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01화
한국이나 일본이나 싸가지에는 민감하니까.
대찬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좋습니다. 모쪼록 선의의 경쟁이 되었으면 합니다. 부디 미래의 거대한 산업이 될 비도축육 시장에서 한국과 일본이 사이좋게 앞자리를 차지하기를 바랍니다. 김연아 선수와 아사다 마오 선수처럼 말입니다.”
시마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대찬 쪽으로 다가갔다.
대찬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마 회장은 그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대찬은 웃으면서 그의 손을 맞잡았다.
시마 회장은 마이크를 저만치 치우고 대찬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언제까지 그렇게 시건방 떨 수 있는지 두고 봅시다.”
“코테츠가 잘 돼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요즘 경질설에 시달리시던데 회장자리 오래 지키고 계셔야 두고 보기도 오래 두고 보실 거 아닙니까.”
“내가 이래서 한국 사람들을 싫어해. 주제 모르고 말을 막 뱉거든.”
시마 회장은 뿌리치듯 대찬의 손을 놓고 먼저 퇴장했다.
그러자 대찬이 거느린 인원과는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의 인파가 그의 뒤를 따라 우르르 빠져나갔다.
대찬은 웃음을 띤 채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시마 회장을 향해 기자들이 따라붙었다.
대개 일본 기자들이었는데, 개중 이질적인 이가 섞여 있었다.
최재한이었다.
그는 일본어로 시마 회장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로튼 프룻츠와 비도축육 시장에서 한 판 승부를 벌이게 되셨는데, 자신 있으십니까!”
시마 회장은 웬만한 질문에는 노코멘트로 일관하며 빠르게 장내를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 질문에는 도저히 응수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시마 회장은 몸을 휙 돌려 최재한을 똑바로 바라봤다.
“지금 자신 있냐고 했습니까?”
“예, 회장님.”
“자신 있냐는 질문은 열세에 놓인 도전자에게 알맞은 것 같은데요.”
최재한은 난감한 듯 웃었다.
“죄송하지만 비도축육 분야에서는 로튼 프룻츠가 코테츠 키친보다 앞서있습니다.”
“우리는 그린블러드 사와 손을 잡았어요!”
대찬의 앞에서도 지켜내던 시마 회장의 평정이 깨졌다.
대뜸 터져 나온 큰 목소리에 주변은 흠칫 놀랐다.
최재한은 일부러 그를 더 긁었다.
“자세한 자료는 없지만 그린블러드 사 역시 로튼 프룻츠에 완벽히 앞서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그건 한국인의 안목에나 그러겠지요. 제발 감정을 배제하고 건조한 사실만 봅시다. 로튼 프룻츠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그럼 그 말씀은 로튼 프룻츠를 이길 자신이 있으시단 걸로…….”
시마 회장은 으르렁거리며 최재한의 말을 끊었다.
“자신이 있냐는 질문 자체가 내게는 모욕입니다. 똑똑히 말씀드리지요. 로튼 프룻츠는 코테츠 키친에 의해 도태될 겁니다. 조대찬 대표도, 그리고 나한테 질문을 하는 한국 기자 당신도 오늘을 부끄러워하게 될 겁니다.”
시마 회장의 턱이 잠깐 부르르 떨었다.
그는 다시 최재한을 등지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최재한은 자신과 동행한 카메라기자를 흘끗 보며 물었다.
“이 정도면 됐지?”
“아유, 차고 넘쳐요.”
카메라기자는 남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소심하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최재한은 씩 웃었다.
대찬은 도쿄에서 로튼 프룻츠, 필래 비바체와 관련된 업무를 몇 가지 처리했다.
그리고 미래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을 만났다.
대찬은 새삼 자신의 높아진 위상을 체감했다.
로튼 프룻츠보다는 필래 비바체에 더 관심을 두긴 했지만, 일본의 몇몇 기업에서 만남을 먼저 제안했다.
대찬은 그들과 관계를 맺어둔 뒤 바로 귀국했다.
연일 촘촘하게 이어진 일정을 소화한 이후였다.
대찬은 비행기에 타자마자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는 좌석에 몸을 묻은 채로 고개만 옆의 진위생 쪽으로 돌렸다.
“포럼에서 있었던 일, 국내에 좀 소식이 전해졌나?”
“도쿄로 가기 전부터 관심을 모으던 사건이라서요. 예열이 잘 돼있던 덕분에 바로 반응이 나오던데요?”
대찬은 좌석에 묻은 몸을 살짝 앞으로 들며 물었다.
“그래? 어때?”
“어떨 거 같아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어땠으면 좋겠다는 건 있지만.”
진위생은 씩 웃었다.
“딱 한 단어로 줄여서 말하면 분노예요.”
“그게 나에 대한 분노는 아니겠지? 감도 안 되는 게 왜 일본까지 가서 싸가지 없이 구느냐, 한일관계 악화의 주범이다, 뭐 이런…….”
“그런 반응이 없지는 않아요.”
그러자 대찬의 얼굴이 삽시에 흙빛이 되었다.
“그런 반응이 있어?”
“비중으로 따지면 한 0.2퍼센트 정도.”
“아, 제발 그 정도는 그냥 없다고 말해줘.”
“뭐, 대부분 분노의 화살은 시마 회장한테 향하고 있어요.”
“그래야지.”
“로튼 프룻츠는 코테츠에 의해 도태될 것이다. 이렇게 떠들어대는 오늘을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이런 발언들이 퍼지고 있어요.”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재한이 시마 회장 성질을 제대로 건드려줬더라고.”
“아직까지 대단한 움직임은 아니지만 코테츠 불매를 하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어요. 그것보다 대표님께 더 반가운 반응은.”
“반가운 반응은?”
“이렇게 된 이상 자존심 싸움이다. 절대 로튼 프룻츠가 코테츠한테 찌그러지는 일은 없어야 될 거다. 여기서 지면 MFG 꼴을 만들어줄 거다.”
대찬은 가볍게 진저리를 쳤다.
“원하던 반응이면서도 등골이 서늘해지네.”
“일단 확실히 이목은 끌었어요.”
“오케이.”
진위생의 말을 들은 대찬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다시 좌석에 몸을 묻었다.
진위생은 대찬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시마 회장은 왜 그렇게 반응했을까요?”
“응?”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게 우리가 바라는 걸 그쪽도 모르진 않을 거잖아요.”
“그렇겠지.”
“결과적으로 우릴 도와준 셈이 된 건데, 우릴 싫어하는데 왜 그랬을까요?”
대찬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렇게 하는 게 자기한테도 좋으니까.”
“네?”
“시마 회장 입지가 엄청 위태로운 상황이라니까. 코테츠 키친도 평소 같았으면 거들떠도 안 봤을 텐데, 이렇게 직접 살뜰하게 챙기는 것도 자기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야.”
“아아.”
“미래지향적인 이미지도 갖고 가면서, 적자에 대한 변명거리도 챙길 수 있거든. 지금의 적자는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둘러댈 수가 있잖아.”
“그렇죠.”
“공연히 쵸 회장을 때리는 것도, 그리고 내 응수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것도 그 연장선상이지.”
“자기를 향하던 비난의 화살을 우리 쪽으로 돌릴 수 있으니까?”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도 우리를 십분 이용하는 거야. 그러니까 일부러 무대 위로 나를 불러내고, 재한이 질문에 필요 이상으로 거칠게 응수하고.”
“어, 근데 최재한 기자 질문에 대답할 때는 진짜 화난 것처럼 보였는데요?”
“진짜 화나긴 했겠지. 감히 대 코테츠 그룹의 회장님한테 주제도 안 되는 것들이 짱돌을 던지니까.”
“이제부터는 주제가 된다는 걸 보여줄 때네요.”
“그렇지. 돌아가면 바빠질 거야. 당신도 당분간 야근수당 두둑이 받아 가야 할 거야.”
진위생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 대찬은 잔뜩 몰려온 기자들에 의해 포위되었다.
대찬은 넥타이를 고쳐 매고 심호흡을 했다.
이번만큼은 최재한이 나서지 않았다.
그의 역할은 시마 회장의 입에서 감정적인 낱말들을 이끌어내는 것으로 족했다.
인천공항에 들어와서까지 합을 맞추면 너무 최재한이 입 안의 혀처럼 구는 것이 노골적으로 보이고 만다.
어차피 그가 아니더라도 기자들은 대찬이 원하는 질문들을 해줄 것이었다.
“시마 회장과의 언쟁이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언쟁일 거까지야…….”
“이번 사건으로 비도축육에 대한 관심은 물론, 조대찬 대표님 본인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찬은 겸연쩍게 웃었다.
“좋은 쪽의 관심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극동일보의 한 기자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일각에서는 일부러 일본과의 대립각을 형성해 이익을 취하려는 얄팍한 술수가 아니냐는 지적이 있는데요.”
대찬은 그쪽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번 일은 시마 회장께서 장복광 회장의 핏줄을 저질스럽게 비난하면서 촉발되었습니다.”
대찬은 기자들 앞에서 쵸 후쿠히로 회장이라고 하지 않고 장복광 회장이라고 했다.
은연중에 쵸 후쿠히로 회장의 혈통이 한국계임을 강조했다.
대찬은 분명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 과정에서 저희 회사도 언급되었고요. 설마 제가 시마 회장을 꼭두각시처럼 조종이라도 했다는 뜻인가요?”
“상황이야 돌발적이지만 일부러 감정의 골을 깊게 만든 건 조대찬 대표 본인 아니십니까?”
대찬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했다.
여기서 신경질적으로 비춰져 봤자 자신에게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제가 기자회견을 자청한 것도 아니고, 시마 회장의 발언이 보도된 이후 몇몇 기자님들이 저를 찾아와 제 의견을 물으셨습니다. 저는 그 의견에 솔직하고 충실하게 답변했고요. 그뿐입니다.”
“도쿄에서 열린 이번 닛케이 포럼에 참석해 시마 회장의 분노를 야기한 건 조 대표님의 선택이셨습니다.”
나 참.
대찬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구본진의 개인적인 사주라도 받고 온 건지.
앳된 얼굴의 극동일보 기자는 어떻게든 건수를 올려보려고 이리 물고 저리 뜯어보았다.
대찬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작은 회사를 경영하는 입장에서, 닛케이 포럼은 많은 공부를 할 수 있는 학습의 장입니다. 시마 회장의 분노를 야기하러 일부러 도쿄에 갔다고 말씀하시는 건 기자님의 개인적인 생각이시고요.”
“눈 가리고 아웅 아닙니까?”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제가 시마 회장의 분노를 야기한 게 아니라, 시마 회장이 선제적으로 저의 분노를 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극동일보 기자의 말을 대찬은 뚝 잘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시마 회장님의 말씀을 경청하러 섹션에 참석했고, 시마 회장님이 저를 연단 위로 불러 세웠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기자님은 더 이상 근거 없는 의혹 제기로 저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그렇지만……!”
대찬은 이제 새내기 기자쯤은 맛있게 찜 쪄 먹을 정도는 되었다.
대찬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둬 자연스럽게 더 이상의 논쟁을 차단했다.
그 틈을 비집고 다른 기자들이 질문했다.
“시마 회장이 로튼 프룻츠와의 경쟁에 자신 있냐는 질문에 역정을 냈다는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들었습니다. 저를 일컬어 열세에 놓인 도전자라고 하셨던데.”
“예, 여기에 대해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시마 회장님께서 워낙 거느린 계열사가 많으셔서 이 시장에 대한 파악이 덜 되신 것 같습니다.”
“그 말씀은…….”
“로튼 프룻츠는 힘든 싸움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열세에 놓여 있지는 않습니다.”
“이번 시마 회장의 발언을 망언으로 규정하는 국민들도 적지 않습니다. 특히 조 대표님, 그리고 질문을 한 한국 기자가 포럼에서의 일을 부끄러워하게 될 거란 말이요. 비단 조 대표님과 기자뿐만 아니라 한국 국민들에 대한 발언으로 여겨질 소지가 다분해서.”
대찬은 웃음을 머금었다.
“물론 저도 시마 회장님을 향해 날 선 반응을 보였으니 거기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건 이해합니다. 그러나 정도가 있죠. 일부 국민들께서 충분히 분노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된 이상 비도축육 시장에서만큼은 로튼 프룻츠가 국가대표가 된 셈이고, 한일전에서는 절대 지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로튼 프룻츠의 경쟁자는 일본의 코테츠 키친을 비롯해 미국, 이스라엘, 네덜란드, 세계 각지에 포진해있습니다.”
기자들은 대찬의 말을 경청했다.
“특별히 코테츠 키친만을 의식한 경영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로튼 프룻츠는 세계시장의 선두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연히 일본의 코테츠 키친은 로튼 프룻츠의 발아래 놓일 겁니다.”
“로튼 프룻츠의 경영도 중요하지만, 현실적인 난관을 돌파하려면 국가 차원의 지원도 절실할 텐데요.”
그렇게 질문하는 기자는 최재한과 자주 술을 마신다는 타 방송국의 동료였다.
최재한의 은근한 사주를 받아 던져진 질문이었다.
대찬은 지금까지 했던 말 중에 가장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말했다.
“비도축육의 법제화가 가장 급선무입니다. 현행 법률 하에서는 비도축육을 판매하지도, 유통하지도 못합니다. 이 부분이 해결되어야 로튼 프룻츠가 코테츠 키친을 비롯한 유수의 비도축육 업체들보다 한 발짝 앞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럼 정부나 국회 차원의 법제화 노력이 기울어져야겠군요.”
“제 입장에선 그렇습니다. 식약처에서도 철저한 조사를 통해 비도축육이 위생과 보건 면에서 아무 이상이 없다고 인증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최근 축산업계는 인조고기 확산 방지를 위한 범국민협의체까지 결성하여 조직적인 반대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축산업계의 고충은 충분히 공감하고 있습니다. 제가 축산업에 종사했더라도 마찬가지의 반응을 보였을 겁니다.”
“그럼 축산업계와의 갈등은 어떻게 해결할 생각이십니까.”
“저는 비도축육 업계와 축산업계가 마주앉아 대화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화 없이 해결책이 도출될 순 없습니다.”
기자는 고개를 끄덕여 공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