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14화
이 기분이 스스럼없는 서구식 마인드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의 잘못인지.
아니면 초면부터 어깨에 손을 척척 올려대는 물색없는 저 녀석의 잘못인지.
대찬은 잠깐 고민했다.
‘아무리 서양이 프리하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는 아니지. 오히려 이런 쪽으로는 예의를 더 따지는데.’
대찬의 결론은 이 알렉스 배라는 인간이 대찬의 심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놈이란 것이었다.
대찬은 자신의 어깨에 올라간 알렉스 배의 손을 노려봤다.
알렉스 배는 대찬의 불쾌한 얼굴을 봤음에도 끝끝내 손을 어깨에서 치우지 않았다.
알렉스 배는 카일라의 회원들에게 말했다.
“자, 우리 카일라의 새로운 일원이 된 로튼 프룻츠 조대찬 대표입니다. 환영의 박수를 쳐주십시오.”
알렉스 배의 말에도 회원들은 건성으로 박수를 쳤다.
대찬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내가 왜 이런 자리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이나 받아야 하는 건데.
대찬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그 말이 대찬의 심정을 가장 잘 대변해주었다.
알렉스 배는 여전히 대찬의 어깨를 쥔 채로 커다란 연회장으로 향했다.
연회장으로 향하는 복도에는 가지각색의 미술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런 것의 값어치를 눈대중만으로 척척 짐작해낼 심미안이 대찬에게는 없었다.
그런 문외한의 눈으로 봐도 가격이 보통은 아닐 것이라는 느낌이 확 들었다.
회원들은 원탁에 죽 둘러앉았다.
알렉스 배가 회원들에게 대찬을 소개했다.
“요즘 뉴스에 여러 번 나오셔서 아실 분들은 다 아시죠. 조대찬 대표님입니다.”
대찬은 다시 예의를 갖춰 정식으로 인사했다.
“조대찬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다시 건성건성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무리 중에서 한 사람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귀티가 줄줄 흐르는 젊은 남녀 중에서도 유독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남자였다.
포마드로 잘 넘긴 머리.
관리가 잘 된 흰 피부.
척 봐도 금수저였다.
그는 대찬에게 다가오는 수고까지 마다하지 않고 악수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제이슨 리입니다. 편하게 제이슨이라고 부르세요.”
코리아 영 리더라면서 이름은 다 왜 이따위야.
대찬은 궁금증을 예의바른 목소리로 포장해서 물었다.
“아, 예. 근데 여기 계신 분들 성함이 다 영어로 돼있네요. 별명 같은 건가요.”
“별명이 아니고 본명입니다. 다들 피는 한국인데 서류상으로는 미국 사람들이라. 대외적으로 쓰는 한국이름이 있긴 하지만 우리끼리는 이게 편하죠.”
“그렇군요. 그럼 카일라가 아니라 에일라(AYLA)가 돼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메리칸 영 리더…….”
그러자 대찬을 바라보는 눈빛들이 더 날카로워졌다.
제이슨 리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대찬에게 말했다.
“조대찬 회원님, 농담도 잘하십니다.”
“…….”
농담 아닌데.
쓸데없는 말은 삼켰다.
제이슨 리는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국적이 미국이긴 한데 활동은 한국에서 하니까요. 미국에서 앞선 트렌드를 배워 와서 한국에 전수하고 있으니, 코리안 영 리더라고 불러도 손색은 없겠죠?”
“예, 딱히 불만이 있어서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
잠깐 인사말이 오고가는 와중에, 아지트에 상근하는 직원들이 마실 것과 먹을 것을 가져왔다.
제이슨 리는 테이블에 걸터앉아 대찬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리 카일라는 사회 각계의 유력인사들의 자제로 구성된 모임입니다. 조대찬 회원님은 집안이 한미하다고 듣기는 했는데, 그래도 워낙 핫한 셀럽이시니까 우리가 특별히 회원자격을 부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제이슨 리는 대찬에게 명함을 건넸다.
대찬은 그와 명함을 교환했다.
JL인베스트먼트 대표 Jason Lee.
대찬은 종종 이런 종류의 자산가와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었다.
투자 명목으로 자기 재산을 갖고 여기 깔짝, 저기 깔짝대면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게 주된 일상이었다.
아마 이 녀석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프라임 리더인 알렉스 배가 일어나서 대찬에게 말했다.
“제가 회원분들 간단히 소개를 해드리죠.”
그러자 제이슨 리는 손짓으로 그를 제지했다.
“알렉스, 내가 소개해드릴게.”
“아, 그, 그러실래요?”
제이슨 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차례차례 소개했다.
회원들은 대개 2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그러니 무리 중에서 대찬은 연장자에 속했다.
첫 번째로 제이슨 리가 소개한 이는 단아한 인상의 여성이었다.
“세아 미술관장 둘째 따님 클라라. 파슨스에서 디자인 공부하셨어요.”
“안녕하십니까.”
클라라는 고개만 까딱거리며 대찬의 인사에 화답했다.
인상과는 달리 냉랭한 태도였다.
제이슨 리는 계속 대찬에게 면면을 소개했다.
알짜 중견기업 대표의 장남.
정치권에 기웃거리면서 국회 입성을 지상과제로 여기는 폴리페서의 차남.
인간문화재의 장녀.
사학 이사장의 손녀.
강남에 빌딩만 열 곳을 가지고 있다는 부동산 알부자의 차녀.
차관의 삼남.
많이 팔아치우기로는 다섯 손가락에 들어가는 유명 소설가의 장남, 등등.
모두가 한가락 하는 집안의 자제들이었다.
그렇다고 대찬이 놀라 뒤로 나자빠질 정도는 아니었다.
서청수 회장의 신임을 얻고, 쵸 후쿠히로의 선택을 받고, 서원웅과 너나들이하며 국회의원 여럿과 밥과 술을 나누는 사이였다.
굳이 윗물과 아랫물을 나누자면 이들은 대찬이 어울리던 사람들보다는 한 급수 낮았다.
그런데 위세 부리기로는 이들이 한 술 두 술 더 떴다.
“그리고 우리의 프라임 리더, 알렉스는 정재계 인사들이 자주 드나드는 살롱의 자제입니다.”
“예, 그렇군요.”
대찬은 왠지 살롱 앞에 한 글자가 빠진 것 같았지만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잘난 부모님의 영향을 부정하진 않아요. 근데 우리는 그 영향력을 열 배, 백 배로 키워내고 있죠.”
“대단하시군요.”
“이 친구들도 각자 자기 사업이 있습니다. 저처럼 유망한 회사에 투자하는 친구들도 꽤 많죠.”
대찬은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회사 꾸려나가는 입장에서 잘 보여야겠군요.”
“하하, 잘 보여 두시면 좋을 겁니다. 다 서로 돕고 사는 거죠.”
“잘 부탁드립니다.”
대찬은 계속 자신의 신분을 주문처럼 속으로 되뇌었다.
지금은 개인 조대찬이 아니라 로튼 프룻츠의 대표 자격으로 있는 것이다.
조금 속이 배배 꼬인다고 내키는 대로 톡톡 쏘아댈 순 없었다.
그런 고분고분한 태도를 택했던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제이슨 리는 대찬에게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자, 그럼 오늘 환영파티 겸해서 술이나 한 잔 하실까요.”
“그러시죠.”
“알렉스네 클럽으로 가시죠.”
그러자 회원들은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술관장의 딸이라는 클라라가 알렉스에게 따갑게 쏘았다.
“저번처럼 술값 아끼다간 진짜 죽여버린다. 아낄 데가 있고 안 아낄 데가 있지.”
“아, 알았어.”
대찬은 그들을 흘끔 보고 프라임 리더라는 자리가 거창한 이름만큼 그다지 권위 있는 자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부전자전인 듯, 알렉스 역시 개인의 클럽을 운영하고 있었다.
물론 자기가 번 돈이 아니라 부모의 지원과 알고 지내는 몇몇과 함께 세운 클럽이었다.
대찬은 그런 쪽에는 취향이 없었다.
바로 옆에서 말하는 목소리도 안 들릴 정도로 쿵쾅쿵쾅 음악소리가 울려댔다.
어지러운 조명이 구역질을 유발했다.
그야말로 광란의 도가니.
첫 번째와 두 번째 삶을 합치면 어언 육십 년을 살았다.
떠들썩한 젊은 문화에 반감을 느끼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이런 데서 영감님 취향인 게 빼도 박도 못하게 들통나는구나.’
대찬은 한숨을 쉬었다.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서 가만히 술이나 꼴깍꼴깍 넘기는 취향이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 까불거리는 금수저들의 비위를 맞춰줘야 돼.’
대찬은 속으로 궁싯거리며 계산에 들어갔다.
그래도 와글와글 시끄러운 탁 트인 곳의 테이블이 아니라, 룸으로 안내 받아 좀 나았다.
그리고 클라라의 한바탕 잔소리를 들은 알렉스는 이름만 들어도 눈 튀어나올 양주들을 테이블 위에 좍 깔았다.
클라라는 그걸 보고 나쁘지 않네, 덤덤한 감상평을 남겼다.
상석을 차지한 건 프라임 리더이자 이 클럽의 주인인 알렉스 배가 아니라 제이슨 리였다.
그는 가장 상석을 자연스럽게 차지했다.
그리고는 그 옆에 대찬을 앉혔다.
그런 제이슨 리의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렉스 배 역시 으레 있는 일이라는 듯, 불쾌한 기색조차 없었다.
“제가 한 잔씩 돌리겠습니다.”
대찬은 양주를 한 잔씩 따라서 회원들에게 돌렸다.
그래도 독한 술이니 대찬은 양심껏 양을 조절해서 따랐다.
그런데 대찬에게서 술병을 넘겨받아 그의 잔을 채워주는 제이슨 리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들지 않으면 넘쳐 흘릴 정도로 가득 따라주었다.
대찬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제이슨 리는 대찬이 채워준 잔을 높이 들며 외쳤다.
“Here’s to our new friend, 우리들의 새 친구를 위하여!”
“위하여!”
클라라는 컵에 입술만 댔다가 바로 떼었고, 알렉스 배는 눈치만 보다가 발 옆에 미리 구비해놓은 양동이에 그 비싼 술을 휙 버렸다.
제이슨 리는 대찬이 적당히 따라준 술을 훅 대번에 넘겼다.
대찬도 그 정도만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대찬의 잔에는 여전히 적잖은 술이 남았다.
그러자 제이슨 리가 미간을 좁히며 피식 웃었다.
“에이, 남기시게?”
“하하, 이걸 어떻게 다 마십니까.”
“배짱이 그거밖에 안 되십니까? 이거 실망인데요.”
“제이슨이 장단이라도 맞춰주면 노력해보겠지만 혼자서 마시려니 영 재미가 없는데요.”
그러자 클라라가 손톱을 들여다보며 툴툴거렸다.
“아, 드럽게 빼네.”
제이슨 리가 픽 웃으며 대찬에게 말했다.
“저거 봐요. 시원하게 들이키시죠. 안주는 제가 먹여드릴게요.”
“예, 그럼…….”
대찬은 원대로 술을 죽 들이켜 주었다.
제이슨 리는 흐흐 웃으면서 대찬에게 안주를 먹여주었다.
그렇게 빈 술병이 하나 둘 늘어나자, 대찬은 슬슬 자리를 떠야겠다고 생각했다.
비위 맞추기도 이 정도면 되었다.
거기에 술을 더 마시면 돌연 속마음이 튀어나올 수도 있다.
대찬은 그들의 술값을 대신 내주는 것으로 인사치레를 다할 생각이었다.
“저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술값은 제가 낼 테니 천천히 놀다 들어가십시오.”
그러자 제이슨 리가 냉큼 대찬의 손목을 붙잡았다.
“에이, 벌써 가는 게 어디 있어요?”
“하하, 내일 회사 일이 바빠서.”
“누구는 회사 안 다닌답니까? 우리가 백수예요?”
“그런 뜻이 아니고요. 제가 체력이 안 좋아서 밤에는 잠을 충분히 자둬야 합니다.”
그러자 클라라가 또다시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냈다.
“아, 진짜 아저씨같이 뭐야.”
“클라라.”
“사장이시라면서요. 대충 직원들 일 시키고 사우나에서 땀 빼세요.”
철없는 소리.
대찬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간신히 삭였다.
제이슨 리는 알렉스 배에게 슬그머니 눈빛을 보냈다.
그러지 알렉스 배가 움직였다.
“조대찬 회원님, 그래도 첫날인데 분위기 좀 맞춰주셔야죠.”
“기본적인 도리는 다했다고 생각합니다만…….”
“회원님, 우리가 기본만 다하면 치워버려도 좋을 정도로 만만하게 느껴지세요?”
대찬은 기가 찼다.
“그런 뜻이 아니잖습니까. 제가 먼저 자리를 뜨는 게 결례는 아니란 겁니다. 그럼 알렉스는 내가 만만합니까?”
“조대찬 회원님.”
“좋은 분위기 해치고 싶지 않습니다. 선 넘지 마세요.”
대찬의 말에 알렉스 배는 침을 꼴깍 삼켰다.
제이슨 리는 알렉스 배를 실험쥐로 삼아 대찬의 성질을 가늠했다.
그는 살갑게 웃으면서 대찬을 도로 앉혔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조대찬 회원님. 저 친구가 좀 덜떨어졌어요.”
“사과 안 하셔도 됩니다. 안 바랍니다.”
“화 푸세요. 자, 그럼 이렇게 해요. 지금이 열두 시니까 딱 한 시 반까지만 마셔요, 네?”
이 제안마저 물리치면 지금까지 비위를 맞춰가며 들였던 공이 수포로 돌아간다.
대찬은 엉덩이를 다시 주저앉혔다.
제이슨 리는 흐흐 웃으면서 술을 따라주었다.
“계속 회원님, 회원님 하는 것도 딱딱하고 좀 이상하니까 형이라고 부를게요. 그래도 되죠? 대찬이 형.”
“예, 편하게 하시죠.”
“형도 편하게 해.”
반말하라고는 안 했는데 제이슨 리는 제멋대로 말 뒤에 요 자를 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