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93화
“앞으로 전해지는 소식은 그때그때 바로 전달해줘.”
“예예, 그렇게 합죠.”
대찬은 허운과의 통화를 마치고 서원웅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들리고 서원웅이 전화를 받았다.
“미국에 있는 거 아니었어?”
“한국 들어왔어. 사장단회의 소집했다며.”
“역시 귀가 밝네.”
대찬은 한쪽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말했다.
“석연찮은 구석이 있어서 미리 귀띔 좀 하려고 전화했어.”
“석연찮은 구석이라니.”
대찬은 서원웅의 바쁜 일정을 고려해서 간단하게 추려 설명했다.
서원웅은 알아들었다고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김풍호 대표의 제안으로 서비스업 계통 계열사들의 사장단회의가 소집되었다.
서청수 회장은 슬슬 그룹 전체에 대한 후계자수업에 들어갔다.
그는 서원웅에게 사장단회의를 주재하라고 주문했다.
후계자로서의 권위를 실어주기에는 이만한 판이 없었다.
서원웅은 서청수 회장의 대리인 자격으로 사장단회의를 직접 맡았다.
다른 계열사들이야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정기 사장단회의도 아니었고, 자기들이 하자고 해서 소집된 회의도 아니었기에 의례적인 보고만 준비했다.
다른 계열사들은 열의가 없는 반면 비바체는 적극적이었다.
김풍호 대표는 발언권의 대부분을 얻어갔다.
그는 열성적으로 서원웅에게 어필했다.
“지금까지 필래 비바체는 엄청난 양적 성장을 이뤄냈습니다. 서원웅 실장님을 위시한 1기 경영진의 쾌거입니다.”
서원웅은 가장 높은 곳에서 김풍호 대표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나 급히 자란 풀은 줄기가 무르고 뿌리가 얕은 법입니다. 제가 대표로 취임한 이후, 급속성장의 뼈아픈 단면을 발견했습니다.”
김풍호 대표는 그렇게 말하면서 서원웅의 눈치를 살폈다.
자칫 1기 경영진에 대한 비판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시선을 의식한 서원웅이 김풍호 대표의 자신감을 북돋워주었다.
“김 대표님께 경영권을 넘기면서 걱정했던 부분입니다. 보고서에 그런 부분들이 잘 나와 있더군요. 인상 깊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임기 동안에는 내실을 기하고자 합니다. 신부구빈, 그게 필래 비바체 2기 경영진의 모토가 될 것입니다.”
“좋습니다. 노력해주세요.”
“실장님도 동의해주시는 겁니까?”
김풍호 대표는 구태여 다시 한 번 서원웅의 동의를 구했다.
필요한 과정이었다.
이 보고서에 대한 서원웅의 신임을 확인하는 것.
그건 홍웅표 부문장이 김풍호 대표에게 여러 번 당부한 일이었다.
서원웅은 씩 웃었다.
“저는 김풍호 대표님의 경영권에 개입할 수 있는 어떠한 권한도 없습니다. 새삼 제 동의를 구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서원웅은 어깨를 으쓱였다.
“감사할 필요도 없으십니다.”
사장단 회의 이후, 김풍호 대표는 신부구빈을 필래 비바체의 슬로건으로 삼았다.
멋을 좀 더 부리려고 대외적으로는 영어 슬로건을 내걸었다.
‘make the new rich, make the old reasonable.’
새로운 것은 부유하게 만들자.
오래된 것은 합리적으로 만들자.
이걸 줄여서 ‘메이크 알(make R)’이라고 천명했다.
영어 원어민인 필래 비바체의 CTO, 마크 콜먼은 그다지 좋은 문장은 아니라고 했지만 알 바 아니었다.
그저 높으신 분들이 좋다면 좋은 것이었다.
대찬은 중림대 연구실에서 사장단회의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서원웅의 동의를 받고 이제 본격적으로 포석을 놓으실 타이밍인데.”
대찬은 김풍호 대표와 홍웅표 부문장이 벌이는 행보의 맥은 짚어나갔다.
그들은 대찬의 예상대로 차근차근 과정을 밟아나갔다.
그러나 계룡산 도사님도 아니고 그들이 정확히 어디서 찌르고 들어올지는 알 수 없었다.
대찬은 정보망을 최대한 가동해서 그들의 행보를 짐작했다.
그러던 중 지루하게 이어지는 허운의 보고에서 대찬은 단서를 얻었다.
“이건 상품기획부 장 과장이 일러준 건데요.”
“응.”
“육가공 협력업체 쪽하고 요즘 부쩍 이슈가 많아졌다고 하네요.”
“육가공?”
“네.”
“육가공 쪽하고 이슈가 있을 건 하나밖에 없는데.”
“그렇죠. 뭐 뻔하죠. 단가 후려치기.”
“장 과장이 육가공 말고 다른 쪽의 이슈는 따로 말 안 했어?”
“네, 육가공만 콕 집어서 말하더라구요. 저도 알아보니까 그것 외에는 딱히 주시할 만한 상황은 없습니다.”
대찬은 이 소식이 석연치 않았다.
안 그래도 석연찮은데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더 석연찮았다.
첫째는 당연히 김풍호 대표와 홍웅표 부문장이 수상한 꿍꿍이를 품고 있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하필 육가공 업체라는 것이었다.
육가공 업체를 비롯한 축산업계는 대찬과 껄끄러운 관계에 놓여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비도축육 산업의 발전을 가장 꺼리는 집단이 그들이었다.
고기를 찾는 입은 한정되어 있다.
가뜩이나 경기도 어렵다.
그런데 느닷없이 4차 산업혁명 운운하며 끼어든 비도축육 산업이 밥그릇 좀 같이 쓰자고 달려든다.
당연히 그들에게 달가울 리 만무했다.
그 어떤 것보다도 치열하게 사수해야 할 것이 밥그릇인 법이다.
대찬 역시 심정적으로는 그들의 반발을 이해했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꽁꽁 얽히고설킬 수밖에 없는 이 갈등을 해결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골머리가 썩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풍호, 홍웅표가 굳이 육가공을 선택했다는 건 염두에 둔 이유가 있는 거겠지.’
대찬은 주먹으로 책상을 탕탕, 두 번 두드렸다.
감이 잡혔다.
허운이 물어다준 정보는 정확했다.
김풍호 대표와 홍웅표 부문장은 바로 포문을 열었다.
그들은 대찬이 해외출장으로 여념이 없다고 판단했다.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그들이 말한, 기존의 사업에서 최대한의 합리성을 도모하겠다고 한 건 지출을 줄이는 것이었다.
사내외의 사람들은 아마 필래마트 점포의 ‘세일 앤드 리스 백’ 전략이 그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그 예측은 틀렸다.
그들은 육가공 협력업체를 일거에 쥐어짜기 시작했다.
그 방식이 도진석 때처럼 우악스럽지는 않았다.
홍웅표 부문장은 각 점포에서 실시하던 제품발주를 마트사업부문 차원에서 일괄적으로 실시하겠다고 지시했다.
자기 산하 부서에 자율업무를 운운했던 때에서 며칠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부서 별 자율업무를 지키기는커녕, 서원웅의 이전, 김태준 사장이 대표로 있을 때부터 관철되었던 점포 별 자율책임 운영마저 침해하는 결정이었다.
밑에 사람들이야 그런 걸 일일이 따질 의지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하라는 대로 했다.
발주 권한을 부문 차원으로 일원화한 홍웅표 부문장은 육가공 협력업체의 목을 차츰차츰 조르기 시작했다.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오리고기.
필래마트에서 취급하는 네 가지 주요 육류에 대해 일괄적인 쥐어짜기에 돌입했다.
원가에 가까운 가격에 물건을 떼어오는 건 기본이었다.
물류비 상당 부분 부담.
행사 판촉비 부담.
고기를 자르는 세절비 부담.
그리고 이런 일련의 부당행위들을 서면계약이 아닌 구두계약으로 처리하기.
홍웅표 부문장의 지휘 하에 이런 작업들이 차례대로 시행되었다.
쇠고기의 경우에는 결이 좀 달랐다.
업체 별로 단가가 비슷해 후려치기가 불가능했다.
이에 쇠고기에는 다른 방법으로 부당행위가 자행되었다.
쇠고기는 팔리는 부위가 한정적이었다.
등심 같은 구이용이 가장 많이 팔리고, 양지 등 국거리는 상대적으로 팔리는 물량이 적었다.
필래마트는 구이용 부위를 대량으로 발주하고, 국거리 등의 비인기 부위는 소량 발주했다.
김풍호 대표는 일련의 조치들에 긴장했다.
그는 홍웅표 부문장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야, 홍 전무, 이래도 되겠어?”
“이러면 안 되는 건 또 뭡니까.”
“이건 조대찬 손을 타기 전에 협력업체 쪽에서 먼저 들고 일어나게 생겼어.”
홍웅표 부문장은 픽 웃었다.
“일본 전국시대에 횡행하던 말 두 가지가 있어요. 뭔지 아세요?”
“한가롭게 역사강론 듣고 있을 때가 아닌데.”
“하나는 이거예요. 백성은 참깨와 같다. 짤수록 기름이 나온다.”
“…….”
“다른 하나는 이거예요. 백성은 죽어서도 안 되고 살아서도 안 된다. 딱 죽지 않을 만큼까지 선을 지켜서 쥐어짜야 한다는 거예요. 이건 그 유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한 말이거든요.”
“지금 그 얘기를 꺼내는 이유가 뭐야.”
“도진석이 왜 갈려나갔게요? 백성이 참깨인 줄 알고 끝까지 쥐어짰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멍청한 도진석이처럼 무식하게 쥐어짜면 공정위에 찔리든 아니면 밤길 걷다가 하청 사장한테 찔리든 찔리게 되겠죠.”
김풍호 대표는 홍웅표 부문장의 눈을 응시했다.
“그럼 너는 다르다는 거야?”
“예, 다르죠. 딱 죽지 않을 만큼만 쥐어짤 것. 이런 조치들이 하청한테는 죽을 듯이 힘들지만 정말 죽지는 않는 거예요. 아슬아슬 줄타기, 그게 이 홍웅표 주특기 아닙니까.”
“그러다 협력업체들이 나가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아유, 그렇게 그쪽 팔자가 늘어진 줄 알아요? 필래마트 손길을 매몰차게 뿌리칠 업체, 장담하건대 없습니다. 다음에 결손을 메워주겠다, 거래 규모를 늘려나가면 장기적으로 너희한테 이익이다. 그렇게 희망을 주면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옵니다.”
“그래도 너무 가혹하지 않아?”
홍웅표 부문장은 탄식했다.
“대표님, 아니 형님, 지금 우린 커리어를 배팅하고 게임하는 중이에요. 누굴 걱정할 여유가 있어요? 여기서 확실한 실적개선, 체질개선 이뤄내야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어요.”
김풍호 대표는 침을 꿀꺽 삼켰다.
홍웅표 부문장은 그의 손목을 가볍게 붙들었다.
“수가 섰으면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겁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길을 따르자고요. 최후의 승자잖아요, 그 사람이.”
“서투르게 하면 안 돼.”
“대표님, 제가 위마트에서 하는 것 보시고도 아직도 못 미더우십니까.”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된다, 이 말이야.”
“참, 지금 대표님 딱 우리 할머니 보는 거 같네.”
“뭐?”
“시도 때도 없이 차 조심 하라고 했거든요. 우리 할머니 돌아가실 때 내가 마흔 다섯이었어요. 그때까지도 차 조심하라고 하는 거야. 나 참, 지금 형님 보니까 우리 할머니 생각이 나잖아.”
홍웅표 부문장은 거듭 김풍호 대표를 안심시켰다.
대찬은 중림대 연구실에서 모든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다.
허운은 다급하게 대찬에게 말했다.
“도대체 왜 아직까지 거기서 미적거리고 있는 겁니까, 예? 상황이 지금 말이 아니라니까.”
“지금 내가 나설 상황인가?”
대찬의 태평한 목소리에 허운의 갑갑증이 절정에 달했다.
그의 목소리는 더욱 격앙되었다.
“당연한 말씀을 하세요. 지금 이 난장판을 조 이사님 아니면 누가 해결해요?”
“저쪽이 나를 외통수에 몰아놨는데?”
“외통수라니. 당장 이사회 출석해서 회사의 불공정행위를 낱낱이 고발하고 제동을 걸어야죠. 그게 이사님 의무이자 권리 아닙니까.”
“그럴 수가 없어.”
“왜 그럴 수가 없어!”
이제 허운은 존댓말까지 포기하고 꽥 소리를 질렀다.
대찬은 수화기를 귀에서 살짝 뗀 채로 말했다.
“그게 저쪽에서 바라는 일이니까.”
“저쪽에서 바란다뇨.”
“내가 그렇게 해봐. 일이 어떻게 될 거 같아?”
“어떻게 되긴, 비정상의 정상화지.”
“나는 필래 비바체 사외이사이기 전에 로튼 프룻츠 대표이사야.”
“아, 그걸 누가 몰라요. 그게 왜요.”
허운이 퉁명스레 대꾸하자 대찬은 웃음을 머금었다.
“지금 축산업계 주적이 누군 줄 알아? 나야. 그 사람들한테 나는 생태계교란종이라고.”
“그게 뭐 어쨌다는 거예요?”
허운의 물색없는 반응에 대찬은 얼굴을 찡그렸다.
“물가에 데려다줬으면 됐지, 떠먹여주기까지 해야 돼?”
“이러쿵저러쿵 야단치지 말고 그 시간에 그냥 설명을 해줘요.”
대찬은 가볍게 탄식하고 말했다.
“안 그래도 축산업계 종사자들이 날 못 죽여서 안달인 상황에서 내가 나서서 육가공 협력업체에 대한 부당행위를 전면중단하라고 주장해 봐.”
“그거야 말로 최고의 한 수 아니겠어요? 그럼 축산업계가 이사님을 얼마나 예쁘게 보겠어요?”
대찬은 한숨을 쉬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왜요.”
“그룹 수뇌부 입장에선 그 행위가 사익을 위해 회사의 이익을 저버린 거로 비칠 소지가 있어.”
그 말에 허운은 인상을 팍 구겼다.
“무슨 말이 그래요. 아니, 사외이사가 그러라고 있는 자리 아니에요? 서슬 퍼런 감시의 눈초리를 보내고 불공정행위를 근절하고, 경영진의 폭주를 견제하는 것. 그게 사외이사가 할 일 아니에요?”
“사전에는 그렇게 나와 있지.”
“자기가 자기 할 일 한다는데 무슨 논란의 여지가 있어요.”
대찬은 웃음을 흘렸다.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래? 이 건은 이미 서원웅 실장까지 오케이 한 건이야.”
대찬은 실제적인 부담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