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91화
부서 별 자율업무제를 실시할 뿐이다.
회사 동료들 간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사적인 자리를 많이 만들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말하면 오히려 시비를 건 쪽이 이상한 사람이 된다.
따라서 홍웅표가 곪기 전에 도려내려면 어쩔 수 없이 치사하고 음흉하고 교묘한 술수를 시도해야 한다.
그러나 대찬에게는 그럴 의사도 여유도 없었다.
대찬은 일단 필래 비바체 내부의 안테나를 홍웅표 쪽으로 바짝 세워놓았다.
오다혜는 물론, 가깝고 입 무거운 사람들에게 주문하여 홍웅표 부문장의 동향을 지켜볼 뿐이었다.
홍웅표 부문장은 도진석처럼 막나가지 않았다.
얄미울 정도로 선을 지켰다.
대찬을 뒤에서 씹어대는 몇 마디 말이 새어나가는 걸 제하고는, 그의 행보는 철저히 물 밑에서 진행되었다.
수면 아래 몸을 감추고 야금야금, 김풍호 대표의 세력을 불려나갔다.
서원웅-조대찬 체제에서 물을 먹고 변방으로 물러나있던 이들이 슬금슬금 다시 세를 결집했다.
작금의 상황에 허운은 잔뜩 뿔이 났다.
대찬이 내야 할 화를 그가 대신 내주는 듯했다.
“이사님, 저것들 그냥 보고만 있을 겁니까?”
“저것들이라니, 사외이사실 직원들 언어생활이 부쩍 험해졌네. 엄연히 허 과장 상사들이에요. 상사도 그냥 상사인가. 회사 원투 펀친데.”
“이사님은 속도 좋으십니다. 지금 하루하루 홍웅표가 이사님 영역을 갉아먹고 있는데, 그냥 가만히 앉아서 갉아 먹힐 요량이세요?”
“허 과장이 그렇게 안 쪼아대도 지금 쪼는 사람 많거든요.”
“쪼이셨으면 행동에 좀 들어가시는 게 맞는 순서 아니겠습니까?”
대찬은 고개를 들어 허운을 똑바로 바라봤다.
눈빛이 엄해서 허운은 저도 모르게 주춤,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어설프게 굴었다가는 내 입지가 위태로워져. 그럼 형도 어쩔 수 없이 휘청거릴 텐데, 그거 감수하고 멧돼지처럼 들이받을까?”
“그, 그런 뜻은 아니고요. 이사님한테 도전하는 건 서원웅 실장한테 도전하는 거랑 마찬가지 아닙니까? 차라리 서원웅 실장님께서 직접 나서도록 하는 것이…….”
대찬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양반은 이제 일개 계열사 일에만 골몰할 수 없는 처지거든요.”
“아, 그거야 알죠.”
“비바체 걱정 안 하게 해달라고 나한테 신신당부를 하고 갔는데, 나더러 쪼르르 달려가서 김풍호, 홍웅표 쥐어박아달라고 조르란 겁니까?”
“그래도 서원웅 실장님도 지금 상황을 썩 좋게 보시진 않을 걸요. 자기 라인 내치고 김풍호 대표가 옛날 도진석 라인들 모으고 있는데.”
대찬은 팔짱을 끼고 의자를 뒤로 젖혔다.
“서승학이하고 아웅다웅 할 때나 라인이 중요했지, 이제 필래그룹 50개 계열사가 손아귀에 다 들어온 마당이야.”
“물론 필래그룹 전 직원이 서원웅 실장 라인이긴 하겠죠.”
“그래, 김풍호든 조대찬이든 경영만 잘하면 그만인 입장이라고.”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인데…….”
“내가 먼저 사표 쓰고 필래 박차고 나갔어요. 서원웅 실장이 자기 뒤도 제대로 못 닦는 사외이사를 굳이 무리해가면서 도울 이유가 없거든요.”
“…….”
“태양은 볕이나 쪼이면 그걸로 제 할 일 다 하는 거예요. 지구가 한겨울이라고 태양이 궤도 이탈해서 지구 쪽으로 가까이 붙는 거 봤어요? 춥다가도 봄바람에 몸 녹이는 날이 알아서 옵니다. 그때까지만 조금 참자고요, 알겠어요?”
“…예.”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아무리 신중한 쥐새끼라도 사람이 수수방관하고 있으면 점점 과감해지는 법이야. 그렇게 치면 지금 우리가 가만히 있는 것도 전략적 방관이지.”
“그럼 방관하다가 쥐새끼가 선을 넘으면…….”
허운은 침을 꼴깍 삼키면서 말끝을 흐렸다.
대찬은 웃으면서 책상을 손바닥으로 탁 내리쳤다.
“작살을 내야지.”
대찬은 이사회에서 종종 김풍호 대표와 만났다.
홍웅표 부문장의 선임 이후, 김풍호 대표는 유독 대찬의 얼굴을 살폈다.
대찬은 홍웅표 부문장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았다.
이사회는 보통 대표가 주도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잘 쳐줘봐야 경영에 깊이 관여하는 사내이사들.
사외이사들은 외부에서 영입된 샌님인 케이스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대개의 사외이사들은 경영 자체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이사회에 참석해서 대충 찬성표를 던져주고 고액 연봉을 꿀꺽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필래 비바체의 이사회는 사뭇 양상이 달랐다.
대찬은 혁신전략팀장에서 사외이사로 물러나 앉은 뒤, 적극적으로 자신의 소임을 해냈다.
그건 로튼 프룻츠에 주력하겠다는 선언을 하고서도 상당한 권한을 유지시켜준 서씨 집안에 대한 최소한의 의리였다.
더불어 필래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당연한 자구책이었다.
김풍호 대표 역시 홍웅표 부문장을 앉히면서 자신의 세력을 늘려가는 와중이었지만, 여전히 대찬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대찬의 합의를 얻지 못하면 자신이 정한 지침이 제대로 준수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필래 비바체의 이사회는 의례적인 기구를 넘어, 실질적인 의결회의체였다.
대찬은 자기 권한에 맞는 능력과 노력을 보여 왔다.
그는 필래 비바체의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김풍호 대표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치밀한 논리를 준비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대찬의 반론에 자신의 뜻을 꺾을 수밖에 없으니.
이번 이사회에서도 김풍호 대표는 긴장감을 품었다.
특히 홍웅표 부문장의 일로 대찬의 심기가 유독 불편하리라 여겼다.
그런데 겉으로는 대찬의 언행에는 변함이 없었다.
지레 찔린 김풍호 대표는 험험 헛기침을 하고 이사회의 개회를 선언했다.
그는 안경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이번 필드업 청주점 신축과 관련해서 협력사인 타이거 디벨롭먼트에서 신규투자를 제안했습니다. 규모를 한번 확 키워보자는 뜻인데, 이와 관련해서 이사님들 생각은 어떠신지 들어보겠습니다.”
이사회의 방식은 으레 이랬다.
안건을 대표이사인 김풍호가 먼저 언급한다.
그 다음은 으레 대찬이 입을 열어 김풍호 대표의 의중을 먼저 묻고, 그 다음에 자신의 소회를 밝히는 식이었다.
김풍호 대표는 그런 방식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었다.
김풍호 대표의 의견을 먼저 들은 다음에야 자기 의견을 밝히는 대찬의 화법은 무적이었다.
항상 공세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었다.
대표의 말을 먼저 듣고 허점을 파악해서 그걸 파고 들었다.
김풍호 대표는 거기에 대해 가진 지식과 정보를 동원하여 해명 비슷한 식으로 방어에 나서야 했다.
만일 해명이 엉망이라면 대찬이 다시 파고 들었다.
그럼 끝내 김풍호 대표는 뜻을 꺾어야 했다.
해명을 잘해도 대찬이 심드렁한 얼굴로 그랬느냐며 찬성표를 던져주는 식.
그러니 김풍호 대표의 입장에서는 잘해야 본전에 불과했다.
반대로 대찬에게는 밑져야 본전이었다.
그렇다고 화두를 던지는 역할을 대표인 자신이 아닌 사외이사인 대찬에게 맡길 수도 없었으니 김풍호 대표의 답답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날 역시 필드업 청주점의 신규투자에 대한 화두를 김풍호 대표가 먼저 던졌다.
이제 대찬이 김풍호 대표의 의중을 물어올 차례였다.
그런데 대찬은 그러는 대신 당혹스러운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청주점에 대한 신규투자요?”
“예? 예.”
“이미 대전에 한 곳이 있는 마당에 세종점까지 신축에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청주점의 규모를 키우는 건 좀…….”
그 말에 부문장이 되면서 등기이사로 선임된 홍웅표 부문장이 말했다.
“조 이사님, 세종점 신축 계획은 이미 백지화되었습니다.”
“백지화되었다고요?”
“…예.”
대찬은 당혹스러운 듯 잠깐 침묵했다.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홍웅표 부문장을 바라봤다.
“아, 그랬었죠. 잠깐 착각했었군요.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예, 그러실 수도 있죠. 대전이 청주하고 가깝긴 하지만 같은 광역권으로 묶을 수는 없습니다. 투자할 가치는 충분하다고 봅니다만.”
“예예, 그럼 저는 찬성하겠습니다.”
대찬은 어영부영 찬성표를 던지며 얼렁뚱땅 의제를 넘겼다.
홍웅표 부문장은 눈빛을 벼리며 대찬의 표정을 찬찬히 살폈다.
대찬은 그날 이후로 이사회에도 뜸하게 출석했다.
그리고 뜸하게 출석하는 이사회에서도 부쩍 말수가 줄었다.
의결과정에 깊숙이 개입하던 태도가 사뭇 달라졌다.
이전처럼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디테일에 숨어있는 문제점을 짚어내지 못했다.
김풍호 대표가 홍웅표 부문장을 앞세워 점점 주요 보직을 자기 사람으로 채워가고 있었다.
대찬의 자산은 자신이 재직하던 시절의 평판과 자취, 그리고 이사회에서 일당백으로 발휘되어야 할 개인기였다.
그런데 서슬 퍼런 칼날이 서서히 무뎌진다.
김풍호 대표를 상대하기에 슬슬 힘에 부쳤다.
지금은 사내에 가진 입지로는 대찬이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자기 세를 불리지 못하고, 갖고 있는 세를 까먹기 시작하면.
승패야 시간문제였다.
김풍호 대표는 이사회에서 넌지시 대찬에게 물었다.
“요즘 바쁘세요?”
“무슨 의도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돌아오는 대찬의 말이 사뭇 신경질적이었다.
김풍호 대표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의도라뇨, 하하. 그냥 조 이사님이 요새 좀 바빠 보이셔서. 원래 이사회도 개근하셨잖습니까. 그런데 요즘은 종종 불참하셔서 여쭤봤습니다.”
“로튼 프룻츠 쪽 일이 좀 바쁘긴 합니다. 하지만 제가 이사회에 몇 번 빠졌다고 비바체 일에 소홀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예, 물론이죠. 그냥 안부 삼아 여쭤봤는데 조금 날이 서있으시네요.”
“그렇게 느끼셨다면 사과드리죠.”
그러나 비바체 일에 소홀할 일이 없을 거라던 대찬의 말은 불과 몇 분 만에 민망하게 되었다.
응당 파악하고 있어야 할 사실관계에 대찬은 다시 착오를 일으켰다.
홍웅표 부문장은 그를 보고 이제 이를 드러내며 노골적으로 조롱했다.
“아유, 이사님 요새 눈코 뜰 새가 없으신 모양이네요. 사외이사에게 주어진 이상으로 해내실 필요가 없어요. 지금까지 억대 연봉이 짜게 느껴질 정도로 열심히 하셨어요. 이젠 좀 짐을 내려놓으시는 게…….”
“…부문장님, 말씀이 조금 듣기 거북하네요.”
“아, 그렇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대표님이 걱정돼서 한 말일 뿐이었는데.”
대찬은 불쾌감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자리를 떴다.
홍웅표 부문장은 김풍호 대표와 따로 만난 자리에서 웃었다.
“조대찬이 감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졌던데요.”
“총명하던 인간이 갑자기 왜 그러는지 몰라.”
“제가 로튼 프룻츠 상황을 조금 알아봤어요. 그럴 만하던데요.”
김풍호 대표는 홍웅표 부문장을 흘끗 바라봤다.
“그럴 만하다니.”
“붐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로튼 프룻츠에 돈다발 싸들고 오는 투자자들이 넘친다데요.”
“그 소식은 나도 듣긴 했는데.”
“본격적으로 비도축육인지 배양육인지에 전력투구하는 모양이에요. 게다가 상용화 이전에 반드시 풀어야 할 문제가 있잖아요.”
“무슨 문제?”
“비도축육에 대한 법제화요. 국회에서 비도축육을 고기로 인정해줘야 본격적으로 장사를 하죠. 그게 아니면 가짜 고기에 불과하잖아요.”
“음, 그렇지.”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 열심히 만나고 다니는 모양이에요. 그런 상황에서 우리 회사 상황을 속속들이 꿰뚫어 볼 순 없죠. 아무리 그 치가 총명하다고 해도.”
“하기야 욕심이지. 그러게 자기 본업에나 충실할 것이지 이 덩치 큰 회사 경영에까지 간섭하려고 들어, 들기는.”
홍웅표 부문장은 씩 웃었다.
“양손으로 젓가락질 하려니 머리가 깨질 지경이겠죠. 아무튼 대표님께는 호재예요.”
“그건 그래. 요 며칠 조 이사 얼이 나간 덕분에 몇 차례나 코가 납작해졌으니.”
“이 호재를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정도에서 끝내는 건 낭비예요. 이 정신없는 상황이 얼마나 오래갈지 알 수가 없어요. 조 이사 정신 돌아오기 전에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됩니다.”
“할 수 있는 일?”
홍웅표 부문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 보장된 임기는 2년입니다.”
“그런데.”
“2년 안에 대표님 실적을 숫자로 증명해야 해요. 그러려면 지금 담금질 들어가야죠.”
김풍호 대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조 이사, 자기 텃밭에 고구마 캐느라 정신없어요. 우리도 그 참에 조대찬이 일궈놓은 밭 갈아엎고 우리 씨앗 뿌려야죠.”
“무슨 씨앗을 뿌릴래.”
“맡겨주세요. 그러려고 그 굴욕 감내하고 저 데려다 이 자리에 앉히셨잖아요.”
“무리수를 둬선 안 돼. 선을 넘으면 조대찬도 고구마 캐다가 이쪽으로 후다닥 달려올 거야.”
“알죠, 알다마다요.”
홍웅표 부문장은 씩 웃었다.
그날 저녁.
그는 홍승연과 단둘이 만났다.
홍승연은 웃으면서 홍웅표 부문장에게 말했다.
“찬바람 쌩쌩이더니 갑자기 날 찾아요?”
“쌩쌩은 김풍호 대표님이 그랬죠. 저는 홍씨끼리 그래도 의견이 잘 맞았다고 생각했는데요?”
“어차피 부문장님이야 김 대표 따라가는 거 아니에요?”
“아유, 우리 풍호 형님, 그렇게 독재자 같은 스타일 아닙니다. 그리고 사모님께 쌀쌀맞게 보인 건 대표님이 경력에 비해 대인관계에 좀 서툴러서 그런 거예요. 사모님께 냉랭할 이유가 없잖아요, 따지고 보면.”
“이런저런 잡설은 됐어요. 왜 보자고 했어요?”
홍웅표 부문장은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