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86화
“이 큰 회사를 떠안기에는 아직 어깨가 가냘프지.”
“음.”
서청수 회장은 세 사람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떤가, 자네들 생각은.”
김태준 사장이 가장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판단이십니다. 비바체 안에서 해볼 만한 건 다 해봤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대국적 마인드를 기를 때지요.”
“백주, 자네 생각은 어때.”
“예, 뭐…….”
장백주의 대답은 김태준만큼 개운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신세가 퍽 애매해졌다.
서청수 회장의 치세에는 그의 위세가 김태준, 왕윤수 부럽지 않았다.
지근거리에서 주군을 모시는 그는 박통 시절의 차지철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슬슬 권력이 아비에게서 아들로 옮겨가는 시점에서는 입지가 미묘했다.
어차피 그 역시 일찍이 서승학 대신 서원웅을 지지하면서 숙청의 칼날을 정면으로 받을 일은 없었다.
‘그런데 역시 그놈이 문제란 말이지.’
장백주 실장이 염두에 두는 그놈은 다름 아닌 대찬이었다.
장백주는 대찬이 신경 쓰였다.
‘자기 회사를 꾸리겠다고 나갈 거면 아예 종적을 감출 것이지.’
사외이사니 뭐니 찝찝하게 한 다리 걸쳤다는 게 문제였다.
필래의 사내정치에 관심이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껏 공 든 탑 한 기를 잘 쌓아놓고, 이제는 경영에 큰 책임이 없는, 그 이름도 ‘사외’ 이사가 되어 비바체의 아랫목을 꿰차고 앉았다.
‘의무는 저버리고 단물만 쏙쏙 빨아먹겠다는 심산이지, 싸가지 없게.’
저렇게 대찬이 계속 존재감을 발하는 이상, 장백주 자신의 입지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는 달은 떠오르는 해를 이길 수 없다.
장백주가 원하는 건 최대한 서원웅이 천천히 부상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더 이상 필래의 권력에 미련이 없을 때, 지지든 볶든 맘대로 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렇기에 서청수 회장의 물음에 개운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숨소리도 잘 들릴 거리에서 장백주와 더불어 지낸 세월이 오래였다.
서청수 회장이라고 그의 마음을 모르진 않았다.
그는 장백주의 대답을 듣지 않고 바로 왕윤수를 바라봤다.
“윤수.”
“예, 적절한 생각이십니다.”
왕윤수 사장의 대답은 간결했다.
찬성 2, 기권 1.
측근들의 과반 동의를 얻은 서청수 회장은 자신의 뜻을 밀어붙였다.
서청수 회장은 서원웅을 그룹 본사로 불러들였다.
직급은 그대로 사장.
보직은 김태준 사장이 맡았던 경영개선실장이었다.
여전히 필래그룹의 선장은 서청수 회장이었다.
다만 이제부터 서원웅의 권한이 점점 확대될 것이었다.
서광구 회장에서 시작된 필래그룹은 2세 서청수 회장을 거쳐, 3세 서원웅에게로 세습될 준비를 했다.
그룹 본사로 떠나기 전.
서원웅은 마지막 이사회를 주재했다.
“저는 이제 정든 비바체를 떠나 그룹 전체의 일을 회장님의 곁에서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사 하나하나에게 시선을 주었지만 어쩔 수 없이 대찬에게 유독 오래 머물렀다.
“저에게는 비바체에서의 시간이 더 없이 소중했습니다. 제가 그룹 전체의 일을 맡게 되어도 지속적인 관심과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미래 오너의 겸손한 말에 이사들은 몸 둘 바를 몰랐다.
잘 부탁드려야 하는 건 이쪽이었으니까.
서원웅이 비교적 덜 부담스러운 대찬만이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서원웅도 대찬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사회가 끝나고, 대찬과 서원웅은 오랜만에 단둘이 마주앉았다.
대찬은 웃으면서 그에게 물었다.
“느낌이 어때?”
“홀가분하면서도 무섭지. 버거운 비바체의 업무에서 벗어나서 홀가분한데, 이제는 계열사 전체를 봐야 하니까 더 버겁게 됐어.”
“내가 너였어도 무서웠을 거야. 난 회사 하나 건사하는 데만 해도 죽을 맛인데 말이야.”
서원웅은 대찬을 보며 웃었다.
“난이도는 비슷할 거야. 나는 다 완성된 회사들 여러 곳 관리하는 거고, 너는 맨땅에서 새로 회사를 세우는 거니까.”
“나는 내 쪽이 훨씬 편하지 싶다. 그래, 후임자는 결정됐어?”
서원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결정은 아니고 아버지 결정.”
“누구?”
“누구일 거 같아?”
대찬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글쎄, 외부영입인가?”
“내부승진. 네가 로튼 프룻츠로 안 튀었으면 네가 유력후보였을 텐데 말이야.”
“월급사장 관심 없수다. 내부승진이면 김풍호 전무 아니면 오윤 전무 둘 중 하나겠네.”
서원웅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완벽한 정답이네. 둘 다 이번에 대표 보직 받게 됐거든.”
“뭐야, 설마 공동대표체제야?”
“아니, 그건 아니고. 비바체 대표는 김풍호 전무가 될 거야.”
대찬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오윤 전무는.”
“이번에 면세점 사업부는 필래호텔로 편입시키기로 결정했어. 오윤 전무님은 필래호텔 대표로 올라갈 거고.”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면세점은 호텔이 갖고 있는 게 순리긴 하지. 지금까지 비바체가 붙들고 있었던 건 네 실적 챙겨주려는 회장님 의중이 크게 작용한 거였고. 네가 그룹 본사로 가게 됐으니 다시 호텔로 보내는 게 순서네.”
“이번 결정은 어떻게, 잘된 거 같아?”
대찬은 깊게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내가 회장님 결정에 가타부타 훈수 둘 군번은 아니지.”
“그래도 의견은 있을 거 아냐.”
“상식적인 판단이신 거 같은데? 김풍호 전무님 능력이야 무난하신데 단 하나 걸리는 지점이 있긴 해.”
“걸리는 지점?”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풍호 전무님 비바체 들어오신 지 얼마 안 됐잖아. 업계 경력이야 누구도 부인 못할 정도시지만 비바체의 경력은 신입급이니까.”
“사내 장악력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위마트에서도 어떻게 보면 불명예 퇴진하신 격이니, 만만하게 보고 들이받는 사람들이 나올 가능성이 크지.”
“으음.”
“그렇다고 극복 못할 문제는 아니니까. 김풍호 전무님이 카리스마를 확실하게 발휘해줄 필요는 있지.”
“네 도움이 절실하겠어.”
서원웅의 말에 대찬의 눈썹이 꿈틀했다.
“나?”
“응, 네가 김풍호 전무님, 아니 이제 대표님을 든든히 후원해주면 그런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을 거야.”
“나야 외곽에서 지원하는 정도지. 나보다는 옥문영 상무님 역할이 클 거야. 짬밥퀸이잖아.”
“아, 옥 상무님도 계셨지. 그래도 따지고 보면 옥 상무님도 네 라인이잖아.”
서원웅의 적나라한 말에 대찬은 펄쩍 뛰었다.
“세자 저하, 어찌 그런 황망한 말씀을 하십니까?”
“내숭 떨긴.”
“야, 내숭은 무슨 내숭. 옥 상무님 들으시면 리어 네이키드 초크로 내 모가지 비틀어버릴 걸. 나 필래에서 제대할 때 계급이 뭐냐, 그래봐야 부장이거든. 부장이 어딜 상무한테 비벼.”
서원웅은 대찬의 반응이 재밌어서 흐흐 웃었다.
“지금은 어엿한 이사님이시잖아요?”
“끈 떨어진 사외이사도 이사님이라고.”
“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섭섭하지. 대한민국 대기업 역사 상 거의 최초로 사외이사실까지 만들고 밑에 사람도 딸려 보내줬는데.”
반론의 여지가 없는 주장에 대찬은 쩝, 입맛을 다셨다.
“그건 그래.”
“그러니까 네가 김풍호 대표 잘 도와서 비바체가 지금처럼 잘 되도록 해줘.”
대찬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서원웅에게 물었다.
“그런데 네가 나한테 당부한 게 두 가지잖아.”
“두 가지?”
“하나, 김풍호 대표를 잘 도울 것. 둘, 비바체가 지금처럼 잘 되도록 해줄 것.”
“근데?”
“근데 두 가지가 양립하지 못하는 경우라면?”
대찬의 말이 석연치 않아 서원웅은 살짝 웃음기를 거뒀다.
“그게 무슨 말이야.”
“김풍호 대표를 돕는 게 회사가 잘 되는데 걸림돌이 된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해?”
“…그런 일이 있을까?”
대찬은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사람은 실수하기 마련이니까. 만약 김풍호 전무가 실수한다면, 나는 통념적인 사외이사처럼 덮어놓고 찬성표 던지는 거수기 노릇을 해야 할지, 아니면 태클 거는 야당 노릇을 해야 할지. 그걸 물어보는 거야.”
“좋은 말로 바른 길을 은근히 권하는 게 모범답안이겠지?”
“현실은 모범답안만으로 흘러가진 않잖아.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바른 길과 김풍호 대표가 생각하는 바른 길이 꼭 일치하란 법은 없어.”
“…….”
대찬은 서원웅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 경우, 나는 어떻게 해야 돼?”
대찬의 질문에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서원웅의 대답 여하에 따라, 서원웅이라는 절대권력이 사라진 필래 비바체의 역학구도가 결정될 것이다.
만일 서원웅이 대찬에게 단순한 거수기 역할만을 당부한다면 대찬은 그렇게 할 것이다.
어차피 이제 대찬의 주력은 필래 비바체가 아니라 로튼 프룻츠였으니까.
그런데 서원웅이 대찬에게 그의 말마따나 ‘야당 노릇’을 허락한다면.
그건 김풍호가 가질 대표로서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되면 대찬은 거수기가 아니라 실세 이사로서 기능하게 될 공산이 컸다.
그렇기에 서원웅은 대찬의 질문에 섣부른 답을 내놓지 못했다.
대찬 역시 서원웅에게 빠른 대답을 종용하지 않았다.
그는 서원웅에게 로튼 프룻츠에 더해 필래 비바체의 권력까지 움켜쥐려는 탐욕 덩어리로 보일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만일 서원웅이 권력을 허락한다면 구태여 내칠 생각도 없었다.
대찬은 그 정도로 선비정신이 투철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코앞까지 들이미는 밥상을 걷어찰 정도로 바보도 아니었다.
서원웅은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한동안 침묵하다가 대찬을 바라봤다.
“내가 둘 중 하나를 너한테 선택하라고 하면, 뭘 고를래.”
“안 골라. 나한테 역할을 부여할 의무는 너한테 있어. 나한텐 없어.”
서원웅은 쓴웃음을 지었다.
“매정하네.”
“매정한 게 아니야. 내 마음대로 고르면 뭘 고르든 내 꼴만 우스워져.”
“…….”
대찬은 뻣뻣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알아서 거수기 노릇을 하겠다고 고개를 숙이는 건 졸장부야. 그렇다고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내가 권력을 움켜쥐겠다고 하는 건 망나니야. 난 졸장부도, 망나니도 될 생각이 없어.”
서원웅은 주먹을 꽉 쥐었다 편 후, 대찬에게 말했다.
“너한테 영혼 없는 기계 노릇 시킬 거면 사외이사로 두지도 않았을 거야.”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에는 긴 침묵이 흘렀다.
내내 심각하던 대찬은 다시 활기찬 웃음을 되찾았다.
“그렇다고 김풍호 대표랑 샅바싸움 할 생각은 없어. 너무 걱정하지 마. 지금까지 김풍호 대표랑은 호흡 잘 맞춰왔으니까.”
“잘 좀 부탁해, 조 이사님.”
대찬은 미소로 응답했다.
서원웅은 떠들썩한 이임식과 함께 필래그룹의 중심인 필래지주로 옮겼다.
필래 비바체 대표실이 있는 필래타워 5층에서 필래지주 임원들의 사무실이 있는 52층으로 옮겼다.
그리고 필래 비바체 대표실의 주인에는 예정대로 김풍호 전무가 낙점되었다.
김풍호 전무는 부사장을 거치지 않고 바로 사장 직급으로 올라섰다.
친일파라는 모욕을 당하며 위마트에서 축출됐을 때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벼락출세였다.
대찬은 필래호텔 대표로 승진한 오윤과 인사를 나누고, 김풍호 대표와도 단둘이서 환담을 나눴다.
생각해보니 자칫 잘못했다가는 저 자리가 하마터면 도진석의 차지가 될 뻔하지 않았는가.
‘화병 걸릴 뻔했네.’
대찬은 끔찍한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진저리를 쳤다.
대찬은 김풍호 대표의 승진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대표님, 축하드립니다. 회장님께서 최선의 카드를 선택했다고 감히 생각합니다.”
“아이고, 조 이사님.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조 이사님이 돕고 안 돕고의 여부가 이 회사의 운명을 결정할 겁니다.”
대찬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무슨 말씀을. 저는 이제 이 회사 직원도 아닌 걸요. 사외이사로서 후방에서 적극 지원하겠습니다.”
“비바체의 주요 사업 중에 조 이사님 손을 거치지 않은 게 없습니다. 반면에 비바체에서의 경력만 따지면 저는 햇병아리에 불과합니다. 많이 배우겠습니다.”
대찬은 김풍호 대표의 저자세에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과한 예의는 도리어 예의가 아니라고 했다.
그런 말을 들으니 대답으로 받아칠 말이 궁해졌다.
대찬은 겸연쩍은 웃음을 머금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저도 대표님과 호흡을 맞춰보지 않았습니까. 그때의 좋은 느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잘하실 겁니다.”
“고맙습니다.”
김풍호 대표는 푸근하게 웃어 보였다.
대찬은 간단한 환담만 나눌 생각이었는데, 김풍호 대표는 그에게 저녁에 술자리를 권했다.
그것도 다른 배석자 없이 단 둘이.
웬만한 자리였다면 완곡하게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찬은 그런 김풍호 대표의 절박한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대찬은 그와 술잔을 나누고,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