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87화
김풍호 대표가 필래 비바체에 새 둥지를 튼 건 그의 경력을 통틀어 보자면 찰나에 불과했다.
그래도 대표 노릇을 제대로 하자면 자기 사람이 필요했다.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측근들을 기용해야 자신의 권위도 바로서고 지휘계통 역시 반듯해진다.
그러나 굴러온 돌인 김풍호 대표에게는 미처 자신의 사단을 꾸릴 물리적인 여유가 부족했다.
반면에 대찬은 이제는 명실상부 필래 비바체의 터줏대감이었다.
사외이사가 되면서 외곽으로 빠진 이후에도 그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김풍호 대표는 특히 도진석 전무를 넝쿨째 들어낸 이후, 그 공백을 대찬이 자신의 사람으로 채워낸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그 말인즉슨, 대찬만 포섭하면 그의 사단을 제 수족처럼 부릴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김풍호 대표는 대찬에게 술을 따라주면서 말했다.
“이사님 사람들을 제 사람처럼 쓰고 싶은데, 그래도 되겠습니까?”
“사람이 주머니 속의 물건도 아니고 내 것 네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사권은 전적으로 대표님께 귀속되어 있습니다. 대표님이 쓰면 쓰는 거고, 아니면 아닌 겁니다.”
대찬은 공손히 술을 받고 김풍호 대표의 잔을 채워주며 원칙론을 설파했다.
그건 원칙론인 동시에 대찬의 현실론이었다.
도진석 전무를 축출하고 그 공백을 자신의 사람들로 메운 건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막후에서 조종하며 장기 말처럼 부릴 생각은 없었다.
그저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
도진석이라는 걸림돌을 치운 김에 서먹하고 모자란 사람에게 자리를 주느니 가깝고 유능한 사람에게 자리를 줬을 뿐이었다.
그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생각은 대찬에게 없었다.
소유권을 주장한다고 해서 고분고분 나는 당신의 것이에요, 간드러지는 고백을 속삭여줄 위인들도 아니었다.
김풍호 대표는 대찬과 건배를 하고 죽 소주를 들이켰다.
“그럼 제가 이사님 사람들을 써도 이의는 없으신 거겠죠?”
“물론입니다. 제 자랑 같아서 참았습니다만, 주책없게 말하자면 다 좋은 사람들입니다. 아마 대표님께 큰 힘이 되어줄 겁니다.”
“하하, 그 말씀을 들으니 꽉 막힌 속이 봄눈 녹듯 사르르 풀립니다.”
둘은 다시 술을 채우고 잔을 부딪쳤다.
김풍호 대표가 취임하고 며칠간은 회사가 잘 돌아갔다.
서원웅이 지주회사로 떠났다고 해서 회사에 큰 변화는 없었다.
조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보통 가는 사람보다 오는 사람에게 귀추를 주목하기 마련이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도 그렇다.
그 말도 가는 사람보다는 오는 사람 때문에 읊조리게 된다.
정말 구관을 그리워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신관을 봤더니 너 정도면 양반이었구나 하는 한탄조의 말이다.
김풍호 대표는 무던한 성품이었다.
자기 치적을 위해 멀쩡히 잘 돌아가는 걸 억지로 바꾸거나 하지 않았다.
백성이 임금이 누군지도 모르는 걸 요순의 태평성대라고 하는데, 그런 점에 착안하자면 김풍호 대표는 성군이었다.
대찬 역시 서원웅이 있던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해냈다.
그러나 밀월 기간은 생각보다도 짧았다.
김풍호 대표는 취임 이후 임원들과 돌아가며 일 대 일로 술을 마셨다.
그건 대찬과의 술자리처럼 전반적으로 잘 부탁한다는 취지의 자리는 아니었다.
구체적인 목표가 있는 자리였다.
릴레이 술자리의 결과는 곧 대찬에게도 전해졌다.
옥문영 상무가 사외이사실의 문을 두드렸다.
대찬은 일어나서 깍듯한 태도로 그녀를 맞이했다.
“옥 상무님.”
옥문영 상무는 대찬의 깍듯한 태도에 흐흐 웃었다.
“등기이사씩이나 됐으면 이제 이런 오버스러운 예의는 그만 차려도 되지 않아요?”
“상무님만 뵈면 허리가 절로 숙여져서요.”
“조 이사님이 자꾸 이러니까 내가 깡패두목이라느니 어떻다느니 하는 헛소문이 사내에 도는 거 아니에요.”
‘그건 거울만 보셔도…….’
대찬은 해봤자 매만 실컷 벌 얘기는 꿀꺽 목구멍 뒤로 삼켰다.
대찬은 웃으면서 옥문영 상무에게 물었다.
“커피 한 잔 드시겠습니까.”
“등기이사님한테 커피 한잔 얻어 마셔봅시다.”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옥문영 상무와 자기 몫까지 두 잔의 커피를 탔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둘은 마주앉았다.
옥문영 상무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대찬에게 말했다.
“오늘 커피나 얻어 마실까 하고 조 이사님 뵈러 온 건 아니에요.”
“용건이 있으십니까?”
“있어요.”
옥문영 상무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찬은 커피 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김풍호 대표님이 마트사업부문장에서 대표로 영전하시면서 부문장 자리가 공석이 되었잖습니까.”
“네, 대표님께서 적절한 후임을 고르시겠죠.”
“네, 지명한 후임자를 인사팀에 알려오셨습니다.”
“그러셨군요.”
대찬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여기까지 들었을 땐 딱히 귀에 걸리는 말이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위마트에서 이사까지 지낸 홍웅표라는 사람인데…….”
“아, 외부영입으로.”
“그렇습니다.”
김풍호 대표가 외부영입 카드를 꺼내든 건 대찬도 이해했다.
필래 비바체는 회사가 양적으로, 질적으로 모두 성장했지만 인재풀이 경쟁업체에 비해 미미했다.
그래서 도진석 전무가 갈려나간 이후, 후임으로 적절한 인사가 없어 김풍호가 영입된 것이었다.
게다가 김풍호 대표는 더더욱 사내에 자기 사람이 없었다.
자기와 쿵짝이 맞는 사람을 갖다가 앉히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옥문영 상무는 그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걸 일러주었다.
“인사팀에서 조사를 좀 했습니다. 홍웅표라는 사람, 문제가 좀 있습니다.”
“문제라뇨.”
“일단 사생활에 결점이 좀.”
“무슨 결점이 있죠?”
“부하직원 폭행으로 징계 받은 사실이 2건이나 있습니다. 99년도에 한 번, 10년도에 한 번.”
대찬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위마트 측에서 확인해준 사실입니까?”
“예, 서류로도 확인이 됐습니다.”
“폭행으로 징계를 두 번이나 받고도 그냥 넘어갔다라.”
“그러게 말입니다. 일을 끝내주게 잘하는지.”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보통 이런 케이스는 일을 잘한다기보다는 기가 막히게 윗사람 비위를 잘 맞출 확률이 더 높죠. 옥 상무님처럼 실력만으로 돌파한 경우는 많지 않잖아요.”
“하하… 뭐, 이 정도야 일만 잘한다면 눈 딱 감고 봐줄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김풍호 대표님 첫 번째 인선이니까.”
“그렇죠. 초장부터 어깃장 놓을 순 없어요.”
“그런데 능력도 좀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
가볍게 넘어가려던 대찬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옥문영 상무는 대찬과 시선을 맞췄다.
“홍웅표 씨는 위마트에서 시설관리본부장을 역임했는데, 대개의 행보가 축소지향적입니다.”
“축소지향?”
“예, 거시적인 안목보다는 지극히 미시적이랄까요.”
대찬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옥문영 상무를 바라봤다.
“자세히 말씀해보십시오.”
“업하우스 대표를 지내던 차재원의 열화판쯤 된달까요. 극도로 비용을 줄여 수익을 창출하는 스타일입니다.”
“우리처럼 일시적인 적자를 감수하더라도 규모부터 늘리고 보자는 관점과는 정반대군요.”
옥문영 상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거기에 노조에 굉장히 적대적입니다. 강경 매파예요.”
“회사 입장에서는 때로 노조에 강경하게 나가야 할 때도 있죠.”
“하지만 냉철한 판단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홍웅표 씨는 앞뒤 안 재고 노조의 ‘ㄴ’ 자만 나와도 알러지 반응을 보입니다. 교섭 자리에서 빨갱이 운운했다가 다 만들어놓은 판을 엎은 전례도 있습니다.”
“으음, 곤란한데.”
“홍웅표 씨가 위마트에서 쫓겨난 것도, 대 노조 스킨십이 경력에 맞지 않게 상당히 유아적이었던 게 결정적이었습니다.”
대찬은 소파에 몸을 묻으며 깊은 시름을 토했다.
“우리가 인재를 채가지 못하도록 위마트 쪽에서 흑색선전을 하는 건 아닙니까?”
“그럴 가능성은 없습니다.”
옥문영 상무는 이렇다 저렇다 이유를 대지 않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럴 여지가 전혀 없다는 뜻이었다.
대찬은 천천히 이마를 긁적였다.
“옥 상무님께서는 부적격 판정을 이미 내리신 것 같군요.”
“면접은 진행하겠습니다만.”
“그저 그런 자리라면 그냥 눈 딱 감고 그대로 진행하는 편이 좋다고 말씀드렸을 겁니다. 하지만 마트사업부문장 자리는 그럴 수가 없죠.”
“마트사업부문장은 우리 회사의 2인자도 아닙니다. 핵심 사업들을 모조리 주관하는, 1.5인자라고 해도 무방한 자리입니다. 무난한 인사는 용인할 수 있지만 잘못된 인사는 절대 용인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하하, 도진석 전무까지 앉은 자리인데…….”
대찬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빡빡하게 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옥문영 상무는 꼿꼿했다.
“도진석 전무는 최소한 업무방향이 회사와 일치했습니다.”
“홍웅표 씨도 필래 와서는 자기 주장은 꺾을 줄 아는 사람이 될 수도 있잖습니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그럴 가능성보다 월등히 높다는 거, 이사님도 모르지 않으실 겁니다.”
대찬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침묵했다.
옥문영 상무의 말이 옳았다.
그녀는 대찬을 똑바로 바라보며 쐐기를 박았다.
“저는 인사팀의 상위부서인 경영지원부문장으로서, 김풍호 대표님의 결정에 분명한 반대를 표하겠습니다.”
“김풍호 대표는 상무님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저는 제 의견을 밝힐 뿐입니다.”
“상무님께서 저를 찾아와서 굳이 이걸 일러주시는 이유는.”
“제 행보에 놀라지 마시라고 미리 귀띔해드리려고 온 겁니다.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대찬은 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권한은 이사회에서만 유효합니다. 옥 상무님의 언로를 막을 권리가 없고, 김 대표님의 결정을 막을 권리 또한 없습니다. 옥 상무님 말씀은 잘 알아 들었습니다.”
“예, 그럼.”
옥문영 상무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사외이사실을 나섰다.
대찬은 허공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초장부터 힘들어지네.”
대찬은 임원회의에 참석할 권한이 없었다.
그는 허운을 통해 임원회의의 내용을 전해 들었다.
내용을 전하는 허운의 표정에는 씁쓸한 기운이 번져 있었다.
“옥 상무님이 아주 강경하게 홍웅표 씨의 선임을 반대하셨답니다.”
“좀 좋게 좋게 가도 되실 걸.”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옥 상무님이 어디 그럴 사람인가요. 우리 지하여장군께서.”
“…그건 그래. 대표님 반응은?”
“워낙 호인이시라 애써 웃으시면서 거듭 자기 결정에 동조해달라고 호소하셨대요.”
대찬은 별 기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옥 상무님은 계속 강경하셨고.”
“예, 그래서 결국 결정이 보류됐답니다.”
“보류? 최악의 결정이네.”
대찬이 최악의 결정이라고 말한 데는 그리 대단한 통찰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보류의 다른 말은 도망이었다.
이걸로 옥문영 상무는 더 자신의 입장을 굳건하게 견지할 것이다.
김풍호 대표가 자신의 의견을 무조건 관철시키려는 의지가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강행했어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김풍호 대표의 말은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임원회의의 일은 사내로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마트사업부문의 노조는 홍웅표의 선임에 대해 반대의사를 표했다.
위마트 재직시절 홍웅표가 지껄였던 모욕적인 발언은 그들의 주장에 정당성을 실어주었다.
필래 비바체의 경영철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성향에, 넥타이 맨 직원들도 우려를 표했다.
김풍호 대표는 옥문영 상무를 비롯해 사내에서 힘을 가진 임원들을 연쇄적으로 만나 설득에 나섰다.
“선 조치 후 설득은 미덕이지만 선 설득 후 조치는 리더로서 최악의 선택이야.”
대찬은 김풍호 대표의 행보에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임원들은 모두 난색을 표했다.
이미 사내에서 발언권이 큰 옥문영 상무가 반대의사를 분명히 한 까닭에, 임원들도 선뜻 김풍호 대표의 편에 서지 못했다.
옥문영 상무의 발언권이 큰 건 그녀가 가진 힘 자체가 강한 까닭이 아니었다.
달은 태양이 쪼이는 빛을 받아 밝다.
옥문영 상무는 달이고, 거기에 빛을 쪼이는 뒷배는 대찬이었다.
또, 대찬은 서원웅의 후광을 입고 있었다.
임원들은 옥문영 상무의 반대가 대찬의 의지라고 믿었다.
그리고 대찬의 의지는 서원웅의 암묵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김풍호가 아무리 회사에서 가장 높은 대표라고 해도 선뜻 그의 결정에 동조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결국 임원진 설득에 실패한 김풍호 대표는 대찬을 찾아왔다.
대찬이 로튼 프룻츠 일로 바쁜 까닭으로 사외이사실이 아니라 로튼 프룻츠 사무실에 있는 데도 거기까지 찾아왔다.
어지간히 급하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