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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00화 (400/556)

난 할 수 있어 400화

대찬은 친절하게 헤드라인을 뽑아주었다.

“시마는 사업하면 안 되는 사람” 한국 기업인의 폭탄발언.

헤비급끼리 제대로 붙는 것도 눈요기가 되지만, 플라이급이 헤비급 앞에서 살살 까부는 것도 제법 재미가 있다.

기자들은 속으로 흐흐 웃어댔다.

“어떤 점에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자본에는 국경이 없습니다. 국적이니 핏줄이니 운운하는 건 뭐랄까, 헛웃음만 나옵니다.”

“그러나 시마 회장의 의견도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곱씹어볼 만하지 않을까요?”

“글쎄요. 고작 백억 원에 벌벌 떠는 시마 회장만큼 일본 사람들이 배포가 없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하…….”

“시마 회장은 남의 사업에, 아, 제가 일본어는 못하는데 이 단어는 잘 압니다. 남의 사업에 겐세이 놓지 마시고 자기 사업이나 잘 돌보십시오.”

기자들은 잔잔한 웃음을 머금었다.

“지금 하신 말씀, 기사에 그대로 올려도 되겠습니까?”

“악의적으로 편집하거나 윤색만 안 하신다면야.”

“물론입니다. 약속드리죠.”

대찬은 웃으면서 기자들에게 말했다.

“11월에 도쿄에서 열리는 닛케이 세계경영자 포럼에 참석할 예정입니다. 체급 낮은 제가 연사로 나서지는 못하고, 훌륭한 분들의 고견을 청해 들으려고요. 듣자 하니 시마 회장님께서 그 포럼에서 연사로 나선다고 들었는데.”

그러자 닛케이 신문 소속의 기자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맞습니다.”

“제가 전해 듣기로는 강연 제목이 뭐였더라, 지구의 지속가능한 생태, 그 비슷한 걸로 시작했는데.”

“지구의 지속가능한 생태를 위한 새로운 산업의 제안이요.”

“예, 그거요. 아마 거기서 배양육에 관한 언급이 있을 걸로 예상됩니다. 그러니 쵸 회장을 건드리면서 예열을 해놨겠죠?”

기자들은 가볍게 웃기만 했다.

대찬의 예상에 공감한다는 뜻이었다.

“시마 회장님의 강연은 꼭 청해 들을 생각입니다. 많이 배우고 오겠습니다.”

대찬이 그렇게 말하고 로튼 프룻츠 사무실로 들어가려고 하자, 기자 하나가 여전히 아쉬웠는지 대찬을 향해 외쳤다.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시마 회장님의 강연이 부디 유익하기를 바랍니다. 아주 기대가 큽니다.”

대찬은 더 말하지 않고 웃으면서 사무실 안으로 쑥 들어갔다.

2016년 11월.

대찬은 도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수행원이 제법 되었다.

진위생은 물론이고, 허운까지 따라붙었다.

로튼 프룻츠와 필래 비바체의 직원들이 동수를 이뤄 대찬의 좌우에 포진했다.

대찬은 제18회 닛케이 세계경영자포럼에 로튼 프룻츠의 대표자이자 필래 비바체의 대표자로 참석했다.

그 직함의 무게가 제법 무거웠는데, 그렇다고 해서 거물급과 서슴없이 말을 섞을 정도는 아니었다.

포럼에 연사로 참석하는 경영자들은 그 위세가 굉장했다.

일본에서 손꼽히는 코테츠 역시 그 무리에서는 그다지 빛을 발하지 못할 정도였다.

한국의 기업으로는 삼라, 대연 정도나 돼야 어깨 쫙, 가슴 쫙 펼 수 있었다.

그러나 대찬이 받는 관심은 그들을 훌쩍 뛰어넘었다.

쵸 후쿠히로를 도발하기 위해 원색적인 비난을 했던 시마를, 대뜸 한국의 젊은 기업인이 들이박았다.

시마 회장은 사업하면 안 되는 사람.

헛웃음만 나왔다.

백억 원에 벌벌 떠는 시마 회장.

남의 사업에 ‘겐세이’ 놓지 말고 자기 사업이나 잘 하시라.

거침없는 발언은 일본 내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반응이야 제각각이었다.

쵸 후쿠히로에게 우호적인 축에서는 괜히 쵸 회장을 건드리려다가 뒤통수를 세게 맞았다며 고소해 했다.

반면 시마 켄시에게 우호적인 축에서는 미친 반도의 애송이가 감히 우리의 산업역군을 욕보였다며 분개했다.

뜬금없이 불의의 일격을 당한 시마 켄시 회장은 카메라의 앞에서 붉어지는 얼굴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는 심한 말을 막 쏟아내려다가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 분노를 억누르고 짧은 반응을 내놓았다.

“못 배운 한국 사람을 포럼에서 많이 가르쳐주겠습니다.”

짧은 반응이었지만 불쾌감을 분명히 표시한 것이었다.

웬만하면 그냥 웃어넘겼을 것이다.

그런데 대찬의 맹랑한 공격이 시마 켄시 회장에게 유효타가 된 모양이었다.

시마 회장은 불씨를 그대로 살린 채로 사람들의 이목을 포럼으로 이끌었다.

그런 시마 회장의 본의 아닌 도움 덕분에 대찬은 일본 기자들에게 삼중사중으로 둘러싸였다.

기대 이상의 반응에 대찬도 속으로는 당혹스러웠다.

대찬은 삽시간에 포위되어 옴짝달싹 못할 지경까지 되었다.

성질이 뻗친 진위생이 그들을 거칠게 밀어내려고 했지만 대찬이 점잖게 제지했다.

대찬이 기자들을 상대할 제스처를 취하자 질문들이 쏟아졌다.

“오늘 시마 회장님이 연사로 나오시는데요, 그 섹션을 들을 계획이십니까.”

“물론입니다. 그거 들으려고 여기 왔습니다.”

“혹시 섹션에서 공개발언 기회가 주어지면 발언하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대찬은 난감한 듯 웃었다.

“섹션 주인공은 시마 회장님입니다. 제가 어떻게 끼어들겠습니까.”

“그래도 만일 기회가 주어진다면 말입니다.”

“시마 회장님이 저한테 발언권을 허락하실 리가 없죠. 배포가 아주 넓으시면 모를까. 주변에 사람들이 많네요. 여기 옹기종기 모여 있으면 민폡니다.”

대찬이 민폐를 언급하자 일본 기자들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저는 이만 공부하러 가겠습니다.”

대찬은 좌우를 거느리고 시마 회장의 섹션을 들으러 걸음을 옮겼다.

준비된 장소에는 인파가 꽉꽉 들어차 있었다.

다른 섹션과 확연히 비교되었다.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들이 좌우 구석에 서 있기도 했다.

대찬은 거기서 아는 얼굴을 만났다.

그다지 반가운 얼굴은 아니었다.

그린블러드의 투자담당으로 있는 잭 머피였다.

잭 머피 역시 대찬을 보고 일어나 악수를 건넸다.

“여기서 뵙는군요, 미스터 초. 만나서 반갑습니다.”

“예, 반갑네요.”

잭 머피는 대찬의 손을 쥐고 딱 두 번만 흔들고 말했다.

“참, 좋은 시대예요, 그렇죠?”

“무슨 말씀이신지.”

“그쪽처럼 요란한 쇼맨이 득세하는 시대 아닙니까. 스마트폰의 등장, 인터넷의 발달. 별 콘텐츠가 없어도 세 치 혀를 나불거리고 화려한 쇼맨십으로 이목을 끌 수 있는 시대잖아요.”

대찬은 잭 머피의 턱살을 흘끗 보고 말했다.

“하긴 좋은 시대죠. 옛날 같으면 비만 합병증으로 벌써 무덤 파고 들어갔어야 하실 분이 여태 잘 살고 계시니.”

“이봐요!”

“죄송하지만 당신 같은 잔챙이를 상대할 시간 없습니다.”

대찬은 잭 머피의 항변을 일축하고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썰면 3인분은 나올 것 같은 잭 머피의 턱살이 부들부들 떨렸다.

대찬은 시마 회장이 자신의 출입을 제한하지는 않을까 일말의 걱정이 있었다.

자기가 그런 잔챙이를 일일이 상대하기 싫다며 막아서면 대찬이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물론 그건 그것대로 얘깃거리가 됐겠지만 대찬이 원하는 정도의 폭발력은 없을 것이었다.

다행히 시마 회장 측은 대찬의 출입을 막지 않았다.

거대기업의 총수가 일개 중소기업 사장이 무서워 도망을 친다는 후문을 남기기 싫었다.

그리고 저렇게 대찬이 까불어주는 게 그의 입장에서도 마냥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대찬이 입장하자 주변의 사람들은 그를 공공연히 의식했다.

대찬은 얼결에 자신을 향해 고갯짓으로 인사하는 사람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답례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시간이 되자 시마 켄시 회장이 등장했다.

그는 무대 위로 올라오면서 저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대찬 쪽을 흘긋 바라봤다.

대찬은 성실하게 시마 회장의 스피치를 경청했다.

미사여구의 말잔치일 뿐이었다.

알맹이는 별로였다.

그렇다고 태도가 불량하면 분명히 트집이 잡힐 것이다.

대찬은 빛나는 눈과 바른 자세를 유지했다.

지구의 지속가능한 생태를 위한 새로운 산업의 제안.

제목만큼이나 시마 회장의 스피치는 지루했다.

대찬은 오랜만에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집중력을 유지했던 고등학생 시절을 떠올렸다.

스피치를 마치고, 시마 회장은 진행자로 나선 하버드대의 교수라는 작자와 대담을 나눴다.

하버드대 교수라고 듣는 귀가 없지는 않았다.

그는 은근히 대찬을 의식하는 눈치였다.

그를 의식하여 애써 스피치의 주제였던 배양육을 직접 거론하지 않고 변죽만 울렸다.

괜히 배양육을 거론하면 대찬과 연관이 되고, 그럼 수십 조를 주무르는 회장님의 심기를 거스를 염려가 있었다.

시마 회장은 그의 유난스러운 챙겨주기가 도리어 불편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발 행동에 하버드대 교수는 놀란 눈을 껌뻑거렸다.

시마 회장은 좌중을 바라봤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 챈 기자들은, 꾸벅꾸벅 졸던 눈에 총기를 다시 탑재했다.

시마 회장은 영어로 말했다.

“사실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이 기대하는 건 교수님과의 고루한 대담은 아닐 겁니다.”

맞아, 맞아.

좌중은 속으로 호응했다.

시마 회장은 대찬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얼마 전에 작은 트러블이 있었죠. 저더러 사업하면 안 되는 사람이다, 헛웃음이 나온다, 남의 사업 견제하지 말고 자기 사업이나 잘 챙겨라. 이런 낯 뜨거운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는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분은 또 이런 말도 덧붙였습니다. 자본에는 국경이 있다. 그런데 웬걸, 자본에는 국경이 있다는 걸 본인 스스로 증명하고 있군요.”

대찬의 표정은 그대로 평온했다.

시마 회장은 이제 대찬을 직접 지목했다.

“로튼 프룻츠의 CEO 조대찬 씨, 지금 당신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걸 당신도 알겠죠.”

그러자 눈치 빠른 주최 측은 대찬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시마 회장은 한 술 더 떠서 말했다.

“아예 무대 위로 모시죠. 올라오세요, 배포가 있으면.”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

대찬은 공손하게 대답하고 그의 주문대로 했다.

시마 회장은 무대 위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대찬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대찬은 시마 회장과 마주앉았다.

“아, 교수님, 그림 예쁘게 안 나와요. 잠깐 좀 비켜 봐요.”

기자들의 거친 요구에 진행을 하던 하버드대 교수는 엉겁결에 구석으로 내몰렸다.

대찬과 시마 회장이 나란히 앉아 서로를 보는 모습이 기자들의 무수한 플래시 세례에 초 단위로 찍혔다.

대찬은 시마 회장에게 말했다.

“제가 자본에는 국경이 있다는 걸 스스로 증명했다고 말씀하셨는데, 무슨 경위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그렇잖아요. 내가 쵸 회장 비판을 좀 했기로서니 자기랑 한 핏줄이라고 발끈해서 톡톡 튀는 모양새가.”

“한 핏줄이라고 발끈하는 게 아닙니다.”

시마 회장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예, 회장님이 먼저 이치에 닿지 않는 비난을 하셔서 반박차원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저도 이해당사자거든요.”

“그걸 차치하더라도 이렇게 쇼맨십을 부리는 것만 해도 얽히고설킨 일한관계의 부스러기를 이용해먹으려는 조잡한 수작이 아닌지?”

대찬은 웃음을 머금었다.

“한국에는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 나무란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허허.”

“적어도 회장님은 그런 논리로 저를 공격할 수 없는 입장 아니십니까.”

“아, 뭐 그게 나쁘다고 하는 건 아니에요. 그저 자본에는 국경이 없다, 그 오류를 정정해주려고 했을 뿐이지. 오늘 공부하러 왔다면서요.”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류를 정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배워가네요. 회장님의 그 발언이 얽히고설킨 한일관계의 부스러기를 이용해먹으려는 조잡한 수작이었다는 사실이요.”

“젊음이 좋네요. 맹랑하기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시마 회장은 자세를 바꾸며 말했다.

“넥타이를 당신보다 조금 더 오래 매본 입장에서, 조금 더 큰 회사를 경영하는 입장에서 조언 하나 해도 될까요.”

“네.”

“지금처럼 경거망동하지 마세요. 그럼 나와 마주하는 지금 이 순간이 그쪽의 유일한 전성기가 될지도 모릅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저도 주제넘은 조언을 드리자면, 재계의 큰 어른이시라면 큰 어른답게 구실하십시오.”

시마 회장의 눈썹이 꿈틀했다.

“나는 코테츠에 평사원으로 입사한 이후로 어른답지 않았던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어요.”

“예, 괜한 민족감정 자극해서 비즈니스에 이바지하려는 태도가 어른답다고 생각하시면 저도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대찬은 공손한 목소리로 시마 회장의 속을 슬슬 긁었다.

그래도 시마 회장은 그나마 자릿값을 하는 인물이라 으하하 호탕하게 웃을 뿐, 뒤집히는 속을 훤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이런저런 말은 됐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번에 그린블러드 사와 손을 잡게 됐으니 조 대표의 소식은 내가 챙겨보게 됐습니다. 이런저런 말놀음은 집어치우고 실적으로 얘기합시다.”

“실적이요.”

“그래요, 실적.”

당신이 코테츠 회장 되고 나서 코테츠 영업이익이 땅을 파고 내핵으로 파고들고 있잖아요.

대찬은 그렇게 쏘아붙이려다가 꿀꺽 속으로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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