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18화
대찬은 울컥, 성질을 냈다.
“뭐? 야, 보자보자 하니까 진짜… 내가 호구로 보이냐?”
“형.”
“너, 자꾸 나 배춘모처럼 취급하는데, 나 그렇게 호구 같은 새끼 아니니까 그따위로 굴지 마.”
제이슨 리는 대찬을 빤히 바라봤다.
대찬은 일렁이는 눈빛으로 제이슨 리의 눈빛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피식.
제이슨 리는 웃으면서 대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알았어, 알았어. 까칠하기는. 내가 잘못했어. 오늘 술은 내가 살게. 그러니까 화 푸세요, 알았지?”
“…다신 그러지 마.”
“알았다니까. 자, 가자고.”
제이슨 리는 대찬의 어깨에 팔을 걸고 알렉스 배의 클럽으로 걸어갔다.
그의 팔에 이끌려 가면서 대찬은 제이슨 리를 흘끔 바라봤다.
‘어디서 간을 보고 있어.’
제이슨 리는 부러 대찬의 성질을 건드렸다.
만약 여기서도 대찬이 고분고분했다면 그는 대찬을 의심했을 것이다.
아무리 취중이라지만 알렉스 배의 희롱에는 바로 주먹부터 나가던 대찬이었다.
그런데 한번 으르렁댈 법도 한데 내내 고분고분 머리를 조아린다면.
제이슨 리도 대찬이 뭔가 품은 꿍꿍이속이 있다고 판단할 것이었다.
분노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상대방로 하여금 내 속을 훤히 들여다봤다고 판단하게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대찬의 옹졸한 분노에 제이슨 리는 대찬을 간파했다고 여길 터였다.
둘은 적잖이 술을 마셨다.
이럴 때면 대찬은 자신의 주량이 보통 이상이라는 게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는 부러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야, 근데 너는 도대체 뭘로 돈을 버냐?”
불콰하게 취한 제이슨 리는 피식 웃었다.
“갑자기 그걸 왜 물어봐요?”
“아니, 궁금하잖아. 순전히 아버지 빽으로 그렇게 돈이 많은 거야?”
대찬은 은근히 제이슨 리의 성질을 건드렸다.
그러자 제이슨 리는 대찬에게 눈총을 쐈다.
“형, 내가 그냥 부모 도움만으로 이렇게 사는 거 같아요?”
“아니,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궁금하잖아. 좀 걱정도 되고.”
“뭐라고요? 걱정?”
대찬은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로튼 프룻츠는 특정 분야에 대한 원천기술을 갖고 있잖아. 개발한 특허도 수십, 수백 개거든.”
“근데요?”
제이슨 리의 취한 목소리가 튀었다.
그는 불만스러운 눈으로 대찬을 빤히 쳐다봤다.
“JL인베스트먼트는 투자회사 아니야? 투자회사는 한 발만 삐끗해도 휘청거린다니까. 우리처럼 딱 확실하게 중심이 잡혀 있어야지.”
제이슨 리는 질겅질겅 씹던 안주를 탁 집어 던졌다.
“아, 진짜 짜증나네.”
“아니, 훈계하려는 생각은 없는데 그냥 걱정되는 마음에…….”
“뭘 모르면 그냥 가만히 있어.”
“…응?”
“어디서 특허 자랑이야. 하, 진짜 같잖아서.”
대찬은 속으로 웃으면서 제이슨 리의 말을 더 끌어냈다.
“그래도 내가 다른 건 몰라도 특허는 자랑해도 되지 않나?”
“그 인조고기 만드는 특허요? 그거 한 5, 6년 묵혀야 뭐가 될까 말까 한 거 아니에요?”
“그, 그렇긴 한데 너는 그런 특허도 없잖아.”
제이슨 리는 피라미를 보듯 비웃었다.
“이봐요, 조대찬 씨. 지금 JL인베스트먼트의 주 수입이 특허사용료예요. 1년에 수십억씩 따박따박 꽂힌다고, 알아?”
그 말에 대찬은 콧방귀를 뀌었다.
“에이, 갑자기 무슨 억지야, 그게.”
“내가 무슨 억지를 부린다고 그래!”
제이슨 리는 흥분해서 탁자를 쾅 쳤다.
대찬은 지레 놀라는 척하며 말했다.
“아니, 그렇잖아. 이름도 JL인베스트먼트라고 지어놓고는, 갑자기 로열티로 수십억을 번다고 하니까.”
“하.”
“괜히 자존심 상하기 싫어서 뻥을 좀 세게 치는 거잖아?”
“나 진짜……. 자꾸 나 자극 안 하는 게 좋아.”
“아니, 그럼 정말이라고?”
“조대찬 씨, 내가 거짓말까지 쳐가면서 당신한테 이겨 먹어야 직성이 풀릴 정도로 병신인 줄 알아?”
“아니, 그건 아닌데…….”
“술맛 떨어지게.”
“그럼 그 특허는 어디서 나온 거야? 설마 네가 개발한 거야? 공대 출신은 아닌 걸로 아는데.”
제이슨 리는 신경질적으로 술로 목을 축이고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강서대 산학협력단장이었어. 그쪽에서 개발한 거야.”
“그 특허가 왜 네 회사 소유야? 산학협력단 소유여야 맞지. 앞뒤가 안 맞는데.”
대찬이 거듭 의심하자 제이슨 리는 이를 으드득 갈았다.
“자꾸 그따위로 나 의심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나도 안 하고 싶어. 근데 안 할 수가 없잖아. 그래, 됐다. 어찌저찌 해서 네 소유가 됐겠지. 믿어줄게.”
믿어준다는 말이 제이슨 리를 또다시 자극했다.
제이슨 리는 미치고 펄쩍 뛸 지경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대찬은 운 좋게 필래 오너 가와 인연이 닿아 그 부스러기를 먹고 유명인사 행세를 하는 쭉정이에 불과했다.
그에 비하자면 자신은 재산도 풍부하고 학식도 풍부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남들 우러러보는 명품으로 치장하고 요일별로 차를 바꿔 타는 현대 귀족이었다.
그런데 저런 쭉정이가 너그럽게 웃으면서 네가 거짓말하는 건 다 알지만 믿어준다는 식으로 얘기하다니.
속된 말로 그의 꼭지가 돌았다.
“형, 자꾸 내 성질 건드릴래? 오늘 피를 봐야 정신 차리겠어?”
“그래, 내 잘못이야. 미안해. 넘어가자고.”
“넘어가? 뭘 넘어가. 지금도 내 말 안 믿고 있잖아.”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아니… 믿기 힘든데 믿어보겠다니까.”
“산학협력단이 갖고 있던 특허가 어떻게 내 소유가 됐냐고? 당신이 얼마나 둔하고 멍청하게 살았는지 알겠네.”
“…뭐?”
“산학협력단장이 우리 아버지였다고. 그리고 그 기술개발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게 우리 아버지야.”
“그랬겠지.”
제이슨 리는 말귀를 못 알아먹는 대찬이 답답했다.
“그러니까 그 특허는 우리 아버지 특허고, 아버지가 나한테 준 것뿐이야. 알겠어?”
“아니, 그렇다 해도 엄연히 소유는 학교일 텐데…….”
“허, 저 혼자 고고한 선비세요?”
제이슨 리는 이제 분노보다는 답답한 감정이 우선했다.
대찬은 순진한 시선을 그에게 보냈다.
“선비가 아니라, 방법이 없잖아, 방법이.”
“세상에는 형 같은 멍청이들이 모르는 비밀들이 수두룩해.”
제이슨 리는 대찬이 원하는 구체적인 답변을 바로 내놓지 않았다.
“나도 예측 정도는 할 수 있어. 산학협력단이 세운 회사의 자회사를 만들어서 그쪽에 특허권을 넘기고. 맞지?”
대찬은 자신이 생각하는 유력한 시나리오를 제이슨 리에게 말했다.
제이슨 리는 피식 웃었다.
“제법이네.”
“JL인베스트먼트, 당시에는 그 이름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별도의 회사를 세워서, 특허권을 가진 자회사를 다시 인수합병 한다.”
“역시 형은 그래도 멍청이들 중에선 똑똑한 멍청이네.”
대찬은 입술을 삐죽였다.
“근데 핵심은 특허의 가치를 어떻게 의도적으로 저평가할 수 있었냐는 건데. 나는 이 부분은 도저히 모르겠네.”
“간단하잖아. 아버지가 산학단장이야. 우리 아버지가 독고다이 스타일도 아니고, 주변에 도와줄 사람이 있는 건 당연하잖아.”
“돕는 분들이 계셨구나.”
제이슨 리는 쯧, 혀를 걷어찼다.
“이제 좀 알아들었어? 세상 보는 시야 좀 넓히란 말이야.”
“응, 감이 잡히네. 그런데 강서대 쪽에서는 이거 갖고 말이 없었어?”
“학교 내부에서 사고가 터지고 이런 게 다 정부에서 일감 줄 때 마이너스 요인이 된단 말이야.”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특허가 알짜긴 하지만 괜히 이걸 공론화했다간 황금알 낳는 거위 배 가르는 격이니.”
“학교는 치를 떨면서도 어쩔 수 없이 묵인할 수밖에 없는 거지. 실제로도 아버지 포함해서 관련자 몇몇 사표 내는 걸로 퉁 쳤어.”
“네가 특허를 가져갔으니 아버지야 이득을 보셨지만 다른 분들은?”
“일가친척 몇 명 사외이사로 세워놓고 놀면서 1년에 몇 억씩 쪽쪽 잘 빨아 드시고 계시지.”
“웰빙 라이프구만.”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까불까불 은근히 성질을 긁던 대찬이, 자신의 말 몇 마디에 찌그러지자 제이슨 리는 신이 났다.
그는 대찬이 묻지도 않았는데 술술 제 치부를 다 고해바쳤다.
“그리고 내가 형이랑 또 다른 게 뭔지 알아?”
“응?”
“JL인베스트먼트, 한국 회사 아니야.”
대찬은 아는 내용이지만 일부러 펄쩍 뛰었다.
“뭐?”
“대단한 애국지사 나셨지. 왜 굳이 인프라도 안 좋은 한국에다 회사를 차려? 멍청하게 세금은 세금대로 다 뜯기고.”
“그럼 JL은 한국 회사가 아니면 어디라는 거야?”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들어나 봤는지 몰라.”
대찬은 속으로 웃었다.
그러나 낯빛으로 절대 드러내선 안 됐다.
“그게 뭐야?”
“뭔지는 집에 가서 인터넷으로 검색해봐.”
“거기에 회사를 세우면 이득이 있나? 세금 측면에서?”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라니까. 거기 법인세율이 얼만지, 소득세율이 얼만지.”
대찬은 즉석에서 휴대전화로 검색하고 제이슨 리에게 말했다.
“둘 다 제로네?”
제이슨 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영한다는 사람이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몰라서 어떡해?”
“하하…….”
“로튼 프룻츠에 투자 좀 하려고 했더니 영 불안해지네.”
그렇게 얼큰하게 취하고 돌아간 다음 날 늦은 오후.
제이슨 리는 대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형, 어제 회사 어쩌고 한 거는 그냥 지나가면서 해본 얘기야.
너무 깊게 생각할 거 없어.
괜히 내 회사 자랑한다고 형 회사 깎아내린 거 같아서 미안하네.
나는 로튼 프룻츠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회사가 될 거라고 믿어.
형하고 로튼 프룻츠, 성공하기를 기원할게~ :)
“제 발 저려서 주절대기는.”
대찬은 피식 웃었다.
일련의 대화는 모두 녹음되었다.
대찬에게는 패가 쥐어졌다.
조세피난처에 법인을 세우고 운영하는 것 자체는 불법이 아니다.
그러나 학교가 개발한 특허를 해외로 빼돌리고 그걸 공모한 인간들이 짬짜미를 벌였다.
당국에서 괘씸하게 여길 소지는 다분했고, 대대적인 조사에 착수할 만했다.
이 건수는 공개하는 동시에 효력이 발생한다.
제이슨 리가 클럽에서의 폭행사실을 발설하지 않는 대가로 이 또한 문제 삼지 않겠다고 허세를 부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얻은 정보를 대찬이 자기를 공격하기 위해 사용할 것이라는 걸 알면, JL인베스트먼트의 존재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건 찌르는 창이지 막는 방패가 아니었다.
찌르는 창만 들고 방패를 들지 않는 건, 중세 유럽 기사들의 마상창 시합처럼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싸움밖에는 되지 않는다.
대찬은 물론 제이슨 리를 죽이자고 자기를 희생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적의 공격에서 안전하게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방패를 드는 거고, 나머지 하나는 적의 창을 빼앗는 것이다.
속이 편한 쪽을 고르자면 전자보다는 후자였다.
대찬은 후자를 택했다.
제이슨 리가 들고 있는 패는 엄밀히 말하면 알렉스 배가 들고 있는 패였다.
알렉스 배가 대찬의 편에 선다면 제이슨 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대찬은 알렉스 배에게 당근과 채찍 두 가지 모두를 구사했다.
대찬이 장기 말로 선택한 건 석우룡 의원이었다.
대찬의 부탁 아닌 부탁을 들은 석우룡 의원은 정치인답게 거래를 원했다.
“내가 조 대표 민원을 들어주면, 나한테 뭘 줄 수 있어요?”
“당장 드릴 건 없습니다.”
부탁하는 쪽이 단호하게 나온다.
앞뒤가 안 맞는 태도에 석우룡 의원은 피시식 웃었다.
“초장부터 그런 김빠지는 소리를 하시나.”
“의원님께서 제 잠재가치를 높게 평가해주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그거야 물론 그렇지.”
“과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과분해진 김에, 조금만 더 버릇없이 굴려고 합니다. 응석 좀 받아주십시오.”
“터무니없이 당당하구만!”
“당장 가진 것 없는 저한테 뭘 가져가시는 것보다는 훗날 좋은 관계를 위한 자양분으로 삼는 게 서로 더 좋지 않겠습니까.”
“어음은 돌아오는 날짜라도 있지. 이건 기약도 없어서 어째 손해 보는 기분이란 말이야.”
“하하, 잘 판단해주십시오.”
“끝까지 꼿꼿하기는!”
석우룡 의원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전화를 끊었다.
알렉스 배의 부모가 운영하는 룸살롱은 강남에만 열 곳이 넘었다.
알렉스 배의 모친, 이선주는 개중 ‘본사’로 불리는 역삼동의 고급 요정에 주로 머물렀다.
고급 요정의 이름은 규원.
알렉스 배의 부모는 이 규원을 일생의 자랑으로 여겼다.
규원은 2층 규모의 한옥이었다.
강남의 우거진 빌딩 숲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다.
빌딩 숲 사이에 자리한 고풍스러운 한옥은 이질적이었다.
정문을 제외한 나머지 삼면은 대나무를 심어 둘러 밖에서 보기 어렵게 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