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97화
“자기를 반면교사로 삼겠다는 말씀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봅니다.”
“이사님.”
“홍웅표 전 부문장이 감사팀 조사를 받고 나서 이번이 저를 두 번째 찾아오시는 거죠?”
“…예.”
“처음 찾아오셨을 땐 긴가민가, 간을 보시더니 이번에는 아예 초장부터 다 내려놓으시는군요.”
김풍호 대표는 쓴 침을 삼켰다.
“인간의 속성이 그렇습니다.”
“예, 이해합니다. 다 그렇죠. 저도 그래서요. 처음 찾아오셔서 지금 같은 모습을 보이셨으면 저도 적극 협조했겠지만요.”
“…….”
“상황종료 되고 나서 이러시면, 글쎄요. 큰 감흥은 없죠.”
“모쪼록 발전적인 결론이 나왔으면 합니다.”
“발전적인 결론. 좋습니다. 김풍호 대표님께서 원하시는 건 경영권 보장이시죠.”
“예.”
“하지만 필래 비바체 임직원들은 이 사태를 유발한 대표님의 용퇴를 원할 겁니다.”
김풍호 대표의 표정이 잠깐 무너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임직원들의 반발을 무마해 주십사 이렇게 이사님을 뵈러 온 겁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는 임직원들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는 배후의 흑막이 아닙니다.”
으레 해대는 소리를 김풍호 대표는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임직원들을 설득하려면 대표님께서도 그에 상응하는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셔야 맞지 않겠습니까?”
“변화된 모습이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번 사태에 대해 깨끗하게 사과하고 기존의 경영방침을 유지할 것이라는 명시적인 약속이 있어야겠죠.”
“물론, 물론입니다.”
그 정도면 싸게 막는 거다.
김풍호 대표 역시 그 정도야 당연히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대찬은 그에게 거저로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마트사업부문장을 적절한 인사로 선임할 필요가 있겠죠.”
“…적절한 인사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임직원들은 홍웅표 다음에 누가 마트사업부문장이 될지 주시할 겁니다. 그런데 초록동색으로 김풍호 대표님이 또 다시 자기 사람을 앉히는 우를 범하시는 건 곤란하겠죠.”
“그 말씀은.”
“적절한 인사를 차기 마트사업부문장에 임명해주시는 쪽이 좋을 것 같은데요.”
“염두에 두신 인사가 있는 듯하군요.”
김풍호 대표는 대찬의 표정을 보고 그렇게 직감했다.
대찬의 입가가 더 벌어졌다.
“에두르지 않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예.”
“제 생각에는 옥문영 상무님이 차기 마트사업부문장으로 적임일 것 같습니다만.”
김풍호 대표의 눈빛이 흔들렸다.
“옥 상무요?”
“예, 옥 상무님 비바체 들어오셔서 오래 고생하셨죠. 전무로 올라설 때도 되셨고, 비바체 내에서 인망도 두텁고, 실무를 모르시는 것도 아니고, 축구도 잘하고.”
“하지만 옥문영 상무는 공장 출신입니다.”
“예, 매번 승진할 때마다 그 소릴 들으셨겠죠. 옥 상무님은 그럴 때마다 실력으로 논란을 일축해왔습니다.”
“하지만 마트부문장 자리는 특별합니다.”
대찬은 헛웃음을 지었다.
“대표님, 그럼 누굴 부문장으로 지명하시겠습니까?”
“…….”
“결정은 대표님이 하십시오. 저는 추천해드렸을 뿐이니.”
대찬은 웃음기가 가신 눈으로 김풍호 대표를 가만히 응시했다.
마트사업부문장은 필래 비바체의 핵심 보직이었다.
오래 비워둘 수 없었다.
김풍호 대표는 고심 끝에 차기 마트사업부문장을 임명했다.
임명식에 대찬은 기어코 얼굴을 들이밀었다.
차기 마트사업부문장은 거구에 꽉 끼는 정장을 입고 보무도 당당하게 연단 앞에 섰다.
“옥문영 상무입니다. 아, 이제 전무네요.”
그녀의 발성은 성격만큼 투박했다.
필래 비바체 임직원들은 그 투박한 말투와 성격을 미덥게 느꼈다.
“욕 안 먹게 확실하게 일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좀 고달프게 됐네요. 정신 바짝 차리고 일합시다. 이상.”
간결한 취임사에 임직원들은 박수로 호응했다.
대찬이 비바체를 떠난 지금.
옥문영 전무는 사내에서 가장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임원이었다.
애초에 직원이 임원을 지지하고 말고 하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
그런데 옥문영 전무는 그걸 넘어 군더더기 없는 일처리로 직원들의 자발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었다.
옥문영 전무는 취임식을 마치고 바로 사외이사실로 찾아가 대찬과 독대했다.
그녀의 표정은 결코 밝지 않았다.
“이사님이 저 이 자리 앉힌 거죠.”
“추천은 제가 했습니다.”
옥문영 전무는 입술을 씰룩였다.
“별로 유쾌하진 않네요.”
“이유는 저도 대충은 알겠습니다.”
“제 실력이 아니라 사내정치의 부산물이 된 기분이라서요.”
“사내정치는 거들 뿐, 옥문영 전무님이 그 자리에 합당한 인재라는 점이 본질입니다.”
옥문영 전무는 얕은 한숨을 쉬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조 이사님 장기 말로 구실할 생각이 없습니다.”
“압니다. 전무님이 그 정도의 인간이었다면 저도 부문장 자리에 천거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 저도 결국 김풍호 대표님이랑 다를 게 없어지니까요.”
“…아무튼 저는 맡겨진 소임을 그냥 묵묵히 수행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그러셨던 것처럼요.”
옥문영 전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찬은 웃으면서 악수를 건넸다.
옥문영 전무는 대찬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꽉 붙들었다.
강한 악력이 대찬의 손을 감쌌다.
옥문영 전무가 마트사업부문장에 취임한 이후, 대찬과 동고동락했던 이들 상당수가 벼락출세했다.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옥문영 전무가 자리의 보답으로 대찬의 사람들을 기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옥문영 전무의 인재풀이 대찬의 인재풀과 겹칠 뿐이었다.
그녀는 대찬에게 대찬의 장기 말이 될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런 역할을 당부할 생각이 자신도 없다고 한 대찬의 대답도 가감 없는 진심이었다.
그럼에도 옥문영 전무의 존재 자체만으로 대찬이 힘을 쥘 수 있는 건, 결국 옥문영 전무의 사람들이 대찬의 사람들인 까닭이었다.
한태윤 부장은 마트사업부문에서 온라인 시장을 총괄하는 이커머스 영업부장에 내정했다.
거기에 사외이사실에서 대찬을 보좌하던 유채경, 김산호, 오다혜, 홍은주 역시 마트사업부문의 요직으로 보직이 이동되었다.
사외이사실에 남은 대찬의 사람은 이제 허운 하나뿐이었다.
대찬은 혼자 쓸쓸히 남은 허운을 보고 히죽 웃었다.
“다 넘어가고 하나 남은 볼링핀 같네. 처량해.”
“저 하나도 안 처량합니다. 남의 기분 맘대로 재단하지 마시죠.”
“왜 안 처량해. 유일하게 옥 전무의 지명을 못 받았는데, 응?”
오랜만에 놀릴 거리를 얻은 대찬이 조롱을 쉽사리 멈추려하지 않자, 허운은 강한 어조로 항변했다.
“유일하게 옥 전무님의 지명을 못 받은 게 아니거든요?”
“아니긴, 팩트마저 부정하는 단계에 들어간 거야?”
“유일하게 옥 전무님의 지명을 못 받은 게 아니고요. 유일하게 조 이사님의 지명을 받아 사외이사실에 잔류한 거 아니겠어요?”
“허, 뻔뻔하긴!”
“솔직히 누가 저를 대체할 수 있겠어요? 저 대신 채경이 있으면 나을 거 같아요? 맨날 이사님 들들 볶을 걸요. 제가 집에서 들들 볶이듯이.”
“그거 유 과장한테 이를 거야.”
허운은 대찬의 협박을 가볍게 무시했다.
“아니면 풋내기 김산호를 갖다가 쓰실 거예요? 그놈은 해외출장 때나 귀여운 맛에 데리고 다니는 용도예요.”
“그것도 이를 거야.”
“김산호 껌딱지 오다혜는 말할 것도 없죠. 얼음공주 홍은주랑 종일 같이 붙어있어 보세요. 3도 동상 걸릴 걸요.”
“거론한 사람들이 우리 허 과장보다 못한 게 하나도 없는 거 같은데?”
허운은 꿋꿋이 제 할 말을 이어나갔다.
“한나라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고 노관이라는 사람을 왕에 임명했대요. 그 유명한 한신이나 장량도 그저 공신 반열에 올랐을 뿐 왕위에는 못 올랐는데, 노관이라는 사람은 그 인간들 제치고 왕 자리를 꿰찬 거죠.”
“당신이 무슨 얘기 할지 대충 짐작이 가는데 그건…….”
“노관이 겉보기에는 별 능력이 없는 것 같지만, 유방은 노관을 아주 아꼈대요. 왜냐, 흉금을 터놓는 지기지우였거든. 그것만으로 가치가 있거든.”
“그래서, 댁이 노관이다?”
허운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그 노관이 나중에 유방 뒤통수 치고 패가망신하는 건 알고 하는 소리야, 지금?”
“그건 유방이 한신, 팽월 같은 공신을 숙청하니까 지레 겁을 먹어서 그런 거죠. 그게 노관 탓이에요? 유방 탓이지.”
“요즘 무슨 독서모임 나간다더니 저번 주에 초한지 읽었나보지?”
“쓸데없이 비아냥거리시는 걸 보니 하실 말씀이 궁해졌군요.”
“나가.”
허운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대찬의 앞에서 물러났다.
허운이 나가고 대찬은 쫑알쫑알 떠들어대던 허운을 궁싯거리며 욕했다.
더 분한 건, 허운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 정글 같은 회사에서 유일하게 온정을 느끼고 있는 말 없는 말, 거창한 사업계획부터 자질구레한 신변잡기까지 나눌 수 있는 상대는 허운이 유일했다.
‘그래, 그런 면에서는 독보적인 가치가 있지.’
대찬은 피식 웃었다.
피라미 같던 사원, 대리 시절에야 누구에게나 속을 터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필래 비바체의 실력자가 되었다.
그런 이후로는 쉽사리 그러지 못했다.
내뱉는 말 한 마디가 약이 되거나 독이 되었다.
점심 한 끼를 먹어도 이해득실을 따지는 위치가 되었다.
대찬이 상대를 편하게 대하려 해도, 상대가 편하게 느껴야 비로소 관계가 편해진다.
그러나 대찬을 편하게 여기는 사람은 필래 비바체에서 극히 드물었다.
김산호, 오다혜도 직급의 차이를 따지면 파격적으로 대찬을 편하게 대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긴장과 조심성이 있었다.
대찬이 순수하게 일만 붙들던 그때의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건, 오로지 허운과 함께할 때였다.
옥문영 전무가 마트사업부문장으로 임명된 후, 필래 비바체의 세력 판도는 확실하게 한쪽으로 기울었다.
결과적으로 김풍호 대표가 홍웅표를 선택한 건 최악의 패가 되었다.
홍웅표의 쓰임은 고작 옥문영 전무를 부문장으로 앉히기 위한 희생 제물에 지나지 않았다.
김풍호 대표는 날갯죽지가 꺾인 처량한 날짐승의 꼴이 되고 말았다.
가뜩이나 비좁았던 사내에서의 권위와 입지가 더 줄어들었다.
거기에 옥문영 전무가 마트사업부문을 석권했다.
턱 밑에 칼날이 들이 밀어진 꼴이었다.
대찬은 옥문영 전무를 마트사업부문장에 앉히는 동시에, 이사회의 권한을 대폭 강화했다.
회사의 주요 의결사항은 반드시 이사회에서 검토하도록 했다.
사내이사 3명, 사외이사 4명으로 이뤄진 필래 비바체의 이사회에서 대찬의 입김은 절대적이었다.
으레 비바체의 사내이사는 대표와 마트사업부문장, 경영지원부문장이 역임했다.
옥문영 전무가 마트사업부문장에 내정되고, 그녀는 자신의 후임인 경영지원부문장에 자신이 아끼는 임원을 추천했다.
거기에 사외이사 네 자리 중에 하나는 대찬이 꿰차고 있었고, 나머지 셋은 대세에 따라 몸을 누이는 갈대 같은 양반들이었다.
김풍호 대표는 외로운 섬이었다.
필래 비바체의 임직원은 물론이고, 필래그룹의 요인들, 심지어는 재계의 이런저런 뒷얘기에 관심을 가지는 일반인들까지 필래 비바체의 실질적인 수장을 김풍호 대표가 아니라 대찬으로 인식했다.
승자는 여유로워야 한다.
여유롭지 못하고 패자의 주머니를 탈탈 털어 십 원짜리 하나 남기지 않고 싹 쓸어 가면 궁지에 몰린 쥐에게 물리는 법이었다.
대찬은 김풍호 대표를 선제적으로 억압하지 않았다.
그의 정상적인 경영권을 최대한으로 보장해주었다.
그게 회사를 위해서도 좋았다.
홍웅표가 부문장 자리에 앉고 실시한 체질개선이니 신부구빈이니 하는 떠들썩한 치적용 사업만 벌이지 않는다면, 대찬이 김풍호 대표의 정상적인 경영을 방해할 이유가 없었다.
김풍호 대표는 충분히 유능한 재원이었다.
난세의 영웅이 될 인물은 아니되 치세의 유능한 관리는 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최소한의 눈치는 있는 인물이었다.
자기 나름대로는 충분한 논리를 구축하고 신중하게 접근했다고 자부하던 홍웅표가 날아가는 현장을 똑똑히 목도했다.
그는 홍웅표가 저질렀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는 자기에게 허용된 영역이 어디까지인지 파악했고, 그 제한된 자유를 최대한으로 누리는 것을 자신의 생존전략으로 삼았다.
‘일단 자리라도 지켜야지. 위마트에서도 모가지, 여기서도 모가지면 수치스러워서 자식새끼들 얼굴을 어찌 보나.’
김풍호 대표는 입술을 앙 다물었다.
홍웅표가 처리된 후, 필래 비바체의 내부 분위기는 빠르게 정리정돈 되었다.
힘이 한쪽으로 쏠리니 더 이상의 치열한 분쟁은 벌어지지 않았다.
김풍호-홍웅표 체제에서 다시 기지개를 켜려던 도진석의 끄나풀들은 다시 슬그머니 겨울잠을 자러 가야만 했다.
“재계 유일무이 실세 사외이사, 필래 가족경영 전통 깰까. 제목 어때?”
“죽을래? 서 회장 눈 밖에 나서 그대로 망해버리라고?”
대찬은 오랜만에 최재한을 만났다.
최재한은 대찬을 보자마자 히죽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그의 말대로 기사 제목이 나가면 대찬의 세상은 삼일천하로 막을 내리고 오너 일가의 견제대상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었다.
대찬은 그 만약을 떠올리고 가볍게 진저리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