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92화
“조대찬 미우시죠?”
“눈엣가시예요.”
“저도 그런데. 동맹 맺을래요?”
홍웅표 부문장의 가감 없는 말에 홍승연은 피식 웃었다.
“원래 그렇게 윗사람한테 맹랑하게 할 말 다 하는 스타일이에요?”
“그럼요. 앞에서 꼬리 말고 설설 기는 놈들은 가치가 없기 때문이에요. 가치 있는 사람은 좀 맹랑하게 굴어도 오히려 예쁘다, 해주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어요?”
“아, 아저씨는 얼굴이 안 예뻐서 그런 소리는 안 나와요. 가오가 조대찬이었으면 예뻤을 텐데.”
“그래도 흥미는 생기시죠?”
“생겨요. 동맹 맺을 동기는 충분해요.”
“사모님이 가진 힘, 그리고 저희가 가진 힘, 더하면 꽤 시너지가 좋을 것 같아서요.”
“머리 텅텅 비우고 날 만나러 온 것 같지는 않네요.”
“귀한 분 뵙기 어려운데 아무렴 아무 생각 없이 뵙자고 했을까 봐요.”
“말해봐요. 시간은 넉넉히 허락할게요.”
홍승연의 허락이 떨어지자 홍웅표는 웃으며 냉큼 품은 생각을 말로 풀었다.
홍승연은 홍웅표의 생각에 만족스런 반응을 보였다.
대찬은 조금씩 이전의 날카로운 모습을 잃어갔다.
이제는 아예 그의 존재감에 공백이 뻥 뚫렸다.
대찬은 비도축육 법제화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미국으로 출국한다고 밝혔다.
미국의 배양육 업체들 역시 법제화의 문제 때문에 투쟁하고 있었다.
상대는 조직력과 자금력이 막강한 축산업계였다.
그들에 대항하여 단일한 협회를 조직했다고 했다.
배양육을 도축된 정육과 마찬가지로 육류로서 법적인 지위를 얻도록 한목소리를 내려는 시도였다.
물론 MFG그룹이 침몰하면서 로튼 프룻츠가 한국의 유일한 배양육 업체여서 협회를 결성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세계 각지의 업계 관계자를 만나 의견을 교환하고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부분을 찾기 위해 대찬은 출국하기로 했다.
그전에 필래 비바체에 들러 출국 일정을 알렸다.
“한 달 정도의 장기출장이 될 것 같습니다. 미국 들렀다 네덜란드까지 거쳐서 다녀와야 할 것 같거든요.”
“예, 걱정 마십시오. 이쪽 일은 저희가 이사님 몫까지 맡아서 하겠습니다.”
홍웅표 부문장은 미더운 목소리로 말했다.
“출장에 다녀와서도 당분간은 이사회에 참석하기 어려워요. 모쪼록 부문장님이 대표님 도와서 회사를 잘 굴려주세요.”
“하하,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대찬은 떨떠름한 미소를 짓고 그 앞에서 물러났다.
그 이후로 대찬은 한동안 이사회에 출석하지 않았다.
대찬의 부재가 김풍호 대표, 홍웅표 부문장에게는 후련했다.
옆 반 친구하고 운동장 반반 나누어 좁은 공간에서 아웅다웅 축구를 하다가, 운동장을 독차지한 기분.
사내의 유일한 견제세력이 사라졌다.
원하는 바를 힘 있게 추진할 절호의 기회였다.
홍웅표 부문장은 자신의 생각을 현실로 관철시키기 시작했다.
마트사업부문의 주도로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보고서의 이름, ‘과도한 지출확대에 따른 실적악화의 개선에 관한 보고서.’
보고서의 논지는 간단했다.
벌려놓은 사업이 너무 많다.
필래 비바체의 자금규모로는 적자를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다.
적자폭을 극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회사는 망할 것이다.
필래 비바체는 이미 그룹 차원에서의 대대적인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투자유치도 필래그룹 계열사 중에 으뜸이었다.
그럼에도 거대한 적자폭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그 내용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50프로만 인간인 인어를 인간이라고 부르지 않듯이, 반만 맞는 소리를 맞는 소리라고 할 순 없었다.
홍웅표 부문장은 자신이 주도하여 제작한 보고서를 김풍호 대표의 앞에 내밀었다.
“이게 필래 비바체에서 기존의 색깔을 확 빼고, 김풍호 체제, 2기 지도부 체제로 완전히 전환시켜줄 비책입니다.”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정도인가?”
“당연하죠. 확실합니다.”
“근데 여기서 말하는 정도로 우리 적자폭이 심각하진 않은데?”
“에이, 왜 이러세요, 아마추어 같이. 통계는 꾸미기 나름이에요.”
김풍호 대표는 팔짱을 끼고 으음, 시름을 토했다.
홍웅표 부문장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지표를 교묘하게 비틀면 피사의 사탑을 삼풍백화점으로 만드는 것쯤이야 간단하죠.”
“좋아, 그렇게 해서 적자를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에 설득력을 싣는다고 치자.”
“예.”
“근데 적자폭을 메우는 거, 말은 좋지만 위험해.”
“아, 예, 뭐.”
“일단 적자폭을 메우려면 비바체가 이어온 윤리경영은 상당부분 포기해야 해.”
“그렇죠. 윤리경영은 극단적인 비합리를 추구하니까요. 멍청한 모토죠.”
김풍호 대표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 모토를 내걸고 승승장구해왔어. 더군다나 그 장본인이 서원웅 실장이고.”
"알죠."
“아는 사람이 그래? 조대찬 잡으려고 서원웅까지 적으로 돌려놓을 참이야?”
“에이, 뒷간 갈 때 마음, 나올 때 마음 다르죠. 그때야 이미지메이킹에 혈안이 되었을 시절이고요. 유일한 후계자로 낙점이 된 이상 그럴 필요도 없어요.”
“으음…….”
“이제 비바체가 아니라 그룹 전체를 보는 위치에 올라갔어요. 허울 좋은 윤리경영보다는 빠듯한 살림 알뜰하게 꾸려나가길 원할 겁니다.”
“어찌 그리 자신해.”
“당장 제 앞에 앞에 부문장 하던 도진석인가 하는 사람을 생각해봐요.”
김풍호 대표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경품 어쩌고 때문에 날아갔지.”
“네, 그거 알아보니까 서원웅 실장이 대표 시절에 인지하고도 묵인했던 일이던데요?”
“맞아.”
홍웅표 부문장은 입술을 씰룩였다.
“조대찬 이사가 그때 부랴부랴 무마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도진석하고 세트메뉴로 날아갈 뻔했어요.”
“그건 그렇지.”
“이미 비바체 대표 시절부터 윤리경영보다는 효율경영에 귀가 솔깃하던 양반이에요. 이제 비바체 대표도 아니겠다, 그룹 전체의 살림을 걱정하는 위치에 갔겠다, 당연히 윤리경영보다는 우리 쪽에 관심을 보일 겁니다.”
“으음, 서원웅은 그렇다 치고, 회사 내부 반발은 불식시킬 수 있겠어?”
“조대찬 바라기들일 뿐이에요. 이미 조 이사 코가 석 자인 이상, 지들이 뭐 어쩔 건데요?”
“그래도 옥문영이 같이 괴팍한 부류도 있잖아. 홍 전무 당신 뽑을 때도 축소지향적인 면모가 회사 기류하고 다르네 어쩌네 해서 반대의 말이 많았단 말이야.”
“저도 압니다. 이 보고서가 제안하는 방식은 축소지향하고는 거리가 멀어요.”
“그러지 않고 적자폭을 어떻게 개선하나?”
홍웅표 부문장은 씩 웃었다.
“이 보고서의 주장을 사자성어로 만들어보자면 신부구빈(新富舊貧)이라고나 할까요.”
“뭔 소리야, 그게.”
“새롭게 추진하는 신사업은 부유하게, 기존에 이미 자리를 잡은 구사업은 알뜰하게.”
“신부구빈이라.”
홍웅표 부문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트부문하고 택배부문이 합작해서 추진하는 온라인 마켓, 필드업을 중심으로 하는 대형 테마쇼핑몰, 이 두 가지가 우리 회사의 핵심 신사업이죠.”
“그렇지.”
“이 두 가지에는 투자를 아끼지 말자고요.”
“그럼 구사업이라 하면.”
“기존의 필래마트 오프라인 점포나 전통적인 택배업무 따위가 되겠죠. 이쪽은 확 알뜰하게 가자는 겁니다.”
홍웅표 부문장의 말이 김풍호 대표의 귀에 그럴 듯하게 들렸다.
“하긴, 기존의 점포는 세일 앤드 리스백(Sale and lease back·보유한 건물을 매각하고 그 건물을 다시 리스하는 것) 형태로 전환해서 당장의 현금을 확보할 수도 있고.”
“그렇죠. 방법이야 여러 가지를 강구할 수 있죠.”
“딱 조 이사가 견제구 던질 만한 계획이구만. 그래서 일부러 이때를 노린 건가?”
홍웅표 부문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 타이밍이면 조대찬이도 뭐 별 수 없죠.”
“음, 좋아. 하지만 그래도 꺼림칙하단 말이야. 조 이사 퍼포먼스는 보통의 범주를 뛰어넘거든.”
“예, 그래서 저도 보통의 범주를 뛰어넘는 계획을 마련했습니다.”
김풍호 대표는 막힘없는 홍웅표 부문장의 말에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얼른 말해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조 이사의 발목을 붙들어둘 방법이 있습니다.”
홍웅표 부문장은 차근차근 설명했다.
대찬의 미국 일정은 5박 6일이었다.
그는 이미 한 차례 척을 졌던 그린블러드 미트 사를 제외한, 미국의 배양육 업체 다섯 곳의 관계자와 차례로 만난 후 귀국했다.
큰 결실은 없었지만 정부와 국회, 그리고 축산업 관계자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략적인 단서는 얻을 수 있었다.
한 달 일정으로 외국에 나가있겠다고 한 건 거짓이었다.
대찬은 귀국 사실을 로튼 프룻츠의 관계자 몇 명하고만 공유했다.
서울의 로튼 프룻츠 사무실로도 출근하지 않았다.
그의 귀국편도 인천 착륙이 아니라 김해 착륙이었다.
그는 일본을 경유해 김해공항에 내려, 중림대 연구실로 향했다.
오너가 갑자기 내방하자 연구실 사람들도 적잖이 놀라는 기색이었다.
은오영 교수는 놀란 눈을 끔뻑거렸다.
“연락도 없이 무슨 일로…….”
“당분간 여기서 숙식을 해결하려고요. 라꾸라꾸 비어요?”
“…당분간이라고 하시면.”
“정해진 기한은 없어요.”
은오영 교수는 뚱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면 차라리 호텔을 잡으시죠.”
“동선이 외부에 노출되면 안 돼서요. 여기까지 나를 추적할 정도의 정성은 없겠지만 제가 좀 유난스럽잖아요.”
“…그래서 기약 없이 연구실에서 먹고 자고 하시겠단 뜻입니까?”
대찬은 난감한 듯 웃었다.
“너무 싫은 티 내시는 거 아니에요?”
“그럼 누가 좋아하겠어요. 사장님이 24시간 감시하겠다는데.”
“언젠 뭐 사장 대접이나 해줬습니까. 그냥 라면 몇 개만 축내고 쥐 죽은 듯 있을게요. 부담 가지지 마세요.”
“부담은 안 가지려야 안 가질 수가……!”
“이 침대, 빈 거죠?”
대찬은 은오영 교수의 말을 가볍게 차단하고 빈 침대에 몸을 눕혔다.
은오영 교수는 땡감을 베어 문 표정을 지었다.
대찬은 중림대 연구실에 머물면서 로튼 프룻츠와 필래 비바체의 업무를 처리했다.
젊은 연구원들은 위상이 미미했다.
은오영 교수처럼 대찬에게 싫은 기색조차 보일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대찬의 존재가 정말 부담스러울 터였다.
대찬은 그들을 의식했다.
그는 아예 연구실 한 구석에 딸린 작은 공간에 부스를 설치하고 그 안에서 업무를 처리했다.
그런 대찬의 귀에 속속들이 필래 비바체의 소식이 도착했다.
물론 주요한 소식통은 허운이었다.
소식통으로서 허운의 장점은 충분했다.
다른 이들은 대찬을 어려워하는 마음이 조금씩은 있었다.
그래서 들어온 소식을 날것으로 전하지 못하고 조금 윤색을 한다든지 좋은 말로 포장한다든지 하는 작업을 거쳤다.
그런데 허운에게는 이런 면모를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조금의 가감도 없는, 자기가 들은 그대로를 대찬에게 전달했다.
그렇기에 다른 쪽으로는 몰라도 메신저로서의 기능은 아주 탁월했다.
“나 없으니까 회사 분위기 좀 어때?”
“완전 널널하고 좋은데? 앞으로 한 반 년만 밖에 나가계시면 안 돼요?”
“…당신 분위기 말고 회사 전체적인 분위기 말이야.”
“전체 분위기는 뭐 좀 다를 거라고 기대하는 거예요? 높은 자리 앉아서 채찍질하던 양반이 사라지니까 한시적 노예해방 상태지, 뭐.”
“그럴 리가 없어.”
“우리 조 이사님은 자기객관화를 좀 하실 필요가 있어요.”
“장난치지 말고!”
대찬의 언성이 높아지자 소기의 성과를 달성한 허운은 흐흐 웃었다.
“아랫것들이야 뭐 매한가지죠. 어차피 이사님이 궁금하신 것도 김 대표하고 홍 전무 쪽 사정 아니에요?”
“맞아.”
“저도 그 양반들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입장은 아니라 확실하지는 않지만요. 우리 조 이사님 없는 사이에 이것저것 일을 벌이는 모양이에요. 아직까지 큰 건더기는 없는데.”
“큰 건더기를 준비하는 중이겠지.”
“아, 맞다. 조만간에 사장단회의 소집된다고 하던데요.”
“전체계열사?”
“아뇨, 서비스업 계통 계열사 사장들만 모인다고 하네요. 김풍호 대표가 건의해서 소집되는 자리래요.”
“지난번에 홍웅표 부문장 회심의 역작이라던 그 보고서를 중점적으로 다룰 모양이네.”
대찬은 홍웅표 부문장이 만든 보고서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
“그 보고서, 뭐 적자를 부풀리긴 했지만 아주 가망 없는 생각은 아니지 않아요? 나름 설득력이 있던데.”
“말이야 괜찮은 말이지. 근데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을 했다지만 결국 실적개선의 종착역은 쥐어짜기야.”
“상황이 어려우면 허리띠 졸라매야지 별 수 없죠.”
“당신은 누구 편이야? 내 편 아니었어?”
“어, 지금 그 말씀, 파벌을 조장하시는 건가요……?”
대찬은 쯧, 불편한 듯 혀를 차고 말했다.
“내 허리띠 졸라매면 다행이지만 그럴 리가 없지. 비바체에 딸린 협력업체가 어디 한둘이야? 내 허리띠 졸라매는 건 남의 허리띠 졸라맨 다음이야. 아니, 허리띠도 모자라서 남의 목 졸라맨 다음이라고.”
“으음…….”
“사장단회의 소집을 제안했다는 건, 그 보고서를 서원웅 실장한테 직접 허락받겠다는 뜻인데.”
대찬은 곰곰이 무언가를 속으로 따지다가 허운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