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83화
PD는 말 대신 손가락 다섯 개를 펼쳐 보였다.
대찬은 그걸 보고 물었다.
“5%?”
PD는 나머지 손의 손가락 세 개를 펼쳐서 보여주었다.
“8%, 8% 나왔습니다.”
“선방한 거죠?”
“너무 기준이 엄격하신 거 아닙니까? 연예인도 아니고 중소기업 대표 두 분이 나오셔서 좌담회 한 것 치고는 대박입니다. 초대박이에요.”
대찬은 겸연쩍게 웃었다.
“하긴 그렇게 생각하면 또 그러네요.”
“조 대표님하고 고 회장님이 한 판 붙을 때부터 시청률이 고공행진하기 시작해서, 고 회장님이 이 스튜디오를 무단이탈했을 때 최고조를 찍었습니다. 그땐 순간시청률 17%까지 나왔어요.”
“고 회장님이 일등공신이시군요.”
“그 이후로 은 교수님 강의가 시작됐을 때 쭉 빠지긴 했지만 그때도 나름 준수한 편이었습니다.”
PD가 은오영 교수를 흘끗 보며 말하자, 은오영 교수도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손호엽 아나운서가 대찬과 은오영 교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저나 대표님, 교수님 모두 큰일 치렀으니 저녁이라도 같이 하실까요.”
“저도 그러고 싶지만, 아무래도 이번 일이 저희 회사의 명운이 달린 일이라.”
대찬의 말에 손호엽 아나운서는 이해한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시겠군요. 아마 오늘이 마지막 방송국 나들이는 아니시겠죠. 조만간 또 뵐 일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럴까요?”
“제가 이런 쪽으로는 촉이 좋은 편입니다. 곧 뵐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안 좋은 일로 뉴스 타면서 뵙지만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대찬은 손호엽 아나운서, PD와 악수를 나누고 방송국을 떴다.
은오영 교수는 그의 뒤를 따라나서면서 말했다.
“뭐가 그렇게 급해요. 방송국 사람들하고 술도 한 잔씩 하면서 안면 터놓으면 좀 좋아.”
“그렇게 한가롭게 술 마실 때가 아니라니까요.”
“으잉?”
대찬은 잰걸음으로 걸었다.
한달음에 지하주차장에 도착해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고 바로 로튼 프룻츠 본사로 향했다.
좌담회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TV보다는 인터넷방송을 통해 더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쏭과장TV의 운영자인 송희근의 방송에서는 실시간으로 시청자의 반응이 파악되었다.
대찬이 MFG그룹을 마구잡이로 패버릴 때는 채팅창이 ㅋ의 향연이더니, 고범수가 갑자기 자리를 비울 때는 ?의 향연이었다.
좌담회를 주관하던 JNN에서 방송 송출을 중단하자 송희근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방송국에서 넘겨주는 화면만 받아서 쓰는 건 프로 인터넷 방송인이라고 할 수 없다.
그 다음의 콘텐츠를 창출해낼 줄 알아야 프로.
그는 시청자들에게 말했다.
“MFG 이것들 완전 사기꾼이다, 그죠.”
송희근의 말에 시청자들은 격렬한 언어로 긍정했다.
잡아다 사지를 잘라버려야 한다느니.
재산을 다 압류해야 한다느니.
MFG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정제되지 않은 언어에 실려 채팅창을 도배했다.
송희근은 빙긋 웃었다.
“자자, 진정들 하시고요. 여기서 그냥 접으면 좀 심심하잖아요. 그래서 발로 뛰는 저 쏭과장이 MFG그룹 본사로 가겠습니다!”
그는 차키를 들고 주차장으로 가서 바로 시동을 걸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서울에서 MFG그룹 본사가 있는 대전으로 내려갔다.
그 시각.
로튼 프룻츠에는 주요 임직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주말이었지만 누구도 한자리에 모이는 데 불만을 표하는 사람이 없었다.
상황이 그만큼 비상했다.
“진위생 씨까지 안 나와도 괜찮은데.”
“그래도 나름 대표님 비서 격인데 이런 일에 어떻게 빠지겠슴까. 섭섭하네요.”
대찬은 잠깐 웃고는 회의실에 비치된 화면을 쏭과장TV에 연결했다.
민승기가 그걸 보고 대찬에게 물었다.
“심각한 상황에 웬 인터넷방송을 틀고 그래?”
“저게 그냥 인터넷방송이 아니에요. 제목 보세요.”
민승기는 보이는 제목을 소리 내어 읽었다.
“MFG 본사 생중계, 대전으로 내려갑니다.”
“지금 MFG 상황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화면이에요. 틀어놓는 게 당연하죠.”
송희근이 아직 대전에 있는 MFG 본사에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경부고속도로 위에서 주절주절 떠드는 말은 별로 영양가가 없었다.
대찬은 우선 화면을 음소거 해놓고 임직원들과의 회의에 집중했다.
그는 방송 내내 실시간으로 대중의 반응을 점검했던 맹윤주에게 물었다.
“어땠어요?”
“어… 일단 인터넷 반응 위주로 체크했는데요. 조금씩 온도 차는 있지만 MFG그룹이 사기꾼 집단이라는 데는 대부분 수긍하는 분위기였어요.”
“MFG그룹 투자자 내부 커뮤니티 분위기는?”
“그쪽은 반응이 확연히 둘로 갈렸어요.”
“MFG를 규탄하는 쪽과 옹호하는 쪽이겠죠?”
맹윤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올라오는 게시물 숫자만 봐서는 화력이 정확히 반반이에요.”
“옹호하는 쪽에는 상당히 허수가 있다고 봐야겠죠?”
민승기가 끼어들어 한 마디 거들었다.
“고 회장 쪽에서 심어놓은 인간들이 한둘이 아닐 테니까.”
맹윤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리고 MFG를 옹호하는 쪽은 고 회장이 부모 자식 팔아넘기래도 그렇게 할 작자들이에요. 광신도들이거든요.”
“그럼 그나마 머리 돌아가는 양반들은 죄다 돌아섰다는 거지.”
맹윤주는 피식 웃었다.
“당연하죠. 그 화면을 보고도 여태 고범수를 지지할 순 없겠죠, 제 정신이라면.”
“음.”
대찬은 흡족한 웃음을 띠었다.
그렇게 로튼 프룻츠 임직원들이 향후 대책에 대해 골몰하는 사이.
송희근의 차는 신탄진IC를 빠져나와 MFG그룹 사옥 앞에 멈췄다.
박 이사가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 쏭과장 사옥에 도착했는데요.”
그러자 대찬은 바로 소리를 키웠다.
그러자마자 웅성거리는 현장음이 회의실을 가득 메웠다.
송희근은 탐사보도를 나온 기자 못지않은 비장함으로 현장의 분위기를 전했다.
“진짜 투자자들이 말 그대로 뿔이 났어요. 여기저기서 죽여라, 살려라 하는데 분위기 진짜 장난 아닙니다.”
MFG그룹 투자자들의 분위기는 거의 민란을 방불케 했다.
죽창만 안 들었을 뿐이었다.
피땀 흘려 모은 돈을 사기꾼에게 갖다 바쳤다.
그들은 그 사실을 곱씹을수록 분노가 곱절로 늘어났다.
그 분노는 두 갈래였다.
한 갈래는 아둔하고 어리석은 선택을 한 자신을 향했다.
그리고 나머지 한 갈래는 천연덕스럽게 면전에서 사기를 쳤던 MFG그룹 경영진을 향했다.
그 두 갈래의 분노는 주체하지 못하고 격렬하게 분출되었다.
MFG그룹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안에는 불이 다 꺼져 있었다.
남아있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고범수! 이 사기꾼 새끼야! 당장 나와!”
“고범수 나와라! 사기꾼 나와라!”
몇몇 과격한 이들은 사옥에 불이라도 지를 기세로 시너를 들이부었다.
대찬은 그걸 보고 혀를 찼다.
“저럴 게 아니라 집을 찾아가야지.”
대찬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허운이었다.
그는 이번 MFG그룹과의 이슈에 있어 여느 로튼 프룻츠 임직원보다도 중차대한 임무를 소화하고 있었다.
대찬이 구태여 필래그룹 소속인 그를 이 일에 끌어들이는 까닭은 분명했다.
대찬이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는 사람 중에 가장 믿음직한 사람이었다.
물론 능력이 믿음직하다는 건 아니었다.
그저 문자 그대로 믿음직하다는 것이었다.
웬만한 일이 있어도 외부에 발설하지 않고 대찬을 위해 은밀하게 움직여줄 위인이었다.
그런 점에서 대찬에게 있어 허운의 가치는 충분했다.
대찬의 전화를 허운은 잔뜩 부은 목소리로 받았다.
“어.”
“잘 쫓아갔어?”
“이대로 핸들 꺾을까도 진짜 여러 번 고민했는데 못 그러고 있다. 이대로 꺾으면 내 유일한 동아줄인 조 이사 라인에서 영원히 축출될 거 같아서.”
“잘 알고 있네. 잘 하고 있어.”
대찬은 팔짱을 낀 채로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거기 주소가 어떻게 된다고?”
“있어 봐라. 서울특별시 송파구…….”
대찬은 허운이 불러주는 대로 주소를 쪽지에 적었다.
주소를 다 적은 대찬은 허운에게 말했다.
“형, 조금만 더 고생해줘. 주말에 염치없는 건 알지만.”
“아, 염치없는 건 아셨구나, 우리 조 이사님이.”
“내가 또 보상은 확실하게 해주는 편이잖아?”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볼 거야. 어떻게 보상을 확실하게 해줄지.”
“기대해.”
대찬은 전화를 끊고 허운이 불러준 주소가 적힌 쪽지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민승기가 그걸 보고 대찬에게 물었다.
“그게 뭐야?”
“이거, 지금 고범수 일당이 숨어있는 곳 주소예요.”
“그걸 어떻게 알았어?”
“필래 사외이사실에 있는 친한 입사동기한테 부탁해 놨어요. 좌담회 끝나자마자 고범수 뒤 쫓아달라고.”
그러자 회의실에 있는 임직원들은 대찬의 주도면밀함에 혀를 내둘렀다.
좋게 말하면 주도면밀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교묘한 것이었다.
민승기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그럴 생각을 다 했어?”
“좌담회에서 민낯이 단단히 까발려질 건 자명한 일이고, 사기꾼이 취할 다음 액션이 뭐겠어요. 돈 싸들고 튀는 거지.”
“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근데 저도 방송 중에 튈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다행히 잠복하다가 용케 따라가 줬더라구요.”
“그래서 그 주소를 갖다가 어쩌게?”
대찬은 미소를 보인 뒤, 송희근에게 전화를 걸었다.
화면 속의 송희근은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보고 화면에 속닥거렸다.
“저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
화면은 잠깐 다른 곳을 비췄다.
화면이 바뀌자마자 송희근이 대찬의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송 과장님, 아니 희근이 형, 행동력 한번 끝내주네요. 한달음에 대전엘 다 내려가시고.”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요. 지금 우리 회사 사람들 전부 쏭과장TV 생중계 보고 있어요. 여기만큼 실황 잘 전달하는 매체가 없어서.”
송희근은 머쓱하게 웃었다.
“공치사나 하려고 전화했어?”
“그건 아니고요. 지금 MFG 사옥 앞에서 시위하는 거 아무 소용없어요. 그 안에 아무도 없는데 헛힘 쓰는 거라고요.”
송희근은 짧게 한숨을 토했다.
“이 사람들이 그걸 모르진 않겠지. 그래도 안방에서 가만히 넋 놓고 앉아있을 순 없으니까.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여기라도 나온 거지.”
“시위를 할 거면 차라리 고범수가 있는 곳에서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렇긴 한데, 이 쥐새끼 같은 영감이 어디 숨었는지 알아야 말이지.”
“잘 듣고 전해주세요. 서울 송파구…….”
대찬이 대뜸 주소부터 부르자 송희근은 깜짝 놀랐다.
“자, 잠깐, 그거 무슨 주소야!”
“무슨 주소긴요. 고범수 은신처 주소지.”
“자, 잠깐만 기다려.”
송희근은 허겁지겁 대찬이 불러주는 말을 받아 적었다.
그는 재차 대찬에게 확인했다.
“이거, 확실한 주소야?”
“허운을 얼마나 믿으세요?”
송희근은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웬 허운 타령?”
“그거 허 과장이 물어다준 거거든요.”
대찬의 말에 송희근은 김이 팍 새버렸다.
“에이 씨, 그러니까 믿음이 확 사라지는데.”
“그래도 바짝 뒤 밟아가면서 알아낸 거예요. 확실할 거예요.”
“오케이, 좋았어. 나한테 이걸 알려주는 건 이 뿔난 인간들한테 헛물켜지 말고, 난리를 칠거면 고범수 있는 곳에 가서 치라고 귀띔해주란 거지?”
대찬은 이제 와서 내숭을 떨었다.
“꼭 그런 취지는 아니었는데 형님이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아니라고는 안 할게요.”
“음흉한 자식. 넌 항상 그랬어.”
송희근은 전화를 끊었다.
대찬은 다시 돌아온 화면을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로 지켜봤다.
송희근은 우선 자기 방송부터 챙겼다.
맥락 없이 우왕좌왕 움직이지 않고, 시청자들과 정보를 공유했다.
“어, 지금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고범수 회장 일행이 송파구에 있다고 그러거든요? 대전 내려온 지 5분 만에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 될 판이네요.”
송희근은 그렇게 말한 뒤, 갈 곳 잃은 성난 투자자들에게 외쳤다.
“여러분! 고범수가 서울에 있답니다!”
“뭐! 그게 정말이야!”
“네! 송파구 모 오피스텔에 쥐 죽은 듯이 숨어있대요!”
정확한 좌표가 주어지자, 황망한 분노에 다시 불이 붙었다.