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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08화 (408/556)

난 할 수 있어 408화

“이것만 잘 풀어내면 자기도 금배지가 유력해지잖아요. 아마 죽을힘을 다해서 해낼 거야.”

“참, 그러고 보면 인생 별 거 없어요. 결국 이 문제도 따지고 보면 대단한 고담준론이 아니라 위원장 개인의 영달이 실마리가 된 셈이잖아요?”

“진위생 씨, 정치랑 소시지의 공통점이 뭔 줄 알아요?”

“갑자기 소시지요?”

대찬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가급적 만드는 과정을 안 보는 게 좋다는 거야. 마크 트웨인이 그랬어요.”

“요즘 소시지는 깨끗하게 만드니까 만드는 과정이 더러운 건 이제 정치 하나뿐이네요.”

“아, 그렇게 되나.”

대찬이 헐렁하게 반응하자 진위생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위원장은 자신의 몫을 해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역량을 총동원해서 내부의 반발을 무마했다.

대찬이 제시한 순이익 1퍼센트만큼의 기탁금이 요긴하게 쓰였다.

“이봐들, 잘 생각해봐. 로튼 프룻츠, 법제화만 되면 무조건 뜬다고. 이미 주목도 많이 받아서 정부에서도 밀어줄 거란 말이야. 이미지가 좀 좋아야지.”

“근데요?”

“근데요는 무슨. 예를 들어 로튼 프룻츠 1년 순이익이 5천억이라고 해봐.”

“에? 무슨 5천억씩이나.”

“잘 풀리면 이것도 우습지. 그거에 1퍼센트면 얼마야, 50억이야, 50억.”

“그, 그렇긴 한데.”

“5백억이라고 해도 1년에 5억씩 따박따박 꽂히는 거라고. 그걸 우리 맘대로 해먹을 수 있다니까.”

“스리슬쩍 우리 주머니로?”

“영리하게만 하면 못할 건 뭐야.”

“오호라…….”

그건 업계에서 발언권을 가진 요인들을 설득하는 데 속된 말로 직빵이었다.

그럼에도 설득되지 않는 이들은 조금 더 직접적인 조건을 내걸었다.

자기 뒤를 이어 자조금위원장이 되게 해주겠다든지, 이번에 집행될 자조금 예산을 원하는 쪽에 더 몰아주겠다든지 하는 식이었다.

그는 최선을 다해 대찬 대신 업계 관계자를 설득해냈다.

며칠 후.

대찬은 위원장과 나란히 섰다.

위원장은 한우자조금관리위원회를 대표하는 입장이 아닌, 축산업계 전체를 대표해 대찬과 나란히 섰다.

둘은 ‘육산업의 상생과 발전을 위한 공동선언문’을 번갈아 낭독하고, 선언문에 사인했다.

축산업은 가축을 기르는 것을 전제로 한다.

게다가 우유와 계란은 물론이고 모피를 얻기 위해 동물을 잡는 것까지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동물을 기르지도 않고, 우유, 계란, 모피 등은 해당되지 않는 비도축육에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그래서 ‘육산업’이라는 개념에 합의하고 선언문에도 그 개념을 실었다.

서명을 마친 대찬은 웃으며 위원장과 악수를 나눴다.

그는 위원장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위원장님께서 업계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되셨습니다. 분명히 유익할 겁니다. 물론 위원장님 개인께는 특별히 유익하겠죠.”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조 대표.”

악수를 나눈 둘은 기자회견도 가졌다.

기자회견에서의 일관된 주장은 딱 하나였다.

로튼 프룻츠와 축산업계가 극적으로 입장을 통일하고 공동선언문까지 채택했으니, 정치권은 빠르게 반응해 달라.

이번 국회 회기 안에 법안을 통과해 달라.

정치권은 이례적으로 빠르게 반응했다.

이미 양자 간에 합의를 이뤘으니 공청회 같은 자질구레한 절차를 밟을 것도 없었다.

그리고 법안에 ‘비도축육’ 네 글자만 박아 넣으면 되는 일이었다.

다른 법률과 상충하는지, 혹은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이 야기되는지 검토는 필요했다.

그러나 다른 세세한 법률안에 비하자면 들어가는 수고가 훨씬 덜했다.

농축산위원회를 통과하고, 이런 오류를 트집 잡아 세월아 네월아 눌러 앉히기도 하는 법사위원회 역시 쉽게 통과될 것으로 예측되었다.

대찬은 국정감사 때 인연을 맺은, 그러니까 자기 아들이 윤이영의 광팬이라던 국회의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조 대표, 축하해요. 분위기가 괜찮아요. 본회의까지 무난하겠어. 국회가 파행으로 치닫지만 않으면.”

“하하, 감사합니다. 사실 그 부분이 제일 걱정됩니다. 국회 개점휴업이 밥 먹듯이 되는지라…….”

“뭐,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 볼 순 없지만 아직 그럴 기미는 없으니 안심하세요. 일단 우리 상임위에서는 빨리 의결해서 넘기기로 여야가 합의를 봤습니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의원님.”

“VIP시사회 티켓은 잘 받았어요. 아들이 감사하다고, 그리고 임자 있는 줄 모르고 쓸데없이 나댔다고 죄송하다더군요.”

“별 말씀을요.”

대찬은 의원과 전화를 끊고 소파에서 TV를 보던 윤이영에게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그러다가 윤이영의 몸을 덮치고 키스를 퍼부었다.

윤이영은 사지를 버둥거리며 대찬을 밀쳤다.

“갑자기 뭐야!”

“지금 나 밀친 거야?”

“아니, 갑자기 그러니까…….”

“키스 좀 하겠다는데 갑자기가 어디 있어.”

“이 인간이 왜 이래, 안 하던 짓을 하고!”

“네 임자가 나라는 걸 확인하고 싶어졌어, 갑자기.”

윤이영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찬을 한참 바라봤다.

비도축육의 법제화가 가시권에 들어왔다.

축산업계의 반대가 점점 거세지자 그에 발 맞춰 뜸해졌던 투자문의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로튼 프룻츠가 망하더라도 MFG처럼 허망하게 폭삭 무너지진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투자자들 사이에 번졌다.

전통의 대기업들이 이끌어가는 시장에서 오랜만에 등장한 젊은 블루칩이었다.

언론의 마사지도 받고 정치권의 우호적인 협력까지 얻은 로튼 프룻츠의 전화기가 다시 한 번 폭주했다.

대찬은 입맛을 쩝 다시며 말했다.

“이걸 우리 회사 IPO(기업공개·주식 시장에 상장하는 것) 직후에 발표했으면 주가가 아주 천정부지로 치솟았을 텐데.”

“대표님 욕심도 많으심다.”

진위생의 퉁바리에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하긴, 그때 되면 법제화에 애를 먹어도 백배는 더 먹었을 테니까.”

축산업계는 로튼 프룻츠로의 직접적인 지분투자와 로튼 프룻츠와의 공동 연구소 설립 중에서 후자를 택했다.

그러는 편이 자조금의 설립취지에도 온당했고, 대의명분으로도 적절했다.

그런데 한우자조금 위원장을 위시한 축산업계 요인들은 별도로 기금을 조성하여 로튼 프룻츠에 지분 투자를 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법제화가 확실시되면서 투자문의가 폭주하자 돈만 집어넣으면 두둑한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란 계산이었다.

대찬은 그들에게 우선적인 투자 권한을 허락했다.

여기에 맹윤주가 의아한 듯 물었다.

“이미 공동으로 연구소 설립하기로 했는데 굳이 저쪽에 지분 투자까지 배려해줄 필요가 있어요?”

“저쪽에서 제법 지분을 갖고 있으면 우리 쪽에 나쁘지 않거든.”

그러자 맹윤주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툴툴거렸다.

“시시콜콜하게 시비나 걸 텐데 뭐가 안 나빠요?”

“지금 우리 회사에 입김 센 대주주가 쵸 회장 쪽 지분하고 필래 쪽 지분이잖아.”

“그렇죠.”

“그 양반들은 비즈니스맨이야. 여차하면 이 회사를 꿀꺽 삼키려 들 거야. 그게 아니더라도 필요만 있다면 언제든지 경영에 간섭할 거고.”

“그러겠죠?”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중장기적으로 A를 택하는 게 맞는데, 저쪽에서는 단기적인 이익실현을 위해 B를 택하라고 강요할 수 있거든.”

“그런 일이 종종 있죠. 그래서 대표님이 경영권 사수를 위한 지분계산에 골몰하시는 거고.”

“응, 그런데 축산업계에서 적당히 지분을 들고 있으면 그런 요구를 상쇄할 때 요긴하게 쓰일 수 있어.”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나와요?”

“자조금은 농민들의 자발적인 거출금하고 정부지원금으로 이뤄져 있어. 정부 쪽 입김이 세게 들어갈 수밖에 없단 말이야.”

“어, 그렇죠.”

“정부는 단기적인 이익실현보다는 중장기적인 성장을 원하겠지. 비도축육이 성공적으로 안착하면 제법 국가경제에 이바지하는 바가 클 테니까.”

그제야 맹윤주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쵸 회장이나 필래 쪽에서 시비를 걸어올 때 정부가 업계를 압박하고, 업계가 우리 쪽에 서는 쓰리쿠션이 가능하다는 거네요.”

“그렇지. 지분이 미미하더라도 그런 견제세력이 존재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데는 큰 차이가 있거든.”

“그렇다고 경영권을 위협할 만큼 지분이 큰 것도 아니니까.”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우리한테 나쁠 건 없어. 그리고 법제화가 유력하다고 해도 끝까지 방심할 순 없으니까. 업계와의 관계는 계속 좋게 유지해야 해.”

“알았어요. 이제야 거리낌 없이 저쪽 투자를 받아줄 마음이 생겼어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대찬은 한우자조금위원장이 주도적으로 결성한 ‘축산업미래기금’의 자금 30억 원의 투자를 받아들였다.

이제 로튼 프룻츠의 큰 덩어리를 차지하는 세력은 대찬과 민승기를 위시한 오너 지분, 그리고 오너를 떠받치는 직원들의 지분, 쵸 후쿠히로 회장의 지분, 필래의 지분, 축산업미래기금의 지분으로 구성되었다.

여전히 대찬의 안정적인 경영을 위한 지분은 위협받지 않았다.

국회에서 법제화가 차근차근 진행되는 동안, 대찬은 공동 연구소 설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그렇지 않더라도 슬슬 중림대학교 연구실은 정리하려던 참이었다.

물리적인 거리도 너무 멀어서 비효율적이거니와, 유능한 인재를 수급하기에는 중림대학교의 그릇이 너무 작았다.

물론 중림대학교 총장은 물론 이사장까지 나서서 읍소했지만 아닌 건 아닌 것이었다.

축산업계와의 공동 연구소 설립은 좋은 구실이었다.

대찬은 과감히 중림대학교와의 결별을 결정했다.

은오영 교수도 미련 없이 학교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의 직함은 이제 공식적으로 중림대 교수에서 로튼 프룻츠 선임연구소장이 되었다.

직급은 다르샨 싱 전무와 마찬가지로 전무였다.

연구소는 어쩌면 로튼 프룻츠의 본사보다도 더 귀중했다.

그곳의 책임자라면 직급이 전무 정도는 되어야 옳았다.

이제 문제는 부지였다.

어디에 연구소를 설립할 것인지가 관건이었다.

서울을 기준으로 너무 멀어도 안 되고 가까워도 안 됐다.

적절한 부지를 물색하던 대찬에게 뜻밖의 비보가 도착했다.

필드업 부지를 구할 때 인연을 맺었던 하남의 ‘알부자 노인’ 심형수로부터의 소식이었다.

그의 손자인 심원철이 대찬에게 문자를 보냈다.

-할아버님 위독하세요. 돌아가시기 전에 조 대표님 꼭 뵙고 싶어 하시니까 시간 내서 와주세요.

그 문자메시지에는 병원의 주소와 호실이 적혀 있었다.

업무를 보던 대찬은 연락을 받자마자 외투를 입었다.

그는 착잡한 말로 진위생에게 말했다.

“나 하남에 좀 다녀올게요. 혼자.”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사무실을 급히 빠져나갔다.

대찬은 하남의 병원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위독한 지경에 이를 때까지 살뜰하게 챙기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

틈틈이 안부야 물었지만 몸이 바쁘다는 핑계로 찾아가 술 한 잔 제대로 사지 못했다.

필드업 부지를 물색할 때는 딱 밀착해서 아양을 떨다가 단물이 빠지니 어쩜 그렇게 안면몰수를 하느냐.

누군가 대찬을 그렇게 힐난한다면 솔직히 아니라고 항변할 수 없었다.

대찬은 그런 무거운 마음으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심형수의 1인실은 손자가 지키고 있었다.

심형수의 손자인 심원철은 대찬과 불편한 관계였다.

그러나 심형수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지금, 그런 불편한 감정을 떠올릴 겨를도 없었다.

대찬은 심원철과 악수를 나눴다.

“오랜만이네요.”

“아, 예…….”

심원철도 악수를 받았다.

그간 묵은 감정이 해소되었는지, 아니면 해소되지 않았는데 할아버지의 일 때문에 굳이 드러내지 않는 건지, 아니면 대찬의 달라진 위상에 꼬리를 마는 건지.

셋 중에 어느 것이 그를 고분고분하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심원철의 태도는 부드러웠다.

대찬은 바로 심형수의 옆에 앉았다.

못 보던 사이, 심형수의 몰골은 많이 초췌해져 있었다.

심형수는 쌕쌕 숨을 내뱉으면서 눈동자만 대찬 쪽으로 움직였다.

그것으로 인사는 되었다.

대찬은 심형수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어르신, 얼른 털고 일어나세요. 원체 건강하셨으니까 금방 쾌차하실 겁니다.”

심형수는 잔뜩 가래 끓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금방 쾌차는 무슨. 저승열차 표 끊어놨어. 갈 때 돼서 가는 거 미련 없어. 자네도 쓸데없이 억지로 슬픈 표정 지을 거 없어.”

“…어르신.”

“아이고, 오래 말하기 되다. 원철아, 나 대신 말해라.”

할아버지의 지시를 받은 심원철이 대찬 쪽으로 몸을 틀고는 할아버지 쪽을 흘끔 바라봤다.

“…여기 적힌 대로 읽으면 돼요?”

심형수는 말없이 고개만 보일 듯 말 듯 끄덕였다.

“나 심형수는, 흥읍시에 보유한 토지 20만 평을 로튼 프룻츠 측에 현물출자의 방식으로 투자하기를 희망한다.”

“20만 평을요……?”

심형수는 짜증이 살짝 번진 얼굴로 대꾸했다.

“고개 끄덕이기 힘드니까 되묻지 마.”

“…네.”

심원철은 다시 이어서 읽었다.

“로튼 프룻츠 측은 토지의 감정평가액만큼의 신주인수권을 대가로 지불해주기를 바란다.”

땅 팔아서 유산으로 상속하면 될 걸 뭘 이렇게 번거롭게…….

대찬의 뇌리에 잠깐 스치는 생각을 심형수는 능히 읽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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