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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13화 (413/556)

난 할 수 있어 413화

“외부에 잡힌 일정 없죠? 오늘은 사무실에서 일만 하다 가면 되나.”

“예, 오늘은 없는데 외부에서 들어온 소식이 하나 있어요.”

“외부? 무슨 외부?”

“코리안 영 리더 어소시에이션이라고, 줄여서 KYLA, 카일라라고 하는 단체인데요.”

“뻣뻣한 혓바닥으로 애써 영어로 말할 거 없어. 우리말로는 뭔데요.”

“우리말로는 없슴다. 코리안 영 리더 어쩌고 하는 게 유일한 명칭이라.”

“오케이, 카일라. 이름만 들으면 젊은 사회지도층 모임 느낌 나는데.”

진위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슴다. 정확히는 젊은 창업가 모임이라고 하더라고요.”

“그쪽에서 뭐래요?”

“대표님을 정회원 자격으로 초청하고 싶다고…….”

대찬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나를요?”

“예, 이렇게 배지도 보내왔슴다.”

진위생은 초청장과 함께 전달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거기에는 KLYA, 철자가 조각된 금빛 배지가 있었다.

대찬은 코웃음을 쳤다.

“암튼 허영심은 하나는 대단한가 보네. 굳이 배지까지? 초청장 줘 봐요.”

“여기 있슴다.”

“귀하에게 KYLA 정회원 자격을 부여합니다.”

대찬은 제목을 소리 내어 읽고는 본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안녕하십니까, KYLA(Korea Young Leader Association)의 Prime leader를 맡고 있는 Alex Bae입니다.

대찬은 피식 웃었다.

“자식이 쓸데없이 영어로 도배를 해놨어. 적당히 좀 하지. 프라임 리더는 또 뭐야?”

“제가 검색해보니까 회장을 프라임 리더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일반 회원은 그냥 리더라고 하고요.”

“프라임 리더, 까고 있네.”

푸흐흐, 대찬은 바람 빠지는 소리로 웃었다.

그래도 배지까지 보내준 성의가 있으니 다 읽어는 주기로 했다.

-우리 KYLA는 세계 경제를 선도할 젊은 기업가들로 구성된 단체입니다.

KYLA는 미래 대한민국과 글로벌 경제의 지도자들 사이의 정보공유와 발전적 관계 수립을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이 밑으로는 이러쿵저러쿵 우리 잘났네 하는 소리고.”

이 글이 미괄식임을 확인한 대찬은 바로 글의 후반부로 시선을 옮겼다.

-귀하는 뛰어난 안목과 수완으로 젊은 기업가로서의 자질이 충분하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KYLA는 귀하가 우리의 일원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확인하였으며, 이에 KYLA의 정회원 자격을 부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미친놈들이 달란 소리도 안 했는데 자기네 맘대로 부여한다 만다 난리야.”

대찬은 초청장을 읽어 내려갈수록 짜증이 돋았다.

-저 Alex Bae는 KYLA의 Prime Leader로서 귀하를 환영합니다.

아래의 연락처로 Contact 하시면 KYLA의 일원이 된 것을 정식으로 확인해드리겠습니다.

대찬은 글을 다 읽고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초청장에 적힌 번호가 아니었다.

서원웅이었다.

서원웅이 전화를 받자마자 대찬이 물었다.

“당신은 카일라의 일원입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당신은 카일라의 존재를 알고 있습니까?”

“코알라?”

“확인 감사합니다.”

대찬은 뚝 전화를 끊고 초청장을 세절기에 갈아버렸다.

진위생이 아연실색하여 그를 말렸다.

“대표님! 연락처나 옮겨 적고 갈아버리셔야지 다짜고짜 갈아버리면 어케 하란 말임까!”

“내가 이딴 쭉정이 클럽 연락처를 왜 옮겨 적어요?”

“쭈, 쭉정이라니…….”

“서원웅이가 모른다잖아. 한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영 리더가 서원웅인데 카일라라고 물었더니 코알라냐고 하잖아!”

“…….”

“서원웅도 못 들어본 단체가 뭐 제대로 된 단체긴 하겠어? 애들 소꿉놀이에 장단 맞춰줄 생각 없어요.”

“그, 그래도.”

대찬은 오물이라도 만지는 듯, 질색을 하며 금배지가 들어있는 상자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이것도 바로 반송해버려요. 어디서 사람 의견도 안 물어보고 정회원 자격을 부여하네, 마네. 장난하나, 진짜.”

그때 민승기가 대표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대찬의 표정을 보고 상황을 바로 짐작했다.

“진위생 씨, 잠깐 나가 계세요.”

“아, 알겠습니다.”

대찬은 나가는 진위생을 향해 말했다.

“이 더러운 배지 갖고 나가요!”

그의 말에 민승기가 어깃장을 놨다.

“아녜요. 놓고 나가요.”

진위생은 민승기의 말을 듣고 빈손으로 대표실을 나섰다.

대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선배, 왜 놓고 나가래요.”

“너, 카일라에서 활동해.”

“네? 싫어요.”

대찬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의 의사를 분명히 했다.

민승기의 권유라면 무조건 두 번은 심사숙고하는 대찬에게는 이례적인 반응이었다.

민승기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조 대표 생각이 뭔지는 알아. 그리고 그 생각대로야. 솔직히 애들 소꿉놀이 하려고 만든 모래밭이야.”

“선배도 아시면서 왜 가입하래요.”

“그 애들이 물고 태어난 수저가 기본 18K 금이고 잘난 놈은 다이아니까.”

“아휴, 저는 그런 상류층 문화에 적응 못해요.”

민승기는 의자를 끌어와 대찬과 마주앉았다.

“해야 돼.”

“왜 해야 되는데요?”

민승기는 다리를 꼬며 대찬을 바라봤다.

그는 진위생이 가져다준 커피 한 모금으로 입을 축이고 말했다.

“카일라, 상류층 자제들 사이에서는 그래도 이름깨나 알려진 집단이야.”

“상류층 자제요?”

민승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소속된 회원 부모들이 다 장난 아니더라고.”

“그러니까, 저더러 거기 가서 장난 아닌 부모들 덕 좀 보게 재롱 좀 떨라는 건가요?”

“새해부터 왜 이렇게 삐딱하냐.”

“제가 딱히 삐딱하게 오해한 거 같지는 않은데요.”

민승기는 얕은 한숨을 쉬었다.

“그 잘난 부모들이 우리의 잠재적인 투자자고, 오리무중인 비도축육 관련 규제를 느슨하게 만들어줄 아군이고, 비즈니스적으로 협력관계를 구축해야 할 파트너야.”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어요. 그 사람들 우리 편으로 만들면 좋겠죠.”

“그럼 뭐가 문제니.”

“이런 억지 인연까지 끌어들일 정도로 우리가 이런 일에 절실해야 하나, 그게 의문인 거죠.”

“절실해서 나쁠 건 없어.”

“제 에너지는 한정적이에요. 그런 겉멋 든 어린애들하고 어울릴 에너지로 차라리 회사 일 하나라도 더 챙기겠어요.”

민승기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좋아. 네 말도 일리가 있고 결국 결정은 대표인 네가 하는 거니까 존중할게.”

“고마워요, 선배. 그럼 얘기 끝난 거죠?”

“아니, 잠깐.”

대찬은 대학 입학 이후 나눴던 민승기와의 대화 중에서 지금이 가장 내키지 않았다.

“또 하실 말씀 남았어요?”

“그래도 일단 한 번은 얼굴 비추는 게 좋아.”

“엑.”

대찬의 노골적인 알레르기 반응에 민승기는 피식 웃었다.

“애처럼 굴지 마.”

“선배가 자꾸 피망 먹기 싫다는데 자꾸 먹이는 짱구엄마처럼 굴잖아요.”

“한 번만, 딱 한 번만 나가.”

대찬은 한숨을 쉬며 의자에 몸을 푹 묻었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네요. 아예 얼굴도 안 비추면 저쪽에서 앙심을 품는단 뜻이죠.”

“그래, 저 사람들하고 친하게 안 지내도 돼. 대신 미움은 받지 말아야지.”

“선배 말씀이 맞아요.”

“얼마나 콧대 높은 사람들이야. 아예 무시해버리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걸림돌이 될 수도 있어.”

대찬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참석할게요.”

“참석해서 괜히 성질대로 들쑤시지 말고, 차분하게.”

“알았어요.”

대찬의 고분고분한 대답을 듣고 나서야 민승기는 안심했다.

대찬은 여전히 카일라 정기모임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민승기의 말이 합리적이었다.

적어도 미움을 받지는 말아야 한다.

그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다.

생각보다 미미할 수도, 생각보다 위력적일 수도 있다.

양자 간에 하나를 잠정적으로 골라야 한다면 후자가 안전했다.

그렇지 않아도 로튼 프룻츠는 헤쳐 나가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굳이 그들의 반감을 사서 문젯거리를 추가로 떠안을 이유가 없었다.

이 일을 윤이영에게 슬쩍 말하자, 윤이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오빠가 그런 데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적응?”

“응, 그거 일종의 사교클럽 같은 거잖아.”

“애초에 설명 자체가 불친절해. 이름만 들어서는 협회 느낌이 강한데, 이영이 네 말대로 사교클럽 성격이 없지는 않을 거야.”

윤이영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산다잖아. 나도 그런 비슷한 모임에 나간 적 있는데, 아주 촌닭 취급을 당했다니까.”

“우리나라에서 손꼽히게 잘 나가는 여배우를 촌닭 취급해?”

“그 사람들 머릿속에는 이 나라가 여전히 양반, 쌍놈으로 나뉘어 있어. 손꼽히는 여배우? 그럼 뭐 해. 쌍년인데.”

대찬은 윤이영의 등을 조심스레 쓸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역시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이미 결정한 일을 물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맛이 쓰다고 뒷일 생각 없이 뱉어버리는 건, 대표로서의 적절한 처신이 아니었다.

대찬은 정기모임으로 예정된 날짜, 예정된 시간에 예정된 장소에 도착했다.

모임장소는 강남의 로튼 프룻츠 사무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으레 이런 장소가 그렇듯, 카일라에서는 일명 아지트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주차할 때부터 대찬은 헛웃음이 나왔다.

카일라의 회원은 지하주차장에서도 별도로 마련된 전용공간을 이용했다.

거기에는 억은 우습게 호가하는 고급 승용차들이 즐비했다.

억이 다 뭔가.

거기에 0 하나를 더 붙여도 못 살 차들도 수두룩했다.

대찬은 자신의 애마인 국산 대형 SUV를 딱히 부끄럽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저 틈바구니에 끼워 넣으려니 자신의 애마를 어째 덩치만 큰 촌놈 전학생 만든 것만 같아 미안했다.

로튼 프룻츠는 작은 빌딩의 한 층도 다 쓰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카일라의 아지트는 로튼 프룻츠의 건물보다 훨씬 비싼 임대료를 자랑하는 건물에 입주했으면서도 한 층을 통으로 썼다.

아지트의 출입문은 건장한 양복들 몇몇이 지키고 있었다.

대찬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들은 익숙한 듯 기계적으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배지를 패용해주십시오.”

“아, 저 초청장을 받고 왔는데.”

“배지를 패용해주십시오. 아니면 못 들어가십니다.”

대찬의 얼굴을 알 법도 한데 그들의 태도는 냉랭하고 단호했다.

대찬은 별 수 없이 내키지 않는 배지를 옷깃에 달았다.

그러자 양복들은 깍듯하게 직각으로 고개를 숙이며 길을 터주었다.

‘나 참.’

대찬은 가면 갈수록 위화감의 수렁에 빠졌다.

안으로 들어가자 별세계가 펼쳐졌다.

강남의 천편일률적인 오피스 건물 안에 들어있는 주제에 이런 공간이 가당키나 할까.

대찬의 감상은 현대식 궁전이었다.

무슨 중세의 화려한 치장 일변도로 꾸며진 궁전이 아니었다.

감각과 취향은 분명히 현대적인데, 궁전처럼 대찬 같은 ‘쌍놈’을 부지불식간에 짓누르는 아우라가 느껴졌다.

아지트라고 해서 푹신한 소파 위에서 게임기나 갖고 놀며 감자칩이나 까먹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대찬의 예상을 보기 좋게 깨부쉈다.

‘허.’

대찬은 그들의 눈에 쌍놈으로 비치지 않기 위해 속으로만 감탄했다.

대찬이 안으로 들어가자, 안에 있던 사람들의 눈빛이 그쪽으로 쏠렸다.

대찬은 멋쩍게 웃으며 먼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조대찬입니다.”

인사에 화답이 없었다.

대찬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은 딱히 적대적이지도, 그렇다고 호의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처음 보는 사람을 보는 눈빛,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저쪽에서 아무 반응이 없으니 대찬도 더 말하지 않았다.

어색한 대치가 이어지던 중.

멀끔하게 차려입은 한 젊은 남자가 나타나 대찬에게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십니까, 조대찬 씨.”

“아, 예.”

대찬은 얼결에 악수를 받았다.

남자는 빙긋 웃으며 자기를 소개했다.

“제가 카일라의 프라임 리더, 알렉스 배입니다.”

“그러시군요. 반갑습니다.”

알렉스 배는 대찬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손을 올렸다.

언제 봤다고.

대찬은 속에서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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