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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398화 (398/556)

난 할 수 있어 398화

최재한이 마음만 먹으면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다니, 새삼 언론의 힘이 무섭긴 하다고 여겼다.

“이왕 기사를 써줄 거면 좀 잘 써줘 봐. 내가 잘 돼야 너도 잘 되고 그런 거 아니야?”

“그거 아주 위험한 발언인데? 경언유착이야, 그거.”

“경언유착은 무슨. 서원웅 정도나 되면 모를까 나는 일개 사외이사로소이다.”

“시총 5조를 바라보는 대기업 계열사를 혼자서 주무르는 존재가 되셨는데, 그건 좀 과한 겸손인데.”

“어차피 서씨가 예뻐해 주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와르르 무너질 거야. 그렇게 치면 허수아비지.”

최재한은 피식 웃었다.

“그래도 너도 알박기 제대로 들어갔잖아.”

“알박기라니.”

“조직 완벽하게 장악했고, 인망 두텁고, 우리사주조합 빵빵하게 커서 대주주 노릇도 할 수 있고, 거기에 노조는 완벽히 네 편이고. 서씨가 작정하면 못 털어낼 건 없지만 그래도 내상 적잖게 입을 걸?”

맞는 말이지만 대찬은 그 말에 맞다고 할 수 없었다.

굳이 입 밖으로 내서 좋을 게 없는 말이었다.

맞는 말을 틀리다고 하는 것도 웃겨서 대찬은 화제를 전환했다.

“기사를 써줄 거면 비바체 말고 로튼 프룻츠 쪽을 좀 써줘.”

“MFG로 난리 칠 때 잔뜩 써줬잖아? 양심이 있어라.”

“그래도 다다익선. 비도축육 법제화가 지금 우리 최우선 화두야. 여기에 전 직원이 매달려있다고. 언론에서 푸쉬를 좀 해줘야 해.”

“글쎄. 그러고 싶어도 기삿거리가 있어야지. 뭐라도 소스를 좀 풀어봐. 정 뭐 내세울 게 없으면 윤이영 씨 SNS라도 한 번 더 써먹든지.”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영이는 포도주 때 한 번 써먹었으면 됐어. 한 번 더 해달라고 하면 길길이 날뛸 걸. 그게 잘하는 짓도 아니고.”

“그것도 아니면 나더러 소설을 쓰라는 거야, 뭐야. 건수를 주세요, 건수를. 그럼 써달라고 안 해도 얼마든지 써줄 테니.”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최재한의 말에 수긍했다.

“그래, 건수가 있긴 해야지, 건수가…….”

필래 비바체에서의 소요를 잠재운 대찬은 이제 다시 로튼 프룻츠의 일에 집중했다.

이사회는 당분간 대찬의 부재에도 잘 돌아갈 것이다.

옥문영 전무가 실권을 쥐었으니 그녀가 대찬의 의지를 대변해줄 것이다.

홍웅표는 대찬이 배양육, 비도축육의 법제화를 위한 작업 때문에 비바체의 일에 소홀할 수밖에 없다고 예측했었다.

틀린 예측이 아니었다.

대찬은 이 일 때문에 머리가 깨질 지경이었다.

다만 홍웅표의 일에 손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니 부족한 시간도 쪼개고 쪼개 썼을 뿐이었다.

배양육의 법제화는 로튼 프룻츠의 사활이 걸릴 일이었다.

대찬은 끊임없이 이 법제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과 연쇄적인 만남을 가졌다.

밥을 사고 술을 샀다.

공공연히 밥과 술을 넘는 접대를 바라는 축들이 있었지만, 대찬은 좋은 말로 달래 선을 지켰다.

박 이사는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은근히 그들이 해달라는 대로 해주라고 진언했다.

그러나 대찬은 완강히 거부했다.

선을 넘는 접대는 훗날 족쇄로 작용할 수도 있는 까닭이었다.

대찬은 그렇게 계속 물밑에서 간접적인 노력만 기울였다.

배양육의 법제화를 공개적으로 거론하는 순간, 축산업계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대찬은 민승기와 마주앉아 이 일을 의논했다.

“모든 게 완벽해야 해요. 축산업계는 정치권에 발언권이 강력한 집단이에요. 완벽한 상황, 완벽한 타이밍에서 승부를 걸어야 승산이 있어요.”

“그렇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지.”

“우리한테 필요한 건 딱 법률 개정안 하나예요. 축산물 위생관리법 제2조 2항.”

“축산물이란 식육, 포장육, 원유, 식용란, 식용가공품, 유가공품, 알가공품을 의미한다.”

“거기에 딱 세 글자, 배양육만 추가하면 돼요. 이왕이면 비도축육이라고 하면 좋겠지만요.”

민승기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그 세 글자, 기왕이면 네 글자 넣기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만큼 어렵다, 그 말이지.”

“국회 본회의에서 법안이 통과되려면 국회 농축수산위원회부터 공략해야 하는데.”

“그게 난관이지. 그 위원회 소속 의원님들이 죄다 농촌 지역 출신들이니까. 축산업계 대신 우리 손을 들어주는 건 다음 선거에서 떨어지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야.”

대찬은 시름 가득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식약처의 동향도 중요해요. 그쪽에서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또 상황이 달라지니까.”

“산 넘어 산이야. 확실한 바람이 없으면 식약처에서는 아마 미국 FDA의 판단이 나온 이후에 그걸 따라가겠다고 하겠지.”

대찬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미 그린블러드 위시한 실리콘밸리 업체들보다 한 발짝 뒤에서 쫓아갈 수밖에 없어요.”

“…그렇겠지.”

“한바탕 바람이 훅 불어야, 그 바람을 타고 일사천리로 해결이 될 텐데.”

“우리가 그 바람을 만들기에는 힘이 미미해.”

대찬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외로운 싸움이에요. 다윗과 골리앗이에요. 기존 축산업계가 단단히 스크럼을 짜고 앞을 막아서면 지원군도 없는 우리가 이길 도리가 없죠. 같이 으쌰으쌰 하면서 돌파할 동종업계 회사도 없고.”

“왜, 그래도 다윗은 골리앗하고 싸워서 이겼잖아?”

“성경에는 신이 도와줘서 골리앗 마빡에 돌팔매질 명중해서 이긴 거라고 쓰여 있잖아요. 바꿔 말하면, 신이 도와주지 않는 이상 이길 수 없다는 뜻이죠.”

“우리한테 신은 뭘까?”

대찬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딱 하나요. 여론.”

“여론?”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국적인 여론이 일면 업계든 정치권이든 한 큐에 돌파할 거예요. 근데 그게 아니면 어렵죠.”

“근데 배양육이 그런 여론을 일으키기에는 좀 마이너한 토픽이잖아?”

“그러니 지금 선배랑 제가 마주앉아서 끙끙 앓는 소리만 내고 있는 거 아니겠어요.”

“난감하네.”

민승기는 훅 한숨을 뿜었다.

“마냥 기회가 오기만을 바라고 있을 순 없어요.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기회를. 우리가 만들어야 해요.”

“어떻게 만들면 좋겠습니까? 조대찬 대표님?”

대찬은 손을 비비며 쩝, 입맛을 다셨다.

“그건 차차 고민해봐야죠.”

“간편한 답변이구만.”

“별 수 없잖아요.”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논리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나름의 논리로 무장한 홍웅표를 대찬이 실력으로 뭉개버렸듯, 대찬이 아무리 완벽한 논리를 구성해봤자 축산업계의 거대한 아성이 훅 입김을 불면 그대로 날아가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냉혹한 현실이었다.

민승기는 대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이걸 축산업계하고의 정면대결로만 인식하는 건 곤란해.”

“예, 결국 살 부대끼고 같이 살아야 하니까요. 우리가 잘된다고 전통적인 축산업이 붕괴하는 것도 아니고, 상생할 방안을 찾긴 해야겠는데. 어쩔 수 없잖아요. 고기 먹는 입은 한정적이라.”

“우리가 잔뜩 칼을 갈고 찌르려고 들면 그쪽에서도 필사적으로 나올 거야.”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치열한 논쟁이 협상을 거쳐 서로 좋은 합의에 이르러야죠. 그래도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는 우리한테 유리한 지형을 만드는 게 필수예요.”

“그렇긴 하지. 지금은 우리가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니까. 적어도 반반싸움은 만들어야지.”

“고려시대 서희도 세 치 혀로 강동6주를 따왔다지만, 그것도 결국 초반 여러 전투에서 이기면서 바둑알 몇 점을 따온 덕분이니까요.”

민승기는 대찬의 말에 수긍했다.

“바람이 불어야지.”

“바람이 불어야죠.”

대찬은 비도축육 법제화의 본편으로 들어가기 전, 축산업계와의 좋은 관계를 구축하고자 했다.

홍웅표를 축출할 적에 축산업계 관계자들과의 협약이 좋은 실마리가 되어주었다.

서원웅이 그들에게 대찬의 공로를 열심히 띄워준 덕택에, 대찬은 문전박대를 당하지는 않았다.

한우, 한돈, 양계 등 주요 가축들의 자조금에서 대표자를 보내 대찬과 한 테이블에 앉게 했다.

물론 서원웅과 대찬의 체급만큼 협약식에 나온 대표자와 이 자리에 나온 대표자의 위상도 달랐다.

직급이 차장, 과장 정도에 불과했다.

주요 결정권을 쥔 이들은 아니었고, 다만 각 단체의 입장을 단순히 전달만 하는 메신저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당장은 로튼 프룻츠 측과 실질적인 협상에 나설 의사가 없다는 뜻이었다.

대찬 역시 본격적인 협상보다는 탐색 정도에 의의를 뒀으므로 딱히 유감은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대표인데, 차장과 과장들에게 대화의 주도권을 뺏길 생각은 없었다.

“어려운 자리에 나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얼굴 붉힐 일이 많을 것 같습니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입장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럼에도 치열하게 다투면서도 항상 최소한의 대화의 창구는 남겨두었으면 합니다.”

그러자 한우 자조금 측의 차장이 입술을 씰룩이며 내키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저희로서는 대표님, 그리고 로튼 프룻츠의 존재가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해합니다. 가뜩이나 어려운 경기에 불쑥 나타나 숟가락 하나 더 얹겠다고 하니까.”

“잘 아시는군요. 한국 축산업은 참 무수한 난관에 봉착해왔습니다. 언제는 값싼 수입육과 싸우게 하더니, 이제는 가짜 인조고기하고 싸우게 되는군요.”

“가짜는 아닙니다. 다만 죽이지 않고 얻은 고기일 뿐이죠.”

“죽이지 않고 얻은 고기라, 소위 비도축육이라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국어사전에도 없고 법전에도 없는, 오로지 조 대표님 사전에만 있는 그 단어요.”

“어쩔 수 없습니다. 저희가 처음 시작하는 사업이니 나름의 적절한 이름을 찾아 명명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조금 차장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 비도축육이라는 단어부터가 불손하다는 겁니다.”

“불손하다?”

대찬의 어색하게 올린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

처음 정식으로 얼굴을 맞대는 자리에서 자조금 차장의 태도야말로 불손했다.

아예 싸움을 작정하고 나왔는지, 자조금 차장의 말투는 유독 맵게 튀었다.

“당연히 불손하죠. 그쪽이 비도축육이면 이쪽은 도축육이라는 거 아닙니까? 윤리적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런 억지스러운 낱말을 창조해낸 거 아닙니까.”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상황이 첨예하게 흐르니 대찬의 목소리도 첨예해졌다.

“아까 적절한 예시를 드렸잖습니까. 가짜, 인조고기.”

“그건 난감한 제안인데요.”

“왜요? 가짜도 맞고 인조도 맞잖아요?”

“차장님.”

“아, 고기가 아니라서 난감하시다는 건지. 그럼 가짜 인조가축세포 정도로 해둘까요?”

“차장님.”

“그쪽과 이쪽의 입장 차이가 이 정도입니다. 대표님께서 이 자리를 왜 주선했는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무의미하거든요.”

“이 정도로 벌어진 차이를 조금이라도 좁혀보려고 주선한 것 아닙니까. 서로의 입장을 알고, 이해하고, 해결책을 도출하고.”

“안 좁혀집니다. 해결책이요? 로튼 프룻츠가 폐업하고 지금처럼 가축을 기르고, 잡고, 가공해서 유통하는 방식을 쭉 유지하면 됩니다. 자연의 섭리를 따라서 말이죠. 그럼 해결돼요.”

“자연의 섭리라.”

자조금 차장의 목소리에는 잔뜩 날이 서있었다.

그건 그의 전투적인 기질도 한몫했겠지만, 그 배후에는 축산업계의 잔뜩 뿔 난 인심이 있을 것이다.

하고 많은 직원들 중에 일부러 덩치 좋고 말투 사나운 저 치가 보내진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다른 자조금의 직원들도 저 차장의 발언을 제지하거나 좋은 말로 타이르지 않았다.

암묵적으로 동조한다는 뜻.

지금이야 로튼 프룻츠의 기술개발이 쇠고기에 집중되어 있다지만, 원천기술만 완벽하게 갖춰지면 그게 돼지나 닭으로 번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어디 돼지, 닭뿐인가.

판다 고기, 방울뱀 고기, 아르마딜로 고기도 마음만 먹으면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더 진척이 되면 매머드 고기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

대찬은 얕은 한숨을 쉬었다.

갈 길이 멀었다.

예상은 했지만 면전에서 체감하니 느낌이 또 달랐다.

“알겠습니다. 업계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존중합니다. 다만, 대화를 위한 노력을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진득한 대화만이 상생의 방법을 도출해낼 수 있으니까요.”

“고루한 탁상공론만 이어나갈 거면 대화는 시간낭비일 뿐입니다.”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탁상공론은 바라지 않습니다. 실제적인 대책을 마련해야죠. 그래서 저는 이 자리에서 업계와 저희 회사 사이의 지속적인 교류를 위한 단체를 만들었으면 합니다. 사무실도 필요 없습니다. 간판만 걸어놔도 좋습니다.”

“대표님, 로튼 프룻츠가 지금 대한민국 축산업 전체를 상대로 단독 교섭할 수 있을 만큼 컸다고 보십니까?”

“…차장님.”

“로튼 프룻츠, 일개 중소기업일 뿐이에요. 솔직히 조금 불쾌합니다. 체급이 안 맞잖습니까.”

“규모의 차이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저희의 존재가 업계의 화두인 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예.”

“그 화두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단체를 만들자는 게 영 글러먹은 제안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단체, 만들 겁니다. 근데 로튼 프룻츠는 그 구성원이 되기에는 자격미달이에요.”

“…….”

“사실 오늘 업계의 여러 대표자들도 대표님 뵈러 나온 건 아닙니다. 이 자리 얼른 끝내고, 우리끼리 만날 겁니다.”

“여러분끼리요.”

“예, 만나서 로튼 프룻츠의 교란행위에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단체를 결성할 거고요, 그 단체를 통해 우리는 한목소리를 낼 겁니다.”

“그럼 이 자리에서는 더 나눌 말씀이 없다는 뜻이신가요.”

“예.”

자조금 차장의 말은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당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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