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99화
타협의 여지가 없는 걸 확인한 대찬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습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다음에 또 뵐 일이 있을 겁니다.”
“그럴까요.”
대찬은 그의 비아냥거림을 뒤로 하고 자리를 떴다.
밖으로 나가자 대찬의 비서 격인 진위생이 그에게 물었다.
“어째 자리가 빨리 끝났습니다?”
대찬은 대답하지 않고 만남의 장소에서 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진위생은 그의 걸음을 따라잡으며 조심스레 그의 안색을 살폈다.
대찬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수치심과 분노가 범벅되어 있었다.
“…….”
진위생은 몇 마디 위로의 말을 덧붙이려다가 관두고 가만히 그의 뒤를 쫓기만 했다.
자조금 차장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그들은 대찬을 떠나보낸 후, 자기들끼리 만남을 지속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자기들의 보스가 결정한 사항을 정식으로 확인했다.
각 자조금위원회는 단일한 조직을 결성했다.
인조고기 확산방지를 위한 범국민 협의체.
줄여서 인확협.
이름을 거창하게 내걸었다고 해서 별도의 거대한 조직을 만들어낸 건 아니었다.
그걸 전담하는 직원도 따로 없었고, 조직의 사무실도 없었다.
그러나 축산업계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은다는 것만으로도 조직의 가치는 충분했다.
대찬은 축산업계 소식을 다룬 신문에서 그 소식을 접하고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인확협은 공동성명을 통해 로튼 프룻츠를 원색적으로 비판했다.
한 자 한 자 분노로 꾹꾹 눌렀었을 공동성명문에는 절대로 비도축육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강고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역시 바둑알 몇 개 따놓지 않고서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겠어.”
대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인확협의 등장에 로튼 프룻츠 직원들의 사기는 뚝 떨어졌다.
태권도 겨루기를 할 때 한 판 잘 겨뤄보자고 인사를 건넸는데 그것마저 거절당한 기분이었다.
그들은 공정한 겨루기가 아니라 너 죽고 나 살자는 진흙탕 개싸움을 원하고 있었다.
말 한 마디 붙여볼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 그들을 공략하기란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대찬도 하루가 멀다 하고 민승기와 마주앉아 대책을 의논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 투자는 계속 유치되었다.
로튼 프룻츠의 곳간은 넉넉하게 유지되었다.
대찬은 본사의 살림은 알뜰하게 꾸려가면서 중림대 연구실에는 사치를 당부했다.
백만 원짜리 편한 사무용 의자를 권하는 재무팀의 권고를 고사했다.
십만 원짜리를 택했다.
그 대신 구십만 원을 중림대로 보내라고 했다.
필래 측에서는 오십억 원을 추가로 로튼 프룻츠에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대찬은 받아들였다.
필래의 투자 용의를 받아들이는 건, 로튼 프룻츠에 대한 필래의 발언권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대찬은 이번 일을 계기로 필래 비바체의 실권을 어느 정도 쥐게 되었다.
그러니 필래에게도 로튼 프룻츠의 대주주로서의 권한을 어느 정도 허락할 필요가 있었다.
그건 우호적인 관계유지를 위해 암묵적으로 통하는 감정이었다.
필래가 추가 투자를 결정하자, 쵸 후쿠히로 회장의 아태지역 투자담당 측에서도 추가 투자를 해오겠다고 제의했다.
대찬은 쵸 후쿠히로 측에서도 30억 원을 추가로 받아들였다.
쵸 후쿠히로는 대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국 속담에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하는데. 이거 괜히 필래랑 우리랑 군비경쟁에 들어간 기분이구만. 로튼 프룻츠 새우 등이 터져 나가겠어. 경영권 지킬 수 있을지 조마조마하지요?”
“죄송하지만 로튼 프룻츠에는 고래가 한 마리밖에 안삽니다.”
“나인가?”
“아뇨, 접니다.”
쵸 후쿠히로는 유쾌하게 웃었다.
“좋아, 좋아. 그래도 조 대표가 영리하긴 해. 아마 커피와 포도주를 취급하지 않았다면 지금 경영권이 더 위태로웠을 거야.”
“하하.”
“든든하게 쥐고 있는 돈줄이 있으니까 우리랑 필래가 쏟아붓는 현금 공세를 너끈히 버텨내잖나.”
“운이 좋았습니다. 현명한 동업자를 만난 덕분이죠.”
“중요한 건 커피와 포도주가 아니라 그것들을 어떻게 팔아내는가 하는 수완이지. 운이 좋기로 따지면 조 대표의 동업자가 운이 좋지.”
“하하,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괜한 사탕발림이 아니에요. 조 대표 수완이 그 정도도 안 된다면 내가 이렇게 조 대표랑 통화할 일도 없으니.”
“예, 회장님의 판단이 옳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 중입니다.”
“음,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렇다고 설익은 결과물을 섣불리 세상에 내놓진 마세요. 멍청한 일이니까.”
“잘 알고 있습니다.”
“비도축육을 법적으로 식량 취급을 받게 하도록 노력 중이라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예, 애 좀 먹고 있습니다.”
“차라리 미국 상하원이라면 내가 힘 좀 쓰겠는데 한국 국회하고는 영 인연이 없어서.”
“이 이상 어떻게 회장님께 빚을 지겠습니다. 제가 잘 돌파해보겠습니다.”
“이번 난관을 잘 넘기면 조 대표는 한 차원 발전된 기업인으로 다시 태어날 겁니다. 행운을 빌어요.”
쵸 후쿠히로 회장이 전화를 끊자, 미소로 일관되던 대찬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대찬은 전화기를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이거, 웃으면서 은근히 압박 넣는 거 맞지?”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찬은 실마리를 발견했다.
대찬은 로튼 프룻츠 사무실에 출근하면, 항상 진위생이 챙겨놓은 신문을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신문의 종류는 대여섯 가지가 되었다.
개중에는 극동일보까지 끼어 있었다.
꼴도 보기 싫은 신문이지만 대찬은 시금치 쓰다고 안 먹는 편식할 나이는 까마득하게 지난 상태였다.
대찬은 한 경제지를 보다가 국제란에 실린 기사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시마 회장, “장복광, 국적보다 핏줄 우선해…지금이 한국에 투자할 때인가?”
대찬은 그걸 보고 곁에 있던 진위생을 바라보며 물었다.
“시마 회장이 누구였지?”
“코테츠 회장 아닙니까. 신문에 나와 있는데 굳이 물어보시는 건 비서 자격이 되나 테스트하시는 검까?”
“잘 아네.”
대찬은 빙긋 웃었다.
코테츠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재벌이었다.
그리고 그 코테츠의 회장이 시마, 시마 켄시(島憲史).
그는 평사원으로 입사해 환갑도 되지 않아 코테츠의 회장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한국에도 제법 지명도가 있는 인물이었다.
대찬의 승진 속도도 가공할 만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내에서는 부장, 사외에서는 사외이사로 승진의 커리어는 끝났다.
그러니 대찬과 시마 회장 중에 누가 더 출세에 도가 텄는지 견주기는 어렵게 되었다.
대찬은 다리를 꼬며 신문지상에 등장한 시마 켄시 회장의 얼굴을 톡톡 건드렸다.
그러면서 지면에 실린 그의 인터뷰를 발음했다.
“쵸 후쿠히로 회장, 아니 요즘의 행보를 보면 장복광 회장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초장부터 세게 나가는데요.”
진위생은 대찬의 말을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대찬은 계속 읽어나갔다.
“그는 한국의 스타트업에 1차로 7억 엔, 2차로 3억 엔, 도합 10억 엔을 투자했다. 그의 안목은 정확해서, 그 스타트업은 업계의 다크호스로 떠오르고 있다. 중요한 건 그 업계가 블루오션인 동시에 미래의 산업을 견인할 약속의 땅이라는 것이다. 바로 배양육이다.”
“잠깐, 그 스타트업이 설마 우리를 말하는 검까?”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쵸 회장이 투자한 한국 회사는 클로빌하고 우리뿐이야. 클로빌에서는 슬슬 발 빼고 있고, 친절하게 시마 회장이 도합 10억 엔이라고 콕 집어 말해주잖아. 거기에 배양육이라고까지 언급해줬어.”
“그럼 그런 걸물이 신경 써줄 정도로 우리 회사가 컸다는 거 아니겠슴까?”
대찬은 피식 웃으면서 계속 읽었다.
“내가 이끄는 코테츠는 미국의 그린블러드 사와 합작하여, 일본의 자랑인 와규를 실험실에서 대량으로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게다가 참다랑어 역시 연구대상이다.”
“와규와 참다랑어. 참 일본다운 연구대상이네요.”
“나는 일본인들을 위해 기꺼이 자본을 투자할 것이다. 그런데 쵸 후쿠히로 회장은 도대체 왜 하필 한국의 기업에 투자하는가? 이웃나라는 언제나 잠재적 적국이라는 걸 모르는 걸까, 아니면 그에게 있어 이웃나라는 한국이 아니라 일본인 걸까.”
“재벌회장의 인터뷰치고는 굉장히 감정적인데요?”
대찬 역시 진위생의 진단에 공감했다.
“다분히 의도된 것이겠지.”
“저렇게 쵸 회장을 건드려서 얻을 게 뭐가 있다고…….”
“원래 시마 켄시 회장과 쵸 후쿠히로 회장은 상극이기는 해.”
“그래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성분이 완전히 다르거든. 일본 극우의 본산, 야마구치 출신인 시마. 조센징 소리를 듣고 자랐던 쵸.”
“아하.”
“평사원으로 시작해서 착착 회장 자리까지 오른 시마, 천재적인 감각으로 자기 전 재산을 배팅해서 단숨에 재산을 불린 쵸.”
“그렇군요.”
“둘이 거느린 회사의 체급도 엇비슷하고. 그런데 시마 회장 취임 이후로 코테츠가 상당히 어려워졌거든.”
진위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알아요. 대표님 비서 노릇 하려면 저도 그 정도 경제상식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니까요.”
대찬은 흐뭇하게 웃었다.
“이건 다분히 어림짐작이지만 시마 회장이 쵸 회장에 대한 열등감 아닌 열등감이 더 깊어져서 그런 게 아닐지.”
“그 정도 사람이 고작 그런 개인적인 감정에 휘둘린단 말이에요?”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시마 회장은 지금 홍보를 하고 있는 거야. 조센징이 자기 고국의 기업에 투자를 하면서 일본의 등에 칼을 꽂으려고 한다.”
“일본에 칼을 꽂기엔 백억은 너무 터무니없이 적은 돈이지 않아요?”
“액수의 많고 적음은 관계없지. 그저 일본사람들의 분노만 일으키면 되는 문제니까.”
“으음.”
“쵸 회장을 공격하는 동시에, 그린블러드와 합자해서 세운 자기 회사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거지.”
“그래도 제법 효과가 있긴 하겠네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순전히 마케팅 측면으로만 보면, 뭐 그렇지.”
“안 그래도 코테츠 실적이 안 좋다고 하니까, 저렇게 총수가 전면에 나서서 애국심 마케팅을 할 정도면 그 사람도 이 사업에 관심을 보이고 있나 보네요.”
“코테츠 키친. 그린블러드와 합자해서 세웠다는 회사가 코테츠 키친이야.”
“코테츠 키친. 단순한 이름이네요.”
“나도 그쪽 소식은 들었어. 코테츠가 돈을 대고 그린블러드가 기술연구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다던데.”
“재밌는 기사네요. 쵸 회장 쪽에서 어떻게 반응할지.”
“반응 안 할 거야. 굳이 판을 키울 이유가 없거든.”
진위생은 아쉬운 듯 쩝, 입맛을 다셨다.
“그럼 이대로 사그라지겠네요. 시마 회장 쪽만 마케팅 효과를 누리고.”
“가만히 놔두면 그러겠지.”
“가만히 안 놔둘 수가 있나요? 쵸 회장 아니고 누가 저 판에 끼어들겠어요.”
대찬은 진위생을 흘끔 보고 소심하게 대답했다.
“나.”
“네?”
“이거, 놓치기 힘든 기회라서 말이지.”
“도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대찬은 웃음만 흘렸다.
쵸 후쿠히로 회장은 시마 켄시 회장의 도발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대찬의 예상대로였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혈액의 절반이 일본이 아니라 한국의 것.
그 점은 그의 아킬레스건 아닌 아킬레스건이었다.
일본의 주요 언론들은 헤비급 매치가 성사될 걸 기대하고 열심히 부채질을 해봤지만 쵸 후쿠히로의 회장의 묵묵부답으로 김이 빠져버렸다.
쵸 후쿠히로 회장에게 있어 이번 일은 귀찮은 구설수에 불과했다.
시마 켄시 회장에게도 그저 맘 놓고 시원하게 질러본 제 딴의 소신발언일 뿐이었다.
하지만 대찬에게 이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그렇게 바라던, 대찬의 앞을 가로막은 장벽을 대번에 타고 넘을 바람이었다.
쵸 후쿠히로 회장이 언론 접촉을 꺼리자, 언론은 이제 시마 켄시 회장이 언급했던 ‘한국의 한 스타트업 기업’ 쪽으로 몰려갔다.
그쪽에 마이크를 들이대면 쵸 회장만큼은 아니더라도 재미를 좀 보지 않을까 하는 의미였다.
로튼 프룻츠, 그 이전에 대찬과 관련된 일이라면 맨 먼저 발 벗고 나서서 열의를 보이던 극동일보였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번 일에는 일절 관심을 끊었다.
그 말인즉슨, 지금의 조명이 대찬에게 이득이 된다는 뜻이었다.
대찬의 출근길에 부지런한 일본 기자들 몇몇이 모습을 드러냈다.
“혹시 코테츠 시마 회장의 인터뷰 보셨습니까?”
“예, 봤습니다.”
“직접적으로 로튼 프룻츠의 이름이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대찬은 웃으면서 기자의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희 얘기겠죠.”
“소감이라고 하면 부적절하겠지만, 어떠셨습니까?”
대찬은 아예 자리를 잡고 서서 적극적으로 인터뷰에 대응했다.
“시마 회장님은 사업하면 안 될 분이라고 생각이 들던데요.”
그 말에 기자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