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17화
대찬은 최재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아는 기자 중에 제일 독한 놈이 누구야?”
“독한 거라면 뭘 말하는 거야?”
“제일 치사하고 악착같은 독종.”
“웬일로 네가 그런 양아치를 다 찾냐.”
“누군지만 알려줘.”
“우리는 명색이 점잖은 보도전문채널이라 그 정도 독종은 없어. 대신, 바깥에 아는 사람이 하나 있기는 하지.”
“누구야.”
“일요한국에서 일하는 전길재.”
“이름은 들어본 거 같네.”
“굵직한 건수 많이 올렸으니까 너도 들어봤을 거야. 나보다 2, 3년 먼저 기자질 시작한 양반인데, 팀으로 안 움직이고 독고다이로 움직여. 가진 정보망도 대단하고 감각도 대단해서 써보면 후회는 안 할 거야.”
대찬은 최재한에게서 그의 연락처를 받아냈다.
최재한은 연락처를 알려주면서도 덧붙여 말했다.
“그런데 좋은 칼 쓰려면 그만큼 비싼 값을 치러야 해.”
“값은 일요한국에 광고비로 지불하면 되겠지?”
“그건 당연하고, 전 선배 주머니에도 몇 푼 요령껏 찔러줘야지.”
“알았어.”
“야, 근데 너 변했다? 이런 사파까지 기용하고.”
“정파든 사파든 지금은 내공 센 사람이 필요해서.”
대찬은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그는 바로 전길재와 단둘이 만났다.
독고다이라고 하더니, 만남의 장소도 곰팡내 나는 반 지하 다방이었다.
전길재는 최재한이 사파라고 부른 것에 걸맞게 인상이 기이했다.
해골에 가죽만 얹은 듯 초췌한 인상에, 낯빛은 시멘트 빛이고 정돈되지 않은 산발이었다.
그는 대찬을 만난 지 십 분도 되지 않아서 담배 세 개비를 피웠다.
그래서 그가 입을 열 때마다 담배 쩐 내가 진동했다.
“조대찬 씨는 나름 유명인산데, 나 같은 놈을 다 찾으시네요.”
“전 기자님도 나름 유명인사 아니십니까.”
“재한이한테 대충 얘기는 들었습니다. 나 같은 음지가 아니라 양지 취향인 녀석한테 웬일로 연락이 왔나 했더니.”
“길게 말씀 안 드리겠습니다.”
“나도 구구절절 장광설은 싫어요.”
대찬은 짧게 말했다.
제이슨 리의 뒷덜미를 잡아 달라.
전길재는 네 개비 째의 담배를 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놈은 관상하고 배경만 봐도 견적이 나와요. 그렇게 수고롭진 않을 겁니다.”
“가급적 빨리 진행해주셨으면 합니다.”
“털어도 먼지 안 나온다는 놈도 손가락으로 슥 닦아보면 한두 톨은 나와요. 이런 놈은 털 것도 없이 입김만 훅 불어도 난리 나죠.”
“좋습니다.”
“단가가 좀 세긴 한데, 뭐 조대찬 씨 정도면 무리될 금액은 아니겠네요. 제 몫은 현금으로 알아서 준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쓸 만한 정보는 입수되는 대로 저한테 바로 일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죠.”
전길재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
전길재가 자리를 뜨고도 독한 담배냄새는 자리에 오래 머물러있었다.
전길재는 착수한 지 하루 만에 대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대찬 씨가 이미 알고 있는 정보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일단 입수된 것만 알려드리겠습니다.”
“네, 알아서 필터링 할 테니 뭐든 말씀해주시죠.”
“이 친구 부친이 누군지 아세요?”
“어, 아뇨.”
그러고 보니 제이슨 리는 대찬이 카일라 정기모임에 참석했을 때, 다른 이들의 부모는 잘만 소개해놓고 자기 부모는 소개하지 않았다.
“이두희라고, 강서대 산학협력단장 지내던 교수 출신이거든요.”
“그래요?”
“네, 그런데 재작년에 퇴임했습니다. 이력이 제법 화려한 양반이라 그런지 여기저기서 많이 찾았더군요. 몇 개 회사 고문으로, 사외이사로 지내고 있고 학술단체 회장이랑 무슨 협회장까지 명함도 많습니다.”
“으레 있는 일이죠.”
난다 긴다 하는 유명인사의 자제들이 모여 있는 카일라가 아닌가.
제이슨 리의 아버지가 그 정도 위상을 지닌 인물이라고 해도 전혀 놀라울 것이 없었다.
대찬은 그의 아버지가 주식이나 부동산쯤으로 대박이 난 졸부쯤이나 되겠거니 했다.
그런데 나름 학계에서 방귀 좀 뀌던 인물이었다니.
오히려 뜻밖이었다.
전길재는 자신이 정리한 자료를 들추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아들, 제이슨인가 심슨인가 하는 놈이 대표로 있는 회사가 뭐? JL인베스트먼트인가 그렇다고 했죠.”
“네.”
“그 회사가 한국 법인이 아니고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법인이더라고요?”
그 말을 듣자 대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조세피난처로 유명한 곳이잖아요.”
“네, 그런데 이 회사가 이름은 인베스트먼트인데 뜬금없이 특허 하나를 갖고 있어요.”
“특허요?”
전길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 어디 보자, 무슨 정밀기계에 관한 특허인 거 같은데 자세한 건 잘 모르겠고, 암튼 이 특허를 그 회사가 보유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럼 그 특허가 혹시…….”
“예, 무슨 경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제이슨의 애비인 이두희가 산학협력단장으로 있을 때, 강서대학에서 개발한 기술이에요.”
“그 특허를 지금 JL인베스트먼트가 갖고 있다.”
“그렇죠. 무슨 경위로 강서대학이 갖고 있던 특허가 그쪽에 넘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이두희 씨가 위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크겠군요.”
“이 특허가 제법 알짜더란 말입니다. 관련 업계에서는 유용하게 사용되나 봐요.”
“그럼 돈도 쏠쏠하게 챙기겠군요.”
“당연하지요.”
“게다가 특허사용료가 한국 법인이 아니라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법인으로 들어간다는 건…….”
“역외탈세.”
“이거, 국세청에 찔러야 하나.”
“무턱대고 그렇게 덤벼댈 순 없지요. 정황이야 그렇지만 정황만으로 들이대는 건 하수예요.”
“알겠습니다. 일단 기자님은 계속 진행해주시죠. 저도 나름대로 파겠습니다.”
“같이 판다고 디스카운트 되는 건 아니에요?”
“물론입니다.”
전길재는 메마른 웃음을 짓고는 전화를 끊었다.
대찬은 전길재에게만 자신의 운명을 맡길 수 없었다.
대찬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챙겼다.
그는 제이슨 리와 따로 만났다.
제이슨 리는 속으로 웃었다.
이제야 대찬이 자기 주제를 파악하고 고개를 숙이는구나.
그렇게 판단했다.
그를 대하는 대찬의 목소리는 한결 고분고분해져 있었다.
그런 목소리가 제이슨 리의 판단을 더 공고하게 해주었다.
대찬은 제이슨 리의 앞에서 칭얼거렸다.
“야, 그래도 좀 섭섭하다. 그걸 바로 홍승연한테 말하면 어떡해.”
“안 그랬으면 형이 이렇게 온순해졌겠어요?”
완전히 우위에 섰다고 생각한 제이슨 리는 온순이라는 단어를 직접 대찬의 면전에 대고 말했다.
이 정도 굴욕에 낯빛이 흔들릴 대찬이 아니었다.
대찬은 멋쩍게 웃으며 열심히 꼬리를 흔들었다.
“좋은 말로 했어도 그랬을 거야.”
제이슨 리는 픽 웃었다.
“형이 제가 하라는 대로만 잘하면 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요. 그래, 오늘 그 얘기 하려고 보자고 했어요?”
“나도 살 길을 고민해봤는데, 아무래도 너랑 적극적으로 밀착하는 게 상책인 거 같아서.”
“역시 그래도 머리가 빨리빨리 돌아가시네요.”
대찬은 제이슨 리에게 가깝게 붙었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고. 나도 제이슨 너한테 그래도 나쁜 파트너는 아닐 테니까.”
“뭐, 형 정도면 저도 같이 어깨동무하기에 부끄럽지 않죠. 유명하기도 하고, 나름 비전도 있고.”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아, 근데 차는 좀 바꿔요.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국산도 괜찮아.”
“형, 우리 정도면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하차감 쩌는 섹시한 걸로 뽑아야 한다니까요. 차에서 딱 내리면 남자고 여자고 늙은이고 어린애고 존경의 눈빛으로 본다니까.”
“알았어. 나도 한번 알아볼게.”
“이 형은 다 좋은데 센스가 좀 구린 게 문제야.”
대찬은 헤헤 웃고 말았다.
대찬은 제이슨 리와 의도적으로 가까워졌다.
골프장 투자 건에 대해 물어보면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면서 대충 눙쳤다.
대찬은 제이슨 리와 함께 알렉스 배의 병문안을 갔다.
알렉스 배는 대찬을 보자마자 경기를 일으켰다.
대찬은 머쓱하게 웃으면서 사과했다.
“미안해, 알렉스. 그땐 나도 술에 좀 취해서.”
“아, 아니에요, 형.”
“갑자기 웬 존대.”
“하하… 이게 편해서.”
제이슨 리는 알렉스 배의 옆에 놓인 과일바구니에서 사과를 꺼내 씹으며 말했다.
“형, 이 새끼한테 절절맬 거 없어. 형이 그러니까 나랑 이 새끼랑 동급으로 묶이는 기분이잖아.”
“친구끼리 급이 어디 있어.”
대찬이 좋게 타이르는 말에 제이슨 리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어?”
“형, 그딴 식으로 말하면 내 자존심이 좀 상하지.”
“제이슨.”
“어떻게 물장사하는 집하고 학력, 재력 안 빠지는 우리 집하고 동급이냐고.”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부탁할게. 말할 때 신경 좀 써줘.”
“그, 그래, 알았다.”
“나 형 좋은 사람으로 여기고 오래 가고 싶어. 나 쉽게 지치는 사람이야.”
“조심할게.”
“하, 밖에서 바람 좀 쐬고 올 테니까 있어.”
제이슨 리는 나가면서 문을 쾅 닫았다.
알렉스 배는 어깨를 찔끔 움츠렸다.
대찬은 닫힌 문을 보며 쯧쯧 혀를 걷어찼다.
“성질머리하고는.”
“…….”
“알렉스, 아니, 낯간지러워서 그렇게 못 부르겠다. 춘모야.”
“…네?”
“너는 왜 쟤 앞에서 입 한번 벙긋 못해?”
“그러는 형은 뭐 입 벙긋 하세요?”
대찬은 넉살 좋게 웃었다.
“흐흐, 그렇네.”
“저는 그렇게 개 잡듯이 패시더니.”
“그런 소리 듣고 가만히 있으면 내가 뭐가 되냐. 그래도 내가 심했지. 미안하다, 미안해.”
“…아녜요. 제가 쓰레기 같았죠. 죄송해요.”
분위기가 조금 물렁해지자 대찬이 넌지시 물었다.
“나야 제이슨한테 물린 게 있으니까 그렇다 쳐도, 너는 그런 것도 없으면서 왜 저 친구한테 힘을 못 써?”
“제이슨이 다 말했잖아요. 물장사하는 집안 출신으로 이렇게라도 안 하면 어떻게 저 틈바구니에 끼겠어요.”
“안 끼면 되잖아.”
알렉스 배는 대찬을 잠깐 올려다보다가 수줍게 웃었다.
“멋있잖아요.”
“그렇게 몸 망가지면서까지 붙어있을 정도로 멋있어?”
“어쨌거나 저쨌거나 이러면 저도 상류층인 거잖아요?”
“상류층이면 어떻고 중산층이면 어때.”
“에이, 그건 형이 계속 평민처럼 살아서 그랬던 거예요.”
순도 백 퍼센트 속물적인 말.
대찬은 경멸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귀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상류층처럼 살고 싶어서. 그게 다야?”
“네.”
“뭐 제이슨한테 인간적인 호감, 그런 건 없고?”
“형 같으면 그런 걸 느끼겠어요? 제가 마조히스트도 아니고 허구한 날 처맞고 술값 떼이는데?”
목소리가 살짝 격앙되는 걸 보니 거짓은 아니었다.
대찬은 은근히 웃으면서 말했다.
“근데 너도 결국 우물 안 개구리야.”
“네? 그게 뭔 소리예요.”
“너는 쟤네가 진짜 상류층인 거 같지?”
“그럼 뭐, 가짜 상류층이에요?”
“으스대는 졸부들 위에 점잖은 나으리들 있는 거야. 너도 아직 진짜 상류층을 못 만나본 거지.”
“그, 그래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창 허영 부릴 때야 지금이 멋있어 보이겠지만 몇 살 더 먹고 나면 그 위에가 보이거든.”
“그 위에…….”
“뭐, 네가 지금도 만족한다니까 더 말할 필요도 없지만.”
“형은 꼭 뭐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네요.”
“나?”
“솔직히 형도 별 거 없으면서.”
물정 모르는 말에 대찬은 피식 웃기만 했다.
그때 제이슨 리가 다시 병실 안으로 벌컥 들어왔다.
그는 대찬을 향해 은근히 신경질적인 눈빛을 보냈다.
“형, 가자.”
“어, 그래.”
대찬은 냉큼 대답하고는 알렉스 배를 향해 웃으며 속닥거렸다.
“우물 밖으로 나오고 싶으면 연락해.”
대찬은 알렉스 배의 대답은 듣지 않고 성큼성큼 제이슨 리의 꽁무니에 따라붙었다.
알렉스 배는 구미가 당겼다.
병실 밖으로 나온 제이슨 리는 대찬에게 눈을 흘겼다.
“형, 좀 눈치 없는 타입인가?”
“뭐?”
“내가 짜증내면서 박차고 나가면 좀 따라와서 좋은 말로 고분고분, 그게 안 되나? 내가 이렇게까지 말로 해야 돼?”
제이슨 리는 그렇게 말하며 대찬을 똑바로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