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89화
김풍호 대표는 대찬의 말이 지원사격인 동시에 등 뒤에 총부리를 들이대는 것임을 직감했다.
“홍웅표 씨는 이 자리에서 지금껏 우리가 지켜온 필래 비바체의 경영철학을 철저히 준수하겠다고 밝히셨습니다. 그렇지요?”
우리가 지켜온 필래 비바체.
대찬의 말은 어느새 필래 비바체의 사외이사의 자격이 아니라 필래 비바체의 개국공신의 자격으로 발음되었다.
이 순간 대찬은 필래 비바체의 외부자가 아니라 내부, 그것도 구중궁궐 심처에 들어앉은 핵심으로서 말하고 있었다.
대찬이 홍웅표를 바라보며 묻자, 홍웅표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습니다.”
대찬은 다시 정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김풍호 대표께서는 전체사원회의를 열면서까지 홍웅표 씨를 기용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이건 정성입니다. 비바체 가족들께 보이는 정성입니다. 이 정성에 우리 역시 응답할 책무가 있습니다. 그렇죠?”
“예!”
대찬의 질문에 임직원은 힘 있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김풍호 대표의 앞에서는 시시껄렁한 예비군이던 이들이 대뜸 훈련병이 되었다.
대찬은 흡족하게 웃으며 말했다.
“김풍호 대표님의 소통을 위한 노력에 찬사를 보내며, 우리 필래 비바체 가족 여러분께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표님의 결정을 수용해주실 것을 당부드립니다, 사외이사로서.”
대찬은 그렇게 말하고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아울러, 김풍호 대표님께 이 자리를 빌려 한 가지 부탁을 드립니다.”
“부탁……?”
“옥문영 상무님께서 이번 인사에 크게 반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회사를 위하는 충정이니, 대표님께서도 너그럽게 넘어가주시길 바랍니다.”
“아, 예, 물론…….”
대찬은 옥문영 상무의 일도 분명히 짚고 넘어갔다.
그렇지 않으면 회사 사람들은 또 옥문영 상무가 끈 떨어졌네 어쩌네 하는 쓸데없는 풍설을 일으켰을 테니까.
전체사원회의는 그렇게 홍웅표를 마트사업부문장에 임명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고 마무리되었다.
회의가 끝나고, 대찬은 김풍호 대표의 식사 제안을 사양하고 옥문영 상무와 점심을 함께 먹었다.
대찬은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섭섭하진 않으시죠.”
“뒤통수가 좀 얼얼하긴 한데.”
“그래도 대책 없이 교착상태에 빠지는 것도 상책은 아니니까요.”
옥문영 상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그렇죠. 저도 좀 기분이 뭣하긴 했어요. 일단 저질러놓긴 했는데 수습이 안 되니까.”
“공개된 자리에서 홍웅표 부문장이 회사의 경영철학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일단 믿어보죠.”
옥문영 상무는 피식 웃었다.
“그래도 이사님 수완이 퍽 좋으시군요. 덕분에 홍웅표 부문장이 폭주하는 일은 없겠어요. 만약 그러면 끌어내릴 명분이 생기니까. 역시 괜히 소년이사 되는 게 아니네요.”
“나이가 몇 갠데 소년이사는 좀 낯간지럽네요.”
“핏줄 도움 없이 그 나이에 대기업 사외이사 하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몇이나 되겠어요. 아니, 유일하시잖아요. 그럼 소년이 뭡니까. 인큐베이터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
대찬은 싱겁게 웃으며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먹었다.
김풍호 대표는 대표실에서 홍웅표 부문장과 마주했다.
그는 안도와 착잡함이 교차하는 얼굴로 말했다.
“웅표야, 우여곡절 많았다. 잘해야 된다, 알았지.”
“예, 열심히는 하겠는데요. 거 참, 형님, 아니 대표님이라고 해야지, 참.”
김풍호 대표는 피식 웃었다.
“둘이 있을 땐 편하게 해라.”
“형님, 참 가오 안 사십니다. 저 이 자리 앉혀주신 건 고마운데, 팔다리 다 묶인 상태에서 일하게 생겼어요.”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자고. 긍정적으로 살아야지, 인생을.”
홍웅표 부문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형님은 밸도 없소? 새파란 어린 애가 젖내 풀풀 풍기면서 회사를 쥐락펴락하는데.”
“그 새파란 어린 애가 이 회사 수렁에서 일으켜 세운 장본인이시다. 물렁하게 볼 사람은 아니야. 우리도 위마트에 있을 때부터 얘기는 익히 들었잖아.”
홍웅표는 픽 웃었다.
“소 뒷걸음질로 쥐 잡는다고, 용케 대학동창이 서청수 아들내미라 출세한 녀석 아뇨. 과소평가도 문제지만 과대평가도 문제예요.”
“어찌 됐든 그 사람 덕분에 너도 부문장 명패 판 거다. 우직하게 일만 해, 소처럼. 게임하지 말고.”
홍웅표 부문장은 손톱을 들여다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 제가 언제는 게임하면서 일 못했습니까. 멀티태스킹이 된다고요.”
그때 누군가 대표실 안으로 들어왔다.
홍승연이었다.
김풍호 대표는 그녀를 보고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모님.”
“대표 되신 거 축하드려요, 김풍호 대표님. 부문장님도 축하드리고요.”
“감사합니다.”
대찬을 뒤에서 씹던 홍웅표 부문장도 홍승연에게는 군기가 바짝 든 목소리로 허리를 숙였다.
하기야 조선시대로 치자면 세자빈 마마였다.
홍승연은 자리에 앉으며 김풍호 대표에게 말했다.
“대표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네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 이사 덕분에 체면치레했습니다.”
“어유, 속도 좋으셔라.”
김풍호 대표는 괜히 찾아와서 자신의 속을 박박 긁어대는 홍승연이 달갑지 않았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비바체에서 재밌는 이벤트를 한다고 하길래 기웃거려봤어요. 세상에, 어느 회사 사장이 자기 인사권 행사하는데 직원들 동의를 구한답니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조 이사가 김 대표를 도와줬다고 생각해요?”
“예.”
“땡, 틀렸어.”
김풍호 대표는 속이 뒤틀렸다.
갑자기 등장해서는, 서원웅의 아내라는 것 말고는 자기가 떠받들 하등의 이유가 없는 사람이 멋대로 속을 휘젓고 다닌다.
김풍호 대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홍승연은 말을 이어나갔다.
“조 이사가 김 대표를 도울 방법은 많았어요. 솔직히 옥 상무 불러다가 딱 분명하게 경고했으면 이 사달까진 안 났을 걸?”
“…….”
“근데 구태여 이 상황이 되도록 손 놓고 수수방관하다가, 김 대표 처지가 난처해지니까 짠하고 나타나서 슈퍼맨 노릇하는 것 좀 보세요.”
홍승연의 말을 홍웅표는 적극적으로 긍정했다.
성도 같겠다, 누가 보면 사촌지간인 줄 착각할 만했다.
“사모님 말씀이 백 번 천 번 옳습니다. 오늘 일은 자기 PR이지 대표님을 도와준 게 아니에요.”
“…….”
홍승연은 홍웅표 부문장의 동의에 더 힘을 얻어서 열심히 활개를 쳤다.
“전체사원회의에 사외이사가 참석할 수 있는 공식적인 권한은 없거든요. 그런데 조 이사는 그 틈을 파고들어서 사내 회의에 참석하고, 그것도 모자라 자기 독무대로 만들어버렸어요.”
“…….”
“이건 명백한 월권이죠. 조 이사는 사외이사로서 명시된 권한을 넘어, 실질적인 회사의 주인 행세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요? 김 대표님 그렇게 안 봤는데 의외로 둔하시네.”
“사모님.”
“자기는 마치 옥 상무의 반대의견과는 관계없다는 듯, 옥 상무랑 대표님 사이를 중재하는 것처럼 나서는 꼬락서니를 봐요. 왜 그랬을까요.”
“…….”
김풍호 대표는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없어도 홍승연은 제 할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야 자기 가치가 가장 높아지니까.”
“…….”
“직원들도 오늘 똑똑히 봤을 겁니다. 누가 회사의 실질적인 1인자인지. 대표님은 앞으로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조 이사 내세워서 해결할 요량이신가요?”
김풍호 대표는 몸을 일으켰다.
“저는 일이 바빠서 이만 일어나야겠습니다.”
“라인을 탈 거면 잘 타세요. 제가 오늘 왜 왔겠어요. 조 이사보다 제가 대표님을 더 잘 도울 수 있지 않겠어요? 현명하게 판단하고 행동하세요.”
홍승연은 그렇게 말하고 김풍호 대표보다도 먼저 자리를 떴다.
김풍호 대표는 홍승연이 떠난 자리를 보고 입술을 악물었다.
“괜히 와서 사람 흔들어놓기는.”
“형님, 사모님 말씀 틀린 거 하나 없습니다.”
“넌 좀 가만히 있어.”
김풍호 대표는 홍웅표 부문장에게 따갑게 쏘았다.
홍웅표 부문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지금 구도가 기울어진 운동장이에요. 조대찬 쪽으로 확 쏠려 있어. 형님하고 나, 둘만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세자빈 마마 등에 업고 게임하면 비등해진다니까요.”
“분명히 경고한다. 네가 괜히 시비 걸어서 게임 오버 뜨면 너만 끝나는 거 아니야. 나도 끝나.”
“다 그것도 조대찬이 술책이죠. 오늘 자리에서 저랑 형님을 운명공동체로 묶어버린 건 다름 아닌 그놈이에요.”
김풍호 대표는 지끈지끈 두통이 올라와 이마를 짚었다.
“경위야 어찌 됐든 방종하지 마라. 내가 널 불러들인 건 네가 내 사람이기 때문이야. 내 사람으로 구실하지 않을 거면 이 일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거 참, 형님도 못 본 새 쌀쌀맞아지셨소. 사모님 백 두면 좋은데 왜 굳이 물리치냐, 이 말이잖아요.”
김풍호 대표는 홍웅표 부문장을 똑바로 바라봤다.
“조 이사가 전체사원회의로 자기 존재감을 부각시킨 건 사실이지만, 우리가 그 사람한테 빚진 것도 사실이야. 이런 마당에 우리가 먼저 진영을 정하면 저쪽에서도 자비 없게 나온다.”
“그 풋내기가 뭐가 무서워서 설설 기는 거요?”
“설설 기는 게 아니야. 때를 보는 거야.”
“때라니.”
“어차피 홍승연은 언제고 우리 손을 잡을 거다. 만약 조 이사와 우리 사이에 대립각이 선다면, 우리가 비바체 내부에서 조 이사를 제어할 유일한 세력이니까.”
“으음.”
“홍승연의 힘이 필요하면 그때 잡으면 돼. 조 이사가 우리랑 갈라서지 않으면 구태여 홍승연 쪽하고 짬짜미 벌일 이유도 없지.”
홍웅표 부문장은 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요. 근데 결국은 척을 지게 돼있다니까요. 조 이사가 뜨면 형님이 지고, 형님이 뜨면 조 이사가 지고. 제로섬게임이에요.”
“어차피 조 이사 본진은 로튼 프룻츠야. 우리가 그 사람 심사만 거스르지 않으면 아무 문제 없어.”
“그럼 형님 임기 내내 그 인간 눈치나 보다 끝낼 겁니까? 그럴 거면 뭐 하러 사장 해요.”
“눈치만 보다가 끝나진 않아. 나도 내가 할 일은 밀어붙일 거야. 조 이사가 내 앞을 가로막으면 그땐 나도 내 살길 찾아야지. 홍승연은 고려할 수 있는 여러 방법 중에 하나일 뿐이야.”
홍웅표 부문장은 얕은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요. 어차피 나는 형님 끄나풀이니까 형님 하자는 대로 따라가죠.”
“홍웅표, 너도 오래가고 싶으면 주제넘을 생각 하지 마. 내 살길이 홍웅표라는 꼬리를 잘라내는 거라고 생각하게 만들지 말란 말이야. 네 생사여탈권을 쥔 건 나야, 알겠나?”
홍웅표 부문장은 익살스럽게 웃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말씀 한번 살벌하시네.”
“나는 비바체 사장으로 커리어 끝낼 생각 없어. 지금 돌아가는 상황으로 봐서는 5년 안에 서청수 회장, 그룹 대부분의 일을 서원웅한테 넘길 거야.”
“서원웅 라인 타고 그룹 중심부로 진출하시겠다?”
“이 정도 자리에 온 사람 치고 그런 야망 안 품은 사람은 하나도 없을 거다.”
“하하, 그렇게 되면 비바체 사장은 내 차집니다?”
“그게 자연스러운 수순이겠지. 나 외부간담회 있다. 당분간 몸 사려.”
홍웅표 부문장은 피식 웃으며 건성으로 거수경례를 올렸다.
“충성!”
전체사원회의의 형식으로 홍웅표를 마트사업부문장에게 앉힌다.
그건 조대찬이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고 존재감을 각인시키며 입지를 넓히려는 전략의 일환이다.
홍승연, 그리고 홍웅표 부문장은 그렇게 진단했다.
아주 틀린 진단은 아니었다.
전체사원회의 이후, 사내에서 대찬의 입지와 권위는 더 강화되었다.
무대의 기획은 전적으로 대찬의 머리에서 나왔다.
김풍호 대표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의도가 우선이었지만, 그렇다고 홍승연이 분석하였듯 자신을 위한 포석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었다.
홍웅표 부문장의 선임을 대찬은 내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김풍호 대표에게 힘을 실어주고자 이 회의를 제안했다.
그러나 위마트에서처럼 비바체에서도 홍웅표가 멋대로 휘젓고 다니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의 성향과 능력이 위마트에서는 유용하게 발휘되었다고는 해도, 비바체에서는 아니었다.
윤리경영을 모토로 내건 회사였고, 압도적인 규모로 경쟁자들을 찍어 누르는 걸 전략으로 채택한 회사였다.
게다가 필래유통에서 택배사업부를 빼올 때, 친노동적인 경향을 유지하겠다는 것을 최우선 조건으로 내걸었다.
자칫 잘못하면 홍웅표 부문장의 선임이 회사의 기둥뿌리를 뽑는 재앙으로 귀결될지도 몰랐다.
그래서 전 사원 앞에서 홍웅표가 비바체의 경영철학을 거스르지 않겠다는 말을 직접 천명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를 위반했을 시의 책임이 김풍호 대표에게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는 불똥이 자신에게 튀는 걸 방지하려는 자구책이기도 했다.
‘이참에 내 입지를 확실히 다져두는 것도 필요하겠지.’
대찬은 로튼 프룻츠를 주력으로 삼겠다고 했지만, 필래에서의 권력을 쉽게 놓아버릴 생각은 없었다.
필래 비바체에는 대찬 자신의 피와 땀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었다.
필래그룹은 아니더라도 필래 비바체에서만큼은 자신의 지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적정선 이상의 영향력은 관 뚜껑에 못 박을 때까지 붙들고 있을 요량이었다.
그러나 그런 대찬의 욕심을 충족시키기에는 사외이사라는 자리만으로는 불안했다.
사외이사라는 자리는 파리 목숨이다.
주주총회에서 훅 입김을 불면 촛불처럼 꺼질 수밖에 없는 신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