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90화
서청수 회장의 목숨값을 담보로 하여 사외이사 자리를 얻어냈다.
그러나 목숨값은 자리를 얻어내는 것까지에 불과했다.
그걸 보전하는 일은 별개의 문제였다.
지금이야 서청수 회장이나 서원웅이나 대찬에게 더없이 두터운 신뢰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천년만년 유지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바보다.
그들과의 연이 끊기는 경우에도 가진 입지와 권위는 유지되어야만 했다.
그러자면 자리를 뛰어넘는 존재감을 발휘할 필요가 있었다.
대찬은 전체사원회의를 그 교두보로 삼았다.
사외이사에게 허락된 이사회를 벗어나 필래 비바체 임직원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자신의 권위와 역할을 그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막후의 실력자라는 인식을 각인시켰다.
그리고 경영진과 직원들 사이의 꼬인 실타래를 중재하고 풀어낼 유일한 적임자가 자신이라는 것 또한 알렸다.
이건 자리를 뛰어넘는 대찬의 자산이 될 것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내고 영향력을 유지, 발전시켜 나가야만 가망이 있다.
중국과 대만이 앙숙의 관계로 서로를 노려본 지 이미 수십 년이 지났다.
중국은 미국에 버금가는 강국이 되었지만 여전히 대만과 으르렁거릴 뿐, 쉽게 잡아먹지 못한다.
왜 그럴까.
대만을 힘으로 제압하려면 자신도 상당한 손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까닭이다.
대만은 중국을 제압할 힘은 없지만, 중국 동남부의 주요 시설들을 타격할 미사일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일례로 대만의 슝펑 미사일이 세계 최대의 싼샤 댐을 폭격하면.
수백만의 사상자와 배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할 것이다.
중국은 그럼에도 끄떡없을 것이라고 자신하지만 실제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
이렇듯 강자에 대항하여 약자는, 나를 죽일 순 있지만 너도 무사하지 않을 것이라는 비례억지전략을 채택한다.
사외이사라는 자리는 슝펑 미사일이 되지 못한다.
그것을 뛰어넘는, 대찬이 고꾸라지면 필래 비바체에게도 큰 상처가 남을 수밖에 없을 정도의 존재감과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
그것만이 대찬의 유일한 비례억지전략이 될 것이었다.
전체사원회의를 마치고 옥문영 상무와 식사를 마친 대찬은 사외이사실로 돌아왔다.
대찬을 본 허운은 쪼르르 사외이사실로 따라 들어왔다.
으레 있는 일이기에 대찬은 심드렁하게 퉁을 놨다.
“일해요, 일해.”
“멋진 한 수였습니다, 이사님. 스포트라이트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기가 막힌 처세술.”
“김풍호 대표 도우려는 의도였을 뿐이거든요. 곡해 마요.”
허운은 자리를 깔고 앉으면서 흐흐 웃었다.
“에이, 저한테도 솔직하지 못하시면 누구한테 솔직하시겠어요.”
“가서 일보라고 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김풍호 대표님이랑 파워게임 들어가는 겁니까?”
대찬은 끊임없이 조잘거리는 허운을 보고 스읍, 무언의 경고를 했다.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한 글자라도 나불거려 봐요. 사내 기강 문란으로 확 잘라버릴 테니까.”
“제가 어딜 가서 그런 소릴 하겠어요. 저도 불안하니까 그러는 거 아니겠어요?”
대찬은 허운에게 눈을 흘겼다.
“허 과장이 왜 불안해?”
“홍웅표 부문장이 대표님하고 운명공동체이듯 저도 이사님하고 운명공동체잖아요. 파워게임에서 이사님이 지면 제 모가지도 뎅강이란 말입니다.”
대찬은 피식 웃었다.
“어딜 일개 과장이 부문장하고 동급으로 엮이려고 그래요?”
“솔직히 가까운 걸로 치자면 또이또이 아닙니까.”
“또이또이는 얼어 죽을. 빨리 가서 일 안 하면 근무태만으로 고과 더럽게 줍니다.”
“에휴, 갑니다, 갑니다요.”
허운은 투덜거리며 대찬의 앞에서 물러났다.
대찬은 볼펜으로 결재서류를 톡톡 건드리며 고심했다.
허운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김풍호 대표와 파워게임이 붙으면 비단 연루되는 건 대찬 본인뿐만이 아니었다.
허운을 비롯해 한태윤 부장 등등.
대찬과 한 가지로 묶이는 사람들 역시 유탄을 맞을 것이다.
‘역시 무탈하게 흘러가는 편이 좋겠지.’
대찬은 얕은 한숨을 쉬고 밀린 결재서류에 사인을 했다.
김풍호 대표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며 홍웅표를 부문장 자리에 앉혔다.
대찬에게 반사이익을 제공하면서까지 홍웅표를 부문장에 앉힘으로써 김풍호 대표도 자기 세력을 만들었다.
김풍호 대표는 외부영입인사로서 외로운 섬이었다.
월드몰 출신과 필래 출신이 주류를, 아니 전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득시글거리는 판국에 김풍호 대표의 존재는 이질적이었다.
그런 그는 홍웅표 부문장을 다리 삼아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 자기에게 오도록 했다.
홍웅표 부문장이 하자가 다분한 인사임에도 그를 끌어다 앉힌 건 단지 그가 위마트 시절부터 친분이 두텁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그의 능력이 탁월한 까닭이었다.
탁월한 능력은 업무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을 다루는 데 그는 탁월했다.
홍웅표 부문장은 취임하자마자 실무를 부문 산하의 팀장들에게 일임했다.
그는 마트사업부문 산하 부서장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선언했다.
“저는 상위부서가 큰 덩어리로 이끌어가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필드를 존중할 겁니다. 각 부서에게 최대한의 자율을 보장할 겁니다. 보고서도 최대한 간단히, 요점만 전달하세요. 서식, 필요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방침을 부서주도 자율업무제라고 거창하게 불렀다.
이점은 분명히 있으나 깔린 의도는 업무효율보다는 자신의 업무를 경감하는 데 있었다.
그는 그렇게 발생한 여유를 사람을 관리하는 데 썼다.
위아래 가리지 않고 그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가 만나지 않는 사람들 몇몇이 있었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완벽한 조대찬 이사의 사람으로 분류되었다는 것이었다.
옥문영 상무 이하, 한태윤 부장과 허운, 유채경 과장 등등은 홍웅표 부문장의 만남 리스트에 존재하지 않았다.
주당에게는 술을 사주고.
약골에게는 보약을 사주고.
수석애호가에게는 수석을, 식도락가에게는 값비싼 점심을 사주고.
그는 닥치는 대로 돈과 시간을 써가며 사람들을 포섭했다.
그렇게 홍웅표 부문장의 작업이 지속된 며칠 후, 김풍호 대표는 두 번째 인사를 단행했다.
택배사업부문장에 월드몰 출신의 이사를 임명했다.
그는 사내에서 ‘범친도’로 분류되었다.
대찬의 손에 갈려나간 도진석 전무의 계파를 ‘친도’라고 했다.
그런데 어정쩡하게 친한 이들 앞에는 ‘범’자가 붙었다.
대찬이 숙청의 칼날을 휘두를 때, ‘범친도’로 분류된 그들은 목을 잔뜩 움츠렸으나 요행히 무자비한 조치는 면제되었다.
다만 그 이후 출세와는 영 거리가 멀어졌다.
홍웅표 부문장은 범친도로 분류된 임원들 중에서 듣는 귀 밝은 이사를 잘 구워삶았다.
범친도가 이제 김풍호 대표의 사람, 그러니까 범친도 식으로 말하면 ‘친풍’이 되었다.
그들이야 대찬의 권세 앞에서는 파리 목숨이었으니 어디에라도 비빌 언덕이 필요했다.
그때 뻗어온 홍웅표 부문장의 손은 그야말로 구원의 손길이었다.
김풍호 대표는 대찬이 떠난 이후로 유명무실해졌던 혁신경영팀에 다시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혁신경영팀장에 역시 범친도 출신의 부장을 임명했다.
여타 다른 요직들도 마찬가지.
필래 비바체의 수뇌부는 거의 전원이 교체되었다.
이제 수뇌부에서 이질적인 존재는 김풍호 대표가 아니라 옥문영 상무가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옥문영 상무는 심드렁했다.
어차피 그녀가 대찬과 가깝게 지내는 것은 인간적인 호감 때문이지 출세욕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 직분에만 충실할 뿐이었다.
홍웅표 부문장은 김풍호 대표 앞에서 말했다.
“사실 다른 자리보다도 경영지원부문장 자리가 완전 알짜인데 말이죠.”
“그야 그렇지. 인사팀이며 재무팀이며 다 그쪽 밑에 줄줄이 사탕으로 있으니.”
“저 고졸 암컷 산도야지도 도려내야지요.”
김풍호 대표는 고개를 저었다.
“옥문영이는 조대찬 이사의 역린 같은 존재야. 잘라내면 조 이사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세상 참 좋아졌다. 손에 기름때나 묻히던 게 부문장은 무슨 부문장.”
“홍 전무도 밖에선 입조심해. 괜한 트집 잡히면 골치 아파져.”
“아무렴요. 그 정도 사리분별이야 당연히 하죠.”
“우린 살얼음판을 걷는 거야. 조 이사는 잠자는 사자야. 사자가 잠 안 깨는 선에서 살금살금 움직여.”
“옙, 형님. 근데요.”
김풍호 대표는 미간을 찌푸렸다.
“옙, 형님까지만 해. 왜 또 사족을 달아.”
“어차피 조 이사하고 한 따까리 안 할 수가 없거든요.”
“무슨 소리야.”
“대표님 경쟁자는 차고 넘쳐요. 필래에 계열사가 몇 갠데요.”
“근데.”
“거기서 눈에 띄어야 중심으로 진출할 수 있다고요.”
김풍호 대표는 팔짱을 낀 채 잠자코 홍웅표 부문장의 말을 들었다.
홍웅표 부문장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러려면 딱 눈에 보이는 업적이 있어야 되거든요?”
“비바체는 지금 가만히 놔둬도 잘 굴러가고 있어.”
“그러니까 그게 문제죠! 지금 이 그림은 조 이사가 다 그려놓은 거 아니에요?”
“…그렇지.”
“이대로 잘 굴러가기만 하면 이게 조 이사 공이 되지 대표님 공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실제로도 그렇고.”
김풍호 대표는 다소 불편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대표님만의 확실한 색깔을 보여줘야죠. 메이드 프롬 김풍호, 딱 내세울 수 있는. 그러려면 조 이사하고의 갈등은 필연이에요. 조 이사는 이대로 자기 그림대로 굴러가기를 원할 테니까.”
“…….”
“대표님도 승부를 두려워해서는 안 돼요. 그럼 영영 조대찬이 그림자에 가려져서 계약기간 끝나면 야인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어요.”
“아직 때가 아니라고 했다.”
“예, 그렇죠. 근데요, 칼날에 항상 기름을 쳐놔야 돼요. 녹이 안 슬게. 그래야 언제가 됐든 승부의 때가 오면 바로 칼을 빼 들죠.”
“알았어.”
“기름칠은 제가 잘 해놓을 테니 대표님은 경영에만 신경 쓰세요.”
“방종은 금물이야.”
“아이고, 그만 좀 말씀하세요. 알았다니깐.”
홍웅표 부문장은 웃음을 머금었다.
대찬은 김풍호 대표의 행보를 예의주시했다.
로튼 프룻츠의 일이 바빴지만 신경을 안 쓸라야 안 쓸 수가 없었다.
‘인사권은 당연히 김풍호한테 있는 거지만 갈아치우는 속도가 너무 빠른데.’
대찬은 김풍호 대표의 권한에 도전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대찬이 애써 쳐냈던 도진석의 끄나풀들이 다시 뭉게뭉게 모여드는 모습이 썩 내키진 않았다.
들리는 풍문도 영 달갑지 않았다.
사내 여직원들을 모두 다 알고 지내는 오다혜가 낮에는 새가 되고 밤에는 쥐가 되어 대찬에게 말을 전해주었다.
“요즘 홍웅표 부문장님이 그야말로 광폭행보를 보인다네요.”
“광폭행보?”
“네, 부장급 이상은 전부 일 대 일로 술을 마셨대요.”
“바람직한 분이시네.”
“그렇게 속편한 말씀 하실 때가 아니에요. 들리는 소문이 불온하다구요.”
“불온하다니.”
“지금껏 조 이사 서슬 퍼런 칼날에 바들바들 떨던 세월을 청산하자. 이제는 쥐구멍에서 나와 빛 좀 보자. 뭐 그런 얘기를 떠들고 다닌다나 봐요.”
“…….”
대찬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에서 뜨거운 게 울컥했다.
오다혜 역시 적잖이 대찬에게 감정이입을 한 모양이었다.
“이사님 아니었으면 부문장 자리에 앉지도 못했을 양반이 뒤에서는 칼을 꽂고 다닌다니까요.”
“오 대리도 말조심해야지. 누가 들으면 나무라겠어.”
오다혜는 입을 삐죽였다.
“나무라려면 그러라죠. 없는 소리 한 것도 아니고.”
“참, 본의 아니게 여러 사람 사내정치에 휘말리게 했네. 미안해요.”
오다혜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사님도 가끔 보면 참 야누스예요.”
“웬 야누스.”
“언제는 상사믹서기였다가 지금은 또 아주 물러터지기가 홍시 수준이시잖아요.”
대찬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어떡해요? 난 끈 떨어진 일개 사외이사일 뿐인 걸.”
“그러시면서 속으로는 복수의 믹서기 칼날을 갈고 계시겠죠?”
“아유, 아니라니까. 대표하고 부문장이 날 죽일 작정이라면 그대로 죽어야지, 도리가 없어.”
“정말요?”
대찬은 잠깐 침묵하다가 오다혜에게 말했다.
“앞으로 김풍호 대표, 홍웅표 부문장 관련해서 들리는 말은 들리는 족족 나한테 보고해줘요. 24시간.”
오다혜는 대찬의 분부에 흐흐 웃었다.
“그러실 줄 알았어요.”
대찬은 그렇게 분부하긴 했지만 필래 비바체의 아사리판에 전념할 여유가 없었다.
로튼 프룻츠의 일이 급했다.
필래 비바체가 대찬의 최우선이었다면 홍웅표 부문장의 수상한 짓거리를 방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에 일일이 견제구를 던지기에는 너무 바빴다.
확실한 건수가 잡히면 단칼에 조치를 취했겠다.
그러나 또 그러기에는 홍웅표 부문장의 행보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명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