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16화
제이슨 리는 홍승연과 만났다.
그는 대찬과 서원웅의 관계를 익히 알고 있었다.
“누나 말대로 조대찬 성격 한번 더럽더라.”
“그지? 잔대가리만 굴릴 줄 아는 게 성격은 또 개차반이라니까.”
“그래도 그 덕분에 일이 잘 풀릴 것도 같아. 배춘모가 윤이영 갖고 조대찬 살살 긁다가 아주 죽기 직전까지 맞았거든.”
“병신.”
“가만 두면 조대찬이 아주 곤란해질 상황이었는데, 내가 덮어줬어.”
“뭐?”
“이걸로 나한테 빚진 거야.”
그러자 홍승연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야, 그걸 왜 덮어줘? 가만 놔두면 우리 쪽에서 알아서 씹어줄 텐데.”
“실리를 따져야지.”
“실리 같은 소리 한다. 조대찬이가 그러면 고마워서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거 같아? 어림도 없어. 그리고 간, 쓸개 빼준다 해도 그게 뭐 별 거야?”
“누나는 꼭 조대찬 얘기만 나오면 그렇게 흥분하더라?”
“내가 그 새끼한테 당한 게 얼만데!”
제이슨 리는 좋은 말로 홍승연을 달랬다.
“너무 그러지 마. 그래도 잘 달래놓으면 써먹을 데가 있잖아. 필래 쪽 돈 빼오려면 조대찬을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어.”
“그것도 자존심 상해.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남편이 조대찬 말에는 좋다고 맞장구쳐줄 거라는 게.”
“현실적으로 판단하자고. 이번에 필래 쪽 돈만 잘 당겨오면 투자할 곳 많다니까.”
“돈은 지금도 차고 넘쳐. 나는 돈 안 벌어도 좋으니까 조대찬 그 새끼 모가지 날아가는 거 보고 싶다고.”
제이슨 리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배춘모 머리 좀 깼다고 조대찬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질 거 같아?”
“그래도 타격은 가겠지.”
“조대찬이 쇼에 얼마나 능해. 윤이영 팔면서 눈물 짜면 오히려 저쪽에 동정표가 갈 수도 있어.”
홍승연은 흥, 콧방귀를 뀌었다.
제이슨 리는 그녀를 좋은 말로 달랬다.
“누나, 걱정 마. 단물 다 빠지면 누나가 말려도 내가 조대찬 와르르 무너뜨려 줄 테니까. 나도 그런 놈 싫어. 천박하게 태어나서 잔대가리나 굴리는 주제에 자기가 뭐라도 된 듯 건방 떠는 거, 딱 질색이라고.”
“네가 무슨 수로 와르르 무너뜨려?”
“에헤이, 속고만 사셨나. 암튼 이번에는 내 말대로 해줘, 오케이?”
홍승연은 침묵으로 그의 말에 동의해주었다.
제이슨 리가 홍승연과 절친한 사이라는 걸 안 대찬은 안절부절 못했다.
대찬은 극동일보의 타깃이었다.
만일 제이슨 리가 그 자리에서 홍승연에게 알렉스 배의 일을 귀띔했다면?
극동일보가 이런 호재를 그냥 놓칠 리가 없었다.
아직까지 대찬을 향한 대중의 관심이 식지 않은 상태.
굳이 대찬과 극동일보 사이의 사적인 감정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그렇다.
이 정도의 유명인이 술자리에서 폭행을 저질렀다는 사실만으로 제법 큰 지면을 할애할 가치가 충분했다.
대찬은 속으로 애간장을 태웠다.
그렇다고 제 발이 저려 제이슨 리한테 함구해 달라, 청탁을 넣을 수도 없었다.
대찬은 제이슨 리 같은 사람을 잘 알았다.
그가 알렉스 배를 어떻게 취급하는지 보라.
제이슨 리는 약자에게는 무자비하다.
대찬이 스스로 치부를 들추고 그에게 매달리는 구도가 되면 곤란했다.
그렇기에 벙어리 냉가슴 앓듯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전전긍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며칠이 지나도 극동일보에서는 대찬에 관한 기사를 올리지 않았다.
대찬은 민승기와 마주앉아 이 일을 의논했다.
전후사정을 들은 민승기는 한숨을 팍 쉬었다.
“암튼 좀 고깝더라도 비위 맞춰주라니까.”
“제 인내심이 더 깊었으면 좋았겠죠. 근데 참을 수가 없었어요.”
민승기도 이 일로 대찬을 심하게 나무라지는 못했다.
“하긴, 그 말 듣고 잠자코 있는 것도 다른 방면으로 한심한 일이지.”
“다음부터는 주먹 간수 잘할게요.”
민승기는 쩝, 입맛을 다셨다.
“근데 제이슨인가 하는 놈이랑 홍승연이랑 꽤 친한 사이라는 게 걸리네.”
“며칠 째 감감무소식인 걸 보니, 제이슨이 홍승연에게 아예 정보를 안 흘렸든지, 아니면 흘렸지만 무기로 쓰지 못하게 막았든지 둘 중 하나예요.”
“하긴, 그 건이 터지면 자기한테도 영향이 있을 거 아니야. 뼈도 못 추리게 밟은 건 너지만 제이슨 그놈 지분도 적지 않잖아?”
“그렇긴 할 텐데 그게 전부는 아니겠죠. 이걸 계기로 더 치근덕댈 게 분명해요.”
민승기는 팔짱을 꼈다.
“너무 그렇게 튕길 거 없어. 우리도 적당히 그놈 이용하면 되잖아. 나쁠 거 없지. 그쪽 인맥 짱짱하잖아.”
“가까이하고 싶지 않아요.”
“뭘 그렇게 뻣뻣하게 굴어. 목마르면 구정물이라도 퍼다 마셔야 되는 게 네 소임이야.”
“창고에 생수가 톤으로 쌓여 있는데 뭐 하러 구정물 마시고 배탈 나겠어요.”
“틀린 말은 아니다만.”
“일단 극동에서 이걸 터트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대비는 해놔야겠어요.”
민승기는 말없이 고개만 천천히 끄덕였다.
제이슨 리는 빚을 오래 묵혀두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빠른 시일 내에 대가를 취하고자 했다.
대찬이 필래 비바체 이사회에 참석하려고 필래타워에 들른 날, 서원웅이 그를 따로 불렀다.
서원웅은 대찬의 앞에 커피 한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와이프가 골프장 투자를 권하던데.”
“골프장? 수익률이 좋을까 모르겠네. 승연 씨가 재테크에 센스가 있는 편이었나?”
“와이프는 딱히 없는데 동업자가 있다나봐.”
“동업자?”
서원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잘 모르겠다고 하니까 그 동업자 얘기를 하더라고.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대찬은 피식 웃으며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못 믿을 사람하고 동업하진 않겠지. 중요한 건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아니면 믿을 만하게 보이는 사람인지 분별할 줄 아는 거야.”
“나도 그렇게 얘기했지.”
“그랬더니?”
“너한테 물어보라던데?”
그러자 대찬은 의아한 듯 물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너도 잘 아는 사람이라더라고. JL인베스트먼트, 제이슨 리 대표.”
이름을 듣자마자 대찬은 정색하며 탁자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서원웅은 그의 기색을 흘끗 보고 말했다.
“잘 아는 사람은 맞나보네.”
“잘 아는 건 아니고, 한 번 봤지. 근데 대충 파악이 되더라고.”
“어떤 사람인데?”
“내가 저번에 카일라라고 물어본 적 있잖아.”
서원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활동하는 친구야?”
“실질적인 리더야.”
“내가 알고 싶은 건 이 친구가 믿을 만하냐는 것, 그리고 투자해도 될 만큼 감각이 좋냐는 거야.”
“얼마나 감각이 있는지는 나도 몰라. 근데 내가 너라면 투자 안 해.”
서원웅은 대찬을 다시 흘끗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들었어.”
대찬은 서원웅에게 투자를 권유할지 잠깐 고민했다.
그러면 당장은 저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다.
눈 한 번 딱 감고 모든 일이 해결된다면 그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었다.
이번에 제이슨 리의 역성을 들어주면 그는 더 큰 것을 요구할 것이다.
대찬의 단호한 조언을 들은 서원웅은 홍승연에게 투자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제이슨 리는 그녀에게 서원웅이 반드시 오케이 사인을 내릴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서원웅의 반응은 오히려 그 반대.
홍승연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여보, 조대찬한테 물어는 본 거야? 내 말 듣지 말고 조대찬 말 듣고 결정하라니까.”
“물어봤어.”
“그랬더니, 그 인간이 하지 말래?”
서원웅은 홍승연을 가만히 응시했다.
“여보, 나는 대찬이 꼭두각시도 아니고 당신 꼭두각시도 아니야.”
“누가 꼭두각시래?”
“판단은 내가 해.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야.”
“그러니까 조대찬이 뭐라고 했냐구.”
홍승연의 언성이 높아졌다.
“내가 그걸 당신한테 구구절절 알려줘야 할 이유가 있어?”
“그렇게 못할 이유는 뭔데?”
“당신한테는 대찬이 얘기 안 하고 싶어. 그 친구 얘기만 나오면 우리 목소리가 커지잖아.”
“목소리가 커지는 게 내 탓이야? 조대찬이 번번이 훼방을 놓으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됐다.”
“나는 아직 안 됐어. 빨리 말해!”
서원웅은 대답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홍승연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바로 제이슨 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제이슨 리에게 한참 성질을 부렸다.
역시 네 말 듣는 게 아니었다, 앞뒤 잴 것 없이 조대찬 기사를 바로 터트리겠다 난리를 쳤다.
그녀에게서 말을 전해들은 제이슨 리는 그녀를 간신히 진정시키고 바로 대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찬은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 진짜 너무하네.”
“다짜고짜 그게 무슨 말이야.”
“모르는 척 하지 마. 골프장 건. 서원웅 대표가 형한테 자문 구했을 거 아니야.”
“자문 구했어. 그런데 아무런 데이터도 없는데 내가 뭐라고 조언을 할까?”
“하, 진짜 섭섭하게 하네. 지금 자료가 중요해?”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한두 푼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내 돈도 아닌데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래라 저래라 할까?”
“사람이 순진한 거야, 멍청한 거야.”
“둘 다 아니야.”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의리 지켜줄 이유가 없지.”
“의리라.”
“형이 알렉스 두들겨 팬 거, 이거 내가 덮어준 거란 거 몰라? 형, 홍승연 알지? 서 대표 와이프. 그 사람하고 나하고 친해. 그 사람도 이거 알고 있어.”
제이슨 리는 대찬이 이 말을 듣고 놀라 까무러치기를 바랐다.
그러나 대찬은 그가 원하는 대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래?”
“반응이 그게 다야? 홍승연이 길길이 날뛰면서 극동일보에 터트리겠다는 거, 내가 막아주고 있었다고.”
“그래, 그건 고맙네.”
“그럼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셔야지.”
“나중에 술이나 한잔 살까.”
그 말에 제이슨 리는 잠시 침묵했다.
불쑥 험한 말이 나오려는 걸, 제 딴에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은 것이었다.
“형, 형이 지금까지 인생을 쉽게만 살아서 뭘 잘 모르나 본데.”
대찬은 본능적으로 헛웃음이 터졌다.
“인생을 쉽게만 살았다고? 적어도 너한테서는 그런 말을 안 듣고 싶은데.”
이번에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한 건 대찬이었다.
자신이 이끌어온 인생이 쉽게 살아지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그 말을 오로지 부모의 덕택으로 모든 걸 쉽게 돌파해온 제이슨 리에게 듣는 게 참기 힘들었다.
“이딴 식으로 자꾸 내 성질 긁어서 좋을 게 없을 텐데. 리얼 월드가 얼마나 참혹한지 알려줘?”
“리얼 월드라.”
언제까지 이 풋내기와 어울려줘야 하는지.
대찬은 진절머리가 났다.
“빨리 대답해!”
“좋아. 그럼 나한테도 명분을 줘.”
“명분이라니.”
“골프장 투자가 합리적이라는 명분. 그래야 나도 서원웅한테 몇 마디 보태면서 설득할 수 있을 거 아냐.”
“그런 명확한 데이터가 있으면 내가 형의 힘을 빌리려고 했겠어?”
대찬은 실소가 나오려는 걸 참고 말했다.
“아무 자료라도 좋으니까, 하다못해 홍보용 찌라시라도 좋으니까 보내달라고.”
“그럼, 우리 편 들어주는 거야?”
제이슨 리의 셈법은 간단했다.
우리 편 아니면 남의 편.
살아오면서 깊은 고민을 안 해봤으니 셈법이 간단할 수밖에 없었다.
대찬은 웃으면서 그 간단한 셈법에 어울리는 해답을 건네주었다.
“그렇게 해줄게. 대신, 시간은 좀 필요해.”
“시간이 왜 필요하죠?”
“서원웅이 요즘 바빠서 독대할 시간을 얻기도 쉽지 않고, 나도 이래저래 말 꾸밀 여유가 필요하니까.”
“좋아, 그건 내가 해줄 수 있지.”
제이슨 리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대찬은 통화가 종료된 휴대전화 액정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나한테 리얼 월드를 알려주겠다고? 네가 모르는 거 같으니까 내가 알려줄게. 웰컴 투 더 리얼 월드다.”
대찬은 제이슨 리가 가자는 대로 끌려갈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편을 들어주겠다는 건 그저 시간을 벌기 위함.
대찬은 제이슨 리를 상대할 때는 도덕이고 체면이고 따지지 않기로 했다.
그럴 까닭도, 필요도 없었다.
제이슨 리가 자신에게 리얼 월드를 보여준다고 했을 때, 그가 구사할 방법이야 뻔했다.
대찬은 같은 방법으로 가르침을 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