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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395화 (395/556)

난 할 수 있어 395화

“커피라도 한 잔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아, 주십시오.”

대찬은 직접 커피를 타면서 말했다.

“대표님, 컴퓨터 게임 좀 하셨어요?”

“예? 갑자기…….”

“아, 그러시기엔 연세가 좀 많으신가. 저 어릴 때에는 애들이 죄다 컴퓨터 게임에 미쳐 있었거든요. 저도 그렇고.”

“…….”

대찬은 테이블 위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으며 미소를 머금었다.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이,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광풍 수준이었죠. 그때 장래희망 1위가 프로게이머였으니까.”

“예…….”

김풍호 대표는 한가로운 대찬의 어린 시절 얘기나 들을 기분이 아니었다.

대찬은 그런 그의 기분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제 할 말만 했다.

“그때 꼭 실력은 개판인데 아주 이론은 빠삭한 친구들이 꼭 있었어요. 아주 입으로는 임요환 뺨을 열 번도 넘게 칠 정도였다니까요.”

“…….”

“근데 막상 붙어보면 이건 뭐, 어처구니가 없는 수준이에요. 그런 친구들을 보고 애들끼리 ‘입스타’라고 했거든요. 입으로만 스타크래프트 한다고.”

“…예.”

“동서고금 막론하고 이런 케이스가 종종 있죠. 입스타를 고상한 고사성어로 말하자면 지상담병(紙上談兵)이에요. 종이 위에서 병법을 논한다, 뭐 그런 뜻인데, 아세요?”

김풍호 대표는 컴퓨터 게임보다는 고사성어 쪽에 더 해박할 수밖에 없는 나이였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옛날 조나라 장군 조괄의 고사죠…….”

“조나라의 명장 조사가 죽고, 그가 이끌던 병사를 누군가에게 맡겨야 하는데 알고 보니 조사의 아들 조괄이가 병법 천재라더라. 육도삼략을 줄줄 외고 이론으로는 따를 자가 없더라.”

“…….”

“근데 조괄에게 병력을 맡겨서 전쟁에 내보냈더니 아주 대판 깨졌어요. 알고 보니 입스타였던 거지.”

김풍호 대표는 입스타, 조괄이 가리키는 사람이 누구인지 이제 알았다.

대찬은 거리낌 없이 말을 이었다.

“홍웅표 부문장의 이론은 완벽했어요. 조대찬이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손발을 꽁꽁 묶어놓고, 주특기를 최대한 발휘해서 연말에 통계 예쁘게 잡히도록 실적을 개선해 보자. 그래서 너도 출세, 나도 출세 한번 해보자.”

“…….”

“조대찬이는 저만치 치워버리고 필래 비바체 맘대로 떡 주무르듯 주무르고 나중에는 그룹 중심까지 진출해 보자.”

“이사님, 그, 그건…….”

“아니라고 하지 마세요. 큰일 납니다, 진짜.”

“…….”

대찬의 으름장에 김풍호 대표는 입을 다물었다.

“이론과 현실은 엄연히 다릅니다. 육가공 협력업체 목을 조르는 일에 조대찬은 찬성하지도, 반대하지도 못할 것이다. 홍웅표의 세계에서는 제 선택지가 찬성, 반대 두 가지뿐이겠지만 리얼 월드에서는 선택지가 무궁무진했어요.”

“…….”

“홍웅표, 그 미물 같은 인간이 조대찬과 서원웅 사이를 멋대로 교란할 주제가 될 것 같습니까? 건방지게 말씀드려서 죄송하지만 솔직히 같잖습니다.”

“…….”

“저는 홍웅표가 기안하고 대표님이 승인하신 그 부당행위를 막을 겁니다. 홍웅표의 이론에 따르면 이 선택은 서원웅의 코털을 건드려야 맞죠. 그렇게 해서 서원웅이 저를 불신해야 맞죠. 관계가 틀어지고, 저는 끈 떨어진 뒤웅박이 돼야 맞죠.”

대찬은 홍웅표가 생각했던 시나리오를 그대로 줄줄 읊었다.

김풍호 대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이론의 근거란 것이 겨우, 로튼 프룻츠의 이익을 위해 필래 비바체의 이익을 저버리는 행위처럼 비춰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 조잡합니다.”

“…….”

“현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곧 보게 되실 겁니다.”

김풍호 대표는 손이 떨리는 걸 억지로 참으며 커피 한 모금을 머금었다.

대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김풍호 대표를 등지고 말했다.

“조나라 왕이 조괄을 장군에 임명하려고 할 때, 조괄의 어머니가 뜯어말렸어요. 얘는 그럴 재목이 아니다.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

“…….”

“김풍호 대표님, 대표님께서는 최소한 조괄 어머니의 반이라도 가셨어야 했습니다.”

김풍호 대표의 가슴이 울렁거렸다.

대찬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대표님을 돕기 위해 무리를 해서 홍웅표를 부문장 자리에 앉혔습니다. 그런 인간을 부문장 자리에 천거하신 것만으로도 조괄 어머니 따라잡기는 이미 글러버린 건데.”

“…….”

“그랬으면 최소한 주제 파악 정도는 시키셨어야죠. 어쩔 겁니까, 이제.”

“면목이 없습니다.”

김풍호 대표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대찬은 한 손을 허리에 얹고 가만히 김풍호 대표를 바라봤다.

김풍호 대표는 대찬의 눈을 직시하지 못했다.

대찬은 슬며시 웃었다.

“지금 일말의 희망을 품고 계시죠.”

“…예?”

“감사팀 조사가 별 거냐. 제보 들어왔으니까 하는 거지. 요식행위로 끝날 수도 있다. 우리 웅표는 솜씨가 그만이니까.”

“그, 그럴 리가…….”

“트집만 안 잡히면 무죄방면 될 것이고 그럼 반격의 카운터를 날릴 때다. 조대찬이 솜씨도 그리 신통하진 못할 거다. 그러니까 상황 끝나기도 전에 호출 때려서 이렇게 으름장이나 놓고 있지.”

속마음을 훤하게 들킨 김풍호 대표는 땀을 뻘뻘 흘렸다.

“이사님, 곡해 마십시오.”

“곡해요?”

“예, 제가 이사님을 모릅니까. 우리, 제법 합도 잘 맞은 그런 사이잖습니까.”

“잘 맞았죠. 그러니까 왜 홍웅표 같은 함량 미달 야심가를 안방에 들여서 이 사달을 냅니까?”

김풍호 대표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마냥 나쁘게만 보실 일은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좋게 볼 수 있을까요?”

“홍웅표 부문장은 회사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조 이사님과 그 방향이 다를 뿐입니다.”

“윤리경영과 협력업체와의 상생은 서원웅 실장님이 대표였던 시절부터, 그 이전 필래 비바체가 필래마트로 창업하던 시절부터 관철되어온 가치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세요? 그걸 홍웅표 부문장은 하루아침에 걸레짝으로 만들었습니다.”

“체질개선을 위한 부득이한 선택이었습니다. 언제까지 선대의 유훈이라고 무작정 신봉하고만 있겠습니까? 여기가 북한도 아니고.”

대찬은 관자놀이의 핏줄이 꿈틀했다.

“유훈 신봉하자는 게 아닙니다. 윤리경영, 상생경영은 단순한 슬로건이 아니라 필래 비바체 경영의 근간을 이루는 가치입니다.”

“…2기 경영진의 판단은 조금 다릅니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다르죠.”

“사외이사로서의 의견개진은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대표로서의 권위를 조 이사님께서도 존중해주셔야 합니다. 경영에 대한 결정권은 저에게 있습니다.”

“존중합니다. 존중하니까 홍웅표 부문장 선임에 힘을 보태드린 거 아닙니까.”

“…….”

“홍웅표 부문장은 회사의 경영철학에 위배되지 않는 선에서 업무를 보겠다고 수천 명의 필래 비바체 가족들 앞에서 선언했습니다.”

“이미 서원웅 실장님의 암묵적인 재가까지 받은 일입니다. 추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대찬은 가만히 김풍호 대표를 내려다봤다.

대찬의 위압적인 말을 듣다보니 김풍호 대표도 속에서 욱하는 마음이 몰칵 올라왔다.

대찬이 스스로 말했듯 겨우 그룹 감사팀이 들이닥쳐서 홍웅표 부문장을 끌고 갔을 뿐이다.

실효적인 조치는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았다.

유독 고압적인 태도 역시, 대찬 스스로도 확신이 없으니 기세로 찍어 누르려는 것은 아닐까.

김풍호 대표는 그런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항변하는 목소리에 더 힘이 깃들었다.

대찬은 그런 기류를 감지했다.

“제가 대표님 뵙자고 한 것도 아니고, 대표님이 부랴부랴 달려오신 겁니다. 용건이 있으면 말씀하시고, 없으시면 일단 돌아가십시오. 돌아가셔서 상황을 잘 보고 거취를 결정하십시오.”

거취라는 단어가 김풍호 대표에게 무겁게 다가왔다.

대찬은 그렇게 김풍호 대표와의 대화를 종결했다.

김풍호 대표는 찝찝한 마음으로 돌아갔다.

홍웅표 부문장이 감사팀의 조사대상이 된 후, 상황은 빠르게 돌아갔다.

그룹 감사팀은 서원웅에게 대부분의 불공정행위들이 사실이라고 보고했다.

홍웅표 부문장은 물론 자기만의 논리가 있었다.

그는 그 이튿날에도 부문장실이 아니라 그룹 감사팀의 사무실로 향해야만 했다.

그는 굴욕감과 위기감으로 잔뜩 성정이 고약해진 상태였다.

그는 지금의 이 상황이 몹시 불쾌했다.

아침부터 사람을 감사팀에 붙들어놓더니, 이제는 점심으로 구내식당도 이용을 못하게 했다.

설렁탕 한 그릇을 그의 앞에 갖다 놨다.

시큼하게 코를 찌르는 깍두기 냄새에 홍웅표 부문장의 머리털이 곤두섰다.

“지금 검찰 흉내 내는 거냐? 이러면 네가 진짜 검사라도 되는 거 같아?”

“한가롭게 소꿉장난 할 여유 없거든요. 그저 부문장님은 사규를 중대하게 위반했기 때문에, 엄정히 조사에 임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이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상부? 네가 말하는 상부가 어디냐?”

“그룹 감사팀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이 그룹에서 다섯 명 안쪽인 걸로 압니다만.”

홍웅표 부문장은 목소리부터가 여유를 잃고 옥수수 알을 튀기듯 사방으로 튀었다.

“이봐, 다 회사를 위한 충정이었다니까! 비바체는 자선단체가 아니라 회사야, 회사! 돈 버는 게 지상과제인 회사라고!”

“네, 지킬 거 지키면서 돈 버는 게 지상과제죠. 불공정행위 저지르면서 돈 버는 건 지하과제랄까.”

감사팀 직원의 농담 같지도 않은 말에 홍웅표 부문장은 더 열을 냈다.

“야, 다 집어치우고, 서원웅 실장하고 직통 연결해. 그럼 다 해결될 일이야. 너, 이거 서원웅 실장이 다 동의한 일인 건 알고 이러는 거냐, 엉?”

“자꾸 야야거리지 마세요. 이래봬도 저도 차장입니다, 부문장님.”

“나한테 대우 받으려면 임원 배지는 달고 와, 새끼야. 서 실장 직통 연결하라고!”

감사팀 차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서 실장님 지금 바쁘십니다.”

“뭐? 네까짓 게 서 실장 일정을 알면 뭘 알아? 어딜 감히 전무 콜을 차장 선에서 커트해?”

“부문장님, 지금 서 실장님이 뭐 하고 계신지 모르는 사람은 여기 필래타워에서 부문장님 하나뿐이십니다.”

“…뭐?”

감사팀 차장은 뭔가 대단한 걸 깨달았다는 듯 무릎을 탁 치며 겸연쩍게 웃었다.

“아! 부문장님은 내내 감사팀 사무실 안에 갇혀 계시느라 모르셨구나.”

“…….”

“실장님 오늘 오전 내내 외근 나가 계셨어요. 평소 외근이랑 다르게 기자들 우르르 대동하고.”

“…뭐?”

“한우, 한돈 자조금 위원장, 양계, 오리협회장, 농축산부 관계자와 회동이 있었거든요.”

홍웅표 부문장의 눈썹이 꿈틀했다.

거기까지만 들어도 대충 감이 잡혔다.

감사팀 차장은 홍웅표 부문장을 놀리듯 빙글빙글 웃었다.

감사팀에 오래 재직한 그의 경험으로 비춰보건대 이미 홍웅표 부문장은 속된 말로 나가리였다.

그를 대접할 가치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 업무협약을 체결했거든요. 계기는 최근 발생한 육가공업체에 대한 한 개인의 일탈적 불공정행위.”

감사팀 차장은 ‘한 개인’을 강조해서 발음했다.

홍웅표 부문장은 입술을 악물었다.

감사팀 차장은 사무실 중앙에 놓인 탁자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사내 정오뉴스 할 시간이네요. 설렁탕 드시면서 무료하실 테니 이거라도 보시죠.”

감사팀 차장은 홍웅표 부문장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멋대로 사무실에 비치된 TV를 켰다.

사내 아나운서의 경직된 발음이 좁은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필래 뉴스룸 정오뉴스 시간입니다. 서원웅 필래지주 경영개선실장은 오늘 오전, 축산업계와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들과 회동을 갖고, 축산물 공정거래와 윤리경영에 대한 협약을 체결했습니다.”

오전.

서원웅은 필래호텔에서 마련된 협약식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많은 수행원을 대동하진 않았다.

그가 대동한 사람은 딱 하나, 대찬이었다.

서청수 회장의 후계자로 낙점된 지 오래였다.

지체 높은 사람들과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 갈 정도로 서원웅의 지체도 높아져 있었다.

그는 농식품부 관계자보다는 축산업계 관계자와 먼저 인사를 나눴다.

중요도를 따지자면 그쪽이 훨씬 높았다.

“이번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업계 전반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협회 회원으로 계시는 사장님들께서 필래 비바체의 조치에 크게 실망하시던 참이었습니다. 실장님께서 직접 나서서 그룹 차원에서 조치를 취해주시니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축산업계 관계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서원웅의 뒤편에 있는 대찬을 흘끗 바라봤다.

표정이 불편해졌다.

그는 대찬을 바라보며 쏘아붙였다.

“조대찬 이사님은 오늘 무슨 자격으로 나오신 겁니까? 필래 비바체의 사외이사입니까, 아니면 로튼 프룻츠의 대표입니까?”

대찬은 그들의 불쾌감을 십분 이해했다.

그들이 불편해 한다고 대찬은 덩달아 불편해지지 않았다.

대찬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로튼 프룻츠가 여기에 낄 자격은 안 되죠. 비바체 사외이사 자격으로 왔습니다.”

“그래요? 글쎄, 비바체 사외이사로서도 여기 올 자격은 안 되는 거 같은데요. 사외이사는 엄연히 외부인인데.”

그러자 서원웅이 나서서 그의 예민한 반응을 누그러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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