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20화
이미 오래전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고 생각한 자신의 부정이 대뜸 온갖 권력기관의 주목을 받았다.
이두희는 자다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까무러치게 놀랐다.
“이게 무슨 일이야!”
그러자 측근이 이두희에게 보고했다.
“아드님이 술자리에서 떠든 내용이 화근이 됐습니다.”
“뭐? 술자리에서 떠들었다고?”
“…네.”
“이런 돌멩이만도 못한……! 돌멩이처럼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돈이나 타 먹으라고 앉혀놨더니 그것도 못해! 당장 불러와!”
제이슨 리는 아버지의 불호령을 받고 부리나케 그 앞에 달려갔다.
“아, 아버지.”
“네놈 새끼가 우리 집안을 말아먹으려고 작정을 했어!”
“아버지! 이거 조대찬 때문이에요!”
“네 깃털같이 가벼운 주둥이 때문이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제이슨 리는 침을 꼴깍 삼켰다.
“일단 진정하시고요.”
“진정하게 생겼어, 지금!”
“술자리에서 지나가듯이 한 말을 조대찬이 녹음을 해서 이 지경으로 만든 거라고요.”
“그래서 이제 어쩔 거냐! 어쩔 거야!”
제이슨 리는 분노와 배신감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일단 시간을 벌어야 해요. 배춘모 아시죠. 규원 주인 아들이요.”
“그 새끼 이름은 갑자기 왜 꺼내!”
“조대찬이 배춘모를 술자리에서 인정사정없이 팼거든요. 제가 그걸 덮어줬더니 지금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제가 터뜨릴까봐 불안하니까, 먼저 이렇게 찌르고 오는 거라니까요.”
“그런……!”
“이걸 극동일보 통해서 터뜨리면 돼요. 조대찬이 자기 폭행을 덮으려고 우릴 음해한다고 해요. 그럼 관심이 저쪽으로 쏠릴 거예요. 그럼 아버지 실력으로 충분히 무마할 수 있잖아요.”
“…완전히 무마는 안 되겠지만 피해를 최소화할 수는 있겠지.”
“맡겨주세요. 제가 관심 그쪽으로 돌려볼게요.”
이두희는 주먹을 콱 움켜쥐고 부르르 떨었다.
“사태가 좀 진정되고 보자. 이번 일 용서 못한다.”
“네, 일단 사태를 진정시키는 게 먼저예요.”
제이슨 리는 아버지의 앞에서 물러 나왔다.
그는 홍승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홍승연은 이죽거렸다.
“그러게 내가 뭐랬냐. 쯧쯧, 내 이럴 줄 알았다.”
“지금 나 미칠 지경이니까 적당히 건드려.”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너한테 들린 패가 나 하나뿐이잖아?”
“…….”
“조대찬이 폭행 건, 깐다?”
“지면에 최대한 크게 실어줘야 돼.”
“그러려면 피해자 인터뷰가 딱이지. 개박살 난 얼굴도 사진 찍어서 대문짝만하게 올려놓고.”
“그래, 그래야지. 배춘모 섭외해줄게. 지금 당장 기자 불러.”
“그 병신 누워있는 병실이 몇 호실인지만 알려줘.”
홍승연은 구본진을 알렉스 배가 누워있는 1인실로 바로 파견했다.
그녀는 이 상황이 못 견디게 신났다.
제이슨 리야 어찌 되든 그녀가 알 바 아니었다.
오로지 대찬의 얼굴에 먹칠할 생각에 들떠 있었다.
그건 구본진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그는 밥 먹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한달음에 알렉스 배의 병실에 도착했다.
사전에 당연히 연락이 됐을 걸로 생각한 구본진은 다짜고짜 그에게 물었다.
“조대찬 대표의 폭행으로 얼마나 다친 겁니까?”
질문을 들은 알렉스 배는 순진한 눈을 깜빡거리며 되물었다.
“네? 조대찬 대표의 폭행이라뇨?”
“아니, 조대찬한테 맞아서 지금 그 지경이 된 거잖아요. 정신 차려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 조대찬 씨한테 맞은 적 없는데요? 오히려 조대찬 씨가 절 감싸주려고 했는데…….”
“이봐요!”
알렉스 배는 멍든 얼굴을 천천히 쓸면서 말했다.
“이거, 제이슨 리한테 맞은 거예요. 아시죠? 제이슨 리. 요즘 확 떴던데.”
“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기자님이야말로 갑자기 찾아와서 무슨 말씀을…….”
구본진은 말문이 막혀 멍한 눈으로 알렉스 배를 바라만 봤다.
그 시각.
왠지 시끄러워질 것 같은 느낌에 대찬은 이틀간 휴가를 내고 집에 머물렀다.
석우룡 의원의 대정부 질문을 본 대찬은 아예 TV를 꺼버렸다.
더 볼 것도 없었다.
바깥의 난리법석과는 동떨어진 듯 대찬의 성수동 집은 평화로웠다.
그는 윤이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내가 파스타 해줄까?”
“어, 냉동에 새우 있는데. 내가 손질할게.”
“오케이. 면 삶는다.”
대찬은 콧노래를 부르면서 가스레인지 위에 물을 끓였다.
그때 식탁 위에 올려둔 대찬의 휴대폰이 울렸다.
한참이 지나도 대찬이 받질 않자, 윤이영이 말했다.
“영감, 벌써 귀먹었어? 전화 오잖아.”
“안 받아.”
“누군지 보지도 않고 안 받는대.”
대찬은 파스타 면을 물 위에 부채꼴로 펼치면서 말했다.
“괜찮아. 까던 새우나 까세요.”
윤이영은 입을 삐죽 내밀고는 슬그머니 액정을 봤다.
그녀는 얼굴을 구기며 대찬에게 다시 물었다.
“곧 갈 놈이 누구야?”
“있어.”
* * *
한바탕 난리 굿판이 벌어졌다.
이두희와 제이슨 리는 당국의 칼날에 영혼까지 탈탈 털렸다.
입방정 한 번에 집안의 기둥뿌리가 뽑혀 나갔다.
기둥뿌리가 뽑힌 집안은 비단 이두희 부자의 집안뿐만이 아니었다.
이두희와 공모해서 특허를 도둑질했던, 그래서 JL인베스트먼트에 빨대를 꽂고 연금처럼 거액을 받아 갔던 이들.
그들의 발등에도 불이 떨어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힘을 음양으로 총동원해서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했다.
전길재 기자는 애프터서비스가 확실했다.
그는 장작불이 꺼지지 않도록 계속 후속 보도를 이어나갔다.
전길재는 나름 당국의 공무원들에게도 독종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런 그가 주시하니, 가뜩이나 상사들의 등쌀에 열심일 수밖에 없는 공무원들은 더 열심히 일했다.
덕분에 대찬의 취미생활은 한동안 인터넷으로 이들의 소식을 전해 듣는 일이 되었다.
이 일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 이선주, 그리고 그의 아들 알렉스 배는 꿈에 그리던 한양클럽에 입성했다.
과연 석우룡 의원이 카일라를 일컬어 애들 소꿉장난이라고 했던 이유가 있었다.
요식행위로 한양클럽 가입신청서를 적던 이선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석우룡 의원에게 물었다.
“의원님, 근데 뭐가 좀 이상하네요?”
“이상하다니.”
“준회원 가입신청서네요……?”
“그게 뭐가 이상해.”
“당연히 정회원인 줄 알았는데.”
준회원의 활동기한은 4년.
이후에도 한양클럽의 회원으로 활동하려면 추천인의 동의를 받아 갱신해야만 했다.
그러자 석우룡 의원은 눈으로는 정색하고 입으로만 웃었다.
“마담, 너무 욕심이 과하네. 뭐든 차근차근해야지.”
“…….”
“우리도 마담이 한양클럽의 회원으로 품격이 떨어지지 않는지 평가할 기회가 있어야 하잖나. 자네가, 그리고 자네 아들이 부끄럽지 않게만 행동하면 자연히 정회원이 될 수 있을 거야.”
석우룡 의원의 단호한 말에 이선주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만 두 번 끄덕였다.
이선주에게 한양클럽의 정회원 자격을 부여하려면 석우룡 의원도 회원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만 했다.
딱히 대찬의 청탁을 들어주면서 대가를 챙기지 않았으니, 정회원 자격을 주기에는 어쩐지 손해 보는 기분이었다.
석우룡 의원은 정회원 대신 정원 외로 뽑는 준회원 자격을 이선주 모자에게 부여했다.
한바탕 홍역을 치른 제이슨 리는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렸다.
요행히 쇠고랑을 차는 일은 면했지만 집안은 너덜너덜해졌다.
한없이 가벼운 자기 입을 탓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자기 탓을 하는 법이 없었다.
제이슨 리는 이를 으드득 갈며 대찬을 원망했다.
“내가 그 새끼를 거두는 게 아니었는데…….”
대찬보다 더 괘씸한 건 알렉스 배였다.
술집 아들을 거둬다가 같이 어울려준 은혜도 모르고 감히 뒤통수를 치다니.
잠깐 정신이 나갔을 때는 청부살인까지 알아봤다.
알렉스 배는 그날 이후로 카일라 모임에서는 종적을 감췄다.
제이슨 리의 연락도 모두 외면했다.
그를 푸대접하는 건, 비단 알렉스 배뿐만이 아니었다.
사건이 터지기 전에는 제이슨 리가 카일라의 명실상부한 리더였다.
그런데 사건이 터지자 카일라는 공중분해 되다시피 했다.
제이슨 리는 카일라가 그렇게 비참한 종말을 맞은 데 일말의 미안함을 느꼈다.
카일라의 친구들은 자신이 미안해 할 가치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미안함도 오래가지 않았다.
카일라가 실은 이름만 바꿔서 제이슨 리를 빼놓은 채로 다시 뭉친 걸, 우연히 SNS를 통해 알게 되었다.
제이슨 리의 정신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이게 다 그 새끼 때문이야…….”
제이슨 리는 짧은 일생, 실패와 패배를 모르고 살았다.
실패의 위기에는 언제나 구원의 손길이 있었다.
학자 아버지를 뒀음에도 공부가 젬병이라 일찍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미국에서 알아주는 대학은 아니지만 국내에서는 미국에서 대학을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떠받드는 얼치기들이 많았다.
미국 국적을 택해 남들처럼 귀한 시간을 군대에서 허비하지 않았다.
텅 빈 알맹이를 간파한 회사들이 그를 써줄 것 같지 않자, 아버지는 아예 회사를 차리고 영구히 마르지 않는 오아시스를 안겨주었다.
그 돈으로 떵떵거리며 아쉬운 소리 한번 안 해보고 살았던 그였다.
그런 그에게, 입 한번 잘못 놀렸다고 자신이 가진 것을 몽땅 빼앗아가는 세태가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버텨낼 정신력이 없었다.
“너도 똑같이 당해봐…….”
제이슨 리는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대찬은 제이슨 리를 더 염두에 둘 여유가 없었다.
골탕 좀 먹이겠다고 한심한 놈 행세를 하며 여러 날 그와 붙어 다닌 시간도 아까운 판이었다.
대찬은 이제 본업으로 돌아왔다.
그가 없는 와중에도 흥읍의 연구소에서는 계속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들이 할 수 없고 대찬이 해야만 하는 일들도 산적해있었다.
로튼 프룻츠는 세 개의 축으로 돌아갔다.
비도축육, 커피와 와인, 사회공헌사업.
당연히 가장 주력하는 사업은 비도축육이었지만, 당장 돈을 벌어다 주는 건 커피와 와인 사업이었다.
이는 민승기가 도맡아 처리하고 있었으니 대찬이 안심하고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았다.
그런데 문제는 사회공헌사업이었다.
사회공헌사업은 웜샤인 때부터 인연을 맺어온 박 이사가 전권을 위임받은 상태였다.
그는 사회공헌사업만으로는 영 수익이 창출되지 않아 광고사업도 병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필래 쪽에서 기본적으로 건네주는 일감 말고는 영 신통치 않았다.
애초에 로튼 프룻츠가 비도축육을 간판으로 내걸고 있었으니, 밖에서 보기에 광고 사업은 부전공 정도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회사에 광고를 덜컥 맡길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승승장구하는 로튼 프룻츠 내에서도, 사회공헌사업부는 어깨를 떳떳하게 펴지 못했다.
대찬 역시 잘 돌아가지 않는 사업부가 줄줄 새도록 놔두지 않았다.
대찬은 업무를 보다가 똑똑, 사회공헌사업부장실의 문을 노크했다.
“박 이사님, 바쁘세요?”
“아, 대표님, 아닙니다. 안 바쁩니다.”
“바빠야 되는데 큰일이네요. 요즘 일감이 잘 없어서 힘드시죠.”
박 이사는 머쓱하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질책하려는 건 아닙니다. 제가 박 이사님이었어도 뭐 어쩔 도리가 없었을 거예요.”
“허허, 참…….”
대찬은 소파의 한 귀퉁이에 슬쩍 걸터앉으며 말했다.
“그래서 일단 사회공헌사업부 소속 직원들 몇 명을 비도축육 쪽으로 당겨오려고 하는데, 어떠세요?”
“예?”
“일손이 좀 달려서요. 연구소 쪽에서 어찌나 열정적으로 일해 주는지, 이쪽도 덩달아 바쁘다니까요.”
“아, 대표님 의중이 그러시면 그렇게 하셔야죠.”
대찬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박 이사님하고 한 마디 논의도 없이 멋대로 처리하면 기분이 상하실까 봐서요.”
“아이고, 제가 뭐라고요.”
“뭐긴요. 우리 회사 3대 축 중에 하나이신데.”
“거창한 이름값 해내기 위해서 노력하겠습니다.”
“그럼 한 다섯 명만 이쪽으로 옮기겠습니다. 괜찮죠?”
“예예, 그 사람들도 좋아할 겁니다. 할 짓 없어서 눈치 봐가며 웹서핑이나 하고 있던 걸요.”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별 말씀을.”
“힘내시고요.”
박 이사는 대찬의 힘내라는 말이 한없이 굴욕적이었다.
대찬은 별 뜻 없이 한 말이었지만, 이런 때의 격려는 질책보다 매웠다.
대찬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그는 의자에 철퍼덕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