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96화
“하하,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이번 필래마트의 불공정한 조치에 제동을 건 장본인이 조대찬 이사입니다.”
“…그래요?”
“예, 저도 그룹 전체의 사무를 보게 되면서 필래마트의 세세한 조치는 미처 살필 겨를이 없었습니다. 조 이사가 저를 대신해서 이번에 큰일을 해준 겁니다.”
그러자 축산업계 관계자들의 눈빛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서원웅은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 자리 역시 조 이사가 적극적으로 추진해서 성사되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도 이해는 합니다만, 조 이사의 공로도 인정해주셔야 합니다.”
“뭐, 일단 배양육인지 비도축육인지 그런 얘기를 하려고 온 자리는 아니니까. 그건 차치하고 좋은 말씀만 나눕시다.”
“예, 그게 제가 바라는 바입니다.”
서원웅은 농식품부 관계자와 악수를 나누고 착석했다.
대찬은 서원웅에게 귀엣말로 속닥거렸다.
“챙겨줘서 고맙네요.”
“내가 없는 말 한 것도 아니고.”
대찬은 눈인사를 지으며 서원웅과 나란히 착석했다.
그 자리에서 협약이 체결되었다.
딱히 법적인 구속력이 있는 협약은 아니고, 다분히 선언적인 성격이 강했다.
축산업계에서도 그 정도 수위를 감히 원하진 않았다.
어쨌거나 유통업계 공룡 중 일익을 담당하는 필래마트가 자사의 불공정행위를 스스로 근절하겠다고 나서는 것만으로도 이 자리의 가치는 충분했다.
농축산식품부야 손 안 대고 생색낼 수 있는 좋은 자리였다.
구태여 말을 보태서 일을 그르칠 이유가 없었다.
행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서원웅은 밝은 표정으로 협약서에 서명했다.
이어 정부와 업계 관계자들과 교차하여 손을 맞잡았다.
더 없이 좋은 분위기를 연출하며 사진을 찍었다.
대찬은 서원웅의 바로 뒤에 서서 얼굴이 제법 크게 찍혔다.
그 장면이 필래그룹의 사내방송 정오뉴스에도 그대로 방영되었다.
그 장면을 배경으로 사내 아나운서의 건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서원웅 실장은 이 자리에서 필래그룹이 오래 지켜온 가치인 윤리경영을 대외적으로 다시 한 번 강조하고, 공정을 모토로 자유 시장에서 오로지 좋은 품질과 친절한 서비스로 경쟁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다음 소식입니다. 서청수 회장님께서는 미국 오리건 주의 필래정보통신 공장을 방문하여…….”
홍웅표 부문장은 멍한 시선으로 화면을 응시했다.
도대체 왜 이런 결과가 빚어진 것인지, 그는 납득하지 못했다.
계산에는 오차가 없었다.
자신의 행보는 서원웅과 필래그룹의 이익에 부합했다.
서원웅이 저렇게 행동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단순히 조대찬하고의 알량한 친분 때문에, 스스로 윤리경영의 족쇄를 대외적으로 광고하다니.
그는 혼란스러웠다.
그때 감사팀 차장과 홍웅표 부문장, 둘만 있던 사무실에 누군가 방문했다.
노크 소리가 들리자 감사팀 차장은 문을 열었고, 방문자의 얼굴을 보고 즉시 허리를 꺾었다.
“이사님.”
“아침부터 고생이 많습니다. 점심은 드셨어요?”
“하하, 곧 해야죠. 이사님은 점심 드셨습니까.”
“서 실장님 모시고 협약식 다녀오느라 아직 식전입니다. 식사하고 오시죠.”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놨더니 아직 괜찮습니다. 이사님 돌아가시면 식사하러 가겠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방문자는 대찬이었다.
그는 감사팀 차장에게 친절한 미소를 보인 뒤, 홍웅표 부문장과 마주앉았다.
“궁금한 게 많아 보이시네요.”
“지금 이사님과 말 섞고 싶은 기분 아닙니다.”
“그럼 섞지 마세요. 저 혼자 말할 테니까.”
“…….”
감사팀 차장은 잽싸게 커피 한 잔을 타서 대찬의 앞에 내려놓았다.
홍웅표 부문장은 그걸 보고 이를 악물었다.
그룹 감사팀을 움직인 막후에는 조대찬이 있다.
홍웅표 부문장은 어림짐작으로 그럴 것이라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서 그걸 확인하니 부아가 더 치밀었다.
대찬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홍웅표 부문장에게 말했다.
목소리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서원웅 실장이 합리적인 이익 대신 저와의 친분을 택했다고 생각하십니까?”
“…….”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부문장님,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으셨습니다.”
가르치듯 으스대는 새파랗게 어린놈이 홍웅표 부문장은 한없이 불편했다.
그렇다고 전세가 확연히 기운 상태에서 왁왁거릴 수도 없는 노릇.
속이 곪아 터져 누런 진물이 줄줄 새는 느낌이었다.
홍웅표 부문장의 말문이 막힌 사이에 대찬은 멋대로 떠들었다.
“무엇이 서원웅 실장에게 이익이 되는 길일까요. 단순히 장부상에 몇 백억 플러스를 안겨주는 게 이익일까요? 부문장님이 의도했던 것처럼.”
“…….”
“아니면 대외적으로는 윤리경영을 강조하면서 젊고 혁신적이고 깨끗한 경영자로서의 이미지를 각인시키고.”
“…….”
“대내적으로는 근본도 없는 낙하산 하나를 때려잡아 오너 후계자로서의 입지를 굳건히 다지는 동시에 사내 기강을 바로 세우는 게 이익일까요? 제가 의도했던 것처럼.”
홍웅표 부문장은 졸지에 면전에서 근본도 없는 낙하산으로 정의되었다.
그는 핏발 선 눈으로 대찬을 노려봤다.
그 눈빛에는 어떠한 권위도 실리지 않은 터.
대찬은 전혀 위압되지 않았다.
“필래그룹을 통틀어 1년에 드나드는 돈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그 가운데 비바체의 장부에 몇 백억이 덜 비는 게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까? 물 한 바가지에 술 한 방울 탄다고 술맛이 날 것 같아요?”
“체질개선을 이뤘다는 데 의의가 있는 겁니다. 폄훼하지 마십시오.”
“체질개선이라. 막중한 적자로 회사가 위기에 봉착했다는 보고서가 사실보다는 소설에 가깝다는 걸 서원웅 실장을 보좌하는 수많은 똑똑이들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세요?”
“…….”
“서원웅 실장은 몇 달 전까지 필래 비바체의 대표였습니다. 남의 두뇌 빌릴 것도 없이 자기 암산으로도 그쯤이야 쉽게 간파합니다.”
“비바체의 적자는 분명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적자가 적지는 않으나 위기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죠. 부문장님이 신부구빈이니 ‘메이크 알’이니 억지 미사여구를 들이댔습니다만, 결국 본령은 구시대적인 하청 쥐어짜기와 전기 절약 정도의 구두쇠 전술일 뿐입니다.”
대찬이 자신의 원대한 전략을 깔아뭉개자 홍웅표 부문장은 얼굴이 벌게져서 항변했다.
“제 의견 자체를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으셨군요. 제 경영전략은 그렇게 허술한 구닥다리가 아니었습니다!”
“아뇨, 맞습니다. 허술한 구닥다리.”
“이사님과 지향하는 방향이 다를 뿐, 그것도 엄연히 적극적인 혁신이었습니다.”
“혁신 다 죽었습니까? 그깟 게 혁신이게. 이번 육가공 협력업체 쥐어짜기로 내 입을 셧아웃 한 다음 뭘 하려고 하셨습니까?”
“구체적인 계획을 일일이 고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제가 그 구체적인 계획들 중에 하나 말씀드려볼까요. 저는 쉽게 예측이 되네요. 필래택배 정규직 기사하고 외주 기사하고 갈라치기 한 다음에, 외주 기사들 대우를 팍 후려치려고 했죠?”
“갈라치기가 아니라 회사의 입장에서 알맞은 대우로 조정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조 이사님의 방만한 지침 때문에 수십 억, 수백억이 그냥 줄줄 새고 있단 말입니다!”
“당신이 그러니까 주제넘게 일을 그르친다는 소리를 듣는 겁니다.”
“다, 당신? 주제넘어?”
“숫자 뒤에 숨은 까닭을 간파했으면 그런 말씀 못하셨을 겁니다. 폭증하는 물동량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건 그쪽이 말하는 그 방만한 지침 덕분입니다. 아시겠어요?”
홍웅표 부문장은 이를 으드득 갈았다.
“좋은 사람 코스프레를 하려고 헛돈을 바닥에 쏟아 붓는 일에 불과합니다. 이대로 당신 뜻대로 2기 경영진을 물갈이하고 과거로 돌아가면 비바체의 종말은 머지않을 겁니다.”
대찬은 코웃음을 쳤다.
“경리나 하셨으면 알뜰하게 잘 해냈겠지만 그 이상으로는 못 쓸 사람이군요. 좋습니다. 어디 봅시다. 2기 경영진을 물갈이할 테니 비바체의 종말이 그쪽이 죽기 전에 오는지 안 오는지 보자고요.”
“…….”
“아, 분명히 말해두는데, 이건 내 뜻이 아니라 서원웅 실장, 그룹 수뇌부의 뜻입니다. 애먼 저한테 성질 뻗치실 일은 아니거든요.”
“이건 해사행위야! 당신은 당신 회사에 이롭게 하려고 우리 회사의 이익을 포기했어!”
“당신 눈으로 상황을 보니까 그렇지. 서원웅을 당신 편으로 끌어들일 요량이었으면 서원웅의 눈으로 상황을 봤어야지. 하기야, 당신 동태눈깔에 서원웅 해태눈깔은 소켓이 안 맞아서 안 들어가겠지.”
“조대찬!”
대찬은 탁자를 쾅 내리치면서 홍웅표 부문장을 향해 치열을 드러냈다.
더 이상 신사적으로 대우할 까닭이 없었다.
“어설프게 칼을 휘두르면 반동이 세게 오는 법이거든? 당신 부문장 자리 꿰차고 개판치는 걸 보면서 괜히 앉혔다 싶었어.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야. 당신 덕분에 반동을 가할 동력이 생겼어. 그건 고마워.”
대찬은 요동치는 홍웅표 부문장의 눈동자를 한참 응시하다가 그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서원웅 실장은 공정거래위원회의 제재를 받겠다고 자청했어.”
“뭐, 뭣……!”
“이걸로 서원웅 실장 주가는 오르고, 너는 그대로 무너질 거야. 회사 측에서 이 모든 손실의 책임을 당신에게 돌리고 민사소송 제기할 거거든.”
홍웅표 부문장은 피가 일거에 마르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 정도로 잘못하지 않았어. 나는 정도를 지켰다고.”
“남들 백 원 훔칠 때 십 원 훔쳤다고 해서 잘못이 없는 건 아니지. 백 원이든 십 원이든 당신 잘못이 없으려면 훔친 걸 들키지 말았어야지. 아니면 들켜도 용서를 받을 만큼 예쁘게 보였어야지. 서원웅을 완벽히 당신 쪽으로 포섭했어야지.”
“…….”
“도진석이든 당신이든 중요한 건 잘못의 크기가 아니야. 그저 용도폐기 됐을 뿐이야. 나도 가치가 다하면 잘못이 없더라도 당신 꼴이 될 걸. 그래도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아닌 듯하네.”
대찬은 휙 몸을 돌려 출입문을 향해 걸어갔다.
감사팀 차장이 대찬의 뒷모습을 향해 허리를 꺾었다.
“살펴 가십시오, 이사님.”
대찬은 문고리를 잡은 채로 홍웅표 부문장을 돌아봤다.
“아, 비싼 변호사 쓸 필요 없어요. 당신이 아무리 비싼 돈 들여도 돈으로 필래를 이기겠어? 어차피 깨질 거 수임료라도 굳혀요.”
대찬이 툭 던지듯 말을 남기고 자리를 뜨자, 홍웅표 부문장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그는 우당탕 몸을 일으키며 대찬을 향해 뛰어들었다.
“건방진 새끼가 어디서 약을 올려……!”
미친개처럼 달려드는 그를 대찬은 손 하나 쓰지 않고 제압했다.
손 하나 쓰지 않고 제압하는 방법은, 자기 손 대신 남의 손을 쓰는 것이었다.
요즘 개인 트레이닝을 받는다던 감사팀 차장은 자신보다 몸집은 커도 순 물살에 술살일 뿐인 홍웅표 부문장은 가볍게 제압했다.
“여기서 사람 때리면 민사 묻고 형사까지 가는 겁니다.”
“이런 씨… 놔!”
대찬은 뒤통수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홍웅표 부문장의 외침을 뒤로하고 감사팀 사무실을 나섰다.
홍웅표 부문장은 회사를 떠나야만 했다.
근로계약서에 잉크도 채 마르기 전에 그는 부문장 자리를 내려놓아야 했다.
필래 비바체 법무팀은 홍웅표가 해고되자마자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대기업이 한 개인을 이렇듯 무자비하게 몰아붙이는 건 억하심정의 이유만은 아니었다.
이는 서원웅의 대외적인 선언에 쐐기를 박기 위해 필요한 작업이었다.
책임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서원웅의 선언도 공염불이 되고 만다.
책임자를 색출해서 최대한으로 문책해야만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홍웅표는 저렴한 변호사를 쓰라는 대찬의 당부를 무시하고 있는 돈 없는 돈, 있는 인맥 없는 인맥 다 끌어다 낼 수 있는 최고의 패를 냈다.
그래봤자 필래 비바체의 법무팀을 이길 수는 없었다.
필래 비바체 법무팀이 여차하여 무너질 것 같으면 비싼 돈을 들여 잘 나가는 로펌을 섭외해놓을 테니, 홍웅표에게 승산은 없었다.
김풍호 대표는 자기 오른팔이 싹둑 잘린 듯 뼈아팠다.
야심차게 닻을 올렸던 김풍호 호는 노 한번 제대로 저어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좌초했다.
이대로라면 김풍호 대표 본인 역시 자리를 지키기 어려웠다.
대찬은 홍웅표 부문장의 선임을 필래 비바체 전 직원에게 알리면서, 홍웅표의 모든 실책은 김풍호 대표에게 책임이 있음을 공공연하게 못 박아 놨다.
이걸 걸고넘어지면 김풍호 대표는 맥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홍웅표의 해고가 알려지자마자 김풍호 대표는 휴대폰을 들었다.
대찬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그것보다 급한 일이 생각났다.
연락처.
홍웅표.
더보기.
차단.
그런 연후에 김풍호 대표는 대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사님, 뵐 수 있을까요.”
“로튼 프룻츠 사무실로 오세요.”
대찬은 간단하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김풍호 대표는 한달음에 로튼 프룻츠 사무실로 향했다.
그는 대찬과 마주 앉았다.
대찬은 김풍호 대표에게 말했다.
“용건을 말씀하십시오. 왜 보자고 하셨습니까.”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찬은 말없이 계속 김풍호 대표의 말을 들었다.
“이번 사태는 제 책임이 큽니다. 홍웅표를 회사에 들이는 게 아니었습니다.”
“예.”
“염치 불고하고 말씀 올리겠습니다. 이번 실책을 반면교사 삼아 경영 잘 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경영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십시오.”
대찬은 미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