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11화
밖에 나가지 않고도 계절을 가늠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음원차트를 보는 것이다.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어쩌고 하는 노래가 동면을 깨고 천천히 차트 순위권에 진입하면 봄이 왔구나, 알 수 있다.
겨울에는 머라이어 캐리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가 그랬다.
12월 23일.
크리스마스이브를 앞둔 금요일이었다.
대찬은 출근하자마자 직원들에게 말했다.
“자, 내일은 크리스마스이브라 커플도 즐겁고, 토요일이라 솔로도 즐거운 그런 날입니다.”
“꼭 그렇게 제 속을 후벼 파셔야 직성이 풀립니까?”
짝이 없는 진위생이 입을 삐죽이며 툴툴거렸다.
짝 없는 몇몇이 그의 툴툴거림에 동조했다.
대찬은 씩 웃었다.
“속이 쓰리면 이참에 애인 하나씩 마련하세요.”
“여친이 물건이에요? 마련하고 말고 하게. 마련할 수 있음 진즉 했슴다.”
“우리 회사는 사내연애에 대해서도 아주 쿨하잖아요? 멀리서 찾지 말고 가까이서 찾아봐요.”
그러자 진위생은 바로 옆의 여직원, 고미수를 흘끗 봤다.
고미수 역시 부지불식간에 진위생 쪽을 봤다.
눈이 마주친 둘은 동시에 웩, 토하는 시늉을 했다.
대찬은 그걸 보고 더 즐거워했다.
“어, 방금 둘이 좀 통한 거 같은데.”
그러자 남녀는 동시에 버럭 화를 냈다.
“아, 진짜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씀 마세요. 닭살 돋는 거 봐요.”
진위생의 호들갑에 고미수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저도 진위생 님 싫거든요? 왜 진위생 님이 먼저 닭살 돋아요? 짜증나.”
괜히 벌집을 들쑤신 대찬은 민망하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오늘 일할 맛이나 제대로 나겠어요? 오늘은 오전까지만 근무합니다.”
“오예!”
내심 기대하던 직원들은 대표의 훌륭한 결단에 박수로 호응했다.
대찬은 웃으면서 직원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오늘 오전은, 기념식 후 간단한 티타임으로 대체하죠.”
“기념식이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준비한 케이크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제법 눈치가 좋아진 진위생이 탕비실로 달려가 인원수에 맞게 포크와 접시를 준비해왔다.
대찬은 상자에서 케이크를 꺼내며 말했다.
“흥읍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왔거든요.”
“무슨 좋은 소식이요?”
“2016년 12월 22일 19시 32분을 기하여, 로튼 프룻츠가 비도축육의 생산단가를 100g 당 20만 원의 선 밑으로 낮추는 데 성공했습니다.”
“20만 원이요?”
진위생이 재차 묻자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확인해주었다.
그러자 직원들 사이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실력 한번 대단들 하시네. 백만 원 돌파한 지 얼마나 됐다고!”
“기술의 발전이 이렇게 빠릅니다.”
대찬은 상자에서 꺼낸 케이크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구석에서 무리와 동떨어져 흐뭇하게 웃던 민승기에게 손짓을 했다.
“민승기 전무님, 이리 오세요. 케이크 같이 잘라요.”
“난 비도축육 사업부도 아닌데요?”
“에이, 선배 아니면 누가 저랑 같이 케이크 잘라요?”
“대표님 혼자 자르면 되잖아.”
“그럼 너무 스트롱맨 독재자 같잖아요. 저 요즘 부드러운 이미지로 가닥 잡았어요.”
“너 독재자 맞아. 조 대표가 회사 세우고, 꽉 완벽하게 장악했잖아.”
“12·12는 전두환 혼자 일으켰나. 잔말 말고 빨리 와요, 노태우 씨.”
“에이 씨, 말장난을 해도 꼭.”
둘이 쓸데없는 소모전을 벌이자 안 그래도 진위생이랑 엮여 기분이 나쁜 고미수가 톡 쏘았다.
“민 전무님, 얼른 가세요! 케이크 빨리 먹고 싶어요.”
“암튼 이놈의 회사는 질서가 없어.”
대찬은 피식 웃었다.
“이래도 내가 독재자예요?”
민승기는 투덜거리며 대찬과 함께 칼을 잡았다.
진위생은 얼른 카메라를 들고 두 창립자를 향했다.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셋!”
대찬은 빙긋 웃으며 촬영에 응하고는, 살짝 힘을 주어 케이크를 잘랐다.
생산단가 20만 원 돌파 기념.
초콜릿으로 적힌 글자가 칼에 눌려 두 동강 났다.
직원들은 의례적인 박수로 호응하고, 얼른 달려들어 케이크를 해치웠다.
가장 수고한 흥읍의 연구소에도 생산단가 20만 원 돌파 겸 크리스마스 기념 케이크와 적잖은 회식비가 전달되었다.
그렇게 12월 23일 금요일은 대표의 노골적인 지시 하에 로튼 프룻츠 전 직원이 월급 도둑이 되었다.
케이크 한 판을 게 눈 감추듯 해치우고 씁쓸한 아메리카노로 입가심까지 마치자 정오가 가까워졌다.
대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자, 이제 각자 갈 길들 찾아갑시다. 퇴근합시다.”
대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직원들은 우르르 퇴근했다.
대찬은 마지막으로 안 꺼진 불이 없나 확인하고 맨 마지막에 로튼 프룻츠 사무실을 나섰다.
직원들은 각자 건조한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를 건네며 뿔뿔이 흩어졌다.
“참 나, 대표님도 가끔 이럴 때 보면 완전 아니야. 이브 전날에 진위생 님이랑 엮일 게 뭐예요?”
고미수는 오전 내내 그 일이 신경 쓰인 모양인지, 진위생에게 짜증을 냈다.
진위생 역시 잠자코 짜증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사람이 왜 그렇게 배려심이 없음까? 난 뭐 고미수 님이랑 엮여서 기분이 좋은 줄 알아요?”
“어머, 왜요? 내가 뭐 어때서? 나 정도면 진위생 님한테 차고 넘치죠.”
“참 나! 그럼 뭐 나는 어떤데요. 내가 뭐가 부족해!”
“저는 남자 볼 때 몸매가 1번이거든요? 진위생 님은 비쩍 말라서 불합격이에요.”
“아니, 원서를 낸 적도 없는데 누구 맘대로 합격, 불합격임까? 그리고 뭘 안다고 비쩍 말랐다고 그럼까!”
“척 보면 알지, 뭐.”
“내가 대표님 수발드느라 매일 정장만 입어서 뭘 잘 모르시나 본데, 내 별명이 진근육임다, 진근육. 진위생하고 잔근육하고 합쳐서 진근육.”
고미수는 진절머리를 냈다.
“말을 좀 지어낼 거면 창의적으로 지어내요. 방금 생각해낸 거 다 티 나요. 진근육이 뭐야.”
“아니, 이 여자가 진짜!”
흥분한 진위생은 노상에서 훌렁 배를 깠다.
그리고는 감춰왔던 조선족 말투로 따따부따 쏘아댔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복근에 자신이 있단 말임다. 이거 안 보이요? 초콜릿 안 보이요?”
“…어머, 그렇네.”
“어디 가서 나 삐쩍 말랐다고 말하고 다니지 말아요. 그거 허위사실 유포니까.”
고미수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진위생을 올려다봤다.
“안 배고프세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임까.”
“같이 점심이나 먹을래요?”
“…….”
“싫어요?”
“…고미수 님 뭐 좋아함까.”
둘은 나란히 걸으며 로튼 프룻츠 사무실에서 멀어졌다.
사무실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나온 대찬은 여전히 근무 중인 경비원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선생님, 고생이 많으십니다.”
“어, 오늘 조 대표님 회사 일찍 마쳤나 봅니다.”
“예, 또 크리스마스 다가온다고 청춘들 심장이 콩닥콩닥 뛰거든요. 일도 제대로 안 돼요.”
“부럽네요. 젊음이.”
“선생님도 이번 크리스마스 때 사모님이랑 좋은 시간 보내셔야죠.”
“다 늙어서 크리스마스는 무슨.”
대찬은 웃으면서 손에 들고 있던 걸 건넸다.
“이게 다 뭐예요.”
“한우예요. 명색이 한우자조금이라고 명절도 아니고 크리스마스 선물로도 한우를 보내네요.”
“아유, 이걸 왜 날 줘.”
“어린 것들은 밖에서 스파게티 먹느라 고기 구워 먹을 시간이 없어요. 괜찮으시면 받아주세요.”
“안 괜찮을 리가 있나…….”
“좋은 고기일 거예요. 맛있게 잡수세요.”
“고마워요, 조 대표.”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꾸벅하고 사무실 밖으로 나섰다.
경비원은 선물포장 사이에 끼어 있는 봉투를 보고 살짝 눈시울을 붉혔다.
대찬이 건물 밖으로 나가자 작은 눈송이들이 내렸다.
대찬은 웃으면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이 아주 외로운 사람은 더 외로우라고 작정을 했네.”
대찬은 성수동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크리스마스는 당연히 윤이영과 시간을 보낼 참이었다.
바쁜 일도 마무리되었겠다, 어디 따뜻한 남국에서 유유자적 ‘호캉스’나 즐기고 올까 생각했다.
명동 한복판을 누비기에는 대찬이나 윤이영이나 이제는 너무 유명인사가 돼버렸다.
그러니 차라리 남들 이목 신경 안 써도 되는 해외가 낫겠다는 계산이었다.
집으로 들어온 대찬을 윤이영이 맞아주었다.
외출할 일정이 없으면 으레 편한 차림으로 있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화장이며 옷차림이며 완전무장 상태였다.
대찬은 그녀가 오늘을 크리스마스이브로 착각한 건 아닌지 의아했다.
대찬은 소파에 걸터앉으며 윤이영에게 물었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남쪽에서 보낼까? 어때.”
“어, 좋네. 남쪽.”
윤이영도 선선히 동의했다.
그런데 대찬이 생각한 남쪽과 윤이영이 생각한 남쪽이 달랐다.
웬일로 자기 의견에 토 안 달고 고개를 끄덕이는 윤이영을 보고 대찬은 들떠서 말했다.
“어디가 좋겠어? 세부? 발리? 파타야는 연인끼리 가기에 좀 난잡하고.”
“거기보다 더 좋은 곳 있어.”
“더 좋은 곳? 어디.”
윤이영은 웃으면서 차키를 챙기고 대찬에게 말했다.
“가자.”
“뭐? 아직 비행기 티켓 예약도 안 했어.”
“비행기는 무슨. 짐은 내가 트렁크에 이미 실어놨어.”
“…어?”
대찬은 귀신에 이끌리듯 윤이영을 따라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윤이영은 대찬을 조수석에 태우고 시동을 걸었다.
“뭐야, 어디 가는데?”
“따뜻한 남쪽으로 가자며. 따뜻한 남쪽으로 갈 건데?”
“…남쪽 어디?”
윤이영은 씩 웃으면서 지상으로 차를 몰았다.
엉겁결에 고속도로를 탔다.
천안삼거리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고 간식으로 호두과자를 샀다.
군산의 유명한 빵집에서 잠깐 한눈을 팔고 커피 한 잔으로 피로를 쫓은 다음, 이번엔 대찬이 운전석에 올라 나머지 여정을 소화했다.
종착지는 함평.
함평의 한마음양파영농조합이었다.
대찬은 하필 크리스마스이브 전날에 여기로 향한 까닭이 궁금했다.
부득이 1박이 불가피하니 크리스마스이브 역시 이 시골에서 보내는 것이 확정적이었다.
윤이영은 트렁크 문을 열었다.
짐을 넣어놓았다던 트렁크에는 포장된 선물이 가득 들어있었다.
윤이영은 그걸 하나씩 대찬에게 넘기며 말했다.
“나한테 크리스마스가 행복했던 건 오빠 만난 뒤부터였거든.”
“뭐?”
“오빠 만나기 전, 소풍 가는 날 영화 찍기 전의 크리스마스는 나한테는 열등감이 가장 심한 날일뿐이었어.”
윤이영은 자기 몫의 선물을 손수레에 싣고 끌며 걸었다.
대찬도 그녀와 보폭을 맞춰 걸었다.
윤이영은 나란히 걸으면서 계속 말했다.
“말했지. 우리 엄마, 아빠한테 나는 의식주 해결해줬더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삐딱선만 타는 못된 년이었다고.”
대찬은 말없이 천천히 고개만 끄덕였다.
“기대를 충족해주지 못한 년, 먹여준 값이 아까운 년, 밥값 못하는 년, 배은망덕한 년. 그런 년한테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니, 당치도 않지.”
윤이영은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대찬은 한쪽 손으로 그녀의 등을 찬찬히 쓸었다.
“오빠 덕분에 영화 잘 되기 전까지는 내내 힘들었어. 어릴 때는 부모님한테, 성인 되고 나서는 소속사한테 밥값 못하는 년이었거든.”
“고생 많이 했지. 나도 잘 알아.”
“간판만 배우라고 걸어놨지 실상은 거지나 다름없었어. 딱 굶지 않을 정도로만 살았지. 그런 나한테 크리스마스라니. 하하 호호 웃으면서 크리스마스 타령하는 사람들이 미웠어.”
“그럴 만해.”
“물론 내 탓이지. 삐딱선 타지 말고 엄마, 아빠 말대로 공부만 했으면 밥벌이는 하고 살았을 텐데. 괜히 뜬구름 잡는다고 객기 부려서 이 모양 이 꼴 안 났을 테니까. 근데 어떡해. 질투 나는 걸. 열등감에 견디지 못하겠는 걸.”
윤이영은 덤덤히 계속 말했다.
“그러다 오빠 만나고 영화 잘 되고, 요 몇 년 사이 크리스마스는 나한테 가장 행복한 날이었어. 고마워.”
“고맙긴. 나도 네 덕에 행복했는데.”
“그래서 올해는 좀 같이 행복하자고. 뭐 여기 친구들도 자기들끼리 재밌겠지만 우리도 어울리면 더 재밌지 않겠어?”
대찬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나도 바쁘다는 핑계로 한동안 함평 못 왔는데 덕분에 왔네.”
대찬과 윤이영이 저만치서 걸어오자, 도진애 한마음양파영농조합 조합장 겸 한마음학교 교장이 아이들을 대동하고 그들을 맞이했다.
“바쁜 분들이 오셨네요?”
“오랜만입니다, 조합장님.”
도진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윤이영에게 유독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