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88화
김풍호 대표는 그를 보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했다.
“조 이사님, 면구스럽지만 부탁 좀 드리러 왔습니다. 제가 지금 임원들 설득에 애를 먹고 있어서요.”
“저도 소문은 들었습니다.”
“옥문영 상무가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있습니다. 설마, 조 이사님 의중은 아니시겠죠.”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임원회의 전에 옥 상무님이 저를 찾아오긴 했습니다. 반대의사를 표하겠다고 하시더군요. 순전히 옥 상무님 개인의 자유의지이지 제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히려 은근히 뜻을 꺾어달라고 권유했습니다.”
“그래도 조금만 더 목소리에 힘을 주시면 옥문영 상무도 뜻을 꺾지 않겠습니까. 한 번만 도와주시죠.”
“저는 대표님의 경영에 딴죽을 걸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인 판단으로도 홍웅표 씨는 적절한 인선은 아닌 듯합니다.”
김풍호 대표는 답답증을 느꼈다.
“조 이사님이 주저하시는 까닭을 저도 잘 압니다.”
“예.”
“하지만 저한테 필요한 사람입니다. 마트사업부문장도 제 뜻대로 선임하지 못하면, 제가 무슨 낯으로 회사를 이끌겠습니까.”
“대표님.”
“예, 이사님.”
“인사는 만사입니다. 지금 어물쩍 잘 넘어간다 하더라도 홍웅표 씨를 그 자리에 앉히면 내내 대표님의 발목을 잡을 겁니다.”
김풍호 대표는 애써 웃었다.
“잘 관리할 자신이 있습니다. 이번에만 힘을 실어주십시오.”
“저는 개인적으로 홍웅표 씨의 선임을 반대합니다. 하지만 입을 꾹 다물고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대표님을 전력으로 돕고 있는 겁니다.”
김풍호 대표는 쓴 침을 삼켰다.
대찬은 그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좋은 사람 많습니다. 다시 잘 골라보시는 걸 권해드립니다. 제가 드릴 말씀은 그것뿐입니다.”
김풍호 대표는 빈손으로 돌아갔다.
그는 며칠을 더 끌었다.
그 며칠간, 그는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여기서 바로 고개를 숙이자니 초장부터 물렁한 ‘물사장’ 소리를 듣기 좋았다.
그렇다고 강행하자니 맨발로 가시밭길을 자청해서 걷는 일이었다.
그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오래전에 버린 버릇이 되살아났다.
‘아, 잘 좀 고르지.’
그렇게 김풍호 대표를 보낸 대찬의 마음이라고 편할 리 없었다.
그는 홀로 사무실에 앉아 의자를 좌우로 움직이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대찬은 김풍호 대표와의 만남이 곱씹을수록 씁쓸했다.
본의 아니게 처음부터 대립각을 세우게 되었다.
무색무취의 평범한 인간을 갖다 앉히겠다고 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홍웅표에게 문제가 많다는 걸 알았어도 옥문영 상무가 저렇게 강하게 반발하지 않았다면 대찬은 눈감아주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옥문영 상무가 홍웅표의 선임을 강력히 반대하고, 그 사실이 필래 비바체 임직원 전체에게로 퍼진 상황이다.
그들이 대찬의 눈치를 본다지만 대찬도 그들의 눈치를 봤다.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그들이 반대하는 인사를 대찬은 넉살 좋게 밀어붙일 수 없었다.
대찬은 난감한 듯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한참 고심하던 대찬은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한태윤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태윤 부장은 바로 대찬의 전화를 받았다.
“이사님.”
“한 부장님, 시간 괜찮으세요? 민폐긴 하지만 지금 로튼 프룻츠 사무실로 좀 와주시겠습니까.”
“예, 그러죠.”
귀찮을 법도 했지만 한태윤 부장은 내색하지 않고 바로 그러겠다고 했다.
한태윤 부장을 다른 부서로 영전시키면서 대면할 일이 부쩍 줄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필래 안에서 대찬이 가장 신뢰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한태윤 부장에게 말했다.
“김풍호 대표님이 많이 힘들 겁니다.”
“예, 짐작은 충분히 하고 있습니다.”
“한 부장님이 대표님 좀 도와드리세요.”
한태윤 부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뭐라고 대표님을 돕겠습니까.”
“왜요, 저도 한 부장님하고 일하면서 얼마나 든든했는데요. 아마 대표님께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길 원하십니까.”
한태윤 부장은 우직하지만 탁월할 정도로 영리하지는 않았다.
그는 대찬의 구체적인 요구를 원했다.
대찬은 웃으면서 한태윤 부장에게 몇 마디 귀띔했다.
한태윤 부장은 그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날이 밝자, 그는 김풍호 대표를 찾아갔다.
야심만만하게 출범했던 김풍호 체제가 불과 며칠 만에 암초를 만났다.
김풍호 대표의 얼굴도 취임식 당시의 밝은 웃음은 온데간데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밥맛도 없어서 끼니를 건성으로 때웠더니 며칠 만에 몸무게가 눈에 띄게 줄기도 했다.
“대표님, 한태윤 부장입니다.”
“무슨 일이죠?”
“조대찬 이사님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김풍호 대표는 입술을 비틀었다.
좋은 말씀 전하러 왔습니다.
내키지 않는 전도를 하는 불청객을 맞이한 듯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내가 직접 갔을 때는 딱 잘라 말하시더니, 무슨 여운이 남아서 자넬 보내셨을까. 자기랑은 급이 안 맞으니 부장급이랑 무릎 맞대고 앉아서 얘기해라, 이거예요?”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럼.”
김풍호 대표의 목소리에는 적잖이 노기가 실려 있었다.
대찬의 앞에서는 애써 그 노기를 감췄지만, 일개 부장 앞에서까지 그 정도의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었다.
“대표님의 말씀에 야박하게 응답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지만 며칠간 이사님께서도 고심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가.”
김풍호 대표의 목소리는 심드렁했다.
“이사님께서는 홍웅표 씨의 부문장 선임에 대해 절충점을 찾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셨습니다.”
“절충점이라니. 쓸데없는 말놀음으로 논점 흐리지 말라 전하세요.”
“홍웅표 씨의 개인사는 이미 위마트에서 처벌되었으니 재론할 필요가 없지만, 문제가 되는 부분은 경영철학에 대한 부분입니다.”
“…….”
“홍웅표 씨가 자신의 경영철학이 필래 비바체의 그것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걸 확실히 보여준다면, 비바체 임직원들도 홍웅표 씨의 선임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사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한태윤 부장이 속 편한 소리를 하자 김풍호 대표의 목소리가 다소 격앙되었다.
“임직원이 반대하는 게 홍웅표의 경영철학 때문이라. 한 부장도 그렇게 생각해요?”
“…….”
김풍호 대표는 한태윤 부장을 사납게 노려봤다.
“조 이사, 그리고 그 뒤의 서원웅 실장. 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게 유일한 이유예요.”
“…….”
“조 이사가 직접 지원사격에 나서지 않는 이상,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을 겁니다. 내 꼴만 우스워지지. 가서 조 이사한테 말하세요. 직접 나서서 도와줄 거 아니면 남의 성질 더 긁지나 말라고.”
“이사님께서는 직접 나서서 홍웅표 씨의 부문장 선임에 도움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김풍호 대표의 눈썹이 꿈틀했다.
“조 이사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가 뭐야.”
“이사님께서는 내내 대표님께 우호적이었습니다. 다만, 회사의 미래를 함께 생각해야 하니까. 고심 끝에 내리신 결정입니다. 회사와 대표님을 모두 생각한.”
한태윤 부장은 사자로서 적당한 사람이었다.
우직한 표정, 미더운 목소리.
그런 한태윤 부장을 보면 이면에 숨은 뜻은 전혀 없다고 저절로 믿게 되었다.
김풍호 대표는 표정과 목소리에 속지 않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구체적인 방법을 한 부장한테도 일러줬습니까, 조 이사가.”
“예.”
김풍호 대표는 긴장 속에 물었다.
“뭔가, 그 방법이.”
“이사님께서도 말씀하셨듯, 임직원 개개인의 판단을 컨트롤할 능력이 이사님 본인에게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치고.”
“대신, 홍웅표 씨의 경영철학이 비바체에 거스르지 않는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주시면 직접 나서서 임직원을 설득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한태윤 부장은 김풍호 대표와 정면으로 시선을 맞닥뜨렸다.
며칠 후.
김풍호 대표는 전체사원회의를 열었다.
정기적으로는 1년에 한 번만 열리는 회의였다.
이번 회의는 비정기였다.
그는 주요 임직원은 대회의실로 부르고, 다른 직원들은 사무실에서 화면을 통해 회의에 참석하도록 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말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새로운 마트사업부문장의 선임을 발표하고자 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그 자리에는 필래 비바체의 임직원이 자리했지만, 다소 이질적인 사람들이 참석해있었다.
한 명은 홍웅표.
마트사업부문장이 되기 위한 정식절차를 밟지 않은 그는, 지금 이 순간 철저한 외부인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세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필래 비바체의 사외이사라는 점이었다.
사외이사의 공식적인 권한은 이사회에서만 유효했다.
명백히 ‘사외’이사인 만큼, 그들은 엄연한 외부인이었다.
그럼에도 대찬을 위시한 세 명의 사외이사가 전체사원회의에, 그것도 제법 상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조치된 까닭은 당연히 대찬이었고, 나머지 둘은 들러리였다.
김풍호 대표는 사외이사 조대찬을 등 뒤에 두고 말을 이었다.
“저는 홍웅표 씨를 마트사업부문장에 임명하고자 합니다.”
그러자 대회의실에 배석한 간부급 임직원들은 술렁였다.
옥문영 상무의 항명사건 이후로 김풍호 대표가 당연히 뜻을 꺾었으리라 여겼던 그들이었다.
맨 앞줄에 배석한 옥문영 상무의 얼굴에는 가감 없는 불편함이 번졌다.
동요하는 임직원을 본 대찬은 난감한 듯 웃으며 검지로 이마를 긁었다.
‘권위가 땅에 떨어진 수준이 아니라 땅 파고 맨틀까지 들어간 수준이네.’
권력은 태어날 때 가장 강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무뎌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김풍호 대표의 권력은 태어나기를 한없이 연약하게 태어났다.
부문장 하나를 지명하는 일에 전체사원회의까지 소집해야 하는, 그마저도 임직원들이 면전에서 술렁이는 이 처량한 권력에 대찬의 귀가 다 빨개졌다.
김풍호 대표는 어흠, 헛기침으로 주의를 환기시키고 말했다.
“홍웅표 씨는 우리 회사에 반드시 필요한 인재라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우려 역시 익히 전달 받았습니다. 이해합니다.”
이 자리에 배석한 홍웅표 역시 한없이 불편해 보였다.
“그래서 저는 폐쇄적인 면접 대신, 필래 비바체 모든 가족이 보는 앞에서 홍웅표 씨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김풍호 대표는 홍웅표를 연단으로 이끌었다.
홍웅표가 연단으로 올라오는 동안, 의례적인 박수도 없었다.
그저 어수선하고 멀뚱한 시선만 있을 뿐이었다.
홍웅표는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 좌중을 향해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홍웅표입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김풍호 대표님께서 제게 막중한 소임을 맡겨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비바체 임직원 여러분께서 저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있다는 것 또한 전해 들었습니다.”
홍웅표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저는 철저히 회사의 입장에 충실합니다. 저의 과오 아닌 과오 역시 회사의 지침에 따랐을 뿐입니다. 여러분께서 김풍호 대표님을 신뢰하신다면, 저 역시 신뢰하셔도 좋습니다.”
말은 누가 못해.
비바체 임직원들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해도 그들은 영영 시큰둥할 것만 같았다.
결국 이 자리에서 그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존재는 대찬뿐이라는 걸 모두가 알았다.
홍웅표 역시 그걸 알았기에, 자신이 저자세를 유지할 용의가 있음을 보여주기만 하고 그대로 연단에서 물러났다.
이후 이어진 자유발언 순서에서 대찬이 연단 앞으로 나섰다.
사외이사가 이사회 밖에서 활개를 치는, 극히 드문 장면이었다.
대찬은 원고도 없이 연단에서 막힘없이 말했다.
“사외이사로서 주제넘게 비바체 임직원 여러분 앞에서 마이크를 잡게 된 점, 우선 사과드립니다.”
비바체 직원들 중에서 그가 주제 넘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대찬은 웃음을 띤 채 말했다.
“회사 내부 인사 선임이 이사회에서 거론될 일이 아니기에, 여기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 역시 주제넘은 일입니다. 그러나 회사의 경영을 걱정하는 한 사람으로서 주제넘게 비칠 것을 감수하고 말씀 올립니다.”
임직원들은 김풍호 대표와 홍웅표가 연단에 섰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집중력을 발휘했다.
대찬은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회사는 군대보다는 못하지만 상명하복을 원칙으로 합니다. 대표는 회사의 경영에 대해 무한대에 가까운 권한을 누리기 때문에 무한대의 책임을 집니다.”
“…….”
“마트사업부문장은 우리 회사의 핵심 보직입니다. 김풍호 대표께서 첫 번째로 단행하는 인사이기도 합니다. 임직원들의 건강한 의견개진은 좋지만, 이 의견개진이 김풍호 대표께 압력으로 전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찬의 말에 임직원들은 다소 당혹했다.
옥문영 상무의 대대적인 항명은 당연히 대찬의 지시에 의해 이뤄졌다고 여겼다.
그런데 정작 대찬이 연단에서 오히려 김풍호 대표를 비호하고 나서니 혼란스러웠다.
“여러분은 홍웅표 씨의 낙마에 어떤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김풍호 대표께서는 홍웅표 씨를 기용한 책임을 전적으로 질 것입니다.”
대찬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만일 홍웅표의 기용이 실패로 귀결될 경우.
그 책임은 전적으로 김풍호 대표에게 있다.
대찬은 전 사원 앞에서 명시적으로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