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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12화 (412/556)

난 할 수 있어 412화

“이렇게 가까이서 연예인 보는 건 처음이에요. 어서 와요.”

“조합장님 말씀 많이 들었어요. 꼭 뵙고 싶었는데 오늘 기회가 닿아서 다행이에요.”

“아유, 말씀도 예쁘게 하셔라.”

“오늘하고 내일, 아이들하고 좀 같이 놀아도 될까요?”

“당연하죠. 애들이 좋아할 거예요. 남자 애들 중에 윤이영 씨 아주 좋아하는 애들이 꽤 되거든.”

대찬은 무의식중으로 툴툴거렸다.

“자식들이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도진애 조합장은 씩 웃었다.

“그런데 두 분 오붓하게 시간 보내셔야 되는데 괜히 무리하신 거 아니에요?”

“당연히 무리… 읍!”

대찬의 즉각적인 대답을 윤이영이 팔뚝을 살짝 꼬집어 진압했다.

윤이영은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의 얼굴을 연기하며 말했다.

“아니에요. 크리스마스 둘이서만 보내는 거 슬슬 질리던 참이었어요.”

“말이 너무 심하네.”

윤이영은 대찬의 푸념을 무시하고 도진애 조합장과 웃으면서 저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찾아간 한마음학교는 알던 얼굴이 반이고 모르는 얼굴이 반이었다.

그새 한마음학교라는 둥지를 떠나 각자 성인으로서 제 구실을 하고자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고 했다.

대찬은 새삼 자신이 이곳에 얼마나 오래 발길을 끊었는지 체감했다.

“아이들은 잘 지내고 있나요?”

“예, 대학 들어간 친구도 있고, 벌써부터 자기 손으로 돈 버는 친구도 있고. 화려하진 않지만 묵묵히 자기 앞가림들은 다 하고 있어요.”

“역시 좋은 선생님 아래 좋은 제자들이네요.”

“그렇게 말씀해줘서 고마워요. 그래도 어떻게 사람만 좋아서 되겠어요. 로튼 프룻츠 쪽에서 계속 지원 사업을 유지해준 덕분이에요.”

“하하, 돈은 필래가 쓰고 생색은 저희가 내버렸네요.”

“그런 말씀 마세요. 로튼 프룻츠 사회공헌사업부 직원들, 우리 쪽에 신경 많이 써줬어요. 다 그 덕분이지.”

대찬은 빙긋 미소로 화답했다.

아이들은 윤이영의 등장에 깜짝 놀라며 멀리 온 보람이 있도록 열렬히 환영해주었다.

윤이영은 학교에 발을 들이자마자 몰려드는 사인 공세에 외투조차 벗지 못했다.

그에 반해 대찬은 찬밥이었다.

요즘 좀 유명세가 생겼다고는 했지만, 아이들은 경제뉴스라고는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대찬과 면식이 있는 녀석들이나 고개를 까딱이며 알은체를 했다.

그들도 그 정도일 뿐, 윤이영에게 우다다 달려가는 꼴은 다르지 않았다.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대찬은 잔뜩 입이 부어서 담배를 피우려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 대찬에게 아이들은 끝까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대찬은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한마음양파영농조합이 있는 이 마을의 인구구조는 남달랐다.

한마음학교의 아이들 덕분에 청소년 인구 비율이 굉장히 높은 동시에 농촌답게 노인 인구도 굉장히 높았다.

조합장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서있는 무시무시한 조합원들.

대찬은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역시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아이들보다는 자라온 것으로 하루를 버티는 노인들의 변화가 더뎠다.

그들은 대찬을 어제 만난 것처럼 반겨주었다.

다짜고짜 막걸리를 권하고, 십 원짜리를 쫄딱 말아먹은 화투판에 대타로 앉혀 복수를 부탁했다.

“역시 어르신들밖에 없어요.”

“아, 잔말 말고 얼른 패 쥐랑게!”

대찬은 웃으면서 어영부영 인사할 틈도 없이 판에 끼어 들었다.

노리던 팔광을 뺏긴 대찬은 민망한 마음에 할머니들에게 말했다.

“지난번에 화투 죽이게 치는 어르신 계셨는데 오늘은 어디 마실 나가셨나 봐요?”

“마실 나갔지. 멀리 나갔지.”

대찬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읍내라도 나가셨나 봐요?”

“죽었어. 저승으로 마실 갔어.”

“…아.”

대찬은 멍청한 말실수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자 대찬의 맞상대를 하던 할머니는 무심한 얼굴로 다시 대찬이 노리던 쌍피를 빼앗아가며 말했다.

“때 되면 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 걸, 뭐. 백 살 못 채우고 간 게 한이라면 한이제.”

“산소 가서 인사라도 드리고 와야겠네요.”

그러자 대찬의 나이 든 맞상대는 피식 웃었다.

“이녁이 안 오는 사이에 죽은 양반만 열서넛은 돼야. 일일이 인사 다 드리고 올 짬이 나겄어? 되았어. 산 사람헌티나 잘혀. 그라믄 된 것이여.”

“…….”

“이녁 어매, 아배도 낫살깨나 드셨제?”

“네? 아, 네…….”

“낫살두 갈수록 쏜살 같어. 접때 먹은 떡국이 속에 걸려서 더부룩헌디 떡국을 또 먹으래. 어매랑 같이 하는 시간이 금쪽같은 것이여. 잘 챙겨. 그래야 가시고도 맘 편하제.”

“알겠습니다, 어르신.”

“나 껍데기로 한나, 둘, 3점 났네. 스돕이여. 자, 금쪽같은 시간 낭비허덜 말고 얼른 패나 돌리게.”

화투판은 저녁 어스름이 질 때까지 지속되었다.

대찬은 윤이영이 자신을 찾으러 올 때까지 다리가 저리도록 화투판에 앉아 있어야 했다.

어른들은 윤이영을 보고 곱다, 곱다를 연발했다.

“저 색시가 네 색시여?”

“네, 제 색시예요. 예쁘죠.”

“하이고, 테레비에서 보는 것보담도 더 곱네.”

그때 대찬에게 오십 원을 잃어 앙심을 품은 할머니가 말했다.

“접때 왔던 처자허고는 헤어졌능가?”

“하, 할머니! 헤어지긴 뭘 헤어져요!”

“아니, 접때 양파 사러 왔을 때 같이 온 처자 말여.”

그러자 윤이영은 도끼눈을 뜨고 대찬을 바라봤다.

“연애 나 말고 한 번밖에 안 해봤다며? 그분하고 양파 사러 올 일은 없던 걸로 아는데. 언 년이야.”

대찬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진화에 나섰다.

“그 사람은 제 부하 직원이었어요. 헤어지고 말고 할 게 아니거든요.”

“그려? 찐하게 보였는디.”

“아이고, 돈 잃었다고 이러시면 안 돼요, 할머니.”

“나가 돈 잃었다구 없는 말 지어낼 사람으로 보여? 참 나, 얼척이 없어서 입이 안 다물어진당게. 색시, 글씨 저 호랑말코 같은 놈이 그 처자를 데려와서는…….”

“할머니! 지금 말 지어내는 거 다 보이거든요.”

윤이영은 대찬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조대찬 씨는 잠깐 빠져계시죠. 할머니, 데려와서는 뭐요?”

“그랑게, 데려와서는…….”

할머니는 속으로 흐흐 웃으며 50부작 막장 드라마를 써내려갔다.

대찬은 길길이 날뛰며 항의를 한 뒤에야 거짓말이었다는 자백을 받아낼 수 있었다.

대찬과 윤이영이 어린 사람, 나이든 사람과 어울리다보니 하루가 금방 갔다.

갓 담근 김장김치에 푹 삶은 돼지고기, 그리고 막걸리로 저녁식사를 했다.

아이들과 노인들은 일찍 잠들었다.

대찬은 윤이영과 사각사각 진눈깨비를 밟으며 불빛 뜸한 시골길을 거닐었다.

보는 눈이 없는 시골길이 둘에게는 서울의 유명 짜한 무슨 리단길들보다 훨씬 좋았다.

빛도 거의 없어서 둘은 오랜만에 서로를 소리와 냄새와 감촉으로만 인지할 수 있었다.

윤이영은 대찬의 팔을 꼭 붙들고 뺨을 댔다.

“기분 좀 그랬지.”

“기분? 왜?”

“그래도 크리스마슨데. 다른 날도 많은데 왜 하필 크리스마스에 이러느냐고 속으로 불평할 수도 있잖아.”

“둘이 보내는 게 당연히 더 좋지. 근데 이것도 뭐 나름 색다르고 좋아. 한 번 정도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한 번 정도는.”

윤이영은 대찬을 올려다보며 씩 웃었다.

둘은 새벽바람이 못 견딜 정도로 차가워질 때까지 밖에서 머물다가 종종걸음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대찬과 윤이영은 점심을 먹고 마을을 떠났다.

마을사람들은 먼 곳까지 나와 둘을 전송해주었다.

도진애 조합장도 활짝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한가해지면 또 와요. 언제든지 환영이니까.”

“또 뵐게요, 조합장님!”

“고마워요. 시간 내줘서 고맙고, 선물도 고맙고.”

“별 거 아닌데요, 뭘. 돈 많이 벌어서 더 좋은 선물 갖고 올게요.”

마을의 어른들도 굽은 등을 짚으며 구태여 마을 어귀까지 배웅을 나왔다.

“추우신데 얼른 들어가세요.”

“너 보러 나온 거 아니여. 내 예쁜 색시 보려고 나온 거여.”

“아, 네…….”

윤이영은 웃으면서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른들은 차가 완전히 마을에서 멀어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았다.

대찬은 내비게이션에 집 주소를 입력했다.

그러자 윤이영이 그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왜?”

“집으로 안 갈 거야.”

“그럼 어딜 가.”

윤이영은 대답 대신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했다.

무안공항.

함평에서 불과 차로 20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였다.

대찬의 눈이 커졌다.

“공항은 갑자기 왜?”

“이대로 집 가면 이브를 고속도로에서 날리는데 나도 그건 싫거든.”

윤이영은 흐흐 웃으면서 대찬에게 여권을 내밀었다.

“티켓은?”

“일찌감치 내가 예약해뒀지. 보라카이. 괜찮지?”

“안 괜찮을 리가.”

대찬은 키스로 대답했다.

따뜻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대찬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생각 같아서는 보라카이의 녹색 바다에서 새해 일출을 보고 싶었지만 대표가 없는 상태에서 종무식을 치르기에는 아무래도 사기가 빠질 수밖에 없었다.

대찬은 종무식에서 직원들 한 명 한 명에게 조지아 와인을 따라주었다.

그리고는 잔을 든 채 짧고 힘 있게 말했다.

“로튼 프룻츠의 2016년은 더할 나위 없었습니다. 2017년은 올해를 뛰어넘는 기막힌 해가 될 겁니다. 우린 할 수 있습니다. 자, 건배!”

“건배!”

대찬을 선장으로 삼아 먼 곳까지 순항했다.

직원들은 대표로서의 대찬을 신뢰했다.

그렇기에 건배! 받아치는 말에는 대찬 이상으로 힘이 넘쳤다.

로튼 프룻츠의 직원들은 전원 목을 젖히고 꿀꺽꿀꺽 와인을 맥주처럼 넘겼다.

2017년.

어김없이 먹기 싫어도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

2016년은 로튼 프룻츠가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으로 도움닫기를 한 해였다.

진용은 완벽하게 갖춰졌다.

연구진이 마음껏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졌다.

대찬이 1퍼센트씩의 지분을 내어놓으면서, 연구의 수장들이 의욕적으로 일할 동기도 갖춰졌다.

로튼 프룻츠의 신사옥과 연구동도 동시에 착공되었다.

로튼 프룻츠라는 이름에 맞게 신사옥은 일명 ‘바스켓’, 직원들 사이에서는 친근하게 과일바구니로 불렸다.

사옥은 바스켓이라는 이름처럼 단층의 바구니 모양으로 지어질 예정이었다.

수레바퀴처럼 중앙에는 대표실이 있었다.

그 대표실을 중심으로 바퀴살처럼 각 부서들이 뻗어있는 형태를 갖출 예정이었다.

그곳에서 로튼 프룻츠의 모든 사무가 처리될 예정이었다.

로튼 프룻츠는 불과 1년 만에 생산단가를 100그람 당 백만 원에서 이십만 원 선까지 낮췄다.

은오영 소장은 기대 이상의 성취에 자신감을 얻었다.

그는 2017년 연내에 생산단가를 오만 원 선으로 낮추는 것을 목표로 했다.

첫 번째 발표회에서는 한 사람 당 난자완스 한 조각씩밖에 내주지 못했다.

만일 로튼 프룻츠가 목표를 달성하면, 연말쯤에는 난자완스로 마을잔치를 벌여도 부족하지 않을 터였다.

대량생산을 위한 단가 낮추기에는 은오영 소장이 주력했다.

다르샨 싱 전무는 이제 물에 불린 마분지 같다던 식감을 개선하는 데 주력하기로 했다.

더불어 근육세포만으로는 구현하기 힘든 고기의 풍미를 재현할 방법을 연구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은오영 소장이 비도축육의 양에 관한 연구를 진행한다면, 다르샨 싱 전무는 질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대찬의 역할은 그들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자금을 안정적으로 수급하고, 그 자금을 적재적소에 부족하지 않게 투입하는 것.

새해 첫 평일 아침.

대찬은 저마다의 직장을 향해 바쁘게 오고 가는 강남의 직장인들을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며 기지개를 켰다.

찌뿌듯한 어깨에 자극이 왔다.

그때 진위생이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대표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진위생 씨는 벌써 복 받았죠?”

대찬의 물음에 진위생은 어깨를 움찔하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임까?”

“고미수 씨랑 썸 타잖아.”

“그, 그, 그, 그게 무슨 말씀임까!”

“말 네 번 더듬고 목소리 커졌네. 그냥 찔러봤는데 맞구만.”

진위생은 침을 꼴깍 삼키면서 잔뜩 목소리를 낮춰 대찬에게 말했다.

“비밀임다.”

“알았어요. 근데 진위생 씨는 포커페이스 하는 법 좀 배워야겠는데. 이러다 사내 기밀까지 들켜버리겠어.”

대찬에게 상투가 잡힌 진위생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슴다. 근데 대표님, 어케 알았슴까?”

“고미수 씨랑 썸타는지?”

“예.”

“아니, 오늘 출근하는데 전철역 출구에서부터 나란히 걸어오잖아. 진위생 씨 원래 버스 타고 오잖아?”

“…….”

“더 캐묻진 않을게요. 다만 업무에 지장이 없는 한에서 맘껏 사랑하는 걸로, 오케이?”

“아, 알겠슴다. 아직 사귀는 것도 아닌데요, 뭘…….”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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