맞네요. 이미 갖춰진 설비투자계획이 있긴 하지만, 기술개발이 조금 앞당겨진다면 설비도 앞당길 필요가 있겠죠.”
“맞습니다.”
대찬은 얕은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이 설비라는 게 쉽지 않더군요. 기존에 개발된 기계를 사오는 게 아니라, 우리 기술에 맞게 커스터마이징 해야 하니까.”
“맞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이고도 신중하게 진행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라도 어긋나면 아예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니까요.”
“저도 열심히 공부는 하고 있지만 여전히 문외한입니다. 이 부분은 외부용역을 주든 해야겠어요.”
“그래서 몇 군데 회사를 수배해놓긴 했습니다.”
“그래요? 역시 부지런하십니다.”
“인력과 시간이 상당히 투입되어야 하지만, 우리가 그만 한 대가를 지불하면 적극적으로 나올 겁니다.”
“실탄은 걱정 마세요. 아주 두둑이 쌓아놨으니까.”
다르샨 싱 전무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업체에 대한 자료는 제가 정리해놨습니다. 아, 엄밀히 말하면 제 밑의 연구원들이.”
“고맙습니다. 검토하고 업체와 미팅 일정을 잡아보도록 하죠. 자리에 전무님도 나오실 겁니까?”
“예, 아무래도 공돌이끼리 통하는 게 있으니까.”
“공돌이라는 단어는 누구한테 배웠습니까?”
“연구소에서는 하루에도 오백 번씩은 씁니다, 이 말.”
“전무님 한국어 실력이 나날이 늘어나시는군요.”
대찬과 다르샨 싱 전무는 한참 환담을 나누다가 자리를 파했다.
그를 보내고, 대찬은 박 이사를 불러들였다.
“말씀하세요.”
“요즘 사회공헌사업부 실적이 좀 미진해서…….”
대찬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건 아까 다 얘기했잖아요?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래도…….”
“박 이사님 탓만은 아니니 괘념치 마시라니까요.”
“제가 책임자 아닙니까.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래서. 무거운 마음 좀 가볍게 하려고 저한테 다시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 그건 아니지만…….”
대찬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얼굴에는 웃음기가 살짝 가셔 있었다.
“저도 박 이사님 심정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한테 더 말씀하실 거 없어요.”
“물론 그렇지만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불안한 마음이요?”
“혹시 대표님께서 사회공헌사업부를 없애지는 않을까 하는…….”
“당장은 계획이 없습니다.”
“당장이라고 하시면…….”
대찬은 의자에 허리를 바짝 붙이며 박 이사를 올려다봤다.
“향후에는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 더 꾸려나가기 힘들면 없애야죠.”
“…….”
“그럴 일은 없겠지만 필래랑 사이가 틀어지고 사회공헌사업부로 매년 들어오던 용역이 끊기면 그땐 정말 유지할 수가 없고요.”
박 이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솔직히 불안합니다.”
“박 이사님이 불안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안심시켜드리려고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어요.”
“…….”
“사회공헌사업부는 박 이사님께 전권이 있습니다. 전권의 뒷면에는 전적인 책임이 있죠.”
“…예.”
“안주하지 말고 사회공헌사업부 단독으로 활로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부여된 권한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고, 부여된 책임을 최대한으로 의식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박 이사는 시름이 가득한 표정으로 대표실을 나섰다.
대찬은 박 이사를 어르고 달래지 않았다.
주어진 업무를 수동적으로 처리만 하라고 그 자리에 앉힌 게 아니었다.
돌파구가 보이지 않으면 돌파구를 마련하는 게 그의 임무였다.
발품을 팔든 접대를 하든 어떻게든 일감을 만들어오라고 임원 자리를 내준 거고, 그에 맞는 연봉을 지급하고 있었다.
마냥 보듬고 껴안아주기에는 박 이사는 너무 징그러웠다.
다르샨 싱 전무의 제안에 따라, 대찬은 비도축육 기술개발에 발맞춰 설비를 제작할 업체를 물색했다.
지금까지 비도축육을 위한 설비를 만들어본 업체는 한국이 아니라 전 세계를 통틀어도 전무했다.
그렇기에 업체 선정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물론 관련된 지식이 전무한 대찬이 신중을 기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다르샨 싱 전무와 은오영 소장의 판단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대찬은 그들의 조언을 받아 업체 몇 군데를 추려 견적을 내기로 했다.
제안서를 받은 업체들은 아우성을 쳤다.
자기들이 할 수 있다고.
맡겨만 달라고.
그도 그럴 것이 조건이 까다롭긴 했지만 일단 해내기만 하면 떼돈을 벌 절호의 기회였다.
로튼 프룻츠 측에서는 돈이 얼마가 들어가도 관계없었다.
대신 원하는 모든 기능이 갖춰져야만 했고, 실수가 없어야 했다.
만일 한 가지라도 뒤틀리면 곤란했다.
단순히 자금이 추가로 투입되어야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 때문에 제품 출시가 경쟁업체에 뒤처질 염려가 있었다.
사람들은 최초는 기억하지만 2등은 기억해주지 않는다.
경쟁도 경쟁이지만 대외적으로 로튼 프룻츠의 브랜드를 확실하게 각인시키려면 무조건 빨라야 했다.
업체들은 그런 로튼 프룻츠의 속사정을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다만 큰 건수라는 점에만 정신이 팔렸다.
즉, 일단 달려들고 보는 어중이떠중이들이 태반이었다.
* * *
“싸다고 덜컥 맡기면 안 돼요. 우리가 중점적으로 봐야 할 건 그 회사의 역량이에요.”
대찬의 당부에 은오영 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값이 싸고 비싸고를 따지는 건 대표님의 몫이죠. 사실 연구하는 저희야 얼마가 들든 무슨 관계겠어요?”
“또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한데요. 소장님도 우리 회사 주주잖아요. 그렇게 또 회사의 이익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면 곤란하죠.”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란 말입니까?”
대찬은 흐흐 웃고는 다르샨 싱 전무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