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02화
“그렇다면 우선 축산업계가 대화 요청에 응하는 게 먼저이겠군요.”
“예, 지난번에는 결렬되었지만, 꾸준히 문을 두드리다 보면 축산업계 측에서도 응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모쪼록 상생의 길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저희 회사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대찬은 웃으면서 기자들에게 깍듯이 인사하고 공항을 떠났다.
이제 공은 정치권과 축산업계로 넘어갔다.
축산업계는 완벽한 계획을 짜두고 있었다.
대찬이 계속 비도축육의 법제화를 밀어붙이면 1차로는 성명문을 발표하고, 2차로는 머리띠를 두르고, 3차로는 삭발을 하고, 4차로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한우 한 마리를 거열형에 처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로튼 프룻츠가 대뜸 일본은 걸고넘어져서 점수를 땄다.
이런 상태에서 강경책을 구사했다가는 오히려 역풍을 맞을 염려가 있었다.
축산업계 주요 관계자들은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한 끝에 행보를 결정했다.
로튼 프룻츠의 사무실로 전화가 걸려왔다.
맹윤주가 전화를 받았다.
“로튼 프룻츠입니다.”
“아, 여기 인확협입니다.”
“인확협이요?”
“인조고기 확산방지를 위한 범국민…….”
그 말을 듣자 맹윤주의 표정이 싹 굳었다.
목소리도 냉랭해졌다.
“네, 왜요?”
“로튼 프룻츠 측과 한번 만났으면 하는데요.”
“그럼 전화가 아니라 이메일이나 팩스를 통해 정식으로 제안해주시는 게 맞지 않을까요?”
“…아.”
맹윤주 역시 그쪽에 감정이 상해 있어서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그걸 가만히 보던 대찬이 경악하며 얼른 전화를 자기 쪽으로 가져왔다.
“조대찬입니다.”
맹윤주가 뿔난 얼굴로 왜 받아주느냐는 표정을 짓자, 대찬은 급한 손짓으로 그녀를 진정시켰다.
대찬이 직접 전화를 받자 인확협 관계자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인확… 아니, 올바른 축산업의 상생을 생각하는 사람들, 올축사의 우계돈 과장이라고 합니다…….”
“아, 그새 이름이 바뀌었군요.”
“하하, 예…….”
“지난번에 뵈었던 사나운 차장님보다는 훨씬 목소리가 좋으시네요. 말씀하세요.”
대찬은 일전과는 달리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확협에서 올축사로 바뀌면서 축산업계의 대찬에 대한 태도도 사뭇 유화적으로 바뀌었다.
이런 태도가 언제 돌변할지 알 수 없었다.
시마 회장 덕분에 점한 우위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유지될 것이라는 생각은 안일했다.
대찬은 배짱을 튕기며 몸값을 불리지 않고 바로 올축사와 대화 테이블에 앉기를 희망했다.
로튼 프룻츠는 올축사의 정회원 자격으로 가입했다.
올축사는 대찬을 올축사의 공동상임대표로 추대했다.
각 자조금의 관리위원장들과 나란히 올축사의 최고위 간부로 선임되었다.
‘일단 여기까지는 다 좋네. 올축사, 저 이름만 빼고.’
며칠 지나지 않아 올축사의 간부들이 원탁에 둘러앉았다.
대찬을 전담마크 하는 정예요원으로 선발되었는지, 올축사 우계돈 과장이 거의 수발 들 듯 대찬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그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원탁에까지 의미를 부여했다.
“원탁에는 모든 일이 원만하게, 둥글게 해결되라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아, 예…….”
확실히 첫 만남 때보다는 대찬을 상대하는 사람들의 위상이 높았다.
귀찮은 걸 처리하라고 과장, 차장을 내보내던 자조금의 수뇌가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위원장들 중 보스 격인 한우 자조금위원장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대찬에게 말했다.
“시마 회장과의 대담은 참 인상 깊게 봤습니다. 이해관계를 떠나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로튼 프룻츠의 발전을 응원하겠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위원장님.”
“우리가 조금 가시를 세웠습니다. 미안합니다. 우리에게 로튼 프룻츠는 외계인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것도 이해합니다.”
위원장은 조심스레 맞잡은 손을 살짝 비볐다.
말에는 신중을 기했다.
“외계인이 우릴 잡아먹으러 온 건지, 노예로 부려먹으려고 온 건지, 아니면 부대끼고 같이 살자고 온 건지 알지 못합니다. 알지 못하니 일단 냅다 핵미사일 쏘고 보는 겁니다.”
“예, 언론에서도 밝혔지만 제가 위원장님이라도, 축산 농가였어도 저의 등장이 결코 반갑지 않았을 겁니다.”
“상황이 조금 우습게 된 건 사실이지만 모쪼록 대화의 물꼬가 트였으니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결책이 도출되었으면 합니다.”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는 바입니다.”
“우선 용어부터 통일해야겠지요. 우리 쪽에서는 식육과 인조육으로 부르고 싶지만 귀하의 생각은 다르잖습니까.”
“저희는 비도축육과 도축육으로 부르기를 희망합니다.”
“용어에 대한 합의가 전제되지 않으면 논의가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차근차근 얘기 나누시죠. 서로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중간에 식사도 하시고 커피도 한 잔씩 나누시고.”
자기가 기르는 돼지를 닮은 양돈 자조금위원장은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대찬의 말에 호응했다.
“좋습니다. 오늘 문 걸어 잠급시다! 용어에 대한 통일은 이 자리에서 해결을 봅시다. 그 전에는 화장실 빼고 담배 빼고 이석 금지입니다. 식사도 짜장면 시켜 드시죠. 제가 쏘겠습니다.”
그러자 원탁에 둘러앉은 올축사 간부들은 잔잔하게 웃었다.
올축사 제1회 간부회의는 낮에 시작해서 밤에 끝났다.
근방의 중국집은 점심 때 배달한 그릇을 가지러 오면서 저녁식사를 배달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올축사 간부들은 피곤에 찌든 얼굴로 서로 악수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날의 결론은 저쪽에서 인조육, 이쪽에서 비도축육으로 부르는 낱말을 ‘비도축육’으로 통일하기로 했다.
반대로 저쪽에서 식육, 이쪽에서 도축육이라고 부르는 낱말은 ‘재래육’으로 통일하기로 했다.
로튼 프룻츠 쪽에서 주장하는 낱말이 관철되고, 축산업계 쪽에서 주장하는 낱말은 관철되지 못했다.
재래육이라는 낱말은 글자 자체로는 ‘예전부터 쭉 존재해온’ 고기라는 뜻으로 의미가 중립적이었다.
그다지 축산업계에서 반길 만한 이름은 아닌데, 축산업계는 이 제안을 수용했다.
그 자체가 대찬 쪽으로 유리하게 기울어진 구도를 대변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논의들이 지금처럼 순탄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지금의 여론이 반짝 소낙비에 그치면 이전처럼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대찬은 본의 아니게 대중과의 스킨십을 늘릴 수밖에 없었다.
매스컴에서 자신을 지우면 여론은 쉽게 그를 잊을 것이다.
그러니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다.
대찬은 자신에게 쏠린 우호적 여론이 사라지기 전에 해야 하는 일을 서둘러 몽땅 처리하고자 했다.
그 마음과 행보가 마치 게임에서 정해진 시간에 점수를 몇 배로 더 주는 피버타임을 치르듯 급했다.
용어 통일부터 일단은 서로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 문제들을 차근차근 해결해 나갔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서로의 지분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하는 숙명의 그들이었다.
점점 본질에 가까워질수록 긴장은 높아지고 경계는 날카로워졌다.
종종 언성이 높아졌고, 그 자리의 감정의 골을 메우고자 자조금 위원장은 우계돈 과장에게 대찬에게 술을 사주라고 지시했다.
대찬은 번번이 사양하되, 로튼 프룻츠 직원들과 올축사 소속 직원들에게는 같이 모여서 밥과 술을 먹도록 했다.
회식에 참여하는 로튼 프룻츠 직원들에게는 야근수당이 지급되었다.
회식은 회식이되, 단순히 즐기는 회식이 아니었다.
회식의 목적은 염탐이었다.
올축사 수뇌부의 생각은 어떤지.
어떤 경우의 수에 어떤 전략을 구사할지.
그건 올축사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수당의 유무에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한바탕 진하게 술을 마시고 다음날 출근한 진위생이 대찬에게 보고했다.
대찬은 수고한 그를 위해 숙취해소 음료를 건넸다.
그리고는 의자를 당겨 와 그의 앞에 앉았다.
“어제 열심히 달린 모양이네요?”
“말도 마십시오. 술 마시는 데는 아주 도가 튼 인간들임다.”
대찬은 씩 웃었다.
“소득은 있었어요?”
“꽁꽁 싸매고 어떻게든 정보를 안 주려고 그러다가, 술이 좀 들어가니까 그래도 좀 말랑해지던데요.”
대찬은 의자를 진위생 쪽으로 가까이 끌고 갔다.
“그래서.”
“법제화 관련해서는 절대 양보할 생각이 없다던데요.”
“쉽게 양보가 되는 문제는 아니지. 그래도 양보하게 만들어야 해.”
“그쪽에서 흘리기를, 5년의 유예기간을 설정하고, 그 이후에 비도축육의 연구개발 상황을 따져서 새롭게 논의하는 걸 베스트로 생각한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에 맹윤주가 벌컥 화를 냈다.
“5년 유예기간 후에 법제화도 아니고, 5년 후에 다시 논의한다고요?”
그 말에 진위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맹 과장님.”
“참 나! 그럼 그때 가서 또 5년 미루자고 할 게 뻔하잖아요.”
“그… 렇겠죠?”
맹윤주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대표님, 말도 안 돼요.”
“나도 알아요. 아마 그 말을 흘린 것도 취해서 실수로 흘린 건 아닐 거야. 그만큼 입장이 강고하다는 걸 은근히 알려오는 거지.”
“대화야 계속해야 하지만 거기에만 매달릴 순 없어요. 우리는 우리대로 밀어붙여야죠. 국회 상임위에 법안이 통과되든, FDA 유권해석을 받든 무조건 가까운 시일 내에 유의미한 결과가 도출돼야 해요.”
대찬은 맹윤주의 말에 십분 공감했다.
대찬은 올축사에서의 대화를 이어가는 한편, 정치권과의 접촉을 늘려갔다.
정치권에서도 대찬을 환영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걸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하는 사람들이었다.
지금 그들의 눈에 대찬은 궁둥이에 통통하게 단물이 오른 진딧물이었다.
젊음.
혁신.
애국심.
정치인에게 부족한 세 가지를, 최소한 대외적인 이미지로서 지니고 있는 대찬이었다.
나중에야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으로서는 가장 가까이하고 싶은 상대였다.
정치권은 대찬이 입김을 넣지 않아도 알아서 국회에서 토론회를 열고, 어느 공식석상의 모두발언에서 소재로 삼았다.
“대한민국의 미래가 여전히 밝다는 것을, 저는 젊은 기업가, 조대찬 대표를 보고 느꼈습니다. 이는 이번 정부에서 우직하게 밀고 나갔던 창조경제의 훌륭한 결과물이라고 자신하며…….”
여당 대표, 최고위원회의 모두발언.
“어둡고 긴 터널 같던 대한민국에 아직 희망은 있었습니다.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듯, 침체된 경제의 돌파구를 찾았습니다. 대한민국의 신 성장동력, 미래 먹거리를 발굴해냈습니다. 저희 당은 대한민국이 비도축육 산업의 선두주자로 굳건히 자리매김하도록…….”
야당 대표, 최고위원회의 모두발언.
상황이 대찬에게 우호적으로 돌아가자 축산업계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마냥 대찬의 위세에 눌러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실력행사에 들어가야 한다는 강경론도 제시되었다.
축산업계의 의견은 통일되지 않았다.
어느 쪽을 택하든 장단점이 뚜렷했다.
한우 자조금위원장은 올축사 회의에서 대찬에게 부드러운 어조로 타이르듯 말했다.
“조 대표, 요즘 너무 외부와의 접촉이 잦지 않습니까?”
“예?”
“우리는 올축사를 통해 하나로 묶였습니다. 여기서 통일된 견해가 도출되기 전에, 정치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별도의 단독 행동을 하는 건 타협의 의지가 약하다고 비춰질 염려가 있습니다.”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의 개인적인 활동까지 올축사의 제재를 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아, 물론 그렇지만, 자꾸 정치권을 충동해서 조 대표의 뜻을 관철시키려고 들면 우리도 마음이 조급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올축사를 시간 끌기 위한 미봉책으로 여기는 건 아니지요?”
축산업계 측은 논의를 최대한 지연하고자 했다.
지금은 대찬의 이미지나 파급력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대찬의 위세가 한 김빠졌을 때 본격적인 논의에 돌입하고 싶었다.
물론 대찬은 그 반대로 속전속결을 원했다.
대찬은 웃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시간은 오히려 위원장님 이하 업계의 편이라는 걸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시간 끌기 용도라니, 당치 않습니다.”
“그러니까 내 말은…….”
“타협의 의지, 강합니다. 조속히 타협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수차례 저희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번 국회 회기 안에, 비도축육을 법제화해서 제도에 의거하여 비도축육을 판매, 유통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요. 업계가 준비할 수 있도록 충분한 유예기간이 있어야만 해.”
“부칙에 유예기간을 설정하면 됩니다. 저희는 최장 1년까지 이를 감수할 생각이 있습니다. 업계가 준비할 기간은 1년이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조 대표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1년은 너무 짧아요. 3년은 돼야 해요.”
“2년까지는 양보하겠습니다. 서로 한 발짝씩 양보하면 됩니다.”
한우 자조금위원장은 입술을 오므렸다 폈다.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니까. 법안에 유예기간을 박아두는 게 아니라, 우리끼리 임의로 유예기간을 설정해두고 그 이후에 다시 논의를 해보자는 거지요.”
“그건 어렵겠습니다. 그렇게 불확실성이 증폭되면 신규투자유치와 사업계획에 막대한 차질이 빚어집니다. 회사 문을 닫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허허, 이것 참……. 그렇게 독불장군처럼 나오면 우리도 실력행사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어요. 우리도 힘이 없는 집단이 아니거든요.”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