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10화
대찬과 올축사의 공동대표이자 한우자조금 위원장은 나란히 서서 악수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위원장은 대찬과 악수를 하며 슬쩍 물었다.
“이런 휑뎅그렁한 곳을 연구소라고 하기엔 좀 민망하지 않아요?”
“왜요, 너무 멋이 없습니까?”
“언덕 위의 하얀 집도 아니고…….”
대찬은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원래 시작은 미약해야 제 맛 아니겠습니까. 조만간 연구소 건물 신축공사에 들어갈 겁니다.”
“음, 그때 사진을 한 번 더 찍으시죠.”
“물론입니다.”
대찬은 흔쾌히 위원장의 비위를 맞춰주었다.
그의 말대로 현재의 연구소는 언덕 위의 하얀 집이었다.
그러나 구상이 세워진 대찬의 눈에는 몇 년 뒤, 이 넓은 부지를 가득 메운 시설들이 선했다.
심형수가 세운 단 한 채의 건물에 들어선 연구소는 어디까지나 임시였다.
대찬은 원대한 계획을 품고 있었다.
이 부지에 로튼 프룻츠의 모든 것을 꽉꽉 채워낼 예정이었다.
가칭 로튼 프룻츠 타운 혹은 로튼 프룻츠 캠퍼스였다.
대찬의 구상은 제법 구체적이었다.
넓은 부지의 중앙에는 본사의 기능을 하는 단층사옥을 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지근거리에는 최신식 설비를 갖춘 연구동을 지을 것이다.
그 뒤로는 직원 기숙사동, 복지시설, 비도축육 생산설비, 문화생활 공간, 공원까지 마련할 생각이었다.
물론 이건 로튼 프룻츠의 규모가 지금보다 열 배, 백 배 늘어난 연후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대찬의 계획이 심형수의 계획처럼 계획으로만 끝날지, 아니면 눈앞의 현실로 구현될지.
어떤 것이 결과가 될지는 그 누구도 몰랐다.
그건 대찬이 살았던 2019년이 오더라도 여부를 알기 힘든 더 뒤에 찾아올 미래였다.
대찬은 부지가 확보되자마자 건축사무실에 설계를 의뢰했다.
직원이 오십 명이 채 안 되고, 아직 본격적인 대량생산 체제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구상 전체를 대번에 실현할 이유는 없었다.
그건 겉멋이고 돈 낭비일 뿐이었다.
그때를 위해 자리는 남겨두되, 우선 필요한 건물만 짓기로 했다.
사옥과 연구동, 직원숙소였다.
그리고 심형수의 기억관까지.
대찬은 자신의 구상이 얼마나 잘 구현될지 궁금한 마음에 여러 차례 의뢰한 사무실에 발길이 향했지만, 억지로 되돌렸다.
대개 비전문가가 전문가의 영역에 간섭하여 잘된 일은 없는 까닭이었다.
12월의 끝 무렵이 다가왔다.
윤이영의 광팬을 아들로 둔 의원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조 대표, 축산물위생관리법 개정안, 내가 대표발의 하기로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의원님.”
“감사는. 덕분에 나도 스포트라이트 좀 받았어요. 요즘 정치에 신물 난 사람들이 많아서 자기 PR 할 기회도 잘 없었는데, 덕분에 건수 하나 챙겼어요.”
“그러셨다니 다행입니다.”
“이번 개정안은 우리 당뿐만 아니라 여야 동수로 마련했습니다. 이 법안에서만큼은 여야가 탕평의 미덕을 아주 잘 발휘했습니다.”
대찬은 미소를 띠며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했다.
그 의원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아, 그런데 이번에 흥읍에다가 대규모 부지를 얻으셨다고.”
“네, 부지를 물색하던 와중에 뜻밖의 제의를 받아서요.”
대찬은 그 뜻밖의 제의에 얽힌 구구절절한 사연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래요? 남들 다 서울로, 서울로 몰려가는 마당에 오히려 수도권 외곽으로 빠지는 행보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하하, 서울 지가가 웬만해야죠. 사무실 하나만 있으면 그만이라 굳이 버티고 있을 이유도 없고요.”
“우리 당에 석우룡 의원 있잖아요? 그 양반 지역구가 흥읍이거든.”
“아, 예, 압니다.”
“석 의원이 조 대표가 흥읍에 부지 마련했다는 소식 듣고는 아주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지던데요?”
“모쪼록 저희 회사가 지역구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음, 조만간 밥 한 끼 하지요. 회사 지역구 의원하고 안면 터두면 좋은 일이 많을 거예요. 거 부지 대부분이 임야라던데.”
“하하, 맞습니다. 나라로 치면 브라질 같습니다. 산이 어찌나 우거졌는지 아마존 뺨친다니까요.”
“허허, 그거 알뜰하게 다 써먹으셔야지.”
“예, 회사 덩치가 커지면 베란다 확장해야죠.”
“나중에 용도변경 하려면 골치 아플 텐데. 지역구 의원하고 사귀어두면 이래저래 쓸모가 많지요.”
대찬은 웃음을 머금었다.
“바쁘신 의원님들 수고롭게 청탁 넣을 생각은 없습니다만, 밉보이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하죠. 약속 잡아주시면 시간 비우겠습니다.”
“그래요. 아무튼 우리 위원회에서는 무난히 통과해서 법사위로 토스할 거 같으니까 연말은 모처럼 맘 편히 보내도록 해요.”
“의원님도 연말 잘 보내십시오. 이런저런 자리 많이 불려 가실 텐데 약주 조금만 하시고요.”
“어이고, 조 대표가 그렇게 걱정도 해주고, 고마워요.”
대찬은 의원과의 통화를 마치고 얕은 한숨을 쉬었다.
정치권 인사들과 만나는 일은 이번 한 번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들과 안면을 트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건 대찬에게 유익했고, 어쩌면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그게 지나쳐서 유착이 되면 곤란했다.
정경유착은 절대 안 돼, 그런 고리타분한 정의론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장사하는 사람들보다 손익계산에 기민하다.
어쩔 때는 날강도가 따로 없다.
1을 주면 2나 3을 가져가려는 경우도 다반사다.
대찬이 저들에게서 이익을 취하면, 저들은 그 이상의 대가를 당연하다는 듯 요구할 것이다.
화이부동.
어울리되 아주 한 무리로 되지는 말라는 공자님 말씀을 절실히 새겨야 하는 때였다.
대찬은 흥읍시를 지역구로 둔 석우룡 의원과 가볍게 반주만 나누고 헤어졌다.
비도축육의 법제화가 순탄하게 흘러가고, 올축사와의 연구소 공동 설립 건도 무탈하게 마무리되었다.
이제는 순전히 연구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했다.
경쟁자는 차고 넘쳤다.
특히 시마 회장이 직접 챙기는 코테츠 키친과의 대립각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무조건 그들보다 한 발짝, 기왕이면 두 발짝 이상 앞서야만 했다.
코테츠 키친의 원천기술은 그린블러드로부터 온다.
그린블러드보다 항상 앞서있어야만 로튼 프룻츠의 가치가 온전할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술을 개발하는 연구진에 대한 투자가 최우선으로 이뤄져야 했다.
지금의 은오영 교수, 이제는 연구소장과 다르샨 싱 전무 두 명이서 이끌어가는 체제는 불안했다.
그들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고작 두 명으로 시장을 선도하겠다는 건 안일한 발상이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했으니, 뱃사공을 더 구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노 저어 줄 사람들은 더 구해야 멀리 갈 수 있었다.
그런데 대대적인 인력확충은 두 명의 뱃사공에게 자칫 위기감을 안겨줄 수 있었다.
인력을 확충하기에 앞서, 그들에게 확실한 신임의 증표와 실제적인 이익을 보장할 필요가 있었다.
흥읍 연구소로의 이사를 마치고, 대찬은 은오영 소장과 다르샨 싱 전무와 술자리를 가졌다.
대찬은 웃으면서 두 사람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이사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짐 나르는 건 이삿짐센터가 다 했는데요, 뭘. 우리는 뒤에서 코딱지나 팠지.”
“그래도 둥지를 옮기는 게 어디 보통 일인가요.”
은오영 소장은 빙긋 웃었다.
“일생을 철새처럼 살았는데 이 정도야 옮기는 축에도 못 들죠. 게다가 더 큰 둥지로 가는데 고생이랄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싱 전무님은 새로 옮긴 곳이 마음에 드십니까?”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양심이 없는 거죠.”
다르샨 싱 전무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대찬은 다르샨 싱 전무에게는 흥읍의 50평 대 넓은 아파트를 사택으로 제공했다.
다르샨 싱 전무는 과한 혜택이라며 사양했지만 대찬은 기어코 그를 거기에 눌러 앉혔다.
은오영 소장과 더불어 기술개발의 양대 축이었으니 그 정도 대우로도 부족했다.
운전기사까지 붙여주려는 걸, 다르샨 싱 전무가 읍소하다시피 사양하여 겨우 물려졌다.
대찬은 술을 몇 잔 마시고, 그들에게 말했다.
“소장님과 전무님께 제가 보유한 로튼 프룻츠 지분을 1퍼센트씩 나누어드리려고 합니다.”
“예? 갑자기요?”
은오영 소장은 놀란 눈을 껌뻑거렸다.
다르샨 싱 전무도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 모실 때부터 진작 그랬어야 했는데 늦었습니다.”
다르샨 싱 전무는 민망한 듯 웃었다.
“우린 그냥 기술자들입니다. 은 소장 대학에서 애물단지 취급받을 때, 제가 캠핑카에서 식은 피자나 먹고 있을 때 대표님이 손을 내밀어줘서 여기까지 온 거 아닙니까.”
“제가 왜 손을 내밀었겠어요. 그만큼 가치가 있으니까 그랬겠죠.”
“저희 가치는 이미 많은 봉급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전무님께서 회사에 소속된 이상, 전무님의 가치는 시장에서 결정합니다.”
“물론 그렇기야 합니다만…….”
“사실 지분 1퍼센트씩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만 현실적인 여건이 그렇다고 핑계를 댈 수밖에 없네요.”
“1퍼센트도 감당하기 버거운 지분입니다.”
다르샨 싱 전무의 말에 은오영 소장이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3퍼센트 넘어서 대주주 취급을 받으면 연구에 오롯이 매진하기도 힘들고요.”
대찬은 씩 웃었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래도 1퍼센트나마 이 회사에 지분을 지니고 계셔야만 연구할 맛도 더 나시겠죠.”
“그건 부정 안 할래요.”
“당연한 것이니까요.”
은오영 소장은 솔직하게 지분을 받아들이겠다고 했지만, 다르샨 싱 전무는 팔짱을 낀 채 눈살을 찌푸렸다.
“근데 지금 투자되는 지분에 대표님 경영권도 수비하기 벅찬 입장에서, 저희한테 1퍼센트씩 떼어주는 게 쉬운 결단은 아닐 텐데요.”
“물론 그렇습니다.”
“저희한테 내주신 1퍼센트 때문에 경영권이 위태롭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어리석은 자비가 될 겁니다.”
대찬은 내미는 선물을 덥석 받지 않고, 자신과 회사부터 걱정해주는 다르샨 싱 전무가 고마웠다.
“만일 소장님하고 전무님이 제 뒤통수를 후리기로 결심하면 말씀대로 제 경영권이 위태롭게 되겠죠. 그게 아니고 제 편에 계속 서주시겠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왜요, 나중에 저를 몰아내고 대표 자리에 앉으려는 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아이고, 그럴 리가요.”
대찬은 어눌한 발음으로 아이고, 탄식하는 다르샨 싱 전무를 보며 웃었다.
“그게 아니라면 문제없습니다. 걱정 말고 받아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대찬은 웃으면서 다시 술병을 들었다.
“자, 오늘 제가 드릴 말씀은 끝났습니다. 이제 맘 놓고 술이나 드시자고요.”
“좋습니다! 건배!”
“건배.”
셋은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대찬이 그들에게 지분을 나눠준 건 자비심이 아니었다.
자비도 여유가 있어야 베푼다.
대찬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다르샨 싱 전무가 말했듯 그들에게 1퍼센트씩 나눠주는 건 대찬에게 적잖은 부담이었다.
아무리 그들이 대찬과 가깝다고 해도 남은 남이었다.
그럼에도 대찬이 그들에게 선뜻 지분을 건넨 건, 그래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대찬은 얼마 전, 흥읍시를 지역구로 둔 석우룡 의원과 식사를 같이 했다.
석우룡 의원은 마른 체형의 말쑥한 신사였다.
대찬보다 나이가 스무 살은 많았는데도 대찬에게 점잖은 존대로 일관했다.
식사를 하던 중, 석우룡 의원이 대찬에게 말했다.
“조 대표님 사업이 앞으로 번창하면서 눈독 들이는 사람들이 생길 겁니다.”
“눈독이요?”
“예, 특히 조 대표님 쌍권총이라고 불리는 기술자들 있잖아요. 대학교수 하나랑 인도사람 하나.”
“아, 예.”
“잘 붙들고 계셔야 할 거예요. 도둑맞으면 어떡해.”
“…….”
대찬은 석우룡 의원의 말에 느끼는 바가 컸다.
사람 도둑맞기는 물건 도둑맞기보다 더 쉽다.
물건은 금고에 꽁꽁 숨겨놓으면 그만이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확실한 혜택과 대우만이 그들을 붙들어놓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살을 깎는 아픔이 있음에도 그들에게 1퍼센트씩의 지분을 양보한 것이었다.
1퍼센트의 지분은 당장의 값어치로만 치면 대단하다면 대단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은오영 소장과 다르샨 싱 전무에게는 가치가 남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같은 1퍼센트를 갖고 있어도, 회사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저 로튼 프룻츠가 잘해주기만을 정화수 떠놓고 비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둘은 달랐다.
이 1퍼센트가 어떻게 튀겨지는가는 자신들의 손에 달려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솜씨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경쟁자들을 따돌리고 가장 먼저 비도축육 대량생산의 고지에 깃발을 꽂을 수 있다는 확신.
그렇기에 자신들이 들고 있는 1퍼센트가 물에 불린 미역처럼 어마어마하게 불어날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니 그들의 눈에 보이는 로튼 프룻츠의 1퍼센트는 현재의 바싹 마른 말린 미역이 아니었다.
미래의, 만백성을 먹여 살릴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불어난 미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