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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394화 (394/556)

난 할 수 있어 394화

서원웅과는 흉금을 터놓는 사이지만 지켜야할 선이 있었다.

김풍호 대표의 조치들을 무력화시키는 건 서원웅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읽힐 염려가 있었다.

더군다나 대찬이 말했듯 로튼 프룻츠의 일이 얽혀 있으니 더더욱 그랬다.

차라리 도진석 때처럼 앞뒤 안 가리고 칼날을 휘두르면 대찬도 부담 없이 나설 것이다.

그러나 홍웅표 부문장은 도진석보다는 한 수 위였다.

원가 이하로 무식하게 후려치는 것도 아니고, 필래 비바체 입장에서 보면 최대한의 이익을 도모한다고 여길 수도 있었다.

일전에 공개적으로 천명한 윤리경영 협약이라든지 필래 비바체의 일련의 행보라든지 하는 것들은 각론에 불과했다.

전장 자체가 대찬에게 확실하게 유리한 지형이 아니었다.

허운은 대찬의 후퇴적인 입장에 툴툴거렸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서원웅 실장이 이사님 편을 들지, 저 치들 편을 들겠어요?”

대찬은 허운의 말을 무작정 긍정할 수 없었다.

서원웅이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는 건 안일하고 현실도피적인 생각이었다.

이미 도진석 때만 해도 자신의 의견을 팽개친 전력이 있었다.

그룹 전체를 이끌게 되면 서원웅에게 있어 대찬의 가치는 필연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이야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다.

서원웅의 신뢰를 방패로 삼아 이사회에 등판하여 김풍호 대표와 홍웅표 부문장의 방종에 실력행사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건 대찬이 필래 비바체에 적을 두는 내내 족쇄가 될 것이다.

수틀리면 언제든 대찬을 쳐낼 수 있는 건수가 된다.

고작 홍웅표를 상대하겠다고 이런 부담을 감수하고 싶은 의지가 대찬에게는 조금도 없었다.

대찬의 묵묵부답에 허운은 뚱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왜 아무 말씀이 없으세요?”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니까.”

“아니, 좋아요, 그럼 이대로 가만히 계실 거예요? 그건 그것대로 문제 아니에요?”

“문제지. 축산업계 탄압에 내가 앞장서는 일이니까. 극동일보가 신나게 나팔 불어댈 거야.”

“극동일보요?”

“응, 지금 비바체 경영진하고 극동일보 쪽이 커넥션을 갖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긴 그거랑 관계없이 이 좋은 건수를 극동일보가 그냥 지나칠 리가 없지.”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있어도 문제야. 극동일보의 부채질이 문제지. 가만히 있으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축산업계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 할 테고.”

“가만히 안 있으면 축산업계와의 관계를 호전시키려고 회사의 이익을 저버렸다고 할 거잖아요?”

“그렇지.”

대찬의 말을 들은 허운도 쉽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못했다.

그는 혀를 빼 물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야, 이거 딱 외통수네. 홍웅표가 그래도 통밥깨나 굴릴 줄 아네요.”

“경솔하게 움직이면 나한테는 치명타야.”

“이사님 동아줄 붙들고 있는 우리한테도 치명타죠. 그럼 어떡해요? 이대로 저쪽에 한 점 뺏겨야 돼요?”

허운의 말에 대찬은 슬며시 웃었다.

“아니.”

“그럼 무슨 방법이 있으세요?”

“있지, 방법.”

대찬이 목소리에 힘을 주자 허운도 그제야 반색했다.

“뭔데요?”

“홍웅표 부문장의 수작에 내가 제동을 걸기 어려운 이유는 딱 하나야.”

“홍웅표의 수작이 회사에는 도움이 되니까, 그런 수작을 이사님 사익을 위해 제동을 거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이잖아요.”

그래도 제법 말을 받아치게 된 허운을 보고 대찬은 웃었다.

“그렇지. 더 분명하게 말하면 홍웅표의 수작이 회사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서원웅 실장에게 유익한 일이라는 거야.”

“아, 그렇죠. 즉, 이사님이 이걸 막아서면 이사님의 이익을 위해 서원웅 실장의 이익을 방해하는 모양새가 되는 거죠.”

“그렇지. 그건 홍웅표 부문장에게 태클을 거는 게 서원웅 실장에게도 이익이 되도록 만들면 해결돼.”

“어떻게 그래요?”

“서원웅 실장한테 주연을 맡기면 돼.”

“에?”

허운이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에 대찬은 전화를 끊었다.

‘제법 머리를 썼다만.’

대찬은 외투를 챙기고 중림대 연구실을 나섰다.

거의 보름 만의 외출.

열심히 연구에 열을 올리던 은오영 교수가 밖으로 나가는 대찬을 발견하고 반색했다.

“외출하세요?”

“네, 서울로 가려고요.”

“아주 가세요?”

“…네. 어째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데요.”

“아, 그럼 안 좋겠어요? 당분간 연구실엔 얼씬도 마세요.”

“섭섭하게. 자꾸 그러시면 간식비 반으로 깎아버립니다?”

“그럼 오또 마니아 연구원더러 사표 쓰란 소린데요? 야, 정용아, 너 잘렸단다!”

“무슨 농담을 못해. 날이 갈수록 대표 권위가 땅에 떨어진다니까요.”

“이게 다 상사믹서기 조대찬 대표님 보고 배운 겁니다. 누굴 탓해요.”

대찬은 진절머리를 내면서 외투의 단추를 채웠다.

그는 서울로 급히 올라갔다.

은오영 교수의 소원대로 중림대 연구실에는 한동안 발길을 끊을 작정이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대찬은 서원웅에게 전화를 걸었다.

“실장님, 비바체에서 육가공 협력업체 목조르기 들어간 얘기 들으셨어요?”

“원래 같았으면 다른 일 때문에 알아볼 겨를도 없었겠지만, 조 이사가 워낙 보채니까 어쩔 수 없이 챙기다보니. 들었어요.”

대찬은 웃음을 머금었다.

“사전에 논의 드린 대로 하겠습니다.”

“그러세요.”

대찬은 서울로 올라가자마자 필래타워로 향했다.

장기간 자리를 비울 것이라고 했던 대찬이 모습을 드러내자 필래 비바체 직원들은 수군거렸다.

대찬은 마트사업부문 사무실로 직행했다.

사외이사로 신분이 바뀐 이후, 대찬은 사외이사실을 제외한 다른 사무실에는 일절 출입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오랜만에 마트사업부문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직원들은 열심히 일하는 척 하면서도 시선은 흘끗흘끗 대찬의 걸음을 뒤쫓았다.

부문장실은 투명한 유리로 구분이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홍웅표 부문장도 대찬의 접근을 진즉에 인지했다.

그는 피식 웃었다.

“새끼, 똥 마려운 표정으로 오기는. 깜짝 놀라서 미국인지 네덜란드인지에서 급거 귀국하셨구만.”

홍웅표 부문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 대찬을 맞이했다.

“아이고, 웬일이십니까? 멀리 나가 계신다더니.”

“급히 들어왔습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대찬은 흔한 인사말도 없이, 에두르지 않고 바로 직구를 던졌다.

홍웅표 부문장은 눈을 크게 떴다.

“예? 무슨 짓이냐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찬은 부문장실의 문을 닫고 홍웅표 부문장을 똑바로 바라봤다.

“제가 없으니까 너무 맘 놓고 날뛰시던데요.”

“말씀은 가려하세요. 조 이사님은 그저 회사 바깥의 사람일 뿐입니다. 저한테 그 따위로 말씀하실 권한이 없어요.”

“당신은 이미 부문장으로서 자격 상실이에요. 부문장으로 취임할 때, 비바체 전 직원 앞에서 필래 비바체 경영철학에 위배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공개 천명했죠.”

“그런데요?”

“이번에 육가공 협력업체에 대한 일련의 조치들은 그 천명을 제멋대로 쌈 싸먹는 패악입니다. 스스로 한 약속을 저버렸으니 부문장으로서의 자격도 저버린 거지.”

홍웅표 부문장은 대찬의 으름장에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그에게 대찬의 갑작스런 등장은 잠깐의 깜짝쇼에 불과했다.

어차피 포석은 완벽했다.

이제 와서 대찬이 난동을 부려봤자 스스로 늪에 더 깊이 빠져드는 꼴밖에 되지는 않았다.

“미국에 나가 계셔서 뭘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요. 이건 서원웅 실장님한테 직접 오케이 사인 받은 건입니다.”

“서원웅 실장은 실적개선에 동의했지, 윤리경영 노선을 포기하는 데 동의하진 않은 걸로 아는데요.”

“아, 그럼 뭐 이사회에서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하십시오. 그건 조 이사님 고유권한이니 뭐라 안 하겠습니다.”

대찬은 입가를 살짝 올렸다.

“왜, 그러면 내가 회사 이익을 저버리고 내 사익을 추구했다고 동네방네 광고라도 하시게요?”

“뭐,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본인 행동에 당당하시면 본인의 권리를 행사하세요. 여기 와서 난동 피우지 말고, 깡패처럼.”

홍웅표 부문장은 씩 웃었다.

‘약 오르지? 어떻게 해야 할지 계산이 안 서지?’

그는 자기가 완벽한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대찬이 차라리 멍청한 멧돼지라면 오히려 상대하기 껄끄러웠을 것이다.

앞뒤 안 재고 들이받았을 테니까.

그런데 사람은 아는 만큼 조심스러워진다.

이미 자신의 포석을 이해했기 때문에 대찬이 쉽게 어쩌지 못할 것이라고 홍웅표 부문장은 확신했다.

대찬은 한동안 침묵했다.

‘궁지에 몰린 쥐새끼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니까… 퇴로 정도는 열어줄까.’

홍웅표 부문장은 웃으며 대찬에게 말했다.

“그냥 가만히 계세요, 예? 그럼 언론에서 조 이사님이 축산업을 말살하려 든다느니 하는 소리는 안 하게 막아줄게요. 그냥 잠자코, 사외이사답게 가만히 계시라고.”

“아, 그럴까요.”

“예, 그러세요.”

대찬은 문고리를 잡은 채로 홍웅표 부문장에게 말했다.

“마지막 기회를 드릴게요. 모든 조치 원상복구 시키고 자기 주제에 맞게 행동하세요.”

“하, 지금 자기 주제에 안 맞게 행동하는 사람이 누군데.”

“저 저녁까지 사외이사실에 있을 겁니다. 용건 있으면 거기로 찾아오세요.”

“없을 건데요, 용건?”

대찬은 홍웅표 부문장을 흘끗 보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홍웅표 부문장은 팔짱을 낀 채 저벅저벅 멀어져가는 대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병신.”

그때 전화가 울렸다.

김풍호 대표였다.

“조 이사, 갑자기 회사에 왔다면서.”

“예. 방금 제 방에 와서 한 따까리 하고 갔습니다.”

“괜찮겠어? 조 이사가 자폭하자고 달려들면 우리도 치명상이야.”

“걱정도 많으십니다. 저 인간이 그럴 거 같아요? 그러면 자기 신세도 아웃이에요. 그 정도로 멍청한 양반 아닙니다.”

“이 일은 내가 전적으로 자네한테 위임했으니까 잘 처리해.”

“예, 그러죠. 아마 어쩌지 못할 겁니다. 이제 이다음으로 나아가면 돼요.”

홍웅표 부문장의 계획은 원대했다.

육가공 협력업체를 쥐어짜는 건 시작에 불과했다.

이걸로 대찬의 손발을 꽁꽁 묶어놨다고 자신했다.

이후로는 김풍호 체제의 실적을 위해 무자비한 칼날을 뽑아 들 계획이었다.

지출을 최대한으로 감축하여 극적으로 실적을 개선한다.

확실하게 비바체의 체질을 바꾸고, 그룹의 중심으로 파고 든다.

서원웅의 오른팔이었던 조대찬은 구시대의 산물로 남겨둔다.

삶아먹을 사냥개로 전락시킨다.

그러나 그건 잠깐의 단꿈이었다.

대찬이 부문장실을 떠난 지 채 10분도 안 된 시점.

갑자기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부문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홍웅표 부문장은 그들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야! 너희 뭐야!”

“안녕하십니까, 홍웅표 부문장님. 그룹 감사팀에서 나왔습니다.”

“…뭐?”

“협력업체에 대한 부당행위에 관련한 제보가 있었습니다. 조사에 협조해주셔야겠습니다.”

홍웅표 부문장은 눈을 뒤집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회사 체질개선 하겠다고 뼈 빠지게 일하는 사람한테 이게 무슨 짓이냐고.”

“소명하실 부분이 있으면 감사팀 조사에서 소명하십시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러는 거야? 난 범죄 저지른 것도 없고 일만 열심히 했을 뿐이라니까!”

감사팀 직원은 홍웅표 부문장의 무의미한 외침을 더 상대해주지 않았다.

그는 간단한 눈짓으로 자기 부하를 부려 홍웅표 부문장을 강제로 감사팀 사무실로 모셨다.

통유리로 된 부문장실 덕분에 직원들은 저 푸닥거리를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봤다.

소리는 차단되어 있었지만 시각만으로도 상황을 인지하기에는 충분했다.

소식은 빠르게 퍼졌다.

김풍호 대표의 귀에도 들어갔다.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온몸의 피가 일거에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미친놈이 자신 있다고 큰 소리 떵떵 치더니 몇 분 만에……!”

그는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이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대찬이 들이닥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감사팀, 그것도 그룹 감사팀이 들이닥쳤다.

대찬과 서원웅 사이에 이미 정해진 계획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부랴부랴 사외이사실로 향했다.

“조 이사님!”

“대표님, 오랜만에 회사 왔는데 인사드리는 걸 깜빡했네요.”

“감사팀에서 홍웅표 부문장을 조사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네, 저도 들었습니다.”

김풍호 대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찌된 영문입니까?”

“어찌된 영문인지 저도 모릅니다. 그룹 감사팀의 일은 그룹 감사팀에 문의해 보셔야죠.”

김풍호 대표의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동서남북으로 요동쳤다.

그의 입 안은 바싹 말랐다.

대찬은 웃으면서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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