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15화
대찬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야, 알렉스, 너도 빨리 와서 사과해.”
제이슨 리의 명령 같은 권유에 알렉스 배는 쭈뼛거리며 대찬에게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회원님.”
“내가 간신히 말 터놓으니까 네가 다시 어렵게 만들고 있네. 너도 말 편하게 해라.”
제이슨 리는 대찬의 의중은 물어보지도 않고 그렇게 해치워버렸다.
알렉스 배는 대찬을 보며 머쓱하게 웃었다.
“미안해, 대찬이 형.”
“…허.”
대찬은 이제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
그렇게 다시 시한부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약속한 1시 반이 되면 앞뒤 안 보고 자리를 뜰 작정이었다.
술을 나누면서 하는 얘기라고는 대찬의 입장에서 영양가가 곤약만큼도 없었다.
제 딴에는 내로라하는 비즈니스맨들의 흉내를 냈는데, 대찬이 듣기에는 허황되고 우스운 소리들뿐이었다.
어디서 주워듣는 말들은 많아서 그럴듯하게 해대는데 따지고 보면 어딘가 묘하게 나사가 한두 개씩은 빠져 있었다.
혹은 경제학원론 정도나 독파했으면 누구나 아는 내용을 구태여 영단어를 동원하여 무슨 저만 아는 내용인 듯 주절댔다.
대찬은 한없는 지루함을 느꼈다.
애초에 케케묵은 돈 버는 얘기에는 별 관심이 없는 클라라는 자기 애인과 전화를 하겠다며 잠깐 자리를 떴다.
그러자 화제가 그래도 점잖은 편이었던 돈 버는 얘기에서 적나라하게 음흉한 얘기로 번졌다.
알렉스 배가 웃음을 흘리면서 대찬에게 말했다.
“아, 근데 형, 진짜 부러워.”
“뭐? 뭐가 부러워.”
“애인 있잖아요. 윤이영이랑 사귀잖아요.”
대찬은 싱겁게 웃었다.
남의 애인을 존칭도 없이 멋대로 이름만 불러 젖히는 정도의 결례는 이제 인지도 못할 정도가 되었다.
“너희도 만나고 싶은 여자들 맘대로 만나고 다니잖아?”
“에이, 그래도 차원이 다르잖아요. 내가 만난 애들은 기껏해야 지망생이었는데.”
“열심히 어필하다 보면 좋은 여자 만나겠지.”
대찬은 그렇게 대충 둘러댔다.
별로 이야기를 더 진전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알렉스 배는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남의 심기는 안중에도 없는 건지 뚫린 입이라고 멋대로 지껄였다.
“윤이영이랑 사귀면 어때? 소풍 가는 날에 나오는 것처럼 실제 성격도 좀 음산하고 그런 게 있다던데.”
“전혀 아니야. 그리고 남의 애인한테 음산하다 어쩐다 얘기하는 거, 별로 안 좋아.”
“그냥 소문인데, 뭐. 하, 진짜 나도 윤이영 같은 탑급 연예인이랑 사귀어 보고 싶다.”
대찬은 아예 대꾸를 안 했다.
그럼에도 알렉스 배의 주둥이는 쉬지 않았다.
“윤이영 몸매 죽이잖아. 힙하고 미드가 어우, 진짜…….”
“알렉스, 술이 많이 취한 거 같네.”
대찬의 점잖은 지적이 술이 오를 대로 오른 알렉스 배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듣는 귀 밝은 제이슨 리가 적당히 끼어들 법도 하건만.
그는 취한 척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그러다 결국 알렉스 배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어때? 침대에서도 비쥬얼만큼 해? 아, 진짜 궁금한데.”
그 한 마디에 간신히 유지되던 이성의 끈이 탁, 끊어져버렸다.
대찬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렉스 배의 취한 시선이 그의 움직임을 채 다 따라오기도 전에 대찬은 그대로 주먹을 알렉스 배의 하관에 내리꽂았다.
“컥!”
알렉스 배는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몽롱하던 정신이 주먹 한 방에 돌아왔다.
“혀, 형! 왜, 왜 이래요!”
대찬은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알렉스 배의 목덜미를 잡아 넓은 곳으로 질질 끌고 갔다.
그리고 그의 배를 콱 짓밟았다.
알렉스 배는 대찬의 짓이기는 힘에 맞추어 컥, 컥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었다.
“이, 이 새끼가 돌았나……!”
대찬은 대꾸하지 않고 그대로 얼굴을 밟았다.
우지끈, 코뼈가 깨지는 느낌이 들었다.
대찬은 멈추지 않고 담뱃불을 비벼 끄듯 알렉스 배의 얼굴을 짓이겼다.
“커, 커억… 누가 좀 말려……!”
알렉스 배는 짧은 사지만 허우적거릴 뿐, 대찬의 일방적인 위력에 조금의 저항도 하지 못했다.
통화를 마치고 다시 안으로 들어오던 클라라는 뜻밖의 광경에 입을 살짝 벌리며 놀랐다.
“오, 저 새끼는 왜 쳐맞고 있는 거지.”
이성을 잃은 대찬이 이제 아예 알렉스 배를 결딴내려는 찰나.
뒤늦게 제이슨 리가 대찬의 손목을 붙잡았다.
“형, 그만 하세요.”
“놔.”
“이만 하면 됐어요. 더하면 형 쇠고랑 차요.”
“차고 말지.”
“에헤이, 왜 이러실까.”
제이슨 리는 대찬을 잡아당겨 알렉스 배에게서 떼어놓고, 대찬이 그를 더 곤죽으로 만들지 못하게 사이를 가로막았다.
제이슨 리는 대찬을 보며 웃었다.
“이러면 형 회사도 어려워지고 윤이영 씨도 마음이 안 좋을 거예요. 이쯤 하시죠.”
“…….”
알렉스 배는 그제야 피 섞인 가래를 뱉으며 쌕쌕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누운 채로 대찬을 향해 경멸의 눈빛을 쏘았다.
“씨, 씨발… 못 배운 놈의 새끼가 사람 패는 법만 배워서는, 씨발……. 가, 감히 누구를 패…….”
“많이 아프냐?”
제이슨 리는 알렉스 배를 내려다보며 태연하게 물었다.
“다, 당연히 아프지!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저런 새끼를 들이는 게 아니었어, 씨팔. 운 좋게 잭팟 한번 터졌다고 감히 누구를…….”
제이슨 리는 그런 알렉스 배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러다 빈 양주병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알렉스 배의 이마를 향해 내리쳤다.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크학!”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알렉스 배의 이마 가죽을 찢었다.
알렉스 배의 이마에 묽은 피가 알갱이 같은 유리파편을 쓸며 흘렀다.
알렉스 배는 이제 거의 혼절할 수준에 이르렀다.
분을 삭이던 대찬도 의외의 상황에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알렉스 배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너, 너, 이게 무슨 짓이야……! 크억…….”
“저런 새끼를 들이는 게 아니었다고? 저런 새끼가 뭔데.”
“다, 당연히!”
“우리처럼 잘난 부모 피 못 받고 못난 부모 피 받아서 촌티를 못 벗은 사람? 그런 뜻으로 저런 새끼라고 한 거냐?”
“틀린 말은 아니지!”
“너 웃긴다. 네가 그런 말 할 처지야?”
“…….”
“네 애미도 원래 창녀였잖아. 회장님한테 몸 팔아서 룸살롱 세우고, 이놈저놈한테 술 대주고 몸 대줘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 그런 더러운 피를 타고난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아?”
“제, 제이슨…….”
“야, 배춘모. 내가 알렉스, 알렉스 불러주니까 네가 진짜 알렉스 된 거 같아? 춘모야, 멍청한 것도 분수가 있지.”
“…….”
“방패막이나 하라고 프라임 리더니 뭐니 대우해줬더니 진짜 지가 뭐라도 된 줄 아나보네. 상황파악 좀 하세요, 춘모야.”
“제, 제이슨…….”
“가치로 따지면 대찬이 형이 너보다 열 배는 더 가치 있어. 깝쳐도 상황을 봐가면서 깝쳐야지.”
“…….”
제이슨 리는 몸을 일으키며 대찬에게 말했다.
“형, 죄송해요. 저런 덜떨어진 새끼는 진작 내쳤어야 했는데.”
“네가 굳이 안 나서도 됐어.”
“아니야. 제가 저렇게 술병으로 대가리를 깨줘야 찍소리도 못해요. 안 그랬으면 형 당장 곤란해졌을걸.”
제이슨 리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만일 이 일이 불거지면 대찬은 치명상을 입을지도 몰랐다.
유명 인사들의 자제와 어울려 클럽에서 술을 먹다가 폭행을 저질렀다.
그게 밖에 극동일보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결과는 끔찍할 것이다.
애인을 모독해서 참을 수 없었다.
그런 시답잖은 변명이 통할 리가 없었다.
상황으로만 보면 제이슨 리는 알렉스 배, 배춘모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그러니 제이슨 리가 대찬의 폭행에 가담함으로써 대찬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클라라는 헛웃음을 지었다.
“대박. 춘모 대가리 봐라. 빨간 머리 알렉스네.”
제이슨 리는 밖의 직원에게 말했다.
“야, 너네 왕자님 모셔가라. 술 취해서 비틀대다가 지 혼자 테이블에 대가리 박고 저렇게 됐다. 대걸레로 여기 피도 좀 닦고.”
그러자 화들짝 놀란 직원들이 알렉스 배를 서둘러 수습했다.
알렉스 배가 끌려 나가고, 제이슨 리는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형, 아무래도 술 더 마실 분위기는 아닌 거 같네.”
“나 때문에 소란 벌어져서 미안해.”
“저 미친 새끼가 도를 넘은 게 잘못이지, 뭐. 신경 쓰지 마.”
대찬은 지끈지끈 머리가 아파왔다.
“너도 욕봤다.”
“다음부터는 형 나올 때 배춘모 얼굴도 못 비추게 할게.”
그 말에 대찬은 단호하게 대꾸했다.
“아니, 그럴 거 없어.”
“설마 저 미친놈을 용서라도 해주겠다는 거야?”
“못하지.”
“그럼 저 역겨운 면상을 계속 보게?”
대찬은 이 이상 제이슨 리와 카일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목표는 저들의 인심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대찬은 이 건을 명분으로 삼았다.
“미우나 고우나 알렉스가 너희 대표잖아. 처음 나온 나 때문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도 좀 아닌 거 같고.”
“말만 대표지, 사실은 그냥 우리 하인 같은 놈이야.”
“하인 같은 놈이라도 굴러온 돌 때문에 너희가 부담 지는 건 내가 불편해서 싫어.”
“…….”
“어차피 나는 여기 사람들하고 친분이 깊지도 않아. 따지고 들자면 술 한 잔 마신 게 다지. 내가 빠져주는 게 맞아. 오늘 술값은 내가 낼게. 고맙다.”
대찬은 그렇게 딱 잘라 말하고는 옷깃에 매단 카일라의 배지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이 이상 엮이고 싶지 않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먼저 좀 가볼게.”
대찬은 제이슨 리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그대로 뚜벅뚜벅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자 제이슨 리는 팔짱을 낀 채 입술을 비틀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클라라가 깔깔 웃었다.
“제이슨 한 방 먹었네? 이 건으로 어떻게 집적거리려다가 완전 차였어.”
“닥쳐.”
“애꿎은 춘모 대가리만 깨졌네. 불쌍해서 어떡해?”
“닥치라고!”
제이슨 리가 버럭 외치자 클라라는 소리 죽여 쿡쿡 남은 웃음을 마저 웃었다.
먼저 자리를 떠서 집으로 돌아온 대찬은 한동안 잠에 들지 못했다.
그는 멀뚱멀뚱 눈을 뜬 채로 천장을 응시했다.
“에이 씨, 등신같이 거기서 주먹이 왜 나가냐, 왜 나가.”
대찬은 중얼거리다가 몸을 옆으로 뉘이며 혼자 말하고 혼자 반박했다.
“아니, 그럼 그따위로 말하는데 가만히 있어? 그래놓고 윤이영하고 떳떳하게 연애하고 결혼하고 살겠다고?”
“패도 좀 지능적으로 적당히 패야지. 조폭 새끼도 아니고.”
“뭘 어떻게 지능적으로 패? 아주 묵사발을 만들어야지.”
“그 덕분에 젠장인지 제이슨인지 하는 놈한테 빚졌잖아. 그거 어쩔 거냐고.”
“…그러게.”
대찬은 혼자 자문자답하는 꼴이 우스워서 피식 웃었다.
아무튼 알렉스 배 같은 잔챙이 하나 때문에 찝찝하게 됐다.
당장 질척이는 제이슨 리를 쳐내긴 해서 응급처치는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순순히 물러날 리가 없었다.
제이슨 리는 어떻게든 이 채무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취하려고 들 것이었다.
‘그놈이 제대로 된 놈이라면 가까이 지내서 나쁠 건 없지만.’
대찬의 경험과 통찰은 그가 제대로 된 놈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때 제이슨 리가 대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형, 오늘 이래저래 고생하셨어요. 그래도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잖아요. 우리 인연이 더 단단해진 계기가 됐다고 믿어요.
-고생했어. 고맙다. 잘 자.
대찬은 그 메시지에 짧게 대꾸했다.
대찬은 그대로 날밤을 샜다.
제이슨 리가 대표로 있다는 JL인베스트먼트의 정보를 뒤져봤다.
“신약개발 사업에 투자, 골프장 건설에 투자, 가상화폐 연구소에 투자… 이걸 다 해냈다고?”
그러나 조금만 더 찾아보니 투자는 말뿐.
실제로 진행된 건수는 많지 않았다.
언론 노출을 즐기며 변죽만 울리는 스타일이란 뜻이었다.
계속 제이슨 리에 대해서 찾다보니 그의 SNS까지 뒤지게 되었다.
시큰둥한 눈으로 계속 스크롤을 내리다 보니 대찬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띄었다.
-오늘은 홍승연이 쏜다, 쏜다, 쏜다! 샤토 마고 2000과 벨루가 캐비어. 역시 홍승연 이 구역의 미친년 클라스 제대로 인증 ㅎㅎ
사진에는 제이슨 리와 홍승연이 활짝 웃고 있었다.
“둘이 아는 사이였어?”
대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홍승연하고 얽혀서 좋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둘이 사적으로 만나서 술잔 나누는 사이이니 그저 아는 사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