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04화
전투력으로 치자면 시위를 적잖이 벌이는 집단 중에서도 상위권이었다.
구호는 우렁차고 눈빛은 다부졌다.
그들은 주먹을 움켜쥐고 인확협 위원장의 주도에 따라 절도 있게 구호를 외쳤다.
시위만 오백 번 나갔다던 관록의 위원장.
그는 그야말로 시위의 마에스트로였다.
“인조고기 웬 말이냐! 불안해서 못 먹겠다!”
“못 먹겠다! 못 먹겠다!”
“미꾸라지 한 마리에 백만 농가 다 죽는다!”
“다 죽는다! 다 죽는다!”
“사기꾼의 세 치 혀에 백만 농가 배신 마라!”
“배신 마라! 배신 마라!”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광화문 광장을 울렸다.
대찬은 집회 현장을 생중계하는 인터넷 방송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규탄하는 일만 명의 목소리를 복잡한 심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이나 대찬이나 배수진을 치고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물론 대찬의 계산으로는 비도축육이 상용화된다고 해도 당장 재래육의 지위를 뺏을 수 없었다.
업계에 타격이야 있겠지만 홀라당 잿더미로 만들 정도는 절대 아닐 것이다.
그렇게 강변해 봤자 저들의 절박한 심정에 작은 파문조차 일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타격이 없을 수는 없으니 괜히 몇 마디 거들어 봤자 불 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밖에는 되지 않는다.
화면을 바라보는 대찬의 입에는 씁쓸한 맛이 맴돌았다.
광화문에서의 집회는 이해당사자인 로튼 프룻츠에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렇기에 토요일에도 사무실에 나온 직원들이 적지 않았다.
대찬은 그들에게 굳이 출근을 당부하지 않았는데도, 자진해서 나온 이들이었다.
딱히 애사심이 유난히 투철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상사들이 부하 직원을 나무랄 때 곧잘 하는 말이 주인의식을 가지라는 것이다.
부려먹기는 노예로 부려먹으면서 주인의식을 가지라니.
숫제 이치에 맞지 않으니 듣는 부하는 겉으로 받아치지 못하면서도 속으로는 온갖 상욕을 퍼붓는다.
그런데 그게 로튼 프룻츠에서는 강요하지 않아도 이치에 맞았다.
수치상으로든, 대외적인 이미지로든 로튼 프룻츠의 밝은 미래는 약속이라도 돼있는 듯 확실하게 다가왔다.
조대찬 대표 이하 로튼 프룻츠의 직원들도 스톡옵션이라는 명목으로 로튼 프룻츠의 지분을 갖고 있었다.
이대로만 탄탄대로를 달리면 몇 십 배, 몇 백 배로 뻥튀기 될 것은 자명해 보였다.
그러니 저들이 토요일에도 출근을 자청하는 건 진실한 주인의식의 발로였다.
그들은 로튼 프룻츠의 직원 입장이 아니라 주주의 입장으로 사무실에 나와 숨죽이며 집회 현장을 지켜봤다.
그래도 그들이 나와서 함께해주니 대찬의 씁쓸한 마음이 조금은 위로되었다.
역시 출근도장을 찍은 진위생이 대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봐봤자 똑같은 소리만 앵무새처럼 계속하는 거 뭐 하러 보고 있슴까.”
“저 양반들은 이 추운 날 찬 바닥에 앉아서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질러대는데 그걸 들어주기라도 해야지.”
“참 나, 속도 좋슴다.”
“좋기는 아주 썩어 문드러지는구만.”
“아, 그럼 욕 들으면서 약간 즐기는 스타일……?”
대찬은 진위생에게 눈을 흘겼다.
“표준어 실력 점점 늘면서 어째 능글맞음도 느는 거 같은데.”
“저번에 업무차 비바체 사외이사실 갔다가 허운이라는 분한테 들었슴다. 대표님은 놀림받는 걸 좋아하신다고.”
“허운은 다음 정기인사 때 울릉도로 발령 내야겠어요. 상사의 마음을 이렇게 못 읽어서야. 당신도 조심해.”
“대표님이 어쭙잖은 협박을 하는 건 조롱이 만족스러웠다는 증거다. 굴하지 말고 더 괴롭혀주면 대표님은 흥분한다고도 그랬어요, 허운 씨가.”
대찬은 로튼 프룻츠 사무실에서까지 허운의 실없음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그는 진위생과의 입씨름을 관두고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사나운 목소리로 정치권은 각성하라! 썩은 과일 분쇄하자! 외치는 구호가 대찬의 귓전에 왕왕 울렸다.
집회에서 구호를 외치던 사람들 중에 저들끼리 수군거리는 치들이 있었다.
“뭐야, 이렇게 악만 쓰다가 해산하는 거야?”
“데모가 다 그렇지, 뭐.”
“아니, 이런다고 어디 뉴스에 단신으로나 나가겠어?”
“나가긴 나가지.”
“조대찬인지 뭔지 하는 놈은 뜨뜻한 사무실에 앉아서 핫초코나 처먹으면서 유유자적하고 있을 거 아니냐고.”
“그거야 그러겠지.”
“근데 우리는 여기서 이 지랄 떨고 있으면 최소한 보람은 있어야 할 거 아냐.”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이왕 이렇게 뭉쳤으면 화끈하게 한 판 해야 한다는 거지.”
구호만 외치는 집회는 목마른데 소금물을 마시는 것처럼 계속 갈증만 났다.
단순히 구호만 외칠 게 아니라 화끈한 행동을 보여주자.
그런 생각은 비단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 생각이 여럿의 것이 되니, 무대 위에서 집회를 주도하던 인확협 위원장의 귀에도 알음알음 전해졌다.
그는 그 전언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의 힘의 원천은 자신들에 앞에 모인 1만 명의 열성적인 지지자들이었다.
그들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면 그는 지체 없이 폐기될 것이다.
그는 어흠,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자, 오늘 모인 여러분들 피가 끓는 거 다 압니다. 오늘 기온이 영상 3도라는데 여러분에게서 뜨거운 기가 전해져서 난닝구 하나만 입고도 서있겠습니다.”
분노로 똘똘 뭉친 참가자들은 가벼운 농담에 웃지 않았다.
위원장은 다시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근데요, 일에는 다 순서가 있는 겁니다. 오늘 이렇게 모여서 구호를 외친 다음에, 반응을 보고 시원찮으면 다시 모여서 더 격렬하게 우리 목소리를 내면 됩니다.”
하지만 그 정도 말로 참가자들의 분노가 다스려지지 않았다.
목소리 큰 사람이 마이크도 없이 위원장에게 바로 고했다.
“바빠 죽겠는데 언제 또 모여요! 그냥 오늘 끝장을 봅시다!”
“여러분들 마음 다 압니다. 아주 잘 알아요. 근데 조금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성숙하고 차분하게 행동합시다. 우리 그 정도는 충분히 해낼 수 있잖습니까?”
위원장은 몇 차례의 좋은 말로 그들을 다독였다.
그래서 그 자리가 더 과격한 단계로 번지는 것은 막았다.
하지만 해소되지 못한 불만은 집회가 진행되는 내내 자가 증식 했다.
집회는 구호, 구호, 구호로 끝났다.
아쉬움이 남은 참가자들은 대절한 전세버스에 오르지 않고 여전히 서울에 남았다.
탑골공원 뒤편의 2천 원짜리 막걸리와 4천 원짜리 선짓국을 갖다 놓고 위원장을 규탄했다.
광화문 앞에서 응집되었던 분노가 작은 식당마다 파편으로 흩어져서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했다.
“위원장 그렇게 안 봤는데 그 새끼도 새가슴이야. 늑대 탈을 쓴 염생이 새끼야.”
“이럴 거면 뭐 하러 그렇게 자조금 위원장 씹어댄 거야? 다른 게 없잖아.”
“차라리 자조금 위원장이 낫지. 그 양반은 적어도 서울까지 올라오는 수고는 안 시켰다고.”
그나마 점잖게 이어지던 논의는 막걸리가 돌면 돌수록 과격해졌다.
이제 위원장에 대한 불만과 성토를 지나, 대찬을 향한 직접적인 인신공격으로 발전했다.
“그놈의 새끼, 쥐새끼 같은 새끼가, 나이도 어린 새끼가 국회를 주무르고 언론을 제 시녀로 삼고 아주, 으응? 상종 못할 새끼가.”
“사회의 된 맛을 좀 봐야 돼, 그놈은. 세상이 아주 놀이터 같을 걸?”
“개새끼!”
막걸리에 눈이 풀린 치는 구겨진 양은 사발을 탁자에 퍽 내려놓으면서 씩씩거렸다.
입가에는 막걸리 몇 방울이 흘렀다.
“우리도 얼마나 우습게 보이겠어. 잘난 대학 나와서, 잘난 애인 만나서, 재벌 회장 빽으로 두고 일본 회장 놈 야코도 죽이는 놈이, 우리가 만 명이 모이든 십만 명이 모이든 코웃음만 나올 거 아니냐고.”
“그러겠지. 그놈은 한번 된통 당해봐야 돼. 그래야 정신을 차리지.”
“이참에 우리가 한번 공포의 쓴맛을 보여줘야 돼.”
그러자 마주앉은 사람들의 귀가 쫑긋 섰다.
“어떻게. 어떻게 보여줘?”
말을 꺼낸 이는 막걸리 사발을 치우고 아예 병째 들이켠 후에,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그의 눈빛에 일말의 광기가 서렸다.
집회가 끝나고, 긴장이 풀린 대찬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주말에 제대로 쉬지 못해서 피로가 곱절로 몰려왔다.
그가 먼저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하자 그게 주변 사람들에게도 전염되었다.
모두 하마처럼 입을 벌리고 동시에 하품을 했다.
대찬은 그런 그들이 웃겨서 피식 웃었다.
“다들 그만 집으로 가요. 수당도 안 쳐주는 주말에 뭐 하러들 나와서 하품이나 쩍쩍 하고 있어요?”
“대표님이 저녁 맛있는 걸로 거하게 쏘실 줄 기대하고 버티고 있는 거 아니겠어요?”
진위생의 말에 대찬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럴 일 없으니까 돌아가서 가족들과 오붓한 저녁시간 보내세요.”
“제 가족은 연변에 있슴다…….”
“당신 집에 고양이 있잖아. 품에 끼고 짜장면이나 시켜 먹어요.”
“너무 하심다.”
진위생이 고집을 부리자, 밥 한 끼 얻어먹을 생각이 없던 직원들도 마음이 동했다.
그들의 은근하고 간절한 눈빛이 따갑게 대찬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이러니 낯짝이 철판이 아니라 티타늄이라도 외면하기 어려웠다.
대찬은 웃으면서 직원들에게 말했다.
“나는 우리 직원들이 이렇게 사장님하고 밥 먹고 싶어 하는 변태들인 줄은 몰랐네요.”
“사장님하고 먹고 싶은 게 아니라 비싼 밥 얻어먹고 싶어서…….”
대찬은 불리한 말에는 대응하지 않았다.
“자, 그럼 식사하실 분들은 저랑 하러 가시죠. 집에 가고 싶으신 분은 괜히 눈치 보지 말고 귀가하시고.”
대찬은 그렇게 직원들을 거느리고 우르르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향할수록 대찬의 귀에 떠들썩한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소리의 정체를 알지 못한 대찬은 진위생과 나란히 걸어가면서 가볍게 물었다.
“뭐야, 오늘 뭐 이 주변에서 행사 있다고 했나?”
“아뇨, 들은 거 없는데요.”
“근데 무슨 소리야, 저거.”
대찬은 진위생이 대답하기 전에 정답을 알아냈다.
걸을수록 그들이 외치는 발음이 또박또박하게 들려오는 까닭이었다.
“조대찬 나와라!”
“조대찬 없으면 당직 서는 놈이라도 나와라! 비상대기 중인 거 다 안다!”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척 봐도 술 취한 목소리였다.
대찬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역시 상황을 파악한 진위생이 대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표님, 일단 피하시는 게 좋겠는데요.”
“음, 이미 늦은 거 같은데.”
대찬이 말하는 찰나, 건물 앞에서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기어코 실내로 쳐들어왔다.
물 만 밥에 멸치볶음으로 요기를 하던 늙은 경비원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누, 누구세요. 여기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우리 오늘 법이고 나발이고 막걸리에 말아서 먹어치운 사람들이거든요? 괜히 덤볐다가 피 보지 말고 가만히 계세요. 뼈 부러져요. 거 드시던 멸치나 마저 드세요. 멸치에 칼슘이 많대.”
“이, 이 양반들이!”
막걸리 좀비들은 더 이상 경비원을 상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오면서도 잔뜩 상기된 얼굴로 대찬을 성토했다.
대찬은 그들이 누군지 바로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들도 대찬을 바로 알아봤다.
“어, 저기 있다!”
“조대찬이다!”
“이야, 토요일에 출근도 했어? 아주 열심이네.”
“일할 맛이 저절로 나시겠지. 뜻 두는 대로 일이 척척 해결되니까.”
막걸리를 마시던 사람들은 기어코 종로에서 강남으로 넘어왔다.
그들은 대찬을 보자마자 술기운이 더 왕성하게 돌았다.
“너 잘 만났다. 개새끼!”
술 취한 사람들이 대찬을 향해 뚜벅뚜벅 육박했다.
그러자 진위생이 대찬의 앞으로 나서며 그들을 가로막았다.
그는 다급하게 대찬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집회 나갔다가 분 덜 풀린 사람들 같은데, 대표님 일단 피하세요.”
“아냐, 당신이 피해.”
“예?”
대찬은 진위생을 살짝 옆으로 밀었다.
막걸리 냄새가 바로 대찬의 앞으로 훅 끼쳤다.
하하호호 웃으면서 저녁밥이나 먹으러 가려던 직원들은 뜻밖의 맞닥뜨림에 당혹했다.
대찬은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을 노리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누구십니까.”
“누군지 몰라서 물어? 네 모가지 따러 온 놈이다, 이 새끼야.”
“누구신데 제 모가지를 따러 오셨습니까.”
“알면서 왜 자꾸 물어. 너 때문에 먹고 살길 막막해진 놈이지, 누구야.”
그들이 정제되지 않은 거친 말투로 대거리를 하려고 들자, 로튼 프룻츠의 직원들이 먼저 나서서 씩씩거렸다.
“어이, 아저씨들, 말조심해요. 말이라고 다 말인 줄 아나.”
“뭐? 말조심? 이 씨발, 말조심은 네들 대빵 보고나 하라고 해. 이게 어디서 확!”
“아니 근데 듣자듣자 하니까 진짜!”
대찬은 자신을 대신해 얼굴을 붉히며 물러서지 않는 직원이 고마웠다.
하지만 상황해결에 이득이 되는 행동도 아닐뿐더러, 그가 그렇게 나설 이유가 없었다.
이건 그의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